Nietzsche
연보
1844년 : 10월 15일. 독일의 작센 주 뤼첸 근교 레켄 마을에서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남
1849년 : 부친 뇌연화증으로 사망
1858년 : 나움부르크 근교의 슐포르터 고등학교 재학
1861년 : <트리스탄>의 피아노 발췌곡이 발표되어 바그너를 알게 된 이 무렵부터 세익스피어, 괴테, 휠덜린 등을 애독
1864년 : 슐포르터 졸업. 10월 본대학에 입학.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전공
1865년 : 10월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김. 쇼펜하우워 철학을 알게 되어 탐독
1867년 : 나움부르크 야전포병대 기병대대에 입대
1868년 : 10월 제대. 대학에 복학. 11월 8일 라이프찌히에서 처음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알게 됨
1869년 :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원외교수로 강의
1870년 : 바젤 대학의 정교수가 됨
1872년 : <비극의 탄생> 출판
1873년 : 두통으로 시달림. <반시대적 고찰> 제 1편 (신앙 고백자로서의 저술가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 라우스) 출판. 단편 <그리스인의 비극 시대의 철학>이 쓰여지다.
1874년 : <반시대적 고찰> 제 2편 (생에 대한 역사의 이해)와 제3편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워) 출판
1876년 : <반시대적 고찰> 제 4편(바이로이트에 있는 리하르트 바그너) 출판. 병이 악화 되어 10월 대학을 휴직
1878년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출판
1879년 : 중병. 바젤대학 교직 사임
1880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제 2부 하권에 해당하는 <방랑자와 그 그림자> 출판
1881년: <서광> 출판
1882년: <권력에의 의지> 집필, 루 살로메와 교제
1883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 2 부 집필, 출판
1884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3 부 집필, 출판
1885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4 부 완성, 자비 출판
1886년: <선악의 피안> 자비 출판
1887년: <도덕의 계보> 출판
1888년: 게오르그 브란데스가 코펜대학에서 니체에 대해 강의 <바그너의 경우>출판, <디오니소스 찬가>완성, <우상의 황혼>집필, <반기독교인>완성. 연말부터 정신착락의 증후가 나타남
1889년: 1월. 예나 대학병원 정신과에 입원
1897년: 어머니 사망. 누이동생과 함께 바이마르로 이주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56세로 사망. 고향인 뢰켄에 안장됨
생애
프리드리히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라이프찌히 근처에서 태어났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니체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고 그후 그의 가족은 나움부르크의 할머니 집으로 이사했다. 음악과 시를 좋아했고 이미 14세 때에 「나의 인생에서」라는 자전적 소품을 썼을만큼 조숙했던 니체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벌써 권위주의적인 모든것에 저항적 태도를 보였고, 학교 수업 과정을 우습게 보고 그리스 철학 서적을 주로 탐독했다.
20세에 본 대학에 입학하여 고전 문헌학을 전공하게 되지만, 처음에는 공부보다는 술과 여자 등 쾌락을 좇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곧 그런 생활에 혐오감을 느끼고 다시금 엄숙하고 고독한 생활로 돌아갔다. 본 대학 문헌학 교수였던 유명한 처칠 교수가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겨 가자 니체 역시 친구 로데오와 함께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옮겨 갔다.
이 라이프찌히 대학 시절에 그는 헌 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사 읽고서 충격적인 감동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그가 평소 그 음악을 좋아해 왔던 리하르트 바그너와 개인적으로 알게 된 것이었다. 후기 낭만주의의 두 대표인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와의 만남은 청년 니체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1879년 그는 25세의 나이로 바젤 대학 문헌학 조교수로 임명되었고, 이 바젤 대학 재임시에 그는 바그너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가 그에게 환멸을 느끼고 그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1879년 그의 나이 35세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자 그는 10년간 강의해 왔던 바젤 대학 교수직을 사임했고, 그 이후 그가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약 10년간을 이탈리아 해안가나 스위스 산중의 요양지를 전전하면서 병과 고독과 싸우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중에서 82년에는 이탈리아에서 루 살로메와 사귀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결혼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5개월 만에 헤어졌다. 병과 고독과 싸우는 이런 생활 중에서도, 점점 더 원숙해져 가는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는 그치지 않았고, 그리하여 진행성 뇌마비의 발병에 의해 정신 착란에 빠질 때까지의 그 짧은 몇 년 동안 그는 자신의 무르익은 사상들을 수많은 저술들을 통해 쉴새없이 토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1889년 1월 튀린에서 그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그로부터 11년 후인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 정신 병원애서 결국 그는 가장 사랑했고 가장 친했던 누이 엘리자베드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철학
[형이상학의 근본적 용어 2개]
니체의 형이상학에 있어서의 두개의 근본적 용어는 ①힘에의 의지와 ②동일한 것의 영원 회귀이다. 이 양자는 존재자를 그의 존재에 있어서, 예로부터 형이상학을 지배하여 온 견해 에 따라서 규정한다.
힘에의 의지란 의지가 자신의 존립을 위해서 힘을 얻기를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란, 의지가 힘을 얻음으로써 스스로를 극복하고서 다시 새로운 출발점 으로서의 의지 자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존재자 전체의 본질은 '권력에의 의지'이며 그것의 존재방식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이다.
(모든 가치정립은 권력에의 의지로부터 출발하고 [존재자 전체에게] 척도를 부여하면서 권력에의 의지에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에 따르면, 새로운 가치정립은 그것이 단순히 이제까지의 가치들 대신에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서 정립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무엇보다도 권력 자체가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가치를 정립하고 이러한 가치가 관철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하나의 가치정립이 가질 수 있는 정당성에 대해 결정한다는 의미 에서 '이제까지의 가치들의 전환'이다.
모든 존재자가 권력에의 의지일 경우 권력을 그것의 본질에 있어서 실현하는 것만이 가치를 '가지며' 하나의 가치로서 '존재한다'. 권력은 권력의 고양으로서만 권력이다. 권력은 그것이 보다 본질적일수록, 즉 그것이 보다 유일하게 모든 존재자를 규정할수록 자신 이외의 것은 그 무엇도 가치있고 귀중한 것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새로운 가치정립 의 원리인 권력에의 의지가 존재자 전체의 외부에 [다시 말해 피안에] 어떠한 다른 목표도 용인하지 않는 이유가 존재한다. 그런데 모든 존재자가 권력에의 의지로서 즉 끊임없이 자신을 강화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지속적인 '생성'이어야만 하고 이러한 생성은 그러나 결코 자신에서 이탈하여 자신 밖의 어떠한 목적을 향해서 나아갈 수 없으며 오히려 항상 권력의 고양의 원운동 안에 진입하면서 오직 이 권력의 고양에로 귀환할 뿐이므로, 존재자 전체도 또한 이러한 권력의 생성으로서 항상 거듭해서 스스로 회귀하며 동일한 것을 재현하지 않으 면 안된다.
따라서 권력에의 의지로서의 존재자의 근본 성격은 동시에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로서 규정된다.)
('권력에의 의지'라는 명칭은 존재자가 그의 '본질(구성)'에 있어서 무엇인지를 말하며 '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는 그러한 본질을 갖는 존재자 전체가 어떻게 존재해야만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니체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권력에의 의지보다도 먼저 사유해야만 했다 는 사실이다. 가장 본질적인 사상은 가장 먼저 사유되는 것이다.)
[초인사상]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들은 초인이 살기를 바란다'라고 외친 적이 있다. 이러한 그의 초인의 개념(槪念), 형성 과정을 대체로 두 가지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보다 높은 사람으로서의 초인'이라 하겠고, 그 두 번째는 '신(神)과 무(無)의 초극(超克)한 창조자로서의 초인'이다. 즉 새로운 가치 창조자로서의 초인이라 하겠다. 그가 맨 처음 그리던 초인은 전자의 초인이라고 하겠으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가치 창조자로서의 초인을 언급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먼저 '보다 높은 사람으로서의 초인'에 관하여 살펴보자.
초인이라는 말은 우선 그리스 신화 속에 나타나는 거인과도 무엇인가 연결을 가지고 있는 용어라고 본다. 니체가 초기에 연구한 바 있는 그리스 고전 중 특히 서기 기원전 2세기경의 그리스 풍자적(諷刺的) 작가 루시안의 작품 속에 'hyperamthropos'란 말이 나오거니와 이것은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라 본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니체가 초기에 사용한 초인이라는 용어는 전자를 말한 것이었고, 결코 위의 후자의 초인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한 개념으로써의 초인이 니체의 저서 속에 등장한 것은 아무래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있어서 였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이유는 그의 신앙(信仰)을 벗어나기란 그에게 있어서 영원회귀 사상이 종래의 단순한 논리사상을 훨씬 벗어나 승리적인 최고 긍정 형식으로 형성하게 된 것과 거의 동시라고 말 할 수 있으며 즉, 이러한 최고 긍정 형식으로서의 영원회귀 사상과 신과 무를 초극하는 창조자로서의 초인사상이 흔연일체(欣然一體) 되어서 바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어서 처음 나타났기 때문이다.
즉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 책의 근본 개념의 영원회귀는 즉, 이제까지 아무도 도달치 못한 최고 긍정형식...'이라 하고, 좀 내려와서 '여기서는 모든 순간에 인간이 초극 되었다. 초인이라는 개념 여기서는 최고의 현실성(現實性)이 되었다'하고 한 것을 함께 연결시켜서 생각해 본다면 그것을 능히 알 수 있다고 본다. 그럼 이 보다 높은 사람으로서의 초인을 극복한 가치 창조자로서의 초인을 살펴보기로 하자.
니체의 저서 <이 사람을 보라>에서 '가치 창조자로서의 초인'의 개념이 보교적 집약적(集約的)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서 초인은 부단히 자기 초극에 가는 위험을 지닌 모험자(冒險者) 탐구자(探究者)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그것은 단지 유행 사조(流行思潮)였던 진화론적(進化論的) 영향을 입은 것이 사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것을 인정하면서 니체의 말을 더욱 인용해 보기로 한다.
'기독교, 그밖에 허무주의자(虛無主義者)들과는 아주 대립되는 최고 전형을 의미하기 위한 초인이 그의 초인이었고 그래서 다원적 진화론과는 판이함을 명백히 밝혔으며, 또한 초인을 일정의 영웅(英雄)시하는 것도 내가 그처럼 새삼스럽게 싫어했던... 가알라일의 영웅 숭배(崇拜)까지도 나의 것으로 인정되곤 하였다'라고 하여 그 부당성(不當性)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 자기 초극으로 순간 자기 창조 자기극기(自己克己)해 가는 초인은 사람이 아닌 '영원 회귀'세계의 신적인 존재인 것이다.
신이 있다면 내가 신이 아님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라든가 '도리어 신 자신이 되라'하고 한 것을 아울러 생각해 볼 때 초인은 분명히 낡은 신과 대치(對峙)된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본다. 특히 야스퍼스가 중요하게 지적하기도 한 또 하나의 니체의 말을 인용해 본다면 '진실로 항상 우리들은 드높은 곳에 이끌린다. 즉 구름의 왕국에까지 부르며 초인이라고 부른다'라고 한 것을 볼 때 신과 초인의 차이는 낡은 관념적인 최고 가치로서의 상징과 새로운 최고 자로서의 상징 차이뿐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초인은 "낡은 신의 가치 전환시킨 최고 가치의 상징적 존재이며 영원회귀의 세계에다 부단히 새로운 의의와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인 것이다.
[영원 회귀 사상]
니체는 그의 저서 <힘에의 의지>에서 힘의 양이 고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힘의 유한성을 전제로 하였으며 시간은 무한하고 영원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힘의 양이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 본질은 유동적(流動的)인 것이었기에 무한한 시간 속에 있어서 이미 유한한 양의 만물(萬物)의 모든 결합은 또한 무한히 반복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또 "만일 세계가 하나의 목적을 지녔다면 그것은 이미 도착되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순간에 있어서는 모든 힘의 종합적 본질은 변함없이 영원히 회귀(回歸)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 세계란 이처럼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단순한 생성(生性)이며, 의미도 없는 것이 영원히 회귀될 뿐이라고 한다. 생성적(生成的), 파괴적(破壞的)인 것을 거부하고 생의 철저한 중심의 내재적 입장에 서려고 하는 니체 적인 허무(虛無) 입장이라고 보겠다. 다시 말하면 이 영원회귀 사상은 무(無)와 신(神)의 초극(超克)자로서의 초인(超人)의 사상(思想)과 직결되어서 처음으로 완전 형성되었기에 여기서 바로 승리적(勝利的) 사상이 된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영원회귀 사상은 진정한 의미의 초인사상과 직결된다고 본다. 그래서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설명할 때 영원회귀 사상은 최고의 긍정 형식으로써는 그때 처음 생각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니체는 이렇게 해서 생성(生成)과 유지(流進) 속에서 허무(虛無)와 죽음이 아니고, 극단적(極端的)인 형식으로부터 최고의 긍정형식(肯定形式)으로 전환(轉換)된 것이라고 보겠다. 그리고 자연의 영원한 회귀 운동 속에 중압적인 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부단히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여 제시하는 초인에 의해 서였으며, 이 초인에 의해서만 영원회귀 사상은 비로소 승리적 사상이 되고, 또한 최고의 긍정형식이 되는 것이다.
[신과 초인의 관계]
하이데거는 니체 철학은 "가치(價値)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는 그의 가치관을 간단이 언급하면서 니체에 있어서의 신과 초인의 관계도 바로 이 가치 관계에서 오는 차이 가치 전환 결과라고 보고 논하고 한다.
그는 '도덕(道德)의 원리'에 있어서 "종속주의적(從屬主義的)인 이상(理想)의 신에 대한 신앙이 부정된 순간부터 하나의 새로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진실한 가치의 문제였다"라고 말하며, '신은 죽었다'는 문제, 따라서 신과 초인의 관계도 가치 문제와 아주 관련성이 깊은 것을 시사한 적이 있다.
그의 말년 자서전(自敍傳) <이 사람을 보라>에서는 기독교적인 신과 디오니소스적인 초인과는 하나의 가치 전환의 결과임을 우리에게 암시하는 말이라고 보겠으며, 사실 니체에 있어서 "모든 가치적 전화의 시도는 그의 필생의 대과업이었고, 그가 미완성으로 그치고만 대적 <힘에의 의지>의 부제(副題)가 또한 주어지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본질적인 신을 낡은 세계관에 있어서의 최고 가치로 보고, 초인을 새로는 세계관에 있어서의 최고 가치의 상징으로서 보고자 하는 것이며, 그가 <이 사람을 보?gt;에 있어서 "모든 가치전환, 이것이야 말로 나에게 살이 되고 천재가 된 인간 최고의 자학(自虐)의 한 행위(行爲)를 나타내는 나의 공식이다'라고 단언한 것은 또한 그것은 입증하는 말이라고 본다.
그러면 니체에 있어서 가치란 무엇을 의미한 것인가를 간단히 고찰(考察)해 보기로 한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속에서 '맨 처음 인간은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물 속에다 가치를 두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가치의 관점이란 생성 속에 있어서의 생의 상대적 관념의 복잡한 형상에 관한 유지 그리고 거기에다 모든 가치 평가에 있어서 문제인 것은 특정한 원근의 힘이다'라고 한 말들을 연결시키면서 고찰해 볼 때, 신과 초인의 관계는 바로 일종의 가치 전환의 상징적 관계이었음을 알 수가 잇다.
"가치의 변화 즉, 그것은 창조하는 가치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말은 그것을 더욱 우리에게 확신케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또한 말한다. "이 새로운 창조자 즉, 새로운 가치의 창안자(創案者)인 초인을 둘러싸고 세계는 회전(回轉)된다"
[니체에 있어서의 가치]
힘에의 의지 자신이 설정한 그 자신의 조건들이 가치이다. 가치를 결정하고 확립하는 것 이 평가이다. 그러므로 모든 의지 속에는 평가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의지는 구체적인 환경 속에서 스스로의 조건을 결정하고 확립하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벌써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삶이란 "의지에의 의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가치는 존재자의 존재(즉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의 유지·향상의 조건들이다. 따라서 힘에의 의지는 그 자신 가치설정의 근거와 영역이 된다.
니체에게 있어서 가치의 문제는 확실성의 문제보다 더 근본적이다. 따라서 가치의 문제는 진리의 문제보다 더 근본적이다. 확실성의 문제는 가치문제에 대한 답을 얻은 후에야 참된 의의를 얻게 된다.
힘에의 의지는 자신의 유지를, 즉 자기 자신의 존립 보장을 하나의 필연적 가치로서 설정 한다. 따라서 가치설정의 원리가 힘에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원리에서 유래하는 필연적 가치는 무엇인가?(진리) 그리고 이 원리에 따르는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가?(예술) 이러한 물음은 곧 표준적 가치구조에 대한 물음이 된다.
[확실성]
한편 힘에의 의지가 자기 자신의 존립 보장을 하나의 필연적 가치로서 설정하고, 그래서 사물을 표상을 통해서 인식하는 표상적 존재자에게는 보장이 필연적임을 인정하게 되면 확 실성이 요구된다. 근세철학은 확실성을 탐구하면서 시작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데카르트에게 있어서는 확실성을 위해서 어떤 확고한 것과 지속적인 것을 고정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이 고정적인 것은 고정적인 현존자(hypokeimenon, subiectum)로서의 존재자의 본질에, 즉 지배적인 존재자의 본질에 알맞는 것이다. 이러한 맥 락에서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기체를 문제삼는다.
이 확실성은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 밑받침이 된다. 이것은 진리가 하나의 필연적인 가치 가 되는 근거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의 근세적 형태가 확실성인 것이다.
[진리]
니체에 있어서의 표준적 가치구조 해명의 단초는 가치의 본질이 존재자의 존재에 있어서 의 유지향상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곧 힘에의 의지가 힘의 단계를 유지하는 것이기 도 하다. 힘의 단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의지가 언제나 믿고 들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의 테 두리로써 자기를 에워싸고 그것으로부터 자기의 안전을 얻음을 말한다. 이것을 위해서 확실 성과 고정이 필요하고 이것은 다시 정립(ein Stellen)을 통해서 획득되고 영속적인 것이 된 다. 표상적 존재에게 있어서 이 정립은 "표상하면서 작성한다"(das vor-stellende Herstellen)의 성격을 갖는다. 확립된 고정성은 지속적이며 하이데거는 계속된 현존성으로서 의 존재가 지배적인 존재의 본질이라고 본다.
이와 같이 힘에의 의지의 본질에 있어서 설정된 하나의 조건, 즉 힘의 유지 조건이 진리 이다. 진리는 이와 같은 조건으로서 하나의 가치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진리란 힘에의 의 지가 자기 자신을 의욕할 수 있는 터전인 일정한 테두리의 존립을 고정화하는 보장이다. 의 지는 어떤 고정적인 것을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는 경우에만 의욕할 수 있으므로 진리는 힘 에의 의지의 본질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 필연적 가치이다.
[예술]
진리는 필연적 가치이지만 앞으로 어떤 힘의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충분하지 못하다. 따라서 진리는 최상의 가치(혹은 충분한 가치)는 아니다. 왜냐하면 고정적인 것은 그것만으 로써는 의지가 의지로서 자기 자신을 넘어가기 위하여 가장 먼저 요구하는 무엇을 줄 수 없 기 때문이다.
의지가 자기 자신을 넘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투시적인 예시(der Vorbick)이다. 이 투 시적인 예시를 통해서 명령의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투시적인 예시는 힘에의 의지 의 본질에 속한다. 왜냐하면 힘에의 의지는 더욱 많은 힘에의 의지로서 그 자신에게 있어서 본래 가능성을 향하여 전망적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힘에의 의지는 그 본질상 가능성 을 향하여 전망을 연다. (이런 까닭에 진리는 최고의 가치척도라고 볼 수 없으며 최고의 힘 은 더욱 아니다.)
이렇게 전망을 여는 것은 예술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는데, 예술이란 힘에의 의지로 하여 금 자기 자신을 향하여 비로소 해방시키는 의지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또한 예술이 란 전망을 열어주고 그 전망을 채워나가는 모든 의미의 본질이다. 하지만 니체는 예술이라 는 이름으로 미적 영역에 한정되지도 않고 이것을 우선시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이 힘에의 의지로부터 파악된 예술의 본질은 예술이 힘에의 의지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분발케 하며 자기를 넘어서 의욕하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예술은 "삶의 가장 위대한 자극제"이다. 즉 "예술은 진리보다 가치가 있다".(힘에의 의지)
[예술과 진리]
예술과 진리는 각각 서로 다른 양식으로 다른 쪽을 요구한다.[어떤 쪽?] 또한 이 두 가치 는 그들의 가치관계에 있어서 가치설정적인 힘에의 의지의 통일적 본질을 규정한다. 이러한 힘에의 의지는 현실적인 것의 현실성이고 혹은 존재자의 존재(하이데거의 용어)이다. [그렇 다면 존재는 의지자의 의지함일 것이다.]
힘에의 의지의 형이상학에 있어서 근본명제는 하나의 가치명제이다. 따라서 가치설정 자 체가 본질상 이중적이라는 것이 명료해진다. 왜냐하면 가치설정에 있어서는 언제나 하나의 필연적 가치와 하나의 충분한 가치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치 설정의 이중적 본질 을 고려할 때 힘에의 의지의 본질적 통일성 문제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가치설정의 능력이 힘에의 의지로부터 뒷받침되며 인도되기 때문이다.
힘에의 의지의 본질적 통일성
힘에의 의지의 본질적 통일성은 의지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이 통일성은 힘에 의 의지가 의지로서 자기 자신의 앞으로 나아가는 양식이기도 하다. 이 통일성은 의지를 시 련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표출하도록 자기 앞에 내세운다. 또한 이 표출에 의해서 규정되는 현존은 바로 이러한 양상 즉 힘에의 의지가 존재하는 양상이다.
힘에의 의지가 본질적 통일성을 향하여 사색할 때 우리는 형이상학의 진리성을 문제삼게 된다. 형이상학의 진리란 힘에의 의지가 존재자 자체의 본질임을 알리는 것이다.
[서양 근세 형이상학]
서양 근세 형이상학은 존재자의 존재가 자기를 의욕하는 것으로서, 그래서 '자기를 스스로 아는 것'으로 규정한다. 즉 존재자의 존재가 '자기를 스스로 아는 것'(das sich-selbst- wissen)이라는 양상으로 존재하고 "나는 생각한다(ego cogito)"라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 런데 표상하는 존재자에게 있어서 표상은 기체로서의 존재자의 존재이고 따라서 '자기를 스 스로 아는 것'이 진정한 주체가 된다. 즉 근세적 형이상학은 주체성의 형이상학으로서 존재 자의 존재를 의지라는 의미에서 사색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하지만 발표자의 견 해로는 근세철학 안에서는 의지가 잊혀져 있다고 본다.]
주체성 속의 제일 본질규정은 표상적 주체가 자기 자신을 언제나 표상된 것으로 확인한 다는 것이다. 즉 존재자의 진리는 확실성이며 이에서 안정성을 획득한다. 한편 확실성은 표 상의 정확성의 다른 형태이다. 그러므로 정확성은 안정성을 목표로 삼으며 표상은 정확한 것으로서 증명될 때 비로소 정당화된다. 또한 확실성은 주체성의 진리이다. 이 주체성을 존 재자의 진리라고 하면 확실성으로서의 진리의 본질 속에는 안정성의 정당화에서 경험되는 정의가 숨어있다.
라이프니쯔는 처음으로 기체를 인식하고 의욕하는 존재(ens percipiens et appetens)라고 생각하였다. 존재자의 힘(vis)적인 성격 속에서 처음으로 존재의 의지적 본성을 알아낸 사람 이 라이프니쯔였다. 한편 칸트는 선험적 주관성의 최후적 자기보전을 선험적 연역의 권리문 제로 생각하였다. 그 최후적 자기보전은 표상적 주체의 정당화의 권리문제이다.
시
[ 고독 ]
까마귀들 울며
요란한 날갯소리를 내며 도시로 날아간다.
곧 눈이 내릴 것이다....
아직도..........고향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랴!
이제 너는 굳은 몸으로,
뒤를 돌아본다, 아~! 벌써 얼마나 오래되었나!
겨울을 앞두고 세상으로 도망나온
너는 바보가 아닌가?
세상은.......말없이 차가운
수많은 사막으로 통하는 문!
네가 잃어 버린 것을
잃어 버린 사람은 어느 곳에도 멈출 수 없다.
이제 너는 창백하게 서 있고,
겨울 여행은 저주받고,
언제나 더욱 차가운 하늘을 찾는
연기와도 같구나.
날아라, 새여, 사막의 새 소리로
너의 노래를 울부짖어라!....
너 바보야, 너의 피 흐르는
심장을 얼음과 모멸 속에 감춰라!
까마귀들 울며
요란한 날갯소리를 내며 도시로 날아 간다.
곧 눈이 내릴 것이다,...
이제 고향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슬프랴
[ 광대에 불과하다! 시인에 불과하다! ]
맑은 대기 속에서
이슬이 어루만지듯
눈에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이
대지로 쏟아져 내려올 때에,
....왜냐하면 위안의 이슬은,
위안으로 가득한 온화한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신발을 신고 있으므로....
그대는 생각나는가, 생각이 나는가, 뜨거운 가슴이여,
예전에 그대가 하늘의 눈물과 이슬방울에,
얼마나 목말라 있었던가를,
몹시 그리워하고 지친 채 목말라 있었던 것을,
그 때 노랗게 변한 풀밭길 위에는,
저물어가는 태양의 눈길이 악의를 품고서
검은 나무들을 꿰뚫고 그대 주위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번쩍이는 태양의 불타는 눈길이,
"진리의 청혼자....그대는?" 이렇게 그들은 비웃었다....
"아니다! 한 사람의 시인에 불과하다!
간교하고 약탈꾼이고 몰래 접근하는 짐승이다,
속이지 않으면 안되는,
알고서 일부러 거짓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짐승이다.
먹이를 노리고,
화려한 가면을 쓰고,
스스로를 도깨비로 만드는,
스스로 수확물이 되는 짐승이다,
이것이 ....진리의 청혼자란 말인가?....
광대에 불과하다! 시인에 불과하다!
단지 화려한 말만을 하고 ,
광대의 가면 그늘에서 화려한 말을 흘리고,
거짓말의 다리 위를,
거짓의 무지개 위를 배회하고,
거짓의 하늘 사이에서
방황하고 발소리를 죽이고 걷는....
광대에 불과하다! 시인에 불과하다....
이것이.... 진리의 청혼자일까?....
말없이, 곧게, 미끄럽게, 차겁게
이미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신전의 기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신의 문지기로서,
신전 앞에 세워지는 것아니다.
아니다! 그러한 덕의 입상과는 적대관계이며,
신전의 안에서보다는 모든 황무지 속을 그리워하고,
고양이처럼 방자하게
모든 창문을 뒤쳐나와,
단번에! 모든 기회를 포착하여
모든 원시림을 탐지해낸다.
그리고 그대는 원시림 속에서
화려한 얼룩의 맹수들 사이를
죄가 무거울 정도로 건강하고 아름답고 화려하게 달렸다.
탐욕스러운 입술을 갖고서,
복되게 조소하며, 복되게 지독하게, 복되게 피에 굶주려,
약탈하고, 발소리를 죽이고 걸으며, 거짓말을 하면서 달렸다....
혹은 독수리와 같다, 독수리는 오랜 동안,
오랜 동안 심연 속을 응시하고 있다.
자신의 심연 속을....
........오오, 그들이 이 곳으로 떨어져,
밑으로, 안으로,
더욱도 깊은 심연으로 휘감겨 들어가는 모습이여!....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일직선으로 날아
날개를 퍼덕이며
새끼 양을 향하여 덤벼든다.
몹시 굶주려, 갑작스럽게 내려앉아
새끼양을 탐내고 있다.
모든 산양(山羊)과 같은 영혼을 증오하고,
덕을 갖춘, 양의 젖과 같은 온정을 담은,
시선을 가진 일체의 것을 증오한다.
그러므로
시인의 동경은,
수많은 가면을 쓰고 있는 그대의 동경은,
독수리와 같고 표범과 같다.
그대 광대여! 그대 시인이여!
그대가 인간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도 양으로서 본다....
인간 내면의 신을 갈기갈기 찢고,
인간 내면의 양을 찢고,
그리고 찢으면서 크게 웃는다.
이것이, 이것이 그대의 행복이다,
표범과 독수리의 행복이다,
시인이자 광대인 자의 행복이다!....
맑은 대기 속에서,
이미 초승달이 진홍빛 저녁 노을 사이를 파랗게
그리고 시새움하듯이 미끄러져갈 때에,
....낮에 대하여 적대심을 갖고,
모든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게,
하늘의 분홍빛이 가라앉아,
밤을 향해 퇴색하며 침전될 때까지,
낫 모양의 초승달을, 장미가 걸린 매트를 낫질하고 있다.
나 자신도 예전에 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광기에서,
나의 낮에 대한 그리움에서,
낮에 지치고, 빛에 병들어 가라앉았었다.
....밑으로, 석양 쪽으로, 그늘 쪽으로 가라앉았다.
절대적인 하나의 진리에 의해서
몸은 불탔으며, 목은 갈증이 났다.
.....그대는 생각나는가? 생각이 나는가, 뜨거운 가슴이여,
그 때 그대는 얼마나 목말라 있었던가를?
모든 진리로부터
추방되는 일에 목말라 있었던 일을!
광대에 불과하다! 시인에 불과하다!
[ 명성과 영원 ]
얼마나 오랫동안 그대는 이미
그대의 불운을 품고 앉았던가?
주의하라! 그대는 나를 위해서,
하나의 알을,
하나의 바질리스코의 알을,
그대의 오랜 고뇌 끝에 부화시킨다.
어째서 짜라투스트라는 산을 따라서 발소리를 죽이며 걷고 있는가?....
의심이 많고, 종양투성이의 음산한,
오래 매복하고 있는 자,
갑자기 하나의 번개가 되어,
밝고 무서운 번개, 벼락이 되어,
심연으로부터 하늘을 향하여 번쩍인다.
.... 산마저도,
그 내장이 흔들린다....
증오와 번갯불은
하나가 되어, 저주가 된다....
산 위에 짜라투스트라의 노여움은 머물며,
뇌운(雷雲)이 되어 자신의 길을 슬쩍 거닐고 있다.
최후의 덮개를 가진 자여, 그 덮게 안으로 기어들어가라!
침상에 숨어라, 허약한 자들이여!
지금 둥근 지붕 위에 뇌성 소리 울리고,
지금 기둥과 벽은 흔들리고,
지금 번개의 유황색이 진리가 번쩍인다....
짜라투스트라가 저주하고 있다....
세상 모든 살마이 지불하는 이화폐들,명성....
장갑을 끼고서 나는 이 화폐를 쥔다.
구역질을 느끼며 나는 그것들을 짓밟는다.
누가 지불을 원하는가?
팔려 갈 사람들....
팔 물건으로나와 있는자는, 살찐 두손으로,
이 세상 어디에도 통용되는, 명성이라는 이 양철의 싸구려
화폐를 움켜쥔다!
........그대는 그것들을 사려고 하는가?
그것들은 모두 팔 물건들이다.
그런데, 높은 값을 매겨라!
돈으로 가득 찬 지갑을 흔들어 소리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을 복돋게 하라.
........그들의 턱을 복돋게 하라....
그들은 모두, 덕을 갖추고 있다.
명성과 덕.... 이것은 조화를 이룬다.
이 세상이 계속되는 한,
세상의 명성의 수다로
덕의 수다로 지불한다....
그리고, 세상은 이 소음에 의해서 계속되어 간다.....
덕을 갖춘 모든 이에 대하여,
나는 죄를 짊어지려고 생각한다,
모든 큰 죄를 갖고서 그 죄를 짊어지리라!
모든 명성의 나팔 앞에서
나의 명예심은 하찮은 것이 된다....
이러한 무리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가장 비천한 사람이고 싶다....
세상 모든 이가 지불하는 이화폐, 명성.......
장갑을 끼고서 나는 그것들을 쥐고,
구역질을 느끼며 그것들을 짓밟는다.
조용히!....
위대한 것에 대하여....나는 위대한 것을 보고 있다!....
사람은 침묵을 지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위대하게 말해야 한다.
위대하게 말하라, 나의 환희하는 지혜여!
나는 우러러보고 있다....
거기에는 빛의 바다가 물결치고 있다.
오오, 밤이여, 오오, 침묵이여, 오오, 죽음처럼 죠용한 소란이여!
나는 하나의 표시를 보고 있다....
아주 먼 곳으로부터
천천히 타오르면서, 하나의 별이 나를 향해서 떨어져 온다....
존재라는 최고 성좌여!
영원한 조각의 조각판이여!
그대는 나를 찾아온 것인가?....
어느 누구도 바라본 일이 없는
그대의 말없는 아름다움이여,....
어찌하여, 그것은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가?
필연의 문장이여!
영원한 조각의 조각판이여!
........그런대, 그대는 정말이지 알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증오하고,
나만이 사랑하는 것을,
그대는 영원하고,
그대는 필연적이라는 것을!
나의 사랑은 영원히
오직 필연에 대해서만 환희한다.
필연의 문장이여!
존재라는 최고 성좌여!
......어더한 소망도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고,
어떠한 부정도 그것을 더럽히는 일은 없다.
존재의 영원한 긍정이여!
영원히 나는 그대의 긍정자,
왜냐하면, 나는 그대를 사랑하니까,
오오, 영원이여!....
[ 미지의 신(神)에게 ]
새로운 출발을 하기전에
전도를 멀리 내다보기 전에,
다시 한번 나는 외로움에 몸둘 바 몰라
두 손을 들어 당신께 빕니다.
당신에게로 도망쳐서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당신의
제단을 장엄하게 축성합니다.
어느때일지라도
당신의 목소리가 나를 다시 부르도록.
제단 위에는 다음의 말이 깊이 새겨져
불타오르고 있습니다.'미지의 신에게'라고.
나는 그의 소유,설사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독자의 무리 속에 있었다 할지라도.
싸움에서 나를 쓰러뜨리고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그를 섬기도록 나에게 강요하는 올까미의 힘을.
나는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미지의 신이여,
깊숙이 나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그대여,
폭풍우와도 같이 나의 삶을 꿰뚫고 지나가는 당신,
붙잡기 어려운 당신, 나와 한 핏줄인 당신,
나는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자진해서 당신을 섬기고 싶습니다.
[ 방랑자 ]
방랑자 한 사람이 밤의 어둠 속을 걸어가고 있다.
정확한 발걸음으로
구부러진 골짜기와 긴 산길...
그는 그 길을 더듬어 간다.
밤은 아름답도다.......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걷고 있으나,
그 길이 아직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다.
밤의 어둠을 뚫고 한 마리의 새가 노래부른다.
"아, 새여, 무슨 짓을 했느뇨!
어찌하여 내 마음과 걸음을 방해하느뇨,
감미로운 가슴의 역정을
나의 귀에 울리게 하여, 나를 멈추게 하는가.
어찌하여 노래와 인사로 나를 유혹하느뇨?"
그 착한 새는 노래를 그치고 말했다.
"아니오, 방랑자여, 나는 당신을
나의 노래로써 유혹하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높은 가지에서 유혹하고 있는 것은 암컷이라오....
당신에게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오?
나에게만 밤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당신은 가야만 하는데.
결코,결코 멈추어서는 안 되지요!
어째서 아직도 서 있는 겁니까?
피리로 부는 나의 노래가 당신에게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방랑하는 그대여?"
그 착한 새는 침묵을 지키고서 생각했다.
'피리로 부는 나의 노래가 그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어째서 그는 아직도 서 있는 것일까?
가엾은, 가엾은 방랑자여!'
[ 소나무와 번개 ]
인간과 짐승을 넘어서서 높이 자라나
말을 하는데....아무도 나와 더불어 말하지 않네.
너무 외롭게, 너무 높이 자라나
기다리는데....나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너무 가까이, 내 곁으로 구름이 흐른다....
나는 첫 번째 번갯불을 기다리고 있다.
[ 실스 마리아 ]
나는 여기에 앉아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런데, 그 무엇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악의 피안에서, 혹은 빛을 즐기고,
혹은 그림자를 즐기고 있었다. 오직 희롱뿐이고,
호수뿐이고, 대낮 뿐이고, 목적이 없는 시간뿐이었다.
그 때, 갑자기, 오오, 연인이여, 하나가 둘이 되었다....
....그리고 짜라투스트라가 내 옆을 지나간 것이다....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
그가 가르친 것은, 버림 받아도
그가 살아간 삶은, 언제까지나 남을 것이다.
자아, 그를 쳐다보라....
그는 어느 누구도 섬기지 않았다!
[ 친구들 사이에서 ]
서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며,
서로 마주보고 웃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로다....
비단과 같은 하늘의 장막 밑에서
이끼와 책에 몸을 기대고서
기분좋게 소리높이 친구들과 웃는 것은,
서로 하얀 이빨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내가 잘해내면 우리는 침묵을 지킬 것이며,
내가 서투르게 하게 되면....우리는 웃으리라.
그리고 더욱 더욱 서투르게 하게 되리라.
우리가 묘혈 안으로 내려갈 때까지.
친구들이여! 그렇지! 그래야만 하는가?
아멘! 그리고 안녕!
변명도 하지 않으리! 용서도 빌지 않으리!
그대들, 마음으로 즐기고 마음이 자유로운 자들이여,
이 부조리한 책에 대하여
귀와 가슴을 내맡기고, 잠시 머물지어다!
나를 믿어다오, 친구들이여,
나의 부조리는 저주가 되지는 않으리!
내가 찾고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은 이제껏 어느 책이든 씌어진 일이 있느뇨?
내 안에 자리한 광대 패거리를 존경하라!
이 광대의 책에서 배워라.
어떻게 이성(理性)이 찾아오는지를....'이성에 이르게 되는지'를!
그럼 친구들이여, 그래야만 하는가?....
아멘! 그리고 안녕!
[ 언젠가 많은것을 ]
언젠가 많은 것을 말해야 할 이는
많은 것을 가슴 속에 말없이 쌓는다.
언제인가 번개에 불을 켜야 할 이는
오랫동안....구름으로 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