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공모전] 우수상 : 무림매니아 - 1 관련자료:없음 [3653]
보낸이:무림동 (k2murim1) 1999-01-12 03:58 조회:3547
무림(武林) 매니아(寐 兒)
김유석(Cookie) 작.
80년대 무협지 백 질 이상 독파하신 모든 분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또한, 이
글에서 특정 작가나 작품을 폄훼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혀 둔다.
* * *
달빛이 창백한 산중(山中). 유령처럼 스물 거리는 밤 안개 속에서 거친 숨소리
가 들려 온다. 헉. 헉. 허억. 턱까지 차 오르는 숨을 집어삼키며 칠흑 같은 어
둠 속을 뛰고 있는 자(者). 그의 모습은 참담했다.
온 몸을 갈기갈기 찢어 피칠을 하게 만든 외상(外傷)은 차라리 가볍다. 어깨
근육을 꿰뚫은 강전(鋼箭)이나 옆구리에 박힌 사검(蛇劍)의 부러진 날, 다리뼈
를 허옇게 드러내 놓은 채 대롱거리는 탈혼정(奪魂釘) 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
은 그의 내상(內傷)이었다. 강력한 내가장력(內家掌力)의 연타. 내부가 진탕되
고 오장육부(五臟六腑)가 극심한 타격을 받은 것은 물론 기경팔맥(寄經八脈)까
지 뒤틀려 간다. 최후의 한 줌 진기(眞氣)마저 끊어져 경공(輕功) 조차 발휘하
지 못하고 무작정 내달려야 하는 이 남자.
그는 쫓기고 있었다. 회(會)에서 보낸 추적대의 손길을 뒷덜미에 매달다시피
하며 동악(東嶽)의 대산령봉(大山嶺峯)을 미친 듯 헤맨지도 이미 나흘. 더 이
상 희망은 없는 것일까. 엄중한 부상과 극도의 탈진 속에서도 기적처럼 달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의 의지다. 의식을 온통 풀어헤쳐 버린 듯한 몽롱함 속에
서 도망자는 마지막 희망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쓰
러져 버렸을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지만 그의 걸음은 어느새 뛰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것이 되어 버
렸다. 육체를 지배하던 정신력도 이제 다한 것일까.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를 덮어 간다. 백색의 달빛이 붉은 피로 만든 그의
발자국을 선연하게 비춘다.
파르륵. 갑자기 들려 오는 파공성. 남자는 크게 휘청거리며 뒤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시커먼 점들이 야공(夜空)을 뚫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이 눈에 박힌
다. 그들이다!
일각(一刻) 전(前) 사력을 다해 일대(一隊)를 해치웠건만 어느새 새로운 추적
대가 편성되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검은 복면
에 흑의경장(黑衣輕裝)을 한 무리들. 시커먼 어둠 속에서도 그들이 발하는 안
광(眼光)이 귀린(鬼燐)처럼 섬뜩하다.
남자의 눈빛이 절망으로 물든다. 저 정도 거리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에게
따라잡힐 것이다. 무릎에 힘이 빠지며 저절로 몸이 기운다. 비틀. 고꾸라질 듯
몇 걸음 앞으로 내치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무엇인가 그의 눈앞에 확
펼쳐졌다.
"차, 찾았다!"
그의 바짝 타 버린 입술이 벌어지며 격동에 찬 음성이 터져 나왔다. 암울했던
두 눈엔 벅찬 환희가 깃들였다.
"됐다! 아직 하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것을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안 돼!"
미친 듯이 달려오던 흑의인들 중 선두에 있던 우두머리가 경악성을 발했다. 그
역시 남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 것을 보았던 것이다.
"막아라!"
흑의인의 목소리는 필사적이다.
"놈이 절대로 절벽에 도달하지 못하게 해!"
갑자기 흑의인의 신형이 엿가락처럼 주욱 늘어난다. 환상과도 같은 신법(身
法). 단숨에 수십 여장의 공간을 압축하듯 뛰어 넘은 흑의인의 손이 남자의 목
덜미를 낚아챈다. 아니, 낚아채려는 순간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남자는 흑의인의 공세를 벗어나며 허겁지겁 한 발자국을 내딛었
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몸이 쑥 꺼지듯이 사라진다. 그는 스스로 절애(絶
崖)에 몸을 던진 것이다.
"하하하! 두고 보자, 이놈들아! 기연(奇緣)을 얻어 돌아오면 제일 먼저 너희들
부터 박살내 주마! 으하하하……"
떨어져 내리는 남자의 의기양양한 웃음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쳤다.
흑의인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낭떠러지 아래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린 어둠을
바라보았다. 휘이이잉. 엄청난 바람 소리와 함께 한기(寒氣)가 느껴진다.
'역시 보통 절벽이 아니군!'
휘리릭. 옷자락 날리는 소리와 함께 수하들이 내려선다.
멍하니 있던 흑의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서! 어서 가져와!"
그가 다급하게 수하들에게 손짓한다.
수하 하나가 재빨리 나서며 품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내밀었다. 웬만한 책
들 두 세 권 분량은 족히 될 듯한 두께, 표지에는 '중원절애기연분포록(中原絶
崖奇緣分布錄)'라는 아홉 글자가 선명하다. 빼앗듯이 잡아 챈 흑의인은 책장을
펄럭이며 정신없이 뒤적거린다.
"태산…… 태산…… 오륜봉(五崙峯)…… 그래. 오륜봉!"
흑의인은 급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자리와 주위의 경물을 살핀다. 정확한
지리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척경애(拓耿崖)로구나!"
그는 비명처럼 내지르더니 다시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천백구십팔번(弟千百九十八番). 척경애
분류. 특급(特級)
위치. 동악(東嶽) 사십일봉(四十一峯)인 오륜봉 북서 방향
추정 높이. 이백오십장(二百五十丈) 이상
수색 난이도. 험난한 지형과 지엽적 폭풍으로 인해 수색 불가능
추정 기연. 오 백 년 전 천하제일 고수(高手)인 천외신군(天外神君)의 비급과
영약, 절애 밑바닥을 이룬 늪에는 적각묵염(赤角墨 )이 서식
대책. 대화급(大火急) 즉시 보고
보일(補一). 가끔 주변에 사는 천년거봉(千年巨鳳)이 날아와 적각묵염과 싸울
때가 있음
보이. 만약 천년거봉과 적각묵염이 양패구상(兩敗俱傷) 지경에 처했을 때 두
영물 사이로 떨어지는 자가 있다면 내단(內丹)을 어부지리(漁父之利)할 가능성
이 큼>
흑의인은 떨리는 손으로 중원절애기연분포록을 덮었다.
"전서구(傳書鳩)를."
짧은 한마디가 떨어지자 수하 한 명이 연락용 비둘기가 들은 작은 새장을 들고
왔다. 흑의인은 급하게 서신을 적었다. 잠시 후 전서구는 자유의 몸이 되어 곧
장 한줄기 흰 선(線)으로 변해 허공으로 사라졌다.
잠시 비둘기가 사라진 방향을 지켜보던 흑의인은 한 숨을 내쉬더니 수하들과
함께 분분히 자리를 떴다. 텅 빈 장내에는 절애 안쪽에서 불어오는 광풍(狂風)
소리만 요란했다.
* * *
대전(大殿).
사방 백여 장이 넘는 엄청난 규모의 공간. 이 곳은 원래 동굴과 연결된 천연적
인 지하 광장을 수백만의 황금과 수만의 인력으로 개조해 완성시킨 지하 대전
이다. 광장의 중심에는 십장 둘레의 석주(石柱)가 굳건하게 자리잡고 사방 구
석마다 그보다 반정도 적은 둘레의 석주들이 늘어서 천장을 지탱하는 구실을
한다.
대전의 내부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태양 조명을 대신해 천장에 설치된 야광주
(夜光珠)들의 불빛 아래 수백 명의 흑의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들은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와 자료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느라 동분서주
했다. 흑의인들이 가장 많이 배치된 곳은 한 쪽 벽면에 설치된 거대한 중원전
도(中原全圖) 앞이었다. 전도는 종이나 양피지가 아닌 점토성 물질로 정교하게
양각된 것이었으며 천하 명산을 중심으로 각기 푸르고 붉은 깃발들이 무수하게
꽂혀져 있었다.
흑의인 한 명이 입구에서부터 급하게 달려와 중원전도 주위의 흑의인들에게 문
서 한 장을 전달했다. 잠시 후 전도 속 태산 부근에 있던 푸른 깃발 하나가 사
라지고 대신 붉은 깃발이 꽂혔다. 전체적으로 보면 푸른 깃발이 아직도 많았지
만 점차 붉은 깃발의 세력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다.
전도를 바라보고 있던 한 남자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는 흑의인 일색인 이
곳에서 특이하게 피처럼 붉은 혈포(血袍)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눈에 띄
었다. 혈포인은 곧장 몸을 돌려 대전 한 구석에 있는 통로로 향했다. 통로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지만 혈포인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 이외의
사람이 이 곳을 지나려 했다가는 통로에 매복해 있는 절정고수(絶頂高手)들에
의해 어떤 꼴이 될지를.
혈포인이 도달한 곳은 하나의 밀실(密室)이었다. 별다른 경물이나 장식이 없는
단순한 구조로 방 안쪽에는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너머로는 희미한 그림
자 하나가 비치고 있다. 휘장은 여러 겹의 천잠사(天蠶絲)로 만들어진데다 특
수한 가공을 했기 때문에 공력이 입신의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그 그림자
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없었다.
혈포인은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휘장 앞에 부복했다.
"방금 전 태산 오륜봉 척경애에서 보고가 왔습니다. 결국 저지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휘장 너머의 인물은 말이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자 혈포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었다.
"속하가……"
"지금까지 수많은 인물들이 무림(武林)의 정복을 꿈꿔 왔었다."
휘장 너머에서 들려 온 나직한 목소리가 혈포인의 말을 끊었다. 그 목소리에는
기이한 울림이 있어 목소리의 주인공이 늙었는지 젊었는지 심지어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중에는 가히 세상을 피로 씻을 만한 무공을 지닌 마두(魔頭)도 있었고, 막
강한 세력을 등에 엎고 야망을 펼치던 효웅(梟雄)도 있었으며, 신묘(神妙)의
지략으로 세인들을 손바닥 안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모략가(謀略家)도 있
었다. 심지어는 그 모든 능력을 일신에 모두 지닌 절세(絶世)의 권능자(權能
者)도 있었다."
목소리는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그 안에 실린 기묘한 울림도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 어떤 무공도, 세력도, 지략도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허무하게 무너지고야 말았다.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그 많
은 야심가들의 뼈를 깎는 노력과 대계(大計)를 그르치게 만들었는가."
목소리가 내포한 힘을 못 이겨 밀실 내부가 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지진이 일대를 휩쓰는 것 같았다. 혈포인의 신형에도 부르르 한차례 떨림이 훑
어 갔다. 혈포인은 그저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수그릴 뿐이었다.
"본좌(本座)는 그 해답을 알고 있다!"
휘장 너머의 신비인(神秘人)은 몹시 격동되었는지 그만 입에서 침을 튀기고 말
았다. 그 침들은 엄청난 내력(內力)을 지닌 듯 천잠사로 된 휘장을 뚫고 날아
가 벽면을 때렸다. 퓨ㅍ. 보라!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벽에 여러 개의 작은 구
멍이 뚫리는 것이 아닌가.
'그 사이 공력이 한층 더 진보 하셨군. 이번에 새로 해 넣은 벽은 단단하기가
금강석보다 더하다는 곤오천강벽(坤午天剛壁)이건만 저토록 쉽게 구멍이 뚫리
다니. 웃! 그러고 보니……'
혈포인은 내심 염두를 굴리다가 벽면을 자세히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벽
면의 곳곳에는 작은 구멍들이 무수히 뚫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새로 해 넣은지 얼마나 됐다고 언제 또 저렇게 침이 많이 튀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수하들을 시켜 대청소를 한 번 해야겠구나.'
혈포인이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신비인의 격동에 찬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한 명의 청년 영웅! 그리고 기연(奇緣)! 두 가지가 바로 모든 것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어 버렸다. 영웅은 어느 시대 어디에나 있었다. 하늘은 언제나
개인의 야망보다는 그 알량한 정의의 편에 서서 영웅의 손을 들어줬다. 그에게
만 온갖 기연을 베풀고 그에게만 온갖 재사(才士)와 미녀들을 붙여 주었다."
신비인의 목소리는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그러나 하늘이여! 당신마저도 몰랐을 것이다! 그토록 허무하게 쓰러져야 했던
수많은 마두와 효웅, 모략가들이 그대로 가지는 않았음을! 그들은 항상 쓰러지
기 직전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 보았음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암중에 전해지고 모아져서 하나의 계략으로 완성되어졌음을! 그
계략이 바로 본좌의 손에 쥐어졌음을 당신은 몰랐을 것이다! 으하하하! 크하하
하하……"
이제 침은 광소(狂笑)와 섞여 사방팔방으로 튀고 있었다. 어느새 휘장은 너덜
너덜해졌고 벽이란 벽마다 모두 구멍이 새겨졌다. 혈포인은 필생의 공력으로
절세보법(絶世步法)을 발휘해 간신히 침들을 피하고 있었다. 방안을 가득 메운
침보라 사이로 붉은 그림자가 환상처럼 움직이는 광경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
다.
갑자기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혈포인도 거짓말처럼 다시 제 자리에 부복했다.
"혈영(血影)!"
"네! 주군(主君)!"
"오늘 이후로 흑암회(黑暗會)는 무림의 전면에 나선다!"
혈영이라 불린 혈포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제 대영웅말살지계(對英雄抹殺之計)를 연다!"
"오오! 드, 드디어……!"
혈영은 격동되어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일계략(弟一計略), 절애봉쇄작전(絶崖封鎖作戰)!"
신비인의 목소리는 다시 침착을 찾았으나 기세는 더욱 강해졌다.
"절벽만 없어진다면 기연의 대부분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시간
에도 절벽에서 기연을 얻고 있을 놈들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으니 그야말
로 일거양득. 제조해 두었던 화약과 회 내의 고수들을 총동원해 중원의 각지의
절벽들을 모조리 막아라!"
"존명(尊命)!
"제이계략(弟二計略), 고아관리작전(孤兒管理作戰)! 영웅은 대부분 고아였다.
가문이나 가족의 복수를 꿈꾸는 고아들만 잘 구슬려 무림 출도를 포기하게 해
도 영웅 탄생의 반 이상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 그 동안 모아 두었던 금력(金
力)을 투자해 각지에 대규모 고아원과 복지시설을 건설하라!"
"존명!"
"제삼계략(弟三計略), 영재세뇌작전(英才洗腦作戰)!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영재
와 기재들에게 어릴 때부터 무림에 대한 나쁜 정서와 혐오감을 심어 주도록 하
라. 그들은 무인이 아니라 유생(儒生)이나 관리(官吏), 의원(醫員)의 길을 걷
게 될 것이다!"
"존명!"
"제사계략(弟四計略), 미혼분독점작전(迷魂粉獨占作戰)! 전국의 미혼분 제조망
을 독점하라. 원래 미혼분을 이길 수 있는 고수는 없다!"
"존명!"
"제오계략(弟五計略), 전서구멸종작전(傳書鳩滅種作戰)! ……"
"존명!"
"제육계략(弟六計略), 선천지경유도작전(先天之境誘導作戰)!……"
"존명!"
"제칠계략(弟七計略), 양피지수거작전(羊皮紙收去作戰)!……"
"존명!"
"제팔계략(弟八計略)……"
"존명!"
"제구(弟九)……"
"존명!"
"중얼중얼……"
"존명!"
거대한 음모가 시작되고 있는 것은 하나의 밀실이었다.
* * *
무림의 최강자는 누구인가?
이런 명제는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무인들의 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만
약 당신이 당금의 무림 판도에 대해 묻는다면 한 문파(門派)의 장문인(掌門人)
에서부터 저잣거리의 건달에 이르기까지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일이삼사오륙칠팔(一李三邪五戮七捌)이라고!
그것은 바로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열 여섯 개의 세력과 인물들을 망라해서 이
르는 말이었다.
일이(一李)!
일명 무적이씨세가(無敵李氏世家). 바로 이씨(李氏) 성(姓)을 가진 이들로 이
루어진 거대한 혈족 공동체였다. 중원에서 인구분포비율로 따지자면 첫째, 둘
째를 다툴 이씨들이었건만 그간 무림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극히 미미했
다. 오히려 이씨에 비해 희귀한 성씨라고 할 수 있는 백리(百里), 독고(獨孤),
위지(慰遲), 용(龍), 엽(葉), 운(雲), 백(百), 연(延), 능(凌), 냉(冷), 구양
(歐陽), 모용(慕容), 제갈(諸葛), 종리(鍾里), 황보(皇甫), 남궁(南宮) 등의
성씨가 판을 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이씨들이 뭉쳐 마
침내 최대 최강의 가문을 세웠으니 그것이 무적이씨세가였다. 이들에게 대적하
기 위해서는 먼저 자파(自派)내에 있는 이씨들을 숙청해야 하는데 그 많은 이
씨들을 모조리 쫓아낸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나마
남궁세가나 황보세가 등의 무림 세가는 구성원의 대부분이 친족들로 이루어져
있어 이씨 없이도 운영이 가능했지만 구성원들의 숫자로 봐서는 무적이씨세가
에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삼사(三邪)!
세 개의 사악한 세력. 바로 흑암회, 일월마교(日月魔敎), 고루궁( 賜宮)을 가
리키는 말이다. 무적이씨세가가 정도(正道)를 대표하는 세력인데 반하여 삼사
는 철저하게 사마외도(邪魔外道)를 추구하는 무리였다. 만약 그들의 세력이 합
쳐진다면 무적이씨세가도 능히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이 세간의 평이었다. 특히
최근 개파(開派)를 선언하자마자 엄청난 저력을 보이고 있는 흑암회는 아직도
전력(戰力)의 많은 부분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오륙(五戮)!
비정도(非情刀) 냉휘상(冷輝霜), 굉풍부(轟風斧) 철무룡(鐵務龍), 단혼객(斷魂
客) 사마추(司馬趨), 염라녀(閻羅女) 능비연(凌琵蓮), 빙후(氷后) 단유하(檀柳
霞). 오륙은 바로 이 다섯 명의 초강자(超强者)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정
사(正邪)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감정과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행동했기 때
문에 어느 한편으로 분류하기가 곤란했다. 하지만 오륙의 공통점이 매우 비정
한데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적을 살육(殺戮) 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래도 정도보다는 패도(覇道)에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칠팔(七捌)!
칠팔은 구파일방(九派一幇)에서 아직 몰락하지 않은 일곱 개의 문파인 소림(少
林), 무당(武當), 개방( 幇), 화산(華山), 곤륜(崑崙), 아미(峨嵋), 점창(點
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전에 비해 성세가 많이 기울기는 했지만 부흥을
노리며 암중에 힘을 키우고 있어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이들은 무적
이씨세가와 함께 정도를 지탱하는 기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이삼사오륙칠팔!
그렇다! 이야말로 바로 무림의 전부를 가리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 동안 일이이사오륙칠팔(一李二邪五戮七捌)이었지만 새로이 흑암회의 전면
부상으로 인해 일이삼사오륙칠팔이 된 무림! 이들이 벌이는 건곤일척(乾坤一
擲)의 대회전(大會戰)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과연 무림의 진정한 패자는 누가
될 것인가.
* * *
지금으로부터 십년(十年) 전.
쏴아아아……
번쩍―
천지를 뒤덮은 어둠과 폭우(暴雨) 속에서 눈을 멀게 하는 새하얀 섬광이 이빨
을 드러내었다.
꽈르르릉!
곧이어 둔중한 뇌성(雷聲)이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이같이 폭우와 천둥 번개가 난무하는 밤에 누가 산중을 방황하랴! 하지만 누군
가가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 그것도 여인이었다. 빼어난 미색(美色)을 지닌 한
명의 중년여인(中年女人)이 폭우 속을 헤치며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
다.
그녀는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한 손에는 보검(寶劍)을 쥐고 한 팔로는 갓
난아이를 감싼 포대기를 안고 있었다.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
굴은 몹시 아름다웠으나 눈가에 어린 한 줄기 원독(怨毒)은 보는 사람의 간담
을 철렁하게 할 정도였다.
그녀는 처참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두고보자, 흑암회 놈들! 너희들이 비록 내 지아비와 가신(家臣)들을 몰살시켰
다지만 언젠가 이 핏값을 고스란히 받게 될 것이다!"
원한에 가득 찬 부르짖음이 일대를 맴돌았다.
그녀는 한차례 뒤를 쓸어 보더니 다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채 몇 장도 가기 전이다.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솟아오른 하나의 붉은 그림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
다.
중년미부(中年美婦)는 놀란 기색이었으나 곧 이를 악물고 그대로 검을 휘둘러
전면을 베어 갔다. 막강한 검기(劍氣) 앞에 빗물이 증발되며 허연 김을 토해
냈다. 그러나 그림자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쌍장(雙掌)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붉은 기류(氣流)가 노도처럼 쏟아지며 검기를 막아냈다.
"혈마수(血魔手)!"
창백해진 안색으로 중년미부가 물었다.
"서, 설마 네가 흑암회의 혈영(血影)?!"
붉은 그림자, 혈영은 싸늘하게 내뱉었다.
"과연 당신들은 아는 것이 적지 않았군."
"그래서 이토록 비열한 습격을 했단 말이냐!"
그녀의 독랄(毒辣)한 목소리는 단숨에 혈영을 찢어 죽일 듯 했으나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
"흥. 본회(本會)의 대업(大業)을 방해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다.
아이는 너와 네 남편 곁에 함께 묻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정하게 저승길
로 떠나거라."
중년미부는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내 한 목숨이 여기서 끊기더라도 이 아이만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 반드시!'
그녀가 다급한 눈으로 사방을 살피자 혈영은 비웃음과 함께 말했다.
"절벽을 찾는 것이라면 포기해라. 이미 이 근처의 절벽들은 본회에 의해 봉쇄
당했다. 도주자를 막기 위해 특별히 신경을 썼지."
그녀는 당황했으나 도움의 손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 주위를 지나치는 고수나 전대(前代)의 은거기인(隱居奇
人)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그러나 혈영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들여다 라도 본듯이 냉소했다.
"허튼 기대는 포기하라고 했다. 본회의 천라지망(天羅地網)은 도망자를 빠져나
가지 못하게 하는 데만 신경을 쓴 것이 아니다. 외부 인물이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는데 더 주안점을 두고 안배된 것이 바로 본회의 천라지망이다!"
마지막 기대마저 짓밟힌 중년미부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악독한 놈들! 이 원한(怨恨)은 구유(九幽)에서도 잊지 않으리라!"
목에서 피가 나도록 외치며 그녀는 최후의 일검(一劍)을 펼쳤다.
완전히 동귀어진(同歸於盡)을 각오했기 때문에 그 기세는 섬뜩하리 만치 위력
적이었다. 마치 검 끝에 서린 한(恨)이 유형의 기운이 되어 쏘아져 나가는 듯
했다. 혈영도 감히 무시하지 못하고 곧장 십성의 공력을 끌어올려 맞받아 쳤
다.
검기와 장력(掌力)이 충돌하며 격렬한 폭음이 일었다. 중년미부는 한 줄기 혈
선(血線)이 되어 날아갔다. 그대로 땅바닥에 쳐 박힌 그녀의 품에서 포대기가
구르고 아이가 퉁겨졌다.
"으아아앙!"
흙투성이가 된 아이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울렸다.
극심한 내상을 입은 중년미부는 마지막 힘을 다해 아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제, 제발 부탁이니 이, 이 아이만은…… 헉!"
힘없이 입술을 달작이던 그녀의 안색이 안색이 더할 수 없는 경악으로 물들었
다. 얼마나 놀랐던지 그녀의 안구가 돌출 될 지경이었다.
"내 애가 아니잖아!"
번쩍―
꽈르르릉!
다시 번개와 뇌성이 작렬했다.
"아이고! 이 일을 어째! 애새끼가 바뀐 줄도 모르고 죽도록 여기까지 뛰어 왔
으니! 아이고!"
쏴아아아……
퍼부어지는 빗속에서 중년미부가 고래고래 고함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혈영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없이 망연자실해져 있었다.
쏴아아아……
빗줄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제 목:[공모전] 우수상 : 무림매니아 - 2 관련자료:없음 [3654]
보낸이:무림동 (k2murim1) 1999-01-12 03:58 조회:2659
* * *
나의 이름? 이름 같은 것은 모른다. 그저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게 범처럼 용
맹한 아버지와 천사처럼 자상한 어머니가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소위 천재에 속하는 지능과 기억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묻든지 언뜻 부모의 모습이 기억난다는 대답 이상은 하지 않는다. 바로
목숨이 위험해 질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이 고아원에서는 가문의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는 녀석이나 무림
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녀석들은 어느 사이엔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곤
했다. 한 놈도 예외는 없었다. 그 같은 사실을 진작에 눈치챌 수 있었던 것만
보아도 나는 확실히 대단한 놈이다.
그러나 내가 천재건 아니건 간에 가문이 몰락 당한 그날 밤을 기억하는 일은
무척 힘들었다. 그 사건을 기억해 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괴로웠기 때
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안에서 꼼짝하지 말아라! 일곱 번 깊은 잠이 들었다 깨
어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절대!'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나 처절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대
꾸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한차례 내 손을 꼭 쥐어 준 아버지는
준비해 둔 구멍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러더니 뒤로 돌아서 무엇인가를
내리쳤다. 잠시 후 아버지는 약간 찌푸리신 얼굴로 내게 두터운 고기 한 점을
내미셨다.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였다.
'아껴 먹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허벅지 살점이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
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곧이어 내 머리 위로 하나의 두터운 종이가 덮이더니
긴 대롱 하나가 살짝 종이를 뚫었다. 그리고 흙이 쏟아졌다. 그것이 아버지와
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나는 그 구멍 속에서 벌레처럼 웅크린 채 시간을 보냈다. 산소를 공급하는 대
롱을 통해 약간의 햇살이 들어올 때가 있었기 때문에 날짜를 구별하는 것은 어
렵지 않았다. 허기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에는 차마 아버지의 살을 먹
을 수 없었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가 고파지자 저절로 목구멍 속으로 넘어
갔다. 진정 힘들었던 것은 공포와 외로움이었다.
그날 밤 가문을 습격했던 흑의인들. 그들의 무공은 정말 놀라웠다. 평소 손짓
한 번으로 나는 새를 떨어뜨리고 석판(石版)을 무 자르듯이 베어 내던 가신들
이 흑의인들 앞에서는 몇 합 싸워 보지도 못하고 맥없이 피를 토하고 쓰러져야
했다. 구멍 속에 웅크린 채 선 잠이 들면 꿈속에서 그들이 악마처럼 웃으며 내
심장에 칼을 박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잠에서 깨면 언제나 식은땀에 등허
리가 축축했다.
비통함과 외로움이 몰려들 때면 어머니의 품이 너무 그리웠다. 어머니는 흑의
인들의 습격이 시작되자 아버지와 함께 그들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아버지도
그들의 상대가 안된다고 느꼈는지 잠시 넋 나간 표정을 하다가 갑자기 근처에
있던 웬 갓난애를 포대기에 싸 들고서 담장을 넘어 사라지셨다. 아버지가 뭐라
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셨지만 어머니는 끝내 듣지 못하셨다. 그 애는 오랜만에
놀러 왔던 먼 친척의 아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아직도 가끔 어머니가
그립다.
일주일하고도 이틀이 더 지났을 때 마침내 구멍을 나왔다. 별빛만 무수히 반짝
이는 깊은 밤중이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주변에는 타 버린 재들밖에 없었다.
누가 수습해 갔는지 시체도 볼 수 없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흑의인들이 뒤쫓을
것 같은 불안감에 며칠을 쉬지 않고 움직여 하나의 도성(都城)에 닿았다. 그리
고 한 달 정도 뒷골목 신세를 지다가 지금의 고아원까지 오게 되었다. 고아원
에 들어오는 첫 날, 자상해 보이시는 원장님이 어쩌다가 부모를 잃었냐고 물었
을 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할 뻔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느낌이
그것을 막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풍족한 편이었다. 재정은 튼튼했고 시설도 완벽했다. 도
성 안은 물론 몇 십리 떨어진 시골 마을, 심지어는 몇 백리 떨어진 산중에 버
려진 고아에 이르기까지 부모 잃은 아이들이라면 무조건 수용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이곳을 가리키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리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나도 처음에는 이 고아원이 참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 인가부터 조금씩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이곳에서는
과거를 잊게 만든다. 제일 처음 들어가자마자 교육받는 것이 불교사상(佛敎思
想)과 도가사상(道家思想) 중에서 특히 인생의 허무함을 강조하는 부분이나 과
거가 덧없었음을 설파하는 대목이었다. 아주 기초적인 것에서 시작해 나중에
가서는 대단히 고난도의 교육을 한다. 또 인생의 새 출발이라든가 원수를 용서
하는 법 등의 교과목도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처참했던 과거라도
잊어버리게 만든다. 그런 교육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잊지 못하는 아이들은 아
까도 말했듯이 이 곳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했다.
두 번째로 이곳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무림에 대해 나쁜 시각을 심어 준다. 한
동안 밤마다 매화자(賣話者) 할아버지들이 와서 번갈아 가며 수많은 무림 이야
기를 해주던 적이 있었다. 당시 그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 속에 포함된 부정
적인 요소들을 강조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무림은 흑백논리(黑白論
理)만 판치는 황당한 세계라든가 지나치게 흥미만을 쫓는 것이 문제라는 식의
비판이 주종이었지만 구체적으로 잘못된 점을 끄집어 낼 때도 있었다. 대부분
의 주인공들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기연을 얻는다느니 등장하는 조연들의
인간적인 면이 무시된다느니 최후에 밝혀지는 음모의 배후 조종자는 항상 잘
아는 사람이거나 심지어는 사부일 때도 있다느니 이런 식으로 혐오감을 자극하
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몇몇 아이들은 무림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
았다. 그러자 수법이 바뀌었다. 언제부터인가 등장인물만 바뀌고 줄거리가 같
은, 심지어는 대사까지 똑같은 이야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기 시작했다. 아이들
이 그만 듣고 싶어해도 이 시간만큼은 엄격하게 출석을 강요당했다. 질릴 대로
질린 아이들은 마침내 무림이라면 치를 떨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매화자 할아
버지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첫머리에서부터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이 속출했고
이야기 시간의 반이 지나기도 전에 대부분이 잠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림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다. 아니 광적(狂的)으로
좋아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무리 피곤한 날이라도 매화자 할아버지들이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버티고 있었다. 어쩌다 잠이라도 든 말은 스스로 몹시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고아원 사람들은 나를 매니아(寐 兒)라고 불렀다. 잠드
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아이, 그렇다. 나는 무림에 관해서는 매니아였다.
그러나 그런 나의 취향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어떤 방법을 써도 내가 무림
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자 점차 고아원 직원들의 눈빛이 변해 갔다. 어느 순간
본능적인 위기가 느껴졌다. 결국 나도 아이들처럼 행동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가 가시지 않았지만 나의 연기(演技)가 워낙 자연스러
웠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매화자 할아버지들의 방문은 끝이
났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같은 매화자들에 의한 부정적인 무림 이
야기는 이 고아원 뿐 아니라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오늘은 내가 이 고아원에 온 지도 어언 십 년째가 되는 날이다. 이제 나도 한
사람의 청년 몫을 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 무엇보다 내게는 할 일이 있다. 가
문의 원수를 갚는 일. 원수가 누군 지는 이제 짐작이 간다. 무림 이야기를 많
이 들었기 때문에 그 정도 계산은 식은 죽 먹기였다. 무림에서 제일 강한 세력
혹은 개인. 그것이 바로 우리 부모님을 헤친 원수일 것이다. 사실 생각하고 말
고 할 필요도 없다. 중간에 어떤 비밀이나 사연이 있다 할지라도 마지막에 가
서 나서는 쪽이 바로 진짜 배후다.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원수가 일이삼사오륙
칠팔 중에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흑암회 쪽일 가능성이 높다. 그
리고 어차피 두고보면 다 안다. 그들 중에 끝에 가서 마각을 드러내는 쪽이 무
조건 원수라는 것을 나는 안다.
오늘 밤 나는 이 비밀 많은 고아원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무림을 향해 첫발을 디딜 것이다. 이미 짐은 다 챙겨 두었다. 긴장을 해서 그
런지 문득 살코기가 먹고 싶어진다. 저승에 계신 아버지는 내가 그때 아버지의
허벅지 살맛을 잊지 못하고 밤마다 시신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실까?
* * *
이천장(李天莊).
바로 무장적이씨세가의 본가(本家)가 자리잡은 장원(莊園)이다. 사방 요소 요
소에 세워진 감시용 망루(望樓). 기진(奇陣)에 의해 효율적으로 배치된 전각
(殿閣)들. 꼭 필요한 장식 외에는 모두 배제한 실용적인 설계. 이 모든 것들은
장원이 철저하게 전투와 암습(暗襲)에 대비해 만들어진 철옹성(鐵甕城)임을 증
명해 줬다. 규모도 규모려니와 성채를 연상시키는 옹골찬 기세가 잘 갈무리된
곳이 바로 이천장이다.
가주(家主)의 처소가 위치한 협웅전(俠雄殿) 내실(內室).
무적이씨세가의 오대(五代) 가주 철혈광검(鐵血狂劍) 이강극(李剛極)은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꼭 그렇게 해야 하겠는가?"
이강극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오십대 후반의 인물. 호사스러운 금포(錦
袍)에 고급 문사건(文士巾)을 썼지만 빈약한 염소 수염과 생쥐처럼 반짝거리는
작은 눈 때문에 좀처럼 조화가 되지 않는다. 도무지 이런 장소에 어울릴 것 같
지 않은 볼 품 없는 몰골을 한 그가 바로 무적이씨세가의 총사(總師) 천기신수
(天機神秀) 제갈탁(諸葛卓)이다. 제갈탁이 가문의 중요한 직위는 전부 이씨가
차지하고 있다시피 한 무적이씨세가에서 타성(他姓)으로 총사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귀신도 놀라게 할 정도라고 소문난 그의 지모(智謀) 덕
분이었다.
"그렇습니다. 정면으로 승부 하기엔 흑암회의 세력은 너무 강합니다. 설사 이
긴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무적이씨세가의 가업(家業)은 뿌리째 흔들려 버릴
것입니다."
"흐음. 놈들이 그렇게 강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힘으로 눌러서 본때를
보여줘야지. 천명의 피가 모자라다면 만 명의 피로, 만 명의 피가 모자라다면
십만 명, 아니 백만 명의 피를 흘려서라도 말일세!"
그렇게 말하는 철혈광검의 두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코에
서는 콧김이 씩씩거리고 양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격렬하게 몸을 떠는
것이 흡사 굶주린 한 마리 맹수 같았다.
'무식한 놈. 그게 니 피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제갈탁은 내심 못마땅했지만 예의 그 생쥐처럼 반짝이는 눈알을 굴리며 공손한
태도로 대꾸했다.
"물론, 어차피 최후의 순간에는 무력으로 그들을 눌러야 할 것입니다. 가주 님
의 신공(神功)이 아니라면 그 무엇으로 사악한 무리들을 제압하겠습니까."
"으음. 헛. 허흠."
철혈광검는 쑥스럽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지만 그의 양 볼에는 만족스러운 미소
가 떠올랐다.
"하지만 일이란 선후(先後)와 경중(輕重)을 따져 가야 하는 법입니다. 막말로
닭 잡는데 소 잡는 칼 쓸 수 없다고 가주 님께서 모든 싸움마다 나타나셔서 신
위(神位)를 보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가주 님께서는 곧 폐관수련(閉
關修練)에 드셔야 하지 않습니까.
"폐관수련, 음! 그것을 잊을 뻔했구먼."
이강극은 아쉽다는 듯이 몇 번이나 입맛을 다셨다.
제갈탁은 작게 한 숨을 내쉬었다. 무공만 대단했지 지능은 이씨 가문 최악을
자랑하는 저 가주를 구워삶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 폐관수련이었다. 무슨 일만
생겼다 하면 들입다 검을 꼬나 쥐고 달려나가려는 이강극에게 일월마교의 교주
는 손짓 한 번으로 산을 평지로 만들었다느니 고루궁의 궁주는 맨몸으로 만근
의 화약 폭발 속에서도 멀쩡했다느니 부추겨서 '그래? 그럼 나도 질 수 없지!'
하며 폐관하게 만드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수법을 쓰
는 것도 힘들게 될 것 같았다. 머리가 나쁜 대신 하늘은 이강극에게 천부의 육
체적 자질(資質)을 주셨는데 절정의 무공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빼어난
오성(悟性)이 필요하다는 법칙이 어째서 이강극에게만 예외인지 알 수 없는 노
릇이었다. 어쨌든 그의 화후(火候)는 가히 입신(入神)의 경지에 다다르는 중이
라 이제 폐관수련만 가지고는 더 이상의 실력 상승은 기대하기 힘든데다가 무
엇보다 이강극 자신이 슬슬 폐관에 싫증을 내는 눈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반
년 정도로 예정으로 행해질 이 번 폐관은 제갈탁에게는 소중한 기회였다.
제갈탁은 이야기를 마무리 짖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따라서 일단 저의 계략대로 천하의 고수들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이
상 이씨 가문의 힘만으로 흑암회를 비롯한 삼사를 상대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
니다. 정도의 세력으로 적의 수족을 제거한 뒤에 무적이씨세가의 정예들로 몸
통을 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방법입니다."
"그래, 그래. 알았네, 알았어. 복잡한 것은 자네가 다 알아서 하게나. 그……
뭐라고 했더라. 자네가 말했던 계략 중에……?"
"갹뉵츤착지계(醵 着之計)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니 그거 말고."
"그럼 흠픽몌녑지계(欽 袂 之計)?
"아니, 그것도 아니고 좀 이름 긴 거 있잖아."
"아, 그러면 물츤녜폄틈녈곶괵지계(沕 貶闖 串 之計) 이야기 시군요."
아아! 이 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보라! 만약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제갈량
(諸葛亮)이 살아나 이 들의 대화를 들었다면 놀라서 까무러치다 다시 무덤 속
으로 들어갔으리라. 갹뉵츤착지계! 흠픽몌녑지계! 그 이름만으로 은하도괘(銀
河倒掛)하고 경신읍귀(驚神泣鬼)할 만한 무시무시한 계략이 아닐 수 없다. 거
기다 물츤녜폄틈녈곶괵지계라니! 가히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무너질 만큼 신묘
무쌍(神妙無雙)한 계략들이 줄줄이 제갈탁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응. 그래, 그거! 거 참 이름도 어렵군. 자네는 역시 최고의 재사(才士)야. 나
는 기껏해야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나 금선탈각지계(金蟬脫殼之計) 정도
밖에 모르겠던데."
"과찬이십니다."
"그 물츤…… 물츤네…… 물찬제비……"
"물츤녜폄틈녈곶괵지계."
"응. 아무튼 그것부터 당장 시행하도록 하게. 더불어 당분간 세가의 일은 자네
에게 일임하지. 나는 오늘밤부터 본격적인 폐관에 들어가겠네."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제갈탁이 방을 나가자 이강극은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무림영웅대회(武林英雄大會)라…… 허허. 참. 거긴 내가 나가야 하는 건데.
쩝."
막 협웅전 복도를 지나던 제갈탁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다. 제갈
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한시라도 빨리 협웅전을 벗어나고 싶
은 게 그의 마음이었다.
제갈탁이 사라지고 나서도 이강극의 멍한 얼굴은 한참 동안 변하지 않았다. 갑
자기! 이강극의 표정에 변화가 나타났다. 약간 벌어졌던 입술은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지며 강퍅한 인상을 준다. 흐릿해 보이던 두 눈에서는 형형한 신광(神
光)이 뿜어져 나왔으며 온 몸에서 발산되는 무형(無形)의 패기(覇氣)는 가히
일대(一代) 종사(宗師)의 그것이었다. 잠시 후 그의 입술이 슬쩍 벌어지며 음
산한 괴소(怪笑)가 흘러나왔다.
"크흐흐흐…… 제갈탁. 너는 내가 니 손에서 춤을 추고 있는 꼭두각시 정도로
여겨지겠지. 어리석은 놈. 원래 똑똑한 녀석일 수록 남에게 더 쉽게 속는 법이
다. 너의 실수는 나를 너무 가볍게 보았다는 것이야. 너라는 존재는 그저 장기
판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하나의 장기 알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바로 나의
몌쉬에돌륵닐즘칩끽녑즐터폄지계(袂 喪突勒 蟄喫 櫛攄貶之計) 안에서 움직이
고 있을 뿐이다! 크하하하."
또 다른 음모가 무르익고 있는 곳은 바로 무적이씨세가의 내부였다.
* * *
한적한 산길이었다. 나른한 햇살과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이 유난히 한가
로운 풍경. 오후가 깊어지며 소슬하게 불어오는 청풍(淸風)에 길가에 덮인 낙
엽들이 가볍게 군무(群舞)를 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같은 풍취(風趣)를
깨트리는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글쎄. 제자가 되라니까!"
"아니, 싫다는데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질그릇 깨지는 소리로 툭탁거리는 일노일소(一老一少). 백발이 성성한 선풍도
골(仙風道骨) 풍의 노인과 봇짐을 진 청년 하나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자네는 내 제자가 되어서 무공을 배워야 한다니까!"
"아, 글쎄. 저는 할 일이 있다고요! 부모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
니까!"
"그러니까 노부(老夫)의 무공을 배워서 원수를 갚으면 되지 않나!"
"할아버지가 뭐 하는 분인 줄 알고 무공을 배워요. 제 원수는 무림 최강이기
때문에 기연이 있어야 한 다니까요!"
"이 젊은 놈이 정말! 절벽이 다 작살나서 기연의 시대는 이제 갔다니까 그래!"
"절벽만 기연입니까! 절벽 아니더라도 다른 기연이 있긴 있을 거 아니에요. 물
론 쉽진 않겠지만 닿기 수월하면 그게 어디 기연이겠습니까. 암튼 그러니까 이
렇게 할아버지랑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은 더더욱 없어요!"
"끼놈!"
"악!"
노인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청년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야, 이 놈아! 네가 뭐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네 놈의 체질(體質)만 아
니었으면 사부가 되어 달라고 매달려도 이쪽에서 먼저 흥이다!"
"체질이요?"
불시의 습격이 너무 매웠기 때문에 눈에서 별이 반짝거리고 눈물이 핑 돌았던
청년은 그제야 좀 관심이 가는 표정이다.
"그래, 이 놈아! 네 녀석이 천년에 한 번 나타난다는 전설의 무허극양빙골지체
(無虛極陽氷骨之體)만 아니었어도 너 같이 싸가지 없는 놈을 내가 제자로 들일
성 싶냐!"
"처, 천년! 그…… 무허극양빙골지체가 그렇게 희귀한 건가요?"
"희귀하다마다!"
붉으락푸르락하던 노인의 안색이 대번에 진중하게 변했다.
"천 년에 한 번 나타난다는 것은 결코 비유나 과장이 아니다. 추호의 오차도
없이 천 년 마다 딱 한 명만이 그 체질을 타고 태어나지. 인세(人世)에 가장
드문 체질임이 분명하다."
청년, 고아원을 나선지 보름째를 맞고 있는 매니아는 생각했다.
'어쩐지 내가 눈치가 빠르고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 같은 신체상의 비
밀이 있었구나. 매화자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의 주인공들도 하나같이 특이한 체
질이나 절맥을 가지고 있었는데 역시 내게도?'
매니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 무허극양빙골지체는 어떤 특징이 있나요?"
"특징은 천 년에 단 한 명 태어난다는 것이지."
"아니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특이한 점이 있냐고요."
"천 년에 한 명밖에 없으니 당연히 천고에 드문 몹시 특이하고 희귀한 체질이
지."
"아니, 아니, 그 왜 있잖아요. 한 번 본 무공은 잊지를 않는다거나. 태어날 때
부터 임독이맥(任督二脈)이 뚫려 있다거나. 무슨 신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체질이라든가. 제마(制魔)의 기운을 타고났다거나."
"잉? 그런 건 없다. 그냥 천년에 한 명밖에 못 태어나는 체질일 뿐이다."
"헉. 아무런 특징이 없단 말입니까?"
"특징이 왜 없어! 천년에 한 명밖에 못 타고난 다니까!"
"으아.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더 이상 잔소리 말아라. 네 놈이 기어코 안 따라 오겠다면 두들겨 패서라도
데리고 갈 테니까."
노인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소맷자락을 걷어붙였다. 노인의 매운 손
맛을 이미 충분히 음미했던 매니아는 약간의 반항 후에 결국 그를 따르게 되었
다.
매니아는 노인에게 사흘 동안 질질 끌리다시피 하며 쉬지 않고 움직여야 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매우 깊은 산중에 위치한 조그만 모옥(茅屋)이었는데 매니
아로서는 어디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만 그 사흘 동안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는 적지 않아서 노인의 정체는 물론
현재 강호무림(江湖武林)의 전체적인 판도까지 알 수 있었다.
노인은 혜검자(彗劒子)라 불리는 전대의 은거 고수로 몇몇 친우들과 함께 강호
의 속진(俗塵)에서 벗어나 무위자연(無爲自然)하는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
던 어느 날 밤 신산지술(神算之術)에 밝은 친우 한 명이 천기(天機)를 짚어 보
다가 곧 무림에 크나큰 재앙이 덮쳐 올 것임을 알아냈다. 그것은 이전까지의
무림을 휩쓸었던 여러 혈겁(血劫)과는 가히 비교도 할 수 없는 미증유(未曾有)
의 대재앙이었다.
은거 기인들은 현 무림의 힘만으로는 재앙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우천
(憂天)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은밀하게 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무림에는 하나의 거대한 음모세력이 정체를 숨긴 채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암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힘은 그 어느 세력과도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하여 능히 세상을 피바다에 잠기게 할 힘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우천은 전력(戰力)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불리함을 깨닫고 암중에서 힘을 기르
며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우천이 자리한 영산(靈山) 가후곡(加厚谷) 근처에서 온갖 영약이초와 비급들이
무더기로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 만년설삼(萬年雪
蔘)이 계곡 입구에서 집단 서식하는가 하면 담청신수(淡靑神水)가 연못에서,
미타성수(彌陀聖水)는 우물에서, 공청석유(空靑石乳)는 근처 동굴에서 마구 솟
아났다. 길가에 묵린혈망(墨鱗血 )과 만년화리(萬年火鯉)의 내단이 곱게 버려
져 있고 그것을 포장한 종이는 알고 보니 무당, 화산, 아미 등 명문대파(名門
大派)에서 실전(失傳)된 온갖 무공 비급과 기서(奇書)들이었다. 며칠 뒤 폭우
가 심하게 내리던 날, 불어난 빗물에 소림의 달마조사(達摩祖師)가 남긴 역근
경(易筋經)이 떠내려왔을 때 마침내 우천의 기인들은 하늘을 향해 눈물을 흘렸
다.
모든 것이 무림의 정기(精氣)를 보우(保佑)하기 위한 하늘의 안배라 여겼던 것
이다. 그러나 이것이 엄청난 음모의 서막임을 그 누가 알았으랴. 원래 우천의
기인들은 도가나 불가의 고인들이 대부분으로 속세에 대한 미련 없이 무위자연
하는 성향이 짙었는데 여기에 각종 영약과 무공비급으로 공력이 입신의 경지에
오르자 그만 우화등선(羽化登仙)하고 성불(成佛)하는 자들이 속출했던 것이다.
무도(武道)의 깊이가 더할 수 없어져 이른바 선천지경(先天之境) 즉, 사람과
천지가 하나 되는 경지에까지 이르면 세속에서 벗어나 우주와 하나 되고 선계
(仙界)나 정토(淨土)로 승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지만 모든
은거기인들이 그렇게 된다면 그 누가 남아 무림의 앞날을 걱정해 주겠는가.
결국 짧은 시일 안에 우천의 구성원 대부분이 신선과 부처가 되자 그때서야 비
교적 무공이 낮아 무사(?)했던 소수의 인물들은 이것이 적의 비열하기 그지없
는 계략임을 깨달았다. 더구나 알고 보니 이런 일은 우천 뿐 아니라 다른 은거
인들의 거주지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참으로 무서운 심계(心
計)였다. 예로부터 적에게 자신의 살을 내어 주고 뼈를 깎는 수법이 없었던 것
은 아니나 영약과 비급, 기서를 주어 좌화(坐化) 시킨다는 발상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다. 이 것만 보아도 암중의 비밀세력을 조종하는 자가 얼마나 담대
하고 치밀한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천의 남은 인물들은 마침내 은거지를 버리고 한층 더 깊숙한 산중으로 숨어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 역시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공력으로 인해 인세를 떠
나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기 때문에 적을 상대할 두 번째 방법
을 강구했다. 바로 강호의 젊은 기재와 영재들을 모아 개정대법(開頂大法)을
펼쳐 자신들의 진력(眞力)을 전수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의 악랄심원무비
한 계략은 이미 여기까지 계산에 두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게 좀 쓸 만한 녀석
이다 싶어 무공을 전수하려고 하면 자신은 이미 유생이나 관리, 의원 등의 길
을 걷고 있으니 무공은 필요 없다고 하며 부득불 전수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그들은 이미 유아기나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절에
무림에 대한 나쁜 정서나 혐오감이 심어져 있었다. 그것이 적들의 대규모 세뇌
공작의 일환이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천의 생존자들은 설마 드넓은 천지에 남은 기재가 하나도 없으랴 싶어 굳이
무공을 거부하는 자에게 강요할 것 없이 다른 기재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정말 한 명도 없었을 줄이야! 그만큼 적들의 계략은 방대치밀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남은 사람들마저 선천지경에 들고
오로지 혜검자 한 명만이 남아 절망에 빠져 있던 중 우연히 매니아를 발견한
것이다.
혜검자는 며칠간의 관찰 결과 매니아가 그간 발견된 다른 기재들에 비하면 보
잘것없는 자질을 가졌으나 무림에 대한 동경이 크고 기연에 대한 열망도 강렬
한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생각할 것 없이 그를 후인으로 정해 버렸다. 혜검자에
게는 이제 시간이 없었다.
제 목:[공모전] 우수상 : 무림매니아 - 3 관련자료:없음 [3655]
보낸이:무림동 (k2murim1) 1999-01-12 03:59 조회:2549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하루 정도밖에 없다."
모옥 안에서 혜검자는 침중한 안색으로 말했다. 매니아도 그간의 사정을 들었
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진지해져 있었다.
"너에게 많은 것을 물려주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시간이 없구나. 따라서 너에
게 전수 할 수 있는 것은 검을 이용한 하나의 공격법, 하나의 암습법, 그리고
하나의 수비법이다. 거기에 인피면구(人皮面具)를 이용한 역용술(易容術)은 부
록이다."
혜검자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급해도 역용술은 빠뜨리기 곤란한 것이 네 외모가 영 별로 이기 때문
이다. 그간 많은 청년고수들이 강호출도에 앞서 자신들의 지나치게 출중한 외
모를 감추기 위해 못생긴 인피면구를 썼던 것에 비하면 참으로 격세지감(隔世
之感)을 느끼게 하는구나. 시절이 시절이다 보니 어쩔 수 없지.'
매니아는 그 동안 들은 무림 이야기에서처럼 온갖 기약과 비급을 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느꼈지만 역용술이라는 말에 마음이 기울어 가만히 경청했다. 혜
검자는 한 장의 절세미남자(絶世美男子) 모습의 인피면구와 그 사용법을 간단
히 설명해 준 후 매니아를 이끌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간 내가 체득한 검술 중 가장 위력적인 공격법인 십육만팔천검(十六萬八千
劍)을 시전해 보이겠다. 단 한 번밖에 보여주지 않을 테니 너는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혜검자의 비장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매니아는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혜검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했다.
"보아라! 이것이 십육만팔천검이다! 하압! "
장중한 기합성과 함께 일대가 한 순간에 눈부신 청광(靑光)으로 물들었다. 혜
검자의 신형이 하나, 둘, 넷…… 여덟…… 열 여섯…… 서른 둘로 쪼개지기 시
작했다. 그에 따라 검의 모습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십육만팔천검! 절정의 검도에 이르지 않으면 시전할 수 없는 환검(幻劍)의 경
지가 시작되며 허공 가득 혜검자의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백 장 안이 그의 몸
뚱이로 뒤덮였다. 십육만팔천 자루의 검이 환상처럼 그어지고, 대지를 무자비
하게 유린하는 검강(劍 )이 유성우처럼 떨어져 내렸다.
"하아아아앗-"
모든 검이 진검(眞劍)인냥 검강이 세상을 덮으며 밀려들었다. 모옥의 일대는
우웅- 웅- 하는 진동음과 함께 수십만 자루의 검이 동시에 흔들리며, 수십만
송이의 검화(劍花)가 분분히 피어올랐다.
고오오오오……
마침내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대지의 껍질이 뜯겨 오르고 백 장 내의 모든 나무
와 암석들이 폭풍에 휘말려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콰르르르르- 릉!
"살려주세요!"
매니아도 같이 날아올랐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의 두 눈만은 혜검자의 십육만팔천검에서 한시도 떨어지
지 않고 있었다. 일검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그의 집념이 발현된 것일까. 혜
검자는 감탄했다.
'저 놈이 저래 보여도 강단이 있구나!'
흐뭇한 혜검자는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십육만팔천검을 마무리 지었다. 잠
시 후 찬란했던 검영(劍影)이 사라지자 날아올랐던 매니아도 다시 장내로 떨어
지며 외쳤다.
"할아버지! 내가 다 세어 봤는데 검이 하나 모자라요!"
자꾸만 십육만칠천구백구십구검(十六萬七千九百九十九劍)이라고 우기는 매니아
를 납득시키기 위해 열 다섯 번을 더 시전해 보인 후 마침내 혜검자는 다음 무
공전수로 넘어갈 수 있었다.
"강호는 절대 깨끗한 승부만 있는 곳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적의 암습이 있을
지 모른다. 그럴 때를 대비한 바로 역습용 암습 방법을 하나 알려주겠다."
혜검자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만약에 네가 잠을 자고 있는데 어떤 절정고수가 너를 암습 했다고 치자. 물론
웬만한 고수라면 자고 있는 동안에도 영활한 이목으로 접근을 알아채겠지만 너
보다 뛰어난 고수가 암습 한다면 벗어날 수 없지. 하지만 그 같은 고수라면 절
대 너를 단칼에 죽이지 않는다. 칼로 네 사혈(死穴)을 겨눈 후 너를 깨워서 비
밀을 알아내거나 위협을 하다 잔인하게 죽이고 싶어한다. 바로 그런 심리를 이
용하는 것이다. 자, 내게 검을 겨누어 보아라."
"제가 어찌 감히."
매니아는 잽싸게 검을 들어 혜검자의 목에다 가져갔다.
혜검자는 약간 불쾌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바로 그럴 때 최대한 멍청하고 잠에서 덜 깬 표정으로 부시시 일어나는 거다.
그리고 암습자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척하며 '이게 꿈이냐 생시냐'라고 외친
다. 그러면서 네 뺨을 꼬집는 것이지!"
"……?"
"후후. 인간의 뺨에는 숨겨진 혈도가 하나 있지. 바로 역천구궁혈(逆天九宮穴)
이 그것이다. 이 혈도를 자극하게 되면 전신의 사혈들이 순간적으로 자리를 바
꾸거나 사라지게 된다. 바로 그 때를 이용하면 적절한 역공이 가능하지. 어떠
냐, 대단하지?"
매니아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자 혜검자는 얼른 최후의 무공으로 넘어갔다.
"드디어 세 번째인 수비법이다. 이것은 신검합일(身劒合一)로 날아오는 적을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는 절묘한 방법이다. 내 자랑 같아 안됐지만 이
같은 수법을 창안해 낸 것은 천 년이 넘는 무림 역사상 노부밖에 없었다."
혜검자의 목소리에는 은연중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이번에는 매니아도 솔깃한
거 같았다. 설명에 차츰 빠져들더니 마침내는 감탄한 기색이 완연했다. 설명을
마치고 헤검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나는 더 이상 너를 가르칠 시간이 없구나. 이제 무림의 안위는 너의
두 어깨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한가지 부
탁을 하자면 하산한 후에 내 손녀딸 모용운지(慕容雲芝)를 찾아가기 바란다.
그녀는 천하의 재녀(才女)인데다 천고의 미색(美色)까지 타고났으니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를 찾아갈 때는 반드시 인피면구를 써야 한
다. 어릴 적부터 남자 보기를 돌멩이 같이 하는 차가운 성정(性情)을 지닌 지
라 웬만한 미남자가 아니면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와 맺어지면
부디 잘해 주기 바란다."
할 말을 모두 끝내고 혜검자는 매니아의 등 뒤 명문혈에 장심을 대고 진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개정대법이 시작된 것이다. 매니아는 심신이 아득한 나락
속으로 빠져 드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내공이
충만해진 탓에 온 몸이 날아 갈듯 상쾌했다. 옆에는 혜검자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좌화해 있었다. 매니아는 그의 유체 앞에 무릎을 꿇고 구배지례(九拜之
禮)했다. 워낙 총망(悤忙)하여 스승에 대한 예조차 올리지 못하고 무공을 전수
받았던 것이다.
매니아는 천천히 산길을 걸어 내려오며 중얼거렸다.
"결국 시체를 보고 절을 하긴 했으니 나도 기연을 얻은 것이구나. 비록 오 백
년 천년 된 시체는 아니었지만 절벽이 다 없어졌다는 판에 이 정도로 만족해야
지."
교교한 달빛이 그의 뒷모습을 비춰 주고 있었다.
"헉!"
모용운지는 비명과 함께 악몽에서 깨어났다. 온 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나의 신산술이 경지에 이르러 천기와 통하게 된 후에 들어서는 나쁜 꿈을 꾼
적이 없는데 괴이하구나.'
곱디고운 그녀의 아미(蛾眉)가 역팔자로 휘어진다.
답답한 마음에 창을 열자 시원한 밤바람이 규방으로 새어든다.
달빛을 받은 얇은 침의(寢衣) 사이로 그녀의 섬연한 몸매가 비친다. 길게 풀어
헤친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단아한 이마. 별빛보다 더 반짝이는
맑은 두 눈. 오뚝하게 솟은 콧날. 살짝 벌어진 빨간 입술과 턱 선의 미묘한 조
화. 사슴인 냥 길게 뻗은 목의 선을 따라 부드럽게 어깨로 이어지다 폭발할 듯
일어나는 가슴의 융기. 안타깝게도 하반신이 이불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것만으
로도 가히 절세가인이라 할 수 있었다.
"누가 감히 한밤중에 처자의 규방을 기웃거리느냐!"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냉랭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밖에서 잠시 움찔하는 기척이 있더니 곧 굵직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하! 과연 천심봉녀(天心鳳女) 모용운지답군! 본좌는 그대의 잠을 깨우기
싫어 특별히 공을 들여 접근했건만 이렇게 그대를 깨우고 말았구려. 하하하!"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위맹한 경풍(勁風)이 몰아쳐 벽을 산산조
각 냈다.
"흥."
차가운 웃음과 함께 모용운지는 천장을 뚫고 허공으로 솟았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백의경장(白衣輕裝) 한 벌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허공에서 연달아 몸
을 뒤집으며 옷을 걸치려 하는 순간 한줄기 날카로운 기운이 날아들었다. 모용
운지는 놀라울 만한 재지의 소유자였지만 무공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다급한
김에 백의경장에 공력을 주입하여 빳빳하게 만들어 그 기운을 후려치자 팍! 하
는 소리와 함께 경장이 산산조각 났다.
"하하. 그대의 침의 차림은 보기에 썩 좋건만 어째서 그따위 천 조각으로 가리
려 하오."
장내에는 휘장으로 가려진 사인교(四人轎)가 열두 명의 건장한 청년들의 호위
를 받으며 서 있었다. 휘장이 들려지며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그는 몸
매가 드러나 보이는 붉은 경장에 붉은 면사를 하고 있었으며 목소리로 보아 서
른 중반 정도의 나이인 것 같았다. 그가 탄 교자를 호위하는 청년들은 하나같
이 영준한 얼굴에 잘 발달된 근육이 비치는 홍색 나삼을 입고 있었다.
모용운지는 자신을 공격했던 날카로운 기운이 하나의 괴이한 암기(暗器)임을
알아보았다. 잠시 암기를 살피던 모용운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단장비라(斷裝飛螺)! 당신들은 설강(雪江)의 성부궁(聖夫宮)에서 왔나요?"
성부궁! 그 이름은 세외의 한 신비문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특이하게도 이
성부궁에서는 단 한 명의 여자도 정식 문도(門徒)로 들이지 않았다. 여자들은
밥이나 하고 빨래나 시키며 오로지 남자들에게만 무공을 전수시키는 금녀의 신
비궁궐 성부궁. 이들의 무공은 무척이나 괴이하여 중원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
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당신들과 일면식도 없는데 어째서 나를 핍박하는 것이오?!"
모용운지가 매서운 어조로 따지자 붉은 면사의 중년인은 한차례 소리내어 웃었
다. 그 웃음소리에는 매우 음탕한 기운이 서려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미묘한
흥분을 일으키게 했다.
"흐흐흐. 당신이 성부궁과 관계가 없을지라도 흑암회까지 그렇다고 하지는 않
겠지?"
"성부궁이 흑암회의 수족이었단 말인가!"
모용운지는 크게 놀라 부르짖었다. 그녀가 우천이 밝혀 낸 음모세력이 삼사 중
흑암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벌써 그들의 마수가 자신에게 뻗치다니.
중년인은 약간 씁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자고로 인걸은 때를 보아 굽힐 줄도 아는 법. 흑암회의 성세는 이미 극에 달
했소. 우리라고 좋아서 남에게 부림을 받는 줄 아오. 아무튼 그대를 잡아가면
회에서 본궁의 위치도 크게 격상할 것이니 순순히 따라 주기 바라오."
모용운지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자신의 거처를 지키던 호위 무사들이 아직까
지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암습에 당한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때 할아버지가 계셨으면.'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모용운지는 서서히 양손에 공
력을 주입했다. 그녀의 손이 팔목부터 새파란 기운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흥. 벽옥수(碧玉手)로군. 그대의 재지가 뛰어나다고 하더니 권주와 벌주조차
구별 못하는가. 십이미청년대(十二美靑年隊)는 천사미혼무(天邪迷魂舞)를 전개
하라!"
면사 중년인이 명을 내리자 열두 명의 미청년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모용운지를
포위했다.
'이들이 바로 여인의 넋을 뺐는다는 십이미청년대로구나. 과연 대단한 미색이
다.'
모용운지는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고 그들의 모습을 살폈다.
미청년 대원들은 그런 그녀를 둘러싸고 하나의 원을 그리며 미묘하게 움직였
다. 청년들의 몸매는 매우 뛰어난데다가 움직임에도 화사한 기운이 있어 마치
열두 마리의 나비가 너울너울 춤을 추듯 사람의 마음을 분탕케 하는 광경이었
다.
돌연 그들이 어깨를 가볍게 흔들자 매미가 껍질을 벗어나듯 홍색 나삼이 흘러
내렸다.
아아! 보라! 드러난 미청년들의 나신은 정녕 눈부셨다. 곰처럼 듬직한 어깨는
하얀 달빛을 받아 더욱 구리 빛으로 빛났고 터질 듯 팽팽한 탄력을 간직한 가
슴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출렁출렁 근육의 파도가 쳤다. 거기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조그만 유두(乳頭)는 찬바람에 가냘프게 떨고 있다. 어디 그뿐이
랴. 왕(王) 자(字)가 선명한 복부를 지나서 풍만한 둔부가 원숭이처럼 날씬한
허리를 받쳤고, 육감적인 다리 사이로 신비의 원시림이 무성하다. 청년들이 다
리를 꼬며 움직일 때마다 껍질을 벗겨 주기를 기다리는 바나나인 듯 흔들거리
는 그들의 양물(陽物)! 실로 이들 열두 명 나남(裸男)들의 자태는 가슴 떨리게
요염한 것이었다.
'아. 이상하구나. 내가 겨우 이 정도로 마음이 흔들리다니.'
모용운지는 내심 신음을 삼켰다. 원래 그녀는 정력(定力)이 고강하고 평소 남
색(男色)을 멀리하였기 때문에 이런 음탕한 술법에 걸려들 수 없었다.
'설마! 음약(淫藥)에 중독 당한 것인가?'
그녀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자세히 살피니 사인교자의 휘장 안에서 아주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열한 암수를 쓰다니!"
그러나 노한 외침과는 달리 그녀의 몸에서는 점차 힘이 빠져 가고 있었다.
갑자기 청년들의 움직임이 한없이 느려졌다. 그들은 아주 완만한 동작으로 서
로 얼싸안고 몸을 비비기도 하고 젖꼭지를 애무하기도 하는 것이 이전보다 훨
씬 더 애간장을 타게 만들었다. 이때 사인교에 있던 중년인이 기묘하게 몸을
비틀며 걸어나왔다. 그의 몸매는 청년들을 능가하는 것이어서 그가 한 번 어깨
를 비틀고 둔부를 살랑거릴 때마다 모용운지는 몸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피가
솟는 것 같았다.
중년인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하나의 옷가지를 벗어 던졌으며 마침내 얼굴
에 쓴 면사와 중요한 부분을 간신히 가린 삼각형의 얇은 내고(內袴)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마 내고는 너무나 얇은 천으로 만들어 졌기에 중년인의 양물이 당
장이라도 뚫고 나올 듯 불끈 솟은 윤곽이 뚜렷하다. 더구나 그의 몸매는 천하
의 둘도 없는 우물(尤物)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으니 완벽하게 발달된 이두박
근과 삼두박근, 흉근, 허벅지 근육 등은 가히 능숙한 장인의 조각품과도 같았
다.
그가 다시 한 걸음 내딛으며 면사를 벗었다. 그러자 절세 쾌남자(快男子)의 용
모가 나타났다. 굵은 검미(劍眉) 아래 흑백의 대조가 뚜렷한 눈동자. 오뚝한
콧날이 지성미를 풍긴다면 시커먼 구레나룻은 원초적인 야성미를 풍긴다.
'아! 저럴 수가.'
모용운지는 가슴이 심하게 분탕됨을 느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이성을 놓치
지 않기 위해 애쓰며 소리쳤다.
"더, 더 이상 다가오지 마!"
그러자 중년인은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화사하게 웃으며 하나 남은 내고마
저 휙 벗어 던졌다. 아아! 드디어 드러난 신비의 원시림과 양물의 적나라한 모
습. 중년인은 몸을 비비꼬고 야릇한 비음(鼻音)을 흘리며 말했다.
"허억. 이봐요. 나를 갖고 싶지 않나요. 흐어. 어서 이리 와서 나를 안아 줘
요. 허리가 부서지도록 당신의 품에 안기고 싶어요. 어서. 흐어어아으오오."
중년인의 물기 젖은 두 눈이 촉촉하게 빛났다. 무엇인가를 애타게 갈구하는 그
눈빛. 모용운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다짜고짜 달려들어 중년
인의 몸 위에 올라타려는 순간이었다.
"이 음탕한 사마외도의 무리들아! 매니아가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누군가 대갈일성(大喝一聲)을 지르며 장내로 뛰어들었다.
모용운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만약 그녀가 욕념을 참지 못하고 중년인과 정
사를 가졌다면 본신의 음기(淫氣)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니 참으로 아슬
아슬한 순간이었다.
모용운지는 새삼 분노가 치밀어 쌍장을 휘둘렀다. 새파란 벽옥수의 강기가 방
심한 중년인의 가슴을 강타했다. 크억. 비명과 함께 중년인의 구릿빛 나체는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그 사이 매니아도 검을 사방으로 휘둘러 미청년 대원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그
검은 혜검자가 쓰던 것으로 영성(靈性)을 간직한 보기 드문 보검이었다. 더구
나 매니아는 미청년 대원들의 잘빠진 나신에 극히 질투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
에 손속에 한 점 사정도 두지 않았다.
삽시간에 장내는 정리되었다. 성부궁의 중년인과 십이미청년대는 이제 모두 고
혼이 되어 있었다.
매니아는 검을 갈무리하고 모용운지에게 포권했다.
"소저, 하마터면 비열한 술수 때문에 곤란을 겪으실 뻔했습니다. 마침 제가 늦
지 않고 당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본인은 조부님의 제자로 매니아라
고 합니다.
모용운지는 마주 예를 취하며 담담하게 물었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오지 않고 당신을 보낸 것을 보니 그분께서는 이미 속세와
인연을 끊고 좌화하였겠지요?"
"그렇소이다. 스승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무림의 안위를 걱정하셨습니다. 또한
소저께서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저 같은 것이 감히. 공자님의 출중한 기상을 보니 공자님이야말로 무림
을 뒤덮은 암운을 걷어 내실 유일한 분이라 믿어집니다."
아닌게 아니라 인피면구 덕분에 매니아의 용모는 참으로 빼어나게 변해 있었
다. 그토록 잘생겨 보이던 성부궁의 중년인도 매니아에 비하면 삼 푼 정도 뒤
진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모용운지는 은연중에 가슴이 방망이 치는 것을 느
꼈다.
'참으로 완벽한 미모구나. 인간으로서 저렇게 잘생기다니.'
한 편 매니아도 처음 보는 모용운지의 절세 미모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더
구나 그녀는 아직까지도 침의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있어 아름다운 몸매가 훤히
비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발 다가서며 모용운지의 손을 잡았다.
"운지……."
모용운지는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지만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그녀의 영혼
은 이미 매니아에게 사로 잡혔던 것이다. 자고로 무림에서 용봉(龍鳳)의 만남
치고 한 눈에 반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매니아는 그녀의 고혹적인 자태를 보며 가슴이 크게 진탕되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와 닿았다. 어느새 둘
은 규방으로 들어서 있었다. 사방의 벽은 무너진지 오래였지만 상관없었다. 둘
은 한 몸처럼 엉키며 침대로 쓰러졌다.
매니아는 그녀의 침의를 벗겨 낸 뒤 서둘러 자신도 옷을 벗었다. 그들은 완전
한 알몸이 되었다. 매니아는 천천히 그녀의 (자체 심의)를 (자체 심의) 하다가
(자체 심의) (자체 심의)에 이어서 (자체 심의) 했다. 마침내 (자체 심의) (자
체 심의) 속에 (자체 심의)를 (자체 심의)한 매니아는 세차게 (자체 심의) (자
체 심의) (자체 심의) 한 후에 뜨거운 입술을 그녀의 (자체 심의)로 가져갔다.
모용운지는 녹아 날듯 한 쾌감 속에 (자체 심의)가 (자체 심의)로 젖어 들었
다. (자체 심의)가 이어지다 마침내 매니아는 모용운지의 몸을 뒤에서 (자체
심의) (자체 심의) (자체 심의) (자체 심의) (자체 심의) 했다. 참지 못하고
모용운지는 (자체 심의) (자체 심의)에 이어 (자체 심의)를 뒤집어 매니아의
몸 위로 올라섰다. 다시 한번 (자체 심의) 소리가 요란하며 (자체 심의) (자체
심의) 하였으니 참으로 변태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매니아와 모용운지는
계속해서 서로의 (자체 심의)를 (자체 심의) 하다가 가끔 (자체 심의)도 하는
것은 물론 (자체 심의)까지 했다.
드디어 길고 격렬했던 정사(情事)가 끝났다. 둘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서로의
몸에서 떨어졌다. 매니아는 자신의 별반 뛰어나지 못한 외모로 절세의 미녀를
얻은 것이 무척 뿌듯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인피면구를 벗으며 득의롭게 웃었
다.
"하하하. 모용 소저, 내가 깜빡 잊고 말을 안했구려. 정말 미안한오. 아까는
역용술이었고 내 진짜 외모는 바로 이것이오!"
격렬한 정사의 피로로 인해 축 늘어져 있던 모용운지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거 우리 할아버지가 준 인피면구죠!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진짜 얼굴과
절대 구별이 안 가는데…… 제 것도 같은 종류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인피면구를 휙 벗어 던졌다.
잠시 후 밤하늘 위로 매니아의 구슬픈 비명 소리가 길게 길게 울려 퍼졌다.
* * *
마침내 무림은 혈풍(血風)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흑암회가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그들은 놀라운 속도로 마도의
힘을 하나로 모았다. 놀랍게도 삼사의 다른 세력인 일월마교와 고루궁이 흑암
회의 꼭두각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흑암회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결집된
마도의 힘. 그들은 너무나 비밀스럽고 너무도 강력했다. 흑암회 앞에서 정도
세력은 차례차례 쓰러지는 수밖에 없었다.
천하 무림은 흑암회의 준동과 더불어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했
다. 그들의 잔인 무도한 행동은 극에 달했으며 특히 그들이 유포시킨 괴이한
마공(魔功)들로 인해 사람의 도리는 땅에 떨어지고 인심은 극도로 흉흉해졌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대꾸를 하고 사부는 회초리로 제자들을 때렸다. 절친했던
친구가 아내와 농담을 주고받는 것은 물론 정숙했던 처녀가 길거리에서 남자에
게 길을 물었다. 뿐인가! 어미가 밥을 먹던 아들의 가슴에 서슴없이 용돈을 던
져 주는가 하면 가장 신임했던 심복이 안보는 뒤에서 혀를 날름거렸다.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니 사람들은 누구도 믿고 의지할
수가 없었다. 무림은 점차 깊고 어두운 나락으로 침몰해 갔다.
* * *
이른 새벽녘의 북경(北京).
중원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아직 깨어 있지 않았다. 채 여명이 밝아 오기 전
의 쌀쌀한 새벽 공기가 청량한 느낌을 주었다. 채소를 나르는 짐수레 소리들만
한산한 가운데 한 명의 백의(白衣)를 입은 청년이 길을 가고 있었다.
반듯하고 시원한 이마. 그린 듯 쭉 뻗은 굵은 눈썹. 샛별처럼 빛나며 보는 이
로 하여금 신비한 느낌을 주게 하는 두 눈. 오뚝한 콧날. 한일자로 굳게 다문
붉은 입술. 이 모든 것이 한 장의 인피면구 덕분인 청년. 바로 매니아였다.
그는 지금 흑암회를 상대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두 가지 힘을 얻기 위해 북경
에 온 것이다. 그 힘이란 바로 오륙의 한 명인 비정도 냉휘상과 세상에 알려지
지 않은 하나의 비밀단체였다.
매니아는 며칠 전 모용운지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지금 공자님의 힘만으로는 절대 흑암회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제 지모(智謀)
를 합친다 하더라도 이란타석(以卵打石)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 그들과 실질
적으로 맞설 수 있는 무력과 정보력이 필요합니다.'
'으음. 그대에게는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듯 한데?'
'과연 공자님은 제 속을 들여다보고 계시는군요. 역시 하룻밤 동안 쌓은 만리
장성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줬나 봅니다.'
'우욱. 하던 말이나 어서 계속 하시오.'
'먼저 냉휘상을 수하로 거두셔야 합니다.'
'냉휘상? 그 오륙의 비정도 말이오?'
'그렇습니다. 알려져 있기로 오륙은 서로 간에 구속됨 없이 각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행동을 함께 해 왔습니다. 그리
고 냉휘상이야말로 오륙의 숨겨진 우두머리입니다. 그의 무공은 실로 대단하여
이미 활검(活劍)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음. 또 다른 하나는?'
'공자님, 당금의 무림에서 최대의 조직을 두개 꼽으라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
까.'
'응? 하나야 당연히 흑암회고, 또 하나는 글쎄…… 아무래도 무적이씨세가나
개방이 되지 않을까.'
'최대의 조직이 흑암회임은 맞습니다. 그들은 최대이자 최강의 조직이고 무엇
보다 철저한 점조직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내부의 조직원들끼리도 서로에 대
해 아는 것이 없을 정도지요. 하지만 나머지 하나는 틀리셨습니다. 그 조직은
비록 무력은 보잘것없지만 조직의 방대함과 정보 수집 능력에 있어서 만은 흑
암회에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리가. 이씨세가나 개방이 아니란 말이오? 그렇다면 혹시 하오문(下五
門)?'
'그것도 아닙니다.'
'말이 되질 않는구려. 이씨세가도 개방도 아니고 하오문도 아니라면 세상에 그
누가 있어 흑암회와 맞먹을 정도의 정보전 능력을 가지고 있단 말이오?'
'훗. 공자님의 총명함은 저에 못지 않으시니 분명 알아내실 수 있을 텐데요.'
'허허. 도대체 모르겠군. 무림에서 이씨 성을 가지지도 않았고 거지나 하오문
문도도 아닌데 그토록 많은…… 많은…… 설마! 설마 점소이(店小二)?!'
'그렇습니다. 바로 점소이들의 연합체인 점소문(店小門)입니다.'
'믿을 수가 없구려. 아무리 험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설마 점소이들까지 비밀
조직을 만들 줄이야.'
'누구인들 점소이를 의심하겠습니까. 객잔에서 강호인들의 시비에 휘말려 매일
코나 깨지는 신세가 점소이라고 여기는 고정관념으로는 절대 눈치 챌 수 없지
요.'
'쥐꼬리만한 봉급으로 먹고살기도 바쁜 그들에게 조직을 운영할 만한 자금이
어디 있단 말이오.'
'가끔 객잔에 들른 절세고수나 신비인들이 던져 준 은자 덩어리가 바로 자금원
역할을 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허허. 그대의 말이니 믿을 수밖에 없군. 아무튼 좋소. 내 반드시 비정도와 점
소문을 거두고야 말겠소.'
'부디 조심하세요. 비정도를 비롯한 오륙의 성격은 무척이나 단순하여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베어 버린 다는군요. 또한 점소문의 문주는 야망이 대단하다
고 들었어요.'
그 길로 매니아는 북경으로 향했다. 비정도가 신분을 숨긴 채 살고 있는 거처
와 점소문의 총단은 공교롭게도 둘 다 북경에 있었다.
제 목:[공모전] 우수상 : 무림매니아 - 4 관련자료:없음 [3656]
보낸이:무림동 (k2murim1) 1999-01-12 04:00 조회:2431
사내는 천천히 도(刀)를 움직여 꽃가지를 베고 있었다. 그의 발 아래로는 이미
많은 꽃가지들이 쌓여 있었다. 사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작업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보라! 잘려진 꽃가지의 단면(斷面)들은 마치 명경(明鏡)처럼
맑고 깨끗하지 않은가. 더구나 적잖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베어진 단
면에는 아직도 싱싱한 물기가 배어 있었다. 진정 놀라운 것은 꽃송이들이 시들
기는커녕 오히려 활짝 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위인활도(爲人活刀). 바로 도예(刀藝)의 극치. 죽임 보다 살림을 위주로 하는
경지 중의 경지. 그것이 바로 이 사내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문득 사내가 칼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몹시도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갑자기 서릿발같은 한기(寒氣)가 그의 눈을 스쳤다. 그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명의 남자가 느린 걸음으로 들어섰다. 검미성
목(劍眉星目)의 미남자, 바로 매니아였다. 사내는 매니아가 들어서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매니아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둘 사이가 점차 좁아졌다.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일대의 공기가 무형의 기운에 의해 밀려나기 시작했다. 삼장
(三丈)…… 이장(二丈)…… 일장(一丈)…… 마침내 둘 사이의 거리가 반장(半
丈)에 이르렀을 때 사내의 입술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저희 꽃집에 들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매니아는 흔들리지 않았다.
"훗. 몹시도 냉막한 음성이군. 귀공이 비정도 냉대협(冷大俠)이오?"
사내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어떻게 나의 거처를 알아냈지?"
"후후. 위인활도의 경지에 이른 자가 북경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
소. 새벽부터 꽃집이란 꽃집은 다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아플 지경이구려."
"으음. 대단한 머리의 소유자로군. 이 냉모(冷某)는 진정 감탄했다. 하지만 검
을 쓰는 솜씨도 머리만큼 좋은지 봐야겠다."
"잠깐."
매니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냉휘상을 제지했다.
"나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그대에 할 말이 있소."
"할 말?"
"그렇소. 본인에겐 당신 같은 남자가 꼭 필요하오."
"흥. 나는 남색에는 취미가 없다."
"음.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내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도요."
"나의 마음? 나의 칼?"
"바로 대의(大義)를 위해서요!"
쿠쿵!
대의라는 두 글자가 냉휘상의 뇌리를 강타했다.
"대, 대의……"
그는 몹시 격동되어 부르르 신형을 떨었다.
매니아는 냉휘상의 두 손을 굳게 쥐었다.
"나와 함께 대의를 위해 싸워 봅시다!"
냉휘상의 두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보는 남자를
위해 목숨을 건다고 하지 않았던가.
"주군!"
그가 무릎을 꿇자 갑자기 뒷방 문이 열리며 숨어 있던 굉풍부 철무룡과 단혼객
사마추, 염라녀 능비연, 빙후 단유하가 튀어 나왔다.
"아아, 주군!"
"주군을 뵙습니다!"
"저도 받아 주십시오!"
"주군! 크흐흐흑."
그들은 정말 단순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륙을 모두 수하로 만든 매니아는 점소문의 총단이 있다는 북경
제일의 객잔 열빈루(悅賓樓)로 향했다. 열빈루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객잔답
게 수많은 점소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매니아는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구석에서 자리를 청소하고 있는 한 명의 늙은
점소이 앞에 섰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철저하게 점소이다운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점소이 모자를
쓰고 점소이 옷을 입고 점소이 신발을 신고 있었다. 노인 점소이는 매니아가
다가와서 말없이 노려보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소, 손님께서는 무엇이 필요하신 지요."
매니아는 날카롭게 말했다.
"후후. 아무리 그렇게 숨기려 해도 소용없소.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면 점역(店
役:중급 점원)이나 점반(店伴:고급 점원) 아니, 점가(店家:지배인)의 지위에
있는 것이 당연할 텐데 아직도 점소이 노릇을 하고 있다면 해답은 바로 하나.
설마 당신이 점소문의 문주임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오."
"우웃. 대단하군요. 한눈에 제 정체를 꿰뚫어 보시다니."
옆에 있던 비정도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한마디했다.
"후후. 우리 주군은 천재이시다."
노인 점소이는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공자께서 북경에 오신 목적은 진작에 저희 정보망을 통해 파악했습니다
만 저희들에게는 오랜 세월에 걸친 숙원(宿願)이 있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걱정 마시오. 내 대업이 완수되면 그대들 점소이의 한(恨)을 풀어 주겠소. 반
드시 그대들에게 객잔 하나씩을 지어서 독립하게 해주겠소."
"오오! 감사합니다, 주군!"
노인 점소이, 점소문주가 감동에 젖어 오체투지(五體投止)하자 다른 점소이들
도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려 절했다.
"주군!"
"주군!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객잔에 있던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고개를 있는 대로 빼 들었
지만 비정도를 비롯한 오륙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시 자라목이 되어야 했다.
점소문을 접수한 매니아는 모용운지와 오륙, 점소문의 힘을 하나로 합하여 하
나의 조직을 결성했으니 이름하여 '광명회(光明會)'였다. 회주는 물론 매니아
였으며 모용운지가 총사, 오륙은 실질적인 행동대를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또
한 재정을 절약하기 위해 광명회의 총타(總陀)는 임시로 열빈루에 설치하기로
했다. 물론 열빈루의 주인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이렇게 해서 마침내 매니아는 무력과 정보력이라는 두 날개를 달게 된 것이다.
무림을 위기에서 구했던 그간의 수많은 청년 영웅들처럼……
* * *
- 모르오.
아버지 이름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면 모두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
고 그를 희귀한 동물처럼 본다. 하지만 그로서는 아버지 이름을 모른다는 것은
그들이 아버지 이름을 아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때로는 그들에게 너희는 어떻게 아버지 이름을 아는가, 너희가 알고 있는 그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인지 어떻게 확신하는 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을 정도
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말이 길어진다. 그것이 귀찮아 그는 그냥 이유를 설명
해 준다.
- 나는 사생아(私生兒)요!
들은 사람은 백이면 백, 모두 당황한다. 사실을 말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
도 아닌데 말이다. 뭔가 그에게 미안한 일을 저질렀다는 듯, 혹은 그가 대단한
불행을 당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듯 위로할 말을 찾는다. 그러나 사생아로 태어
났다는 것이 어째서 위로 받을 일일까?
"으흠. 음. 미안하네. 내 괜한 것을 물었구먼."
지금도 그의 눈앞에 있는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연방 헛기침을 터뜨리며 어
쩔 줄 몰라 한다. 중년인은 무적이씨세가의 열 여섯 집사 중 하나로 무림영웅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천장에 몰려든 무림인들의 방명록을 작성하는 중이었
다.
집사 앞에서 오연한 태도로 버티고 서 있는 남자. 그는 특이하게도 한 자루의
기형도를 엉덩이 쪽에 비스듬하게 차고 있다. 또한 그의 눈빛은 기묘하게 빛나
고 있어 마주보는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한마디로 살아 있는 눈빛의
소유자였다.
그 눈빛에 거북해진 집사는 붓을 들며 다시 물었다.
"그래, 아무튼 자네 이름이 대도오라고 했지. 그러면 어머니가 대(大) 씨(氏)
인가 본데 성함이?"
순간 썰렁함이 일대를 감쌌다.
집사는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얼굴을 붉혀야 했다. 스스로 사생아라 밝힌 이
청년이 설마 어머니의 성을 따서 대도오라는 이름을 짓기야 했을까.
기형도의 사내는 몹시 화가 난 눈초리로 집사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홱 돌려 소
리쳤다.
"대도일(大刀一) 형님! 이 자가 자꾸 아버지, 어머니의 성함을 캐묻는데요."
"흥. 되게도 까다롭군. 우리 대씨(大氏) 가문을 뭘로 보고. 대도이(大刀二),
대도삼(大刀三), 대도사(大刀四)! 짐 챙겨라. 돌아간다."
곧이어 다섯 명의 사내들이 요란하게 기형도를 쩔그럭거리며 장내를 빠져나갔
다.
집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방명록을 작성하기 시작
했다.
인파 속에 파묻혀 그런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한 명의 절세미남자가 있었다.
바로 매니아였다. 그는 광명회의 힘을 기르며 암중에서 흑암회를 견제하던 중
이번 이씨세가가 주최한 무림영웅대회에 음모가 숨어 있다는 점소문의 첩보를
듣고 정탐을 위해 온 것이다.
'확실히 무언가 수상해. 아무래도 나 역시 이 대회에 참가를 해야겠구나. 하지
만 나도 부모님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는데. 그렇다면 아무래도 가명을 써야겠
군. 아무튼 접수는 내일 하기로 하고 일단 오늘밤에는 이 이천장이라는 곳부터
살펴봐야겠다.'
생각을 정리한 매니아는 다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삼경(三更)을 알리는 북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삼경이라는 시간은 원래 야행인들이 돌아다니기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과연
삼경이 되자 여기저기서 수많은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흑의
경장 차림으로 바람처럼 빠른 경공을 전개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야행인들이
어둠 속에서 흑의를 펄럭이며 서로 미행을 하기도 하고 담장을 넘고 전각 위로
올라서며 처마 밑으로 숨어드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었다.
야행인들의 반 정도는 시가지를 빠져나가 인근의 야산이나 관제묘, 공동묘지
등으로 향했고 나머지는 이곳 저곳의 장원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인원들이 같은 시간대에 움직였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 은밀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물론 매니아도 먹물처럼 검은 흑의를 입고 이천장으로 숨어들었다. 잠시 후 그
가 담장을 넘어 사라지자 근처에서 낮은 목소리들이 두런두런 들려 왔다.
"휴우. 정말 못해 먹겠구만. 요즘 따라 무슨 놈의 야행인들이 이렇게 많이 출
몰해."
"쉿. 목소리가 너무 커. 이 사람아, 우리 같은 하급 경비 무사들이 한 목숨 건
지려면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거 모르나."
"아무래도 우리 가주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
렇게 밤마다 담 넘는 놈들이 많겠어.
"그런들 아닌들 무슨 상관이야."
"하긴 그래. 근데 하도 경공 높은 고수들이 많이 드나들다 보니 나도 견식이
많이 늘었나 봐. 이제 웬만한 야행인들은 바람 소리나 기척만으로도 구분이 간
다니까."
"끌끌. 이렇게 수상한 세월엔 그저 우리 같은 사람들은 봐도 못 본 척. 어디서
바람이 스쳐 갔나 멍한 표정으로 서 있거나 아니면 꾸벅꾸벅 졸고 있는 흉내
내는 게 최고야. 어이쿠. 누가 다시 나온다!"
목소리들이 단번에 끊겼다.
잠시 후 매니아가 담장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과연 이천장에는 무서운 음모가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스무 개의 전각과 여섯 개의 별당, 두 개의 대전을 뒤졌는데, 다섯 곳에
서 발가벗은 여인과 눈이 마주쳤고 세 곳에서 정사를 나누는 척 하다 남자를
납치하는 여인을 목격했으며 일곱 곳에서 밀담을 엿들을 수 있었다. 모두에게
이 무서운 사실을 알려야만 한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마침내 무림영웅대회의 날이 밝았다.
이 대회는 무적이씨세가와 칠팔이 주최한 것으로 정도의 모든 힘을 모아 흑암
회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회에 참가한 군웅(群雄)들과 무적세가, 칠팔
의 정예가 주축이 되어 정도 무림맹(武林盟)을 결성하고 비무대회(比武大會)의
승자를 무림맹주에 등극시키기로 한 것이다.
대회장(大會場)은 이천장에서 몇 리 떨어진 넓은 분지에 자리 잡았다. 대회에
참가하거나 단순히 구경을 온 군웅들의 편의를 위해 대형 천막이 사방에 솟았
고 중앙에는 커다란 비무대(比武臺)가 다섯 개나 설치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비무대회는 시간이 흐를 수록 열기를 더해 갔다. 초반의 이름
없는 무사들의 대결이 정리되고 차차 고수들의 대결이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명
승부가 이어졌다. 그에 따라 군웅들의 함성과 놀란 외침도 대회장을 메웠다.
"앗! 저것은 백년 전부터 자취를 감추었던 분뢰수(奔雷手)다!"
"헉! 이백 오십 년 전에 사라졌다는 유룡검파세(游龍劍波勢)가 다시 나타났
다!"
"아아! 오백 년 전 수라혈마군(修羅血魔君)의 백팔수라멸겁식(百八修羅滅劫式)
이다!"
"와아아! 팔백 년 전 실전 되었던 성검대제(聖劍大帝)의 무한초절검(無限超絶
劍)의 위력을 봐라!"
군웅들은 주최측에서 나누어 준 실전무공식별법(失傳武功識別法)이라는 책자를
참고하며 열심히 소리를 질러 댔다.
이런 식으로 사흘이라는 시일이 흘렀다. 워낙 규모가 크고 참가자가 많았기 때
문에 이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인데, 최종적으로 결승에 참가하게 된 사람은
철혈광검의 독자(獨子)이자 무적이씨세가의 소가주(小家主)인 신검공자(神劒公
子) 이수완(李秀完)과 매니아였다. 이씨세가의 소가주가 결선에 오른 것은 어
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으나 갑작스러운 매니아의 등장은 실로 세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매니아는 무림맹 결성에 모종의 음모가 작용할 것임을 알고 그것을 막기 위해
비무대회에 참가하였다. 원래 그는 혜검자의 검법을 십일만이천칠백사십구검
정도밖에 익히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 정도 실력으로 결선까지 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는 대결을 거듭할수록 자신이 가진 검법의 약점을 보
완할 수 있었다. 결국 마지막 승부를 앞에 두고서 그는 거의 완전하게 십육만
팔천검을 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결전의 시간.
넓은 비무대 위에는 오직 두 사람, 매니아와 이수완 만이 대치하고 있었다. 비
무대 위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자신감에 차 있던 매니아는 이수완과
마주하는 순간 패배를 예감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 이수완의 자세는 그야말로 한 점의 빈틈도 없었다. 사실 이수완은 무적
이씨세가가 배출해 낸 최고의 기재인데다가 무공에 대한 집착이 강해 이제까지
수련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노력하는 천재. 그는 강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
가 없는 자였다.
하지만 매니아는 싸워 보기도 전에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갚아야
할 혈채(血債)와 이끌어야 할 가솔(家率)들이 있지 않은가. 이를 악물었다. 자
꾸만 수그러들려는 전의(戰意)를 끌어올리며 맹렬하게 기세를 불태웠다.
"타핫-"
힘찬 기합과 함께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며 분열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넷…… 여덟…… 열 여섯…… 서른 둘…… 계속해서 쪼개어 지며 검의 개
수도 늘어났다. 십육만팔천검! 환검(幻劍)의 경지가 재현되며 허공 가득 매니
아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비무대 위가 온통 그의 몸뚱이로 뒤덮이며 십육만팔
천 자루의 검이 환상처럼 그어진다.
그때였다.
이수완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비웃음.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절기(絶技) 중
하나인 삼십삼만육천검(三十三萬六千劍)으로 상대를 도륙 할까 생각했다. 삼십
삼만육천검이라면 십육만팔첨검의 두 배. 매니아의 몸은 난도분시(亂刀分屍)가
되어 허공에서 산산조각 날 것이다. 그러나 이수완은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결승전을 화려하게 장식할 좀 더 멋진 방법이 생각난 것이다.
그의 검이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눈부신 광화(光華)가 피어올랐다. 비무대 아
래의 군웅들 중 공력이 약한 자는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어느 순간 이수완
과 검은 하나가 되었다. 신검합일(身劒合一). 검술의 극상승(極上乘) 경지. 사
람이 검이 되고 검이 사람되는 경지를 그가 펼쳐 낸 것이다.
허공에 떠서 십육만팔천검을 시전하던 매니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귓
가에 혜검자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메아리쳤다.
'드디어 세 번째인 수비법이다. 이것은 신검합일로 날아오는 적을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는 절묘한 방법이다. 내 자랑 같아 안됐지만 이 같은 수법을
창안해 낸 것은 천 년이 넘는 무림 역사상 노부밖에 없었다. 이 수법은 바로…
…'
매니아는 순간적으로 운용하던 십육만팔천검을 거두어 들였다. 이수완이 검과
하나가 되어 빛살처럼 쏘아져 오는 모습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수완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야압! 신(身)-검(劍)-합(合)-일(一)!"
매니아도 혼신의 힘을 다해 다시 공력을 끌어올리며 외쳤다.
"차아앗! 신(身)-초(墅)-합(合)-일(一)!"
신초합일(身墅合一)!!!! 수비 검술의 최고 경지! 사람이 검집[墅] 되고 검집이
사람되는 수법! 아아! 정녕 무림에 그 누가 있어 사람과 검집이 하나 되는 검
도(劍道)를 상상이나 했으랴!
마침내 신검합일로 날아가던 이수완과 신초합일로 날아가던 매니아가 공중에서
격돌했다.
굉량(宏量)한 폭발음도 없었다. 막강한 경기의 폭풍도 없었다. 그저 검이 검집
에 꼽히는 찰칵- 소리만이 작게 울렸다.
승부는 매니아의 승리로 끝났다. 신초합일에 당한 이수완은 극심한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기절했으며 비무를 구경하던 군웅들 중 백 명 이상이 정신을 잃거
나 기억 상실 증세를 보였다. 어찌되었든 매니아가 정도 무림맹의 맹주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사방에서 수백 명의 검은 복면을 한 흑의인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대회 장소
를 포위했다. 이들은 흑암회의 정예들로 무림맹의 결성을 역이용하여 기습에
나선 것이었다. 수천의 군웅들은 겨우 십분지 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숫자로
습격을 감행한 흑암회를 비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피눈물로 바뀌어야 했
다. 흑의인들이 엄청난 양의 미혼분을 뿌리며 공격해 들어온 것이다.
미혼분. 다르게는 미혼약(迷魂藥), 몽환약(夢幻藥)이라고도 불리며 강력한 마
약 성분이나 수면제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종류에 따라서는 내공을 흐트러뜨
리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미혼분은 독이 아니기 때문에 해독이 불가능하며 무
림 역사상 천하없는 고수라도 미혼분에 한 두 번 당해 보지 않은 자는 없었다.
미혼분은 비싼 가격도 가격이려니와 시중에 유통되는 양도 워낙 적어서 집단전
에서는 금기시 되었으며 그나마도 얼마 전부터는 누군가의 독과점으로 인해 자
취를 감춘 약물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같은 배경에는 흑암회의 손길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신호에 따라 흑의인들의 미혼분 살포가 시작되었다. 그 비싸고 귀한 미혼분이
밀가루 날리듯 사방 팔방에 뿌려졌다. 푸른 하늘이 하얀 가루에 가려지며 태양
도 빛을 잃었다.
초대량으로 살포된 미혼분 앞에서 군웅들은 맥없이 쓰러졌다. 흑의인들의 본격
적인 살공(殺攻)이 시작되면 모두 피를 뿌리며 목숨을 잃어야 할 상황이 극적
으로 반전된 것은 그때였다.
폐관수련에 들어갔다고 알려진 철혈광검 이강극이 충혈 된 눈으로 뛰쳐나왔던
것이다. 괴이하게도 그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피처럼 붉은 광채가 흐르고 있었
다. 그는 비무대 위에 쓰러진 아들을 끌어안고 한동안 매니아를 노려보았다.
가슴이 섬뜩해지도록 무서운 눈빛이었다. 갑자기 그가 미친 듯이 웃었다. 그
와중에도 이강극을 감싼 혈광(血光)은 급속도로 정도를 더해 갔다. 누군가 실
전무공식별법을 살피다가 혈광의 정체를 파악하고 놀라 부르짖었다.
"천년 전 실전 된 전설의 마공, 수라수라아수라마황혈천강기(修羅修羅阿修羅魔
黃血天 氣)다!"
마공 서열 일위(一位)를 자랑하는 천마강림무(天魔降臨舞) 보다 최소 세 배 이
상 강하다고 알려진 극강의 무공, 수라수라아수라마황혈천강기! 그러나 이 것
은 금지된 무공이었다. 강한 위력만 발휘할 수 있다면 비인간적인 수련법도 마
다 않는 마도인들이었지만 수라수라아수라마황혈천강기만은 예외였다. 무공을
대성하는 순간 완전히 인성(人性)을 상실하고 한 마리 피에 굶주린 악마가 되
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강극이 누구도 몰래 금지된 마공을 연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이
강극에는 수라수라아수라마황혈천강기를 극복할 자신이 있었다. 육체적 능력은
뛰어나지만 머리는 돌이라는 세간의 평과는 그는 실상 재지(才智)에 있어서도
그 누구에 못지 않았다. 그같은 천재였기 때문에 마성(魔性)을 극복하고 인성
을 간직한 채 수라수라아수라마황혈천강기를 연성할 수 있었다. 철혈광검이 폐
관에 들었던 동안 계속해서 수라수라아수라마황혈천강기를 수련했음은 물론이
다. 명실상부한 무림의 최강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일부러 남의
눈을 속이고 바보 같이 행동했을 뿐이었다.
그는 흑암회가 영웅대회를 틈타 암습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이를 거꾸로 이용
하여 수라수라아수라마황혈천강기로 그들을 전멸시킬 계획이었다. 결국 압도적
인 자신의 무위(武威) 앞에 정도도 마도도 모두 무릎을 꿇게 된다는 것이 그가
그려 놓은 그림이었다.
그러나 애지중지하던 아들의 충격적인 패배로 그만 이강극은 이성을 잃고 순간
적으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들게 되었다. 결국 마기를 제압하지 못하고 살인
귀(殺人鬼)가 된 것이다.
워낙 눈치가 빨랐던 매니아는 그간 들었던 수많은 무림 이야기를 참고해 이 같
은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잘못하면 끽 소리 한 번 못하고 마공에 의해 난도
질당할 수 있음을 깨달은 매니아는 잽싸게 흑의인들과 비슷해 보이는 흑의경장
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냅다 흑의인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를 핏빛 광
채에 휩싸인 이강극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까만 옷
입은 놈이라면 닥치는 대로 찢어 죽이는 이강극을 막기 위해 흑의인들은 미친
듯이 미혼분을 뿌렸다. 그러나 천년의 시공을 뛰어 넘어 나타난 전설의 마공은
과연 강했다. 결국 남은 미혼분이 모조리 살포되고 단 한 명의 흑의인을 뺀 모
든 흑암회 인원이 몰살당하고 나서야 이강극도 쓰러졌다. 그는 '분하다. 몌쉬
에돌륵닐즘칩끽녑즐터폄지계가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다니.'라고 중얼거린 후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사라졌다. 흑의인들 중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이 공교롭
게도 변장한 매니아였음은 천운(天運)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
다.
제 목:[공모전] 우수상 : 무림매니아 - 5 관련자료:없음 [3657]
보낸이:무림동 (k2murim1) 1999-01-12 04:00 조회:2372
* * *
깊은 밤이었다. 구름에 가려 달빛조차 모습을 감춘 계곡. 다섯 개의 검은 그림
자가 야음을 틈타 계곡 사이로 빨려 들듯 잠입했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비정
도 냉휘상을 비롯한 오륙이었다.
절정의 경공을 발휘해 귀신처럼 계곡 안으로 들어온 그들 앞에 여러 채의 목조
건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곳곳에서 화톳불 타는 소리가 요란했고 수많은 흑
의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별다른 경계가 없었던 계곡 입구에 비해 내부의
경비망은 극히 삼엄했다.
"역시 점소문의 정보는 정확하군. 우리가 찾던 곳이 틀림없다."
냉휘상이 하얗게 웃었다.
"명심해라. 빠르고 신속하게. 경우에 따라서는 합공도 주저하지 말아라. 반드
시 흑암회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다섯 개의 그림자가 질풍처럼 쏘아졌다.
"으악!"
"크헉!"
두 번의 비명이 울렸다면 이미 이십 명 이상의 흑의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
다. 그만큼 오륙의 무공은 강했다. 그런데 그토록 패도적이던 오륙의 앞을 가
로막은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챙- 챙-
연달아 칼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고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냉휘상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자신의 애도(愛刀)를 막아낸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 자루의 칼날을 연상시키는 기도(氣度)를 지니고 있었다. 어깨축과 소
매통이 넓은 무사복에 하나로 묶은 상투만 빼고 죽 밀어 버린 머리. 바로 동영
(東瀛) 특유의 복장과 머리 모양이었다. 그의 뒤로는 같은 모습을 한 인물들이
수십 명 더 있었다.
"사무라이인가.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군."
냉휘상은 강적을 만난 것이 몹시 기쁘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무라이도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강한 자 특유의 단순함에서 그들은 통하는 것이
있었다. 아니 단순함만 가지고 따지자면 명예를 중시하고 수치심을 견디지 못
하는 것만 제일로 아는 사무라이가 냉휘상보다 훨씬 더 할지도 몰랐다.
흑의인들을 모조리 도륙한 나머지 오륙이 냉휘상의 뒤편에 섰다. 장내에는 오
륙과 사무라이 집단이 뿜어내는 살기로 질식할 것 같았다.
사무라이 대장이 오연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 곳의 보안을 책임지고 있는 미나모토 요시이에라고 한다. 겐지(源氏)
가문의 무원(武院) 소속 일등부장(一等部長)이었는데 주군의 명을 받고 중원에
파견되었다."
"훗.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용병이라고 간단히 말해라."
미나모토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내게 수치를 주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쩔 테냐."
"우리 동영의 무사는 수치를 참지 못한다! 셉뿌꾸(切腹:할복 자살)하겠다!"
"맘대로 해라."
푹-
미나모토는 자신의 배를 가른 채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바로 뒤에 있던 사무
라이가 재빨리 앞으로 나선다.
"나는 호조 사네토모라고 한다! 겐지 가문의 무원 소속 이등부장으로 주군의
명을 받고 중원에 파견되었다."
"너도 돈에 팔려 온 놈인 건 마찬가지다."
"우웃!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지금 발언을 취소해라!"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못한다."
"셉뿌꾸하겠다!"
"해라."
푸욱-
"나는 다케다 마쓰히데라고 한다! 겐지 가문의 무원 소속 삼등부장이다."
"너도 똑같은 놈이다."
푸확-
"나는 요시키 와리가리라고 한다! 겐지 가문의……"
"이하동문!"
푸화악-
이런 식으로 냉휘상은 향 하나 태울 시간 동안에 수십 명의 사무라이 전부를
해치웠다.
"자. 이 것으로 경비는 모두 제거되었다. 신속하게 화약을 설치한 다음 이 곳
을 벗어나기로 한다."
냉휘상을 비롯한 오륙은 건물 요소 요소에 화약을 설치했다. 이 건물들은 바로
흑암회의 미혼분 제조 공장과 저장고였다. 전번의 무림영웅대회에서 미혼분의
위력을 절감한 광명회는 미혼분 살포를 사전에 막을 방법을 강구했다. 점소문
의 정보망을 통해 미혼분 제조 공장의 소재를 파악한 매니아는 오륙에게 이 곳
을 철저히 파괴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모든 작업을 마친 냉휘상은 자리를 뜨려다 말고 움찔했다. 거대한 너무도 거대
한 무형의 기운이 그를 덮쳐 왔다. 기파(氣波)에 압도당한 냉휘상은 조금도 움
직일 수 없었다. 심지어 호흡조차 곤란했다. 나머지 오륙이 어리둥절한 표정으
로 냉휘상을 바라보았다. 냉휘상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같은 장소에 있
는 사람들 중 특정인에게만 기파를 보낸 다는 것―그것도 냉휘상을 압도할 만
한 정도의―은 보통의 고수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어디를 그렇게 바삐들 가시는가."
기이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들려 왔다. 늙었는지 젊었는지 심지어는 남자인
지 여자인지 조차 알 수 없는 목소리.
그제야 적의 출현을 안 나머지 오륙은 경악했다. 절정에 달한 무공을 가진 그
들이었건만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도록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나타난 인물. 그는 거대한 체구의 소유자로 황제만이 입을 수 있는 곤룡포(袞
龍袍) 차림이었다. 기묘하게도 그의 곤룡포는 검은 색으로 물들여져 있어 금방
이라도 불길한 어둠의 권세가 묻어 날 것 같았다. 얼굴은 면사(面紗)로 가려져
있었으나 눈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부근에서 형형한 광채가 면사를 뚫고 뿜어져
나왔다.
"다, 당신은 누구요?"
냉휘상은 쥐어짜듯 외쳤다.
"말을 조심하라. 이 분이야말로 흑암회의 주인이시다."
갑자기 흑의인의 옆에서 붉은 그림자가 솟아오르며 그의 말을 받았다.
혈영. 바로 혈영이었다.
오륙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누구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 흑암회의 주
인. 암중에서 그 모든 사악한 음모를 꾸미고 조종하는 권능자. 그가 이곳에 모
습을 드러내다니.
"어째서, 어째서 당신이……?!"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기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륙의 능력을 아끼기 때문이지."
뜻밖의 말이었다. 하지만 냉휘상은 냉정을 되찾았다.
"흥. 주군을 져 버리라니. 어림도 없소!"
"자네들은 지금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네. 자네들의 주인과 자네들의 힘으로는
절대 흑암회를 상대할 수 없어."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 것이오."
"후후.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줄까. 자네들의 그 너저분한 조직의 이름이 광명
회가 맞지."
"그, 그걸 어떻게!"
"광명회가 아무리 비밀스럽게 운신하고 점조직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결코 흑암
회의 이목을 피할 수는 없지. 그에 비해 자네들이 흑암회에 대해 알아낸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
"흑암회의 내부 동정은 고사하고 하부 조직의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
야. 그것은 흑암회가 진실로 철저하게 비밀 점조직으로 운영되기 때문이지. 놀
라지 말게나. 실은……"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얼마나 철저한 비밀 점조직인지 당사자 자신도 조직원인지 아닌지 모르는 경
우가 있다네!"
충격! 오륙은 진정 충격에 빠져들었다. 본인이 조직원인지 아닌지 조차 모르는
비밀 조직이라니. 가히 공포의 극치였다. 하지만 그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말
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사실은 비정도 냉휘상, 자네도 우리 흑암회의 회원이지!"
냉휘상의 눈이 더할 수 없이 커졌고 그의 입은 찢어 질듯이 벌어졌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소!"
"아니, 사실이네!"
목소리가 사납게 몰아쳤다.
"자네가 흑암회의 도각(刀閣)을 이끄는 각주(閣主)임은 틀림없는 사실일세!"
"아냐! 나는 흑암회 회원이 아니야!"
냉휘상은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하지만 어느새 나머지 오륙의 눈빛은 싸늘
하게 변해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말하고 있었다. '배신자! 냉휘상, 이 더러운
배신자!'
"아니야! 아니야! 나는 배신자가 아니야!"
냉휘상의 처절한 절규가 하염없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더 이상 부정하지 말게!"
마침내 냉휘상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내가…… 흑암회의 회원이었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그의 눈동자에서는 급속도로 생기(生氣)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지. 자네만 흑암회의 회원인 줄 안다면 오산이야. 굉풍부 철무
룡, 자네는 부각(斧閣)의 각주야! 단혼객 사마추, 자네는 단혼각(斷魂閣)의 각
주네! 염라녀 능비연, 자네는 염라각(閻羅閣)의 각주이며 빙후 단유하 역시 빙
각(氷閣)의 각주일세!"
"그, 그럴 수가!"
"안돼!"
"설마!"
"오오! 하늘이시여! 땅이시여!"
오륙은 비명처럼 외쳐 댔다. 가히 충격의 연속이었다. 오륙 모두가 흑암회의
소속되어 있었다니.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었다. 너무나도 의외의 사태에 오륙
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온 몸에 힘이 빠지며 마치 아득한 나락 속으로 영
원히 빠져드는 것 같았다.
매니아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은퇴? 이게 무슨 말이오! 오륙이 갑자기 은퇴를 하다니……!"
그의 떨리는 손에는 한 장의 편지가 쥐여져 있다. 오륙 전원은 주군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니 이 시간 후로 영원히 사라지겠다는 내용이었다.
모용운지는 씁쓸하게 웃으며 오륙이 흑암회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
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토록 그들을 믿었건만!"
매니아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흑암회를 상대하기 위해선 반드시 그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공자님,
제 물음에 솔직히 대답해 주세요. 그들을 용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모용운지는 매니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곳에는 심한 갈등이 회오리
치고 있었다.
"모르겠소. 솔직히 답하라지만 정말 지금 심정으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구
려. 그 문제는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이야기해 봅시다."
매니아는 깊게 한 숨을 내쉰 후 탁자에 있던 용정차(龍精茶)를 한 모금 마셨
다.
"후우.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구려. 흑암회에 대한 공격 준비는 어떻게 진행되
고 있소."
"네. 현재 무림맹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고수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적의 전
력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지만 이 정도 숫자의 고수들이 모였다
면 한 번 해볼 만 할 것입니다. 더구나 제게는 비장의 한 수가 있습니다."
"흠. 기대하겠소. 그런데 고수들 중에 어검술(御劍術)이 가능한 자는 몇 명이
나 되오."
"세 명입니다."
어검술. 그것은 신검합일 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다. 검과 하나 되거나 기(氣)
로서 검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단계를 뛰어 넘어 검을 안고 거리에 관계없이 날
아다닐 수 있는 최상승의 경지가 바로 어검비행이었다.
"좀 모자란 감이 있지만 총사가 알아서 요긴한 곳에 배치하도록 하시오. 흑암
회 놈들이 전서구(傳書鳩)를 멸종시킨 이후 연락망을 대체하기가 수월치 않구
려. 이 편지만 하더라도 보름 전에 보낸 것이 오늘에야 도착했으니. 끌끌."
"네. 맡겨 두십시오. 어검비행으로 각종 소식과 편지들을 배달하면 크게 시간
이 단축될 것입니다."
"흑암회의 배후 인물에 대해서는 알아낸 것이 있소?"
"거의 전무한 실정입니다. 외부 행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극히 드문데다
나타난다 하더라도 항상 면사를 착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면 별다른 대책이 없는 것이오."
"제게 한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적이 미혼분을 독점하는 것을 보고 영감(靈感)
이 떠올랐는데 우리 쪽에서 전국의 면사 제조망을 독점하는 것은 물론 재고까
지 싹쓸이하는 것입니다. 원래 면사라는 것은 오랜 시간 얼굴을 덮기 때문에
대단히 비위생적이라 자주 자주 갈아줘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쓰고 있는 면사
를 갈고자 할 때쯤이면 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면사는 단 한 장도 없을 것
입니다. 훗. 그렇게 되면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지요."
"역시 총사답소. 믿겠소이다."
이렇게 무림맹과 광명회의 흑암회를 상대하기 위한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
다. 그러나 매니아는 미처 알지 못했다. 무림맹에 모여 든 정도 무림인들의 마
음을 일시에 뒤흔드는 엄청난 소문이 퍼지게 될 것임을.
* * *
울창한 숲 속의 외로운 모옥(茅屋). 한 사내가 마당에서 도끼질을 하고 있었
다. 탁. 탁. 일정한 격타음과 함께 장작이 쪼개졌다. 그는 아침부터 쉬지 않고
도끼질을 했기 때문에 주위에는 수백 개의 장작이 쌓여 있었다.
휴우. 사내는 짧은 한 숨을 한 번 내쉬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다시 도끼를 치
켜들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숲을 따라 난 조그만 소로(小路). 백의를 입
한 한 남자 느린 속도로 걸어오고 있었다. 누구일까. 이 곳은 너무 외져서 사
냥꾼조차 좀처럼 찾지 않는 숲이거늘. 갑자기 사내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저 느리고 완만한 걸음이 어딘가 낯이 익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주, 주군……"
사내는 힘없이 도끼를 떨어뜨리고 털썩 무릎을 꿇는다. 그는 무림에서 은퇴한
후 나무꾼으로 먹고살던 과거의 비정검, 냉휘상이었다. 물론 백의인은 매니아
였다.
"일어나게, 이 사람아. 이게 무슨 고생인가."
매니아는 냉휘상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과거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네. 진정으로 재출발 할 마음만 있다면 누구든 용
서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게야. 더구나 우리는 대의를 함께 이루기로 한 형
제 같은 사이 아닌가."
담담하게 말하는 매니아. 생사를 넘나드는 그간의 격전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
았기 때문일까. 예전에 비해 그는 무척 성숙해 있었다.
"주군!"
냉휘상은 오열했다. 이어서 싸리문이 열리며 방안에 있던 철무룡과 사마추, 능
비연, 단유하가 튀어 나왔다.
"아아, 주군!"
"주군을 다시 뵙습니다!"
"저희를 받아 주시다니!"
"주군! 크흐흐흑."
잠시 후 그들은 손을 맞잡고 초옥 안으로 들어갔다.
오륙이 정성 들여 조리한 토끼 고기를 대접받으며 매니아는 그간 강호를 휩쓸
게 된 하나의 소문을 이야기해 주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전설의 신비제왕지총(神秘帝王之塚)이 열리다니!"
냉휘상의 감탄하자 매니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야. 흑암회가 중원의 모든 절애를 파괴, 봉쇄한 후
그간 무림인들이 얼마나 기연에 굶주려 있었나. 그런데 하필이면 흑암회와 일
전을 벌이려는 시기에 신비제왕지총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지금도 무림
맹 소속의 많은 고수들이 그 곳으로 향하고 있네. 그로써 우리는 막대한 인원
손실을 당했으니 누구의 음모 일지야 뻔한 것 아니겠나."
"후우. 그렇다면 신비제왕지총 안에는 반드시 함정이 도사리고 있겠군요."
"그렇겠지. 아마도 그들의 총단 역시 신비제왕지총 안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
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이것은 기회일 수도 있어. 만약 무림맹의 남은 정예들
까지 모두 이끌고 신비제왕지총으로 들어간다면 힘의 분산됨 없이 적의 본거지
를 일거에 궤멸시킬 수도 있으니까. 물론 아주 운이 좋아야 하겠지만 말일세."
"……"
"함께 가겠나?"
냉휘상은 조용히 일어서서 벽으로 향했다. 벽장문을 열자 검가(劍架)가 드러났
다. 냉휘상은 애도를 꺼내 들며 믿음직하게 웃었다.
"어디든지."
* * *
널따란 암도(暗道). 이곳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
"크윽!"
비명과 함께 점창파 청허도인(晴虛道人)의 목이 꿰뚫어지며 피분수가 솟았다.
반쯤 휘둘러진 그의 검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지며 메마른 비명을 토해 냈다.
"모두 절대로 벽면을 건들이지 마시오! 움직일 때는 반드시 앞선 사람이 밟고
나간 바닥만을 밟아야 하오!"
내공을 주입한 매니아의 목소리가 어둠 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실수다. 신비제왕지총의 기관(機關)이 이토록 무서울 줄이야. 단 십 장의 거
리를 통과하는데 벌써 백 명 이상이 쓰러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암도의 끝에
다다르기도 전에 몰살당하겠다.'
매니아는 당황했다.
신비제왕지총에 들어설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있었다. 기관진식(機關陣式)과
토목지술(土木之術)의 대가인 모용운지가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 명이
넘는 인원을 이끌고 어느 정도 진입해 왔을 때 엄청난 진동과 함께 무덤의 내
부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복도가 내려앉고 천장이 갈라지며 기둥이 자리
를 바꾸었다. 바닥이 춤을 추고 벽면이 미친 듯이 회전했다. 모용운지가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을 만큼 빠르고 격렬한 움직임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매
니아의 곁에는 오 백 명 정도의 인원밖에 남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라진 반수
에 모용운지와 오륙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타격이었다. 광명회의 머리와 팔
이 한꺼번에 사라진 상황. 매니아로서는 애가 탈 수 밖에 없었다.
"여러분! 혹시 보물이 나타나더라도 어차피 가짜거나 극독이 발라져 있을 것입
니다. 절대 현혹되지 말고 저를 따라 중심부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
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매니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전 지식을 총동원해 간신히 암도를 빠져나왔
다.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지하 대전이었다. 천장에 설치된 야
광주의 인공 조명 아래 드러난 광경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십장 둘레의 석주
기둥을 중심으로 사방 백여 장이 넘는 엄청난 규모.
쿠르릉. 중인들이 감탄해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기관이 작동하며 한 쪽 벽면에
공간이 열렸다. 분분히 무기를 꼬나 쥐는데 반가운 음성이 메아리쳤다.
"공자님!"
모용운지를 비롯한 나머지 인원들이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매니아에 비해 훨
씬 더 위험한 기관들을 상대해야 했지만 모용운지의 지식으로 인해 희생은 오
히려 적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흑암회의 총단인 거 같아요."
모용운지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조용하지?"
매니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사방에서 기관이 작동되며 수천 명의 흑의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와아! 쳐라!"
"죽여라!"
"모조리 없애라! 와아아!"
거친 함성이 대전을 가득 메웠다. 그들은 흑암회의 정예들인데다가 수적으로도
압도적이었다. 피가 난무하는 혼전 속에서 광명회와 무림맹의 숫자는 자꾸 줄
어들었다. 매니아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모두 수비진을 취하시오! 무림맹의 고수들은 흑의인들 중 지위가 높은 자를
격살하여 적의 지휘 계통을 혼란시킵시다!"
그러나 이 방법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흑의인들의 복장은 하나 같이 똑같
은데다가 그들의 호칭이 매우 괴상해서 지위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
다. 대개 강호상의 방회(幇會)에서의 지위는 방주나 회주 아래에 장로나 호법,
당주, 향주하는 식인데 반하여 흑암회의 직책 명은 정 반대였다. 가장 많은 인
원을 차지하는 최하급 무사들의 호칭이 회주였고, 다음으로 일반 무사들이 태
상장로, 그 다음 중급 무사들이 총당호법, 다음 고급 무사들이 당주, 마지막으
로 절정급의 무사들이 조장이라는 호칭을 가졌다.
이러니 사방 팔방에서 '회주 조심하시오!', '태상장로 거기가 아니라니까!',
'총당호법들은 좌측으로 진격하라!' 같은 소리에 겁을 먹고 일류 고수들이 후
퇴하는가 하면, '조장! 도와주세요!' 한 마디에 코웃음을 치며 달려들었던 일
반 고수들이 피떡이 되어 한 많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모용운지는 한 차례 발을 굴렀다.
"정녕 무서운 심계로구나! 하지만 우리는 너희의 가장 큰 약점을 알고 있다.
너희는 워낙 철저한 점조직인 데다 매일 복면을 쓰고 생활하다 보니 서로에 대
해서 너무나 모른다. 여러분! 모두 흑의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는 굳이 싸울 것 없이 적의 복면만 벗기시는데 주력하시면 됩니다!"
이 방법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적을 죽이는 것보다 적의
복면만 벗겨 내는 것이 더 힘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림맹의 절정고수들을
중심으로 무공이 낮은 흑의인들부터 복면을 벗겨 나가자 효과는 금방 나타났
다.
"공격하지 마세요! 저 회주 천삼백팔십삼호에요!"
"저는 제팔백오호 태상장로거든요! 진짜에요!"
"백칠십육호 총당호법입니다! 당주님 어디 계셔요!"
흑의인들은 크게 동요했고 그 효과는 시간이 흐를 수록 강해졌다. 물론 무림맹
의 인물들도 시치미를 떼고 흑암회의 수하들인 척 한 것은 물론이다.
결국 일장의 흉험무비했던 싸움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흑의인들은 조장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인원 파악을 하며 조직을 정리하려 했으나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한 명의 흑암회 조장이 크게 외쳤다.
"향주님이시다!"
그러자 흑의인들이 썰물 빠지듯이 갈라지며 공간을 비웠다.
과연 검은 곤룡포를 입은 면사인과 혈영이 나타났다. 그 둘의 뒤로는 열여덟
명의 검은 장포를 둘른 인물들이 호위를 서고 있었다.
'저 곤룡포를 입은 자가 그 때 보았다는 인물이 맞는가?'
흑의인들 틈에 끼어 있던 매니아가 냉휘상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면사가 어쩐지 좀 이상하군요. 보통 면사가 아니라
무슨 종이 같은데요?'
'후후. 저것은 화선지야. 운지의 면사 독점 작전이 효과가 있었군. 하지만 화
선지로 면사 대신을 하다니 역시 무서운 놈이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쟎습니까.'
'물론. 이렇게 된 이상 저 자만 제거하면 나머지 수하들은 알아서 항복할게 틀
림없어.'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향주 아니, 진짜 회주의 무공은 저로서도 처음 보
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가능성이 적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일단 부딪혀 보는 수밖에. 내게도 숨겨진
한 수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고수들에게 전음을 보내라.'
잠시 후 신호가 떨어지자 매니아와 모용운지, 오륙을 비롯한 십여 명의 정도
절정고수들이 맹렬하게 흑암회주에게 날아들었다.
혈영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십 팔 인의 빛을 막는 자들, 십팔색희(十八塞熙)여! 저들을 막아라!"
십 팔 인의 묵포인(墨袍人)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십팔색희들의 무공은 대단하여 정도의 절정고수들과 평수를 이루었다. 혈영은
십팔색희들 사이를 뚫고 흑암회주를 향해 쏘아지는 매니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 이상은 가지 못한다!"
그때, 냉휘상의 빛살처럼 빠른 도가 혈영의 정수리를 노렸다.
"너는 내 상대다!"
혈영은 쌍장을 내밀어 혈마수를 폭사시켰다. 냉휘상의 도와 혈영의 검이 번개
처럼 맞부딪치며 붉고 푸른 섬광을 토해 냈다.
"혈영, 잠시 멈춰라."
둘이 재차 격돌하려는 순간 흑암회주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매니아도 냉희상을 물러서게 했다.
흑암회주와 매니아는 서로를 지척에 두고 마주섰다.
"후후후. 흑암회의 총단까지 온 것을 환영하네. 어떤가 환영 인사치고는 너무
조촐한 거 같아 미안한데."
예의 그 기묘한 울림을 지닌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매니아는 웃으며 회주의 말을 받았다.
"하하. 분에 넘치는 환대에 이 매모(寐某)는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호오. 아직도 기가 죽지 않았군. 솔직히 나로서도 자네들이 여기까지 해낼 줄
은 몰랐네. 그토록 철저하게 기연을 막고 정도의 기반을 붕괴시켜 왔건만 아직
도 그대 같은 청년 영웅이 나타나다니 정말 놀랍네 놀라워."
"흥.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그만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어떻겠소."
"하하하. 나의 정체라. 그것이 그토록 궁금한가?"
모용운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걸 짐작하는 게 뭐 그리 어렵겠어요. 당신은 분명히 매니아의 죽은 줄 알았
던 아버지나 아니면 가장 친했던 사람 혹은 어쩌면 좌화하신 것으로 알았던 사
부 즉, 나의 조부님일 것이에요. 아무튼 매니아와 아주 가깝거나 매우 잘 아는
사람일게 분명해요!"
제 목:[공모전] 우수상 : 무림매니아 - 6 관련자료:없음 [3658]
보낸이:무림동 (k2murim1) 1999-01-12 04:01 조회:2592
그녀의 지적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단한 추리력이자 직관력인걸."
"역시 천심봉녀답군. 저렇게 똑똑할 수가."
그러나 흑암회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너는 틀렸다, 모용운지. 나는 매니아의 아버지도 아니며 사부나
친구는 더더욱 아니지. 너희들은 결코 나의 진면목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모용운지를 비롯한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때 매니아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소."
그의 목소리는 매우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흑암회주는 매니아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안광이 화선지를 뚫고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매. 니. 아. 너. 는. 그. 말. 에. 책. 임. 져. 야. 할. 것. 이. 다."
갑자기 흑암회주의 목소리가 구천에서 울부짖는 혼령들의 그것인 냥 음산하게
변했다. 매니아는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원래 나는 당신의 정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답답했소. 내게 있는 유일
한 단서라면 멸문지화를 당한 가문에서의 기억밖에 없었소. 어째서 부모님을
해치고 우리 집안을 멸문시켜야 했을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소. 바로 우리 부
모님만은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요."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흑암회주에게서 뿜어지는 안광이 빛을 더했다. 하지만
그가 풍기는 기세는 어쩐지 아까보다 약간 위축된 듯 했다.
"그렇지만 나는 거기서 또 다른 벽에 가로 막혀야만 했소. 도대체 누구일까.
내 기억력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라 부모님과 친했던 사람들과 집안에 자주
들렸던 무림인들을 모두 떠올릴 수 있었지만 한 사람도 가능성이 있는 자는 없
었소. 그러나 만약 무림인이 아니었다며? 아니 무림인이긴 했지만 정체를 감추
고 평범하게 살아가던 일반인이었다면? 그렇소. 나는 그제야 비로서야 한 명의
인물을 떠올릴 수 있었소. 하지만 확신은 가질 수 없었소. 그것은 그가 너무나
의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소. 바로 당신
의 그 목소리를 기억해 냈기 때문이오!"
흑암회주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자, 이래도 당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겠소! 굳이 내 입으로 말하기를 원하는
거요!"
매니아의 마지막 말이 오랫동안 대전에 메아리쳤다. 메아리가 사라지고 나자
장내를 숨막히는 고요가 눌렀다.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짝. 짝. 짝짝. 짝짝짝짝.
흑암회주는 천천히 박수를 쳤다.
"대단하군. 대단해. 나는 진정으로 감탄했다."
그의 손이 느리게 움직여 면사로 향했다. 마침내 화선지로 만든 면사가 걷혀졌
다.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자 그것을 알아 본 군웅들 틈에서 일대 소요가 일었다.
"저, 저럴 수가!!!"
"헉! 왕(王)서방이다!"
"비단 장수 왕서방이 흑암회주였다니!"
"믿을 수가 없다!!"
경악이 파도처럼 장내를 휩쓸었다. 심지어는 흑암회의 인원들조차 충격 어린
표정이었다. 진정 놀라운 일이었다. 무림 최대의 암중 세력을 이끌어 온 자가
어린 시절 추억 속의 비단 장수라니……
그러나 괴이한 것은 중인들 모두가 하나 같이 흑암회주를 비단 장수 왕서방
즉, 하나의 인물로 지목했다는 것이다. 이 곳에 모인 군웅들은 각기 중원의 각
지에서 태어나 자라 왔기 때문에 그들이 알고 있는 비단 장수 왕서방은 모두
다른 인물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한 명의 흑암회주가 전 중원을 상대
로 모든 비단 장수 왕서방 노릇을 했단 말인가.
"후후. 그렇게들 어리둥절할 것 없다. 본좌는 백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비단 장수 노릇으로 매일 같이 사해구주(四海九州)를 누볐으니 너희들이 알아
볼 수 있는 게 당연하다."
흑암회주의 목소리는 그토록 기묘했던 울림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사람들
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과연 고향에서 비단 사라고 목청 높이던 왕
서방의 것과 흡사함을 알 수 있었다.
비단 사리여…… 비단 사리여……
매니아는 어릴 적 추억이 산산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오."
"끔찍? 아하하하. 우리 왕씨 가문의 천년 한을 풀기 위해 이 정도 희생은 어쩔
수 없다!"
흑암회주, 비단 장수 왕서방의 목소리가 처절하게 이어졌다.
긴 무림의 역사 속에서 왕씨들은 언제나 주인공이 되고자 발버둥 쳤지만 극히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항상 조연에 머물러야 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의 음
모를 생각하게 되었다. 무적세가의 이씨들이 밝은 태양 아래 세력을 결집했다
면 왕씨들은 철저히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토록 비밀을 지키기 위해 많은 피를 흘리는 것도 서슴지 않았었는데 네가
그것을 알아내다니! 도대체 너는 누구냐!"
매니아는 약간 슬픈 눈빛으로 대답했다.
"나는…… 나의 성(姓)은 주(朱) 씨요."
"주, 주가(朱家)! 설마 네가 황실(皇室)의 후손이란 말이냐!"
"그렇소. 주원장(朱元璋) 태조께서는 본인의 먼 조상 뻘 되시오."
"그렇다면 네 이름은 설마……?!"
"나의 이름은 주인공(朱人公)이오."
또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었다. 매니아가 황가의 자손으로 주인공이었다니.
"후우. 네가 바로 주인공이었다니……"
흑암회주의 목소리가 가늘게 경련할 때였다.
쿠르르릉-
사방에서 다시 기관이 작동하며 수천 명의 병사들과 금의무복(錦衣武服)을 입
은 무인들이 쏟아졌다. 중인들은 곧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황군(皇軍)이다!"
"금의위(錦衣衛)도 있다!"
금의위들 중 선두에 선 사십대 장한이 위엄 있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금의위의 부영반 위주청이라고 한다! 황제의 명을 받들어 주공자를 돕고
사악한 무리들을 토벌하기 위해 왔으니 모두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정도의 인물들은 모두 분분히 무릎을 꿇었다. 흑암회의 인물들은 처음에는 심
하게 갈등했으나 왕서방임이 드러난 흑암회주와 위세를 떨치고 있는 황군 쪽을
번갈아 보더니 마침내 하나씩 둘씩 무기를 버렸다. 혈영만이 끝까지 흑암회주
의 곁에 머무를 뿐이었다.
"왕회주, 이제 당신의 야망은 끝났소. 순순히 항복한다면 내가 황제께 선처를
부탁드리겠소."
주인공의 말에 왕회주는 길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점차 높아지고 커지더니
광소(狂笑)로 변했고 마침내는 하나의 귀곡성(鬼哭聲)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
갔다.
갑자기 소리가 뚝 그치며 왕회주의 한 서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늘이 나를 희롱하는구나! 그러나, 수(誰)-불능(不能)-오여지금(汚余之錦)!
누가 감히 나의 비단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그의 전신에서 질 좋은 비단 같은 광채가 줄기줄기 흘러 나왔다.
"주인공! 너는 감히 나와 승부를 겨룰 자신이 있느냐?"
오만한 목소리가 주인공의 귀를 때렸다.
"얼마든지! 오늘에서야 가문의 혈채를 갚겠소!"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푸른 불꽃을 일으켰다.
모용운지는 주인공을 말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그
누구도 참견할 수 없는 둘 만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왕회주는 천천히 한 자루의 검을 꺼내 들었다. 붉은 검신(劍身)이 한없이 사이
로운 느낌을 주는 한 자루의 마검. 이 검은 무형검(武刑劍)이라는 상고시대(上
古時代)의 마병(魔兵)으로 그가 오랜 세월에 걸친 노력 끝에 입수한 것이었다.
'단 일 초다!'
주인공은 단 일 초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단 일 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것이며 왕회주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는 오직 이 일 초를 펼치기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그는 참혹했던 과거에 대한 복수를
십여 년만에 이루게 될 것이다.
만약 일이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된다면……?
그의 전신은 무형검에 의해 갈가리 찢겨지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주인공은 출수했다.
'주인공의 자세는 참으로 완벽하군.'
왕회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회주는 아직 주인공처럼 한 치의 허점도 없는 무공을 펼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무형검을 입수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의 공세에 쓰러졌을 지도 모른
다. 그러나 지금은……
왕회주는 몸을 쭈욱 폈다.
갑자기 그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솟구쳐 나와 어두운 지하대전의 천장을 꿰
뚫고 저 먼 곳까지 뻗어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 기운은 너무도 강력하고 세찬 것이라 마치 거대한 비단 수천 수만 필이 합
쳐져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장엄했다.
그 기운은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비단이 되어 주인공을 향해 쏘아져 가고 있었
다.
한 순간 주인공은 아찔했다.
저 커다란 비단이 떨어져 내리며 내 몸을 감는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나 그 순간 주인공의 입가에는 배시시 미소가 떠올랐다.
상대의 검이 비단이라면 치명적인 약점이 있을 것이다.
비단을 아무렇게나 찢으려 하면 힘들지만 그 결을 따라 가르면 너무도 쉽게 찢
어진다는 간단한 원리.
주인공이 내뻗었던 보검에서 별과 같은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 섬광은 마치 비단에 수놓아진 여러 가지 무늬들처럼 화려한 변화를 일으키
며 뻗어 가더니 비단 폭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그 섬광은 어두운 지하 공간을 밝히며, 별빛을 따라 왕회주의 몸을 꿰뚫어 버
렸다.
왕회주는 우두커니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초식은 무어라고 하나?"
주인공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소."
왕회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내가 지어도 되겠나?"
"마땅한 이름이 생각난다면 그렇게 하시오."
왕회주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하대전 천장에 뚫린 구멍 사이로 빛나는 수많은 별들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
어왔다.
왕회주는 문득 주인공을 바라보며 웃었다.
"생각이 났네."
"어떤 것이오?
"지하를…… 뚫은 별빛을…… 따라 움직인다……."
주인공은 눈을 반짝 빛냈다.
"지하철성추행(地下徹星追行)이라……."
"어떤가?"
"정말 지저분한 이름이오."
왕회주의 눈에도 번쩍하고 빛이 흘러나왔다.
"그럼 그 초식의 이름을 그것으로 안하겠나?"
주인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왕회주는 한스럽게 말했다.
"치사하다."
"어쩔 수 없소. 기껏 만든 무공에 지하철성추행이라니 절대 불가하오."
"그렇다면 이건 어떠한가?"
"무엇이오?"
"지하를…… 뚫은 별빛이…… 터질 듯이 움직인다……."
"지하철성폭행(地下徹星爆行)이라……. 당신 수준이 왜 그 모양이오."
"너무 하는군. 그럼 이건 어떠한가?"
"무엇이오?"
"천지사방에…… 별이 가득하니…… 능히 천하를 비출 것이다……."
"육합성만조천하(六合星滿照天下)라……."
"어떤가?"
"어디서 베낀 거 같아 곤란하오."
"그렇다면……"
왕회주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들의 대결을 구경하던 중인들의 눈에 지루함이 떠올랐다. 여기저기서 수군거
림이 흘러나왔다.
"역시 흑암회주의 공력은 대단하군. 아직도 안 죽고 있다니……!"
"근데 좀 짜증나지 않소이까?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으음……"
심지어는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드는 무리도 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몇몇 사람들은 심심풀이 군것질 거리를 싸 들고서 군웅들
의 틈 사이를 누비며 장사를 시작했다.
"오징어 있어요!"
"낙화생(落花生:땅콩) 있어요!"
왕회주는 초조하게 생각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뚫린 구멍 사이로 쏟아지는 별빛을 외면하고 그냥 천장만을 보았다.
천장에 빛나는 수많은 야광주들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왕회주는 문득 주인공을 바라보며 웃었다.
"생각이 났네."
"어떤 것이오?
"천지사방에…… 야광주가 가득하니…… 능히 천하를 비출 것이다……."
주인공은 눈을 반짝 빛냈다.
"육합야광주만조천하(六合夜光珠滿照天下)라……."
"어떤가?"
"정말 멋진 이름이오."
왕회주의 눈에도 번쩍하고 빛이 흘러나왔다.
"그럼 그 초식의 이름을 그것으로 하겠나?"
주인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왕회주는 다시 미소지었다.
"천하제일의 무공에 네 번만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니 역시 나는 머리가 좋
아. 그런데 왜 졌을까……"
그의 음성이 점차 미약해졌다.
그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쿵!
매니아는 길게 탄식했다.
"일세의 효웅이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다니."
* * *
무림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흑암회주가 목숨을 끊은 후 매니아는 무림맹
을 해체하고 강호에서 은퇴할 것임을 공표 했다. 수많은 무림인들이 그를 무림
영수(領袖)의 자리에 앉히려 했으나 그는 끝까지 거부했다. 당금의 황제 역시
그를 중용 하려 했으나 이 또한 고사하고 그는 모용운지, 오륙과 함께 은거했
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와 모용운지 사이에는 두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이
있었으며 어릴 적부터 특수하게 제작된 인피면구를 쓰고 다녀 다섯 모두 천하
의 준미절색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매니아 부부도 백발이 성성해질 무렵 의 어느 날 한 명의 청년이
그들을 찾아왔다. 청년은 어릴 적부터 매니아에 대한 무용담을 듣고 자라 그를
대단히 존경했다.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청년은 한가지 질문을 했다.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으셨던 비결
이 알고 싶습니다."
"비결이라……"
매니아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무림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난관을 극복할 수 없었을 것
이네. 어릴 적 무림이라면 손가락질 먼저 받아야 하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래
도 나의 애정은 식지 않았던 거야. 그게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일세."
종(終).
제 목:[공모전] 우수상 : 무림매니아 심사평. 관련자료:없음 [3659]
보낸이:무림동 (k2murim1) 1999-01-12 04:01 조회:2886
'무림매니아'에 대한 심사평입니다.
이 작품은 지난날의 팔십 년대 한국무협을 조금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패러디한
작품입니다. 때문에 그 작품자체가 당시의 무협작품들이 지녔던 전형성을 패러디
한 자체로 얻을 수 있는 장점과 단점을 다 갖추고 있어, 그 공과를 말하기는 정
말 쉽지가 않다고 봤습니다.
장점과 단점을 살펴보면, 쭉 펼쳐지는 장면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그때마다 실
소를 흘리게 하고 때론 무릎을 치게도 하지만, 그 이상 독자를 소설 안의 세계로
깊이 끌어들이지 못한다고 저는 봤습니다. 이 작품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진
행이 되고 어떻게 결말이 날지를 읽는 이가 다 알고 있는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합
니다.
-몽강호
무척 웃기는 패러디 무협. 좋은 패러디물에 필수인 야유와 독설, 그리고 애정이
잘 살아있는 글이였다. 또한 이렇게 넌센스한 글에서 빠지기 쉬운 전반적인 글의
구성이나 개연성을 잘 살려낸 수작. 단지 너무 소수의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웃고
즐길수가 있다는 것이 아쉬움이였다.
-오인현
상당히 유쾌한 패러디물입니다. 그리고 무협 패러디 물이 가지기 쉬운 무협에
대한 냉소적 색채가 훌륭히 극복되어 있습니다. 매니아의 마지막 말은 여러 문제
가 많은 무협이라는 대중 장르에 대한 애정까지도 느끼게 합니다.
아쉽다면, 패러디물은 한 장르를 바라보는 거울의 역할에 그칠 뿐이지, 그대로
그 장르의 심장부에 뛰어들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협에 대한 패러디를 뛰어넘
어 그 무협 자체의 심장부에 뛰어든 작품을 작가가 훗날 다시 써보게 되기를 바랍
니다.
-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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