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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

Darkel 2013. 5. 31.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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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들은 무엇을 해석하려 하는가?

 

2012. 12. 02.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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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가 애니메이션 자체가 아닌 에반게리온 팬이 임의로 끼워 맞춘 설정을 말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식의 비판이 빈번히 나오는 탓에, 확실히 밝히고 간다. 참고 자료와는 별개로, 이 리뷰 전체에서 취급하는 공식 설정은 다음을 말한다. 이 일련의 리뷰는 공론사견이라는 주석을 달지 않은 경우엔 절대적으로 이 공식 설정 내부의 사항만으로 진행하고 있다. 중요도를 기준으로 순서를 배치했다.

 

1. TV판, 비디오판, 극장판을 아우르는 애니메이션, 그 대본과 스토리 보드.

 

2. 안노와 주요 제작진들의 인터뷰 자료. DVD 수록 제작자 코멘터리 포함.

3. 공식적으로 발간된 보충 설명 자료.

4. 게임 내의 설정 관련 텍스트. , 1-3번 내용과 반하는 내용은 포함하지 않는다.

 

5. 코믹스 내용 중 1-4번 설정과 배치되지 않는 설정만 참고 자료 정도로 사용.

 

이 이외의 자료는 특별한 경우 언급하되 반드시 주석을 달 것이며, 따라서 본 리뷰에 기술하는 내용은 작품과 제작진의 공식 언급 안에서 분명히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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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필두로 한 일련의 해석 리뷰는 개인적인 감상을 위해 적었던 글에서 좀 더 살을 보탠 형식으로, 공개형 커뮤니티에 올리기에 앞서 고민을 제법 많이 했다. 리뷰 초반은 명시적인 작품 해석에서 후반으로 가면서 사견과 공론이 덧붙여진 작품 의미의 해석 쪽으로 흐르게 될 것이다. 시작은 물론 진행 과정에서 이러한 태도에 대한 비난 여론이 많이 일겠지만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정식적으로 이 리뷰를 시작하고자 한다. 관심을 가지려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기 때문에 그 외부의 사람들은 고려하지 않고 쓴다. 때문에 전혀 요약적이지도, 어쩌면 읽기 쉬운 글도 아니겠지만, 넓은 인터넷 공간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겨줬으면 한다. 또 긴 글이 될 것 같으므로 개인의 편의상 반말 어투로 진행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양해를 구한다. 참고 자료는 에반게리온 TV판, DVD 제작자 코멘터리, 게임(신에바 2), 코믹스, 구극장판,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의 꿈>,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 그 외 루리웹을 포함한 인터넷 유저들의 다양한 의견이다.

피카소는 선을 하나 그었을 뿐인데….는 내가 개인적으로 예술 작품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취하려는 입장이다. , 작품을 처음 감상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작자의 의도를 배제한 채 개인적인 감상에 의존하여 즐기기만 하자는 취지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작품에 드러나는 작자의 의도나 그것의 설정, 좀 더 깊이 잠겼을 때 느낄 수 있는 상징적 장치들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일차적으로 작품을 즐긴 다음엔, 각각의 구성 요소가 가지는 의미와 그것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알 필요도 있다. 종종 그 과정에 있어 작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찾아내는 것에 병적인 포비아를 가진 사람도 있지만, 작품 내에서 의미를 찾아 상호 소통하는 것은 사실 누군가의 의도 개입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제쳐두고, 작자가 의도하지 않은 작품 요소의 해석은 무의미한 짓이라 하더라도, 작자가 그 선을 명확하게 해 두지 않았다면 그것을 수용자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부터 언급하고자 하는 작품 에반게리온은, 작자가 나서서 말하지 않아도 인물의 대사와 표정, 행위 등에 여러 가지 설정이 아주 노련하게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으며, 때문에 그것을 보다 구체화, 명시화할 필요를 느꼈다.

에바의 헤비급 팬들에게조차 의미 없는 저질 장면으로 치부되는 '축하해' 장면

필요 이상의 분석적 감상은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이 일의 필요성을 느낀 것은 최근 커뮤니티 사이에서 안노 감독은 아무 것도 의도하지 않았다.’, ‘에반게리온은 있어 보이는 설정으로 도배된 공허한 작품일 뿐이다.’, ‘오타쿠를 엿 먹이기 위한 작품일 뿐이다.’, ‘TV판 최종 부분은 재정 부족이 일구어낸 쓰레기일 뿐이다.’와 같은 편향적인 발언들이 많은 공감대를 사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기본적인 작품 이해도, 혹은 그것에 대한 일정 부분의 노력도 없는 상태에서 나온 경솔한 발언들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아니다라 뚝심 있게 말할 필요성을 느꼈다. 과연 에반게리온의 설정과 그것이 작품 속에 녹아난 방식을 이해하고 나서도 저런 말들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을까. 본인은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라 본다. 에반게리온은 그 시각적 차이에서 입장의 분열은 일어날 수 있을지언정,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말하기 방식을 볼 때 오타쿠 양산 목적의 설정 도배 작품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분명한 오해이다. 그것을 납득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다소 두서는 없더라도 에반게리온의 기본적인, 또 심층적인 설정과, 그것이 애니메이션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으며, 무엇이 에반게리온을 훌륭한 작품으로 만든 것인지 찬찬히 살피고자 한다. 이 글의 최종적인 목적은 생각하면 지는 거다와 같은 감상적 편향이 이 작품은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개인적 편향으로 이어진 사람들에 대해 선사하는 가능성의 환기이며, 혹자가 커뮤니티에서 에반게리온은 공허한 작품이다라 주장할 때 이 글을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거다.란 증거 자료를 만드는 것이다. 본 글은 기본적으로 TV판과 구극장판을 한 번이라도 정주행한 사람을 타깃으로 한다. 또 그 감상의 깊이는 최대한 낮게 잡았다. 신극장판은 당분간 언급하지 않겠다.

신지는 왜 하필 아스카의 '목'을 졸라야 했을까? 그러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었을까?

 

물론 우리가 이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며 어쩌면 감독이 일부러 잃어버린 고리부분을 설정해 놓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작품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유효하다. 그러기 위해 서로를 사랑하는 인간이며, 미리 말하지만 그것이 에반게리온의 주제이기도 하다. 미지의 존재를 알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로 설정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며 또한 온당 하여야 할 일이기도 하니까.

[에반게리온] 2. 퍼스트 임팩트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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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퍼스트 임팩트란? 

 

퍼스트 임팩트, 세컨드 임팩트, 서드 임팩트...‘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의 얼개를 잡아 나갈 때 가장 첫 번째 고리로 언급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임팩트이다. 작품 내에서 통용되는 의미는 인간 외적인 무언가에 의해 나타나는 재앙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는 어떠할까.

 

퍼스트 임팩트는 자이언트 임팩트라고 불리기도 하며, 그것에 대해서는 다소 나누어진 의견이 있다. 공룡이 멸망한 시기를 말한다는 소문도 있고 노아의 방주 시기일 거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에반게리온 세계관에서 그 해답은 이미 공식 설정으로 확실히 나온 상태이다. 바로 지구에 함께 떨어진 검은 달하얀 달이다.

태초에 1시조 민족이 있었다. 그들은 쉽게 말하면 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로, 이 광활한 우주에 생명의 씨앗을 퍼트린 종족으로 우리 인간, 나아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의 머나먼 조상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씨앗으로 아담이 잠들어있는 하얀 달,릴리스가 잠들어있는 검은 달이 있다. 그들은 단일 개체로서 완전한 존재이지만 그 특성은 다소 다르다. 예를 들어서 아담의 경우 생명의 열매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강인한 생명과 체력을 관장하는 것이다. 한편 릴리스의 경우 지혜의 열매를 가지고 있는데 때문에 릴리스와 그 자손은 현명한 지혜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 각각의 씨앗은 우주 전역으로 흩어져 에 뿌리를 내려 생명을 싹트게 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1행성 1씨앗원칙이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 지구에 아담의 씨앗이 왔다면 지구는 전적으로 아담 베이스의 생명체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메커니즘인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우연히 이 지구에, 착오로 인한 것인지 두 개의 씨앗이 동시에 도착한다. 정확히는 아담이 먼저, 릴리스는 그 후에.

검은 달은 지금 네르프의 위치에 있는 지오 프론트를 만들며 추락한다.

, 다음과 같다. 지구라는 행성에 먼저 아담이 잠든 생명의 캐리어, ‘하얀 달이 떨어진다. 다시 말해 아담 베이스의 생명체가 지구의 조상이 될 자격 증명이 된 셈이다. 허나 그 즈음 릴리스의 검은 달이 또 지구에 떨어지고 만다. 하얀 달의 경우에는 현재의 남극 부근으로, 검은 달의 경우에는 역시 극지방 부근에 떨어졌지만 지각 변동의 결과로 현재 일본(에반게리온의 작중 배경)으로 위치를 옮긴 상태이다. 검은 달은 지구로 추락하면서 현재의 일본 지역에 지오 프론트라고 불리는 거대한 반구 형태의 동공을 만들고, 90%의 덩어리는 다시 하늘로 튕겨 올라가 지금의 이 된다. 우리가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달은 하얗지만 그것은 릴리스의 생명 캐리어인 검은 달인 것이다.(실제로 학계의 달에 관한 가설 중 인류 생명의 씨앗이 달에서 왔다는 가설이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발상이다.)

검은 달을 배경으로 떠 있는 롱기누스의 창

어쨌든 검은 달의 릴리스는 지구에 뿌리를 내리고 만다. 아담이 먼저 도착한 지구인데 어째서 그들이 먼저 선수를 쳤을까? 그것은 바로 롱기누스의 창때문이다. 롱기누스의 창은 시조민족이 캐리어()와 함께 동봉하여 우주에 뿌리는 보조 도구로, 겉보기엔 단순한 모양이지만 그들 역시 아담과 릴리스와 같이 생명체이다. 달에 잠든 아담과 릴리스 등은 시조 민족의 자손이 맞지만 그들의 강력한 힘을 제어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해, 언제나 그들의 행동을 멈출 수 있는 컨트롤 옵션으로 존재하는 것이 이 창이다. 그래서 롱기누스의 창은 기본적으로 씨앗과 세트로 운반된다. 그러나 릴리스의 검은 달이 지구에 다소 잘못된 방식으로 추락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아담의 하얀 달은 남극에 정상적으로 도착해 롱기누스의 창과 함께 잠든 상태로 곧 있을 아담 베이스 생명체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릴리스의 검은 달이 지구로 떨어지더니 그 충격파로 릴리스 세트의 롱기누스의 창까지 소실되고 만다. , 릴리스는 그들을 제어할 도구를 지구 너머로 흘렸으며, 때문에 아담보다 먼저 릴리스 베이스 생명체를 퍼트리고 만 것이다. 그 생명체가 바로 우리, 당신,인간이다. 불완전한 육체를 가졌지만 지혜를 지닌 종족 말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다.

결국 원래 지구에 정상적으로 뿌리를 내렸어야 할 정당한 계승자는 아담이며, 우리 인간의 조상 릴리스는 잘못된 방식으로 지구에 추락(퍼스트 임팩트)해 주제넘게 두 팔을 뻗은 녀석들이다. 그것이 에반게리온이 말하는 인간의 원죄이다.

 

[에반게리온] 3. 세컨드 임팩트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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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컨드 임팩트란?

 

이상([에반게리온] 2. 퍼스트 임팩트란?)의 이야기숨겨진 사해 문서라는 수수께끼의 고서 안에 수록된 글이다. 그것의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이에 대해서 다음에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일단 프리메이슨정도로 이해하면 괜찮은, 범세계적 비밀 조직인 '제레'의 의장 킬의 손 안에 들어있다. 그 안에는 퍼스트 임팩트의 전말이 있었고, 조직이 우연히 획득한 그 문서에 집착하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일본의 지오 프론트에 잠든 의문의 거인인 릴리스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아마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그것은 여태 초국가적인 비밀에 붙여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거인은 거인일 뿐, 당시의 제레 역시 이 이야기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는데, 주목할 만한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남극에서 아담의 존재가 실제로 발견된 것이다.

남극에서 부활한 아담의 모습. 운석 충돌 따위로 유폐된 세컨드 임팩트의 전말이다.

지오 프론트에 릴리스가 있는 것처럼, 남극에도 지오 프론트와 꼭 닮은 공간이 있고, 거기에도 하얀 거인이 있었다. 모두 문서에 나온 내용과 일치했으며, 자연스레 제레는 사해문서의 내용과 같이 일본 쪽이 릴리스, 남극 쪽이 아담이라고 받아들임은 물론 나아가 사해문서의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이에 제레의 출자를 바탕으로 카츠라기 조사대가 그 확실한 진위 확인을 위해 비밀스럽게 남극으로 출발(로쿠분기 겐도우도 동행), 마침내 롱기누스의 창과 함께 하얀 달 안에 잠든 아담을 육안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 때,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조사대의 전멸로 인해 여전히 불명이지만, 아담이 가진 생명의 열매(후에 언급하겠지만 이것을 인간은 S2 기관이라고 부른다.)가 폭주하여 말 그대로 대폭발이 일어난다.

세컨드 임팩트의 배후에는 제레, 그 의장 킬이 있었다.

 

이것은 정부에 의해 거대한 운석 충돌 사건으로 은폐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었으며, 때문에 이를 세컨드 임팩트라고 한다. 이로 인해 지구의 인류는 그 수가 절반 정도 줄었고, 해수면은 상승하며, 일본은 계절이 여름뿐인 나라가 되었다. 지구적으로는 빈곤과 내전 등의 여러 재앙을 낳은 끔찍한 고난이 되었지만, 얼개로만 볼 때 세컨드 임팩트의 의미는 결국 아담의 폭발이고, 제레에게 중요한 점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세컨드 임팩트 발발 당시의 모습.

문제의 사해 문서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있었는지는 제레만 알고 있었겠지만, 그것은 결국 제레의 의해 계획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사대의 행위로 아담이 깨어난 것이며, 롱기누스의 창으로 그것을 다시 저지하려고 했지만 어떤 경위로 인해 아담이 자폭’, ‘롱기누스의 창만 회수 가능했으며 임팩트로 인해 아담의 육체는 산산 조각이 나고, ‘그의 영혼또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이 모든 설정은 제레와 그 하부 조직인 게히른에 의해 활용되며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볼 때 아마도 카츠라기 조사대의 희생은 제레/게히른에 의해 계획된 시나리오의 일부였을 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겐도우 일행이 세컨드 임팩트 직전(하루 전이었다.)에 일본으로 돌아갔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의문의 조직 제레. 아마 현실 세계의 프리메이슨 정도?

그렇다면 왜 그런 짓을 해야 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제레는 자신들이 지구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거짓된 계승자라는 걸 알았으며, 정당한 계승자인 아담이 남극에 떡하니 잠들어 있다면 언젠가 그들로 인하여 인간이 파멸할 것임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멸망을 막기 위해 릴리스의 자손으로서 먼저 손을 써야 했을 것이고, 세컨드 임팩트는 그것을 위한 인간의 몸부림이었다. 물론, 그로 인하여 15년 후 시작되는 (구체적으로 아담의 자손이라 할 수 있는)사도들의 연이은 습격 역시 자동적으로 예정된 일이지만, 최소한 분명한 건 세컨드 임팩트 당시 아담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어쨌든 인간은 언젠가 분명히 부활한 아담에 의해 멸했을 것이다.(-라고 제레는 생각했다 :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신지의 어머니이자 겐도우의 아내, 또 레이의 전신, 이카리 유이!

이 시기까지는 제레도, 겐도우가 속한 게히른도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한 집단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제레의 생각은 변하게 되는데, 그것을 가장 먼저 촉발시킨 것은 제레 유력 멤버의 영리한 자제, 다름 아닌 이카리 유이로 보인다.

[에반게리온] 4. 인류 보완 계획 : 오리지널 타입/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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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류 보완 계획 : 오리지널 타입

 

폭발로 인해 태아 수준으로 퇴화된 아담. 카지가 겐도우에게 이것을 몰래 넘겼다.

의도된 세컨드 임팩트를 통해 인간(정확히는 제레와 게히른)은 아담을 주웠다. 그들은 멸망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인간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아담이었다. 제레와 그 수행 조직인 게히른(후의 네르프)은 그 아담을 이용해 본격적인 E-계획, 즉 에반게리온 건조에 착수한다. 이 시기의 에반게리온은 분명히 아담 폭발로 인해 예상되는 차후 사도의 침략(통칭 서드 임팩트)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결론적으로는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단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제레의 3대 계획이 E-계획, 아담 계획, 인류 보완 계획인데 이 시기에는 에반게리온을 건조하는 E-계획과 샘플 아담을 목적에 맞게 활용(에반게리온은 기본적으로 아담의 복제이다.)하는 아담 계획만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사해 문서는 실존하는 유물이다. (당연히 그 내용은 다르겠지만….)

거짓된 계승자 릴리스의 후손인 인간이, 본래 계승자인 아담을 밀어내고, 그에 대한 후폭풍으로 반드시 응징을 맞으리라-본래 제레의 인물들은 그런 위협에서 인류를 지키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지만 여기서 시각의 변화가 일어난다. 어차피 우리는 죄인이고, (사해 문서에 따르면 대략 십여 종류의)사도들의 침략을 막아야 살 수 있는데, 우리가 정말 그 정도의 힘을 가진 것이 맞다면, 차라리 신을 흉내 내서 좀 더 발전적인 일을 도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질문의 시작이었다.

초호기는 유일하게 릴리스를 바탕으로 제작된 에반게리온이다. 그런데 어째서?

쉽게 말하면 이렇다. 거짓된 계승자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아예 인간을 지구의 정당한 계승자로 못 박아 버리자는 것이다. 에반게리온은 본래 아담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것이지만, 두 번째 제작물인 초호기는 예외적(이후 모든 에반게리온은 역시 아담 베이스.)으로 지오 프론트 내 터미널 도그마에 위치한 릴리스를 바탕으로 만드는데, 인간의 조상인 릴리스를 바탕으로 한 에반게리온을 이용하면, 인류가 현재의 불완전한 형태가 아닌 보다 더 완전한 형태의 단일 개체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에반게리온 초호기는 새롭게 태어날 인류의 육체 그 자체인 것이다. 릴리스 베이스의 에바를 건조, 그것으로 완전성을 지닌 릴리스의 후손-나아가 새로운 릴리스 그 자체-으로 새롭게 태어나자는 것.(이것은 차후 밝히겠지만 제레의 초기 인류 보완 계획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것이 오리지널 인류 보완 계획의 의미이며 그것을 가장 처음 몸소 실현해 인류 단일화의 총대를 멘 사람이 이카리 유이였다.

부모에 이어 제레 유력 멤버가 된 이카리 유이.

인류 보완 계획은 직접적으로는 겐도우가 처음 발안한 계획이 맞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계획이 실은 유이의 머리에서 착상된 것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분명 인류 보완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하고, 그것을 가장 먼저 실천에 옮긴 사람은 유이이며, 유이의 사후 겐도우의 인류 보완 계획이 제레에게 정식으로 허용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유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카리 유이, 따뜻한 어머니 이미지가 워낙 강하지만 그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유이는 교토 대학 출신으로 후에 로쿠분기 겐도우와 결혼하는 신지의 어머니 되는 사람이다. 그녀의 최후(?)는 다들 알다시피 초호기의 실험 중 그 코어로 빨려 들어간 것인데, 그것이 사고인지 의도적인 것인지는 좀 더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유이의 소실을 겐도우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별개의 일이고, 유이는 분명히 초호기의 코어에 흡수되는 것이 죽음이 아닌 영원에 이르는 길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또 그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스스로 코어 실험에 임했다.

그녀가 창안한 보완 계획에 따르면 새로 태어나는 릴리스의 영혼은 자신이, 그 육체의 운용은 아들인 신지가 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이카리 겐도우가 신지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유치한 악감정을 나타내는 것-코믹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지가 유이를 혼자서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것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겐도우…지, 진심이야?

과연 유이는 나이에 비해 과학적인 지식은 물론 철학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월등(?)한 시각을 가졌던 여인인데, 그녀의 인간인간의 미래에 대한 생각은 그녀가 죽기 얼마 전, 친애하는 교수인 후유츠키와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후유츠키 "사람이 신을 흉내 내서 아담을 만든다. 이것이 진정한 목적인가?"

유이 ", 에바는 무한히 살아갈 수 있죠.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의 마음과 함께요.

설령 50억 년이 지나 이 지구도, 달도, 태양도 모두 없어져도 남아요.

단 혼자서라도 살아갈 수 있어요. 아주 쓸쓸하겠지만, 살아갈 수 있다면…."

"안녕히 계세요, 엄마."

삶은 괴롭다. 힘들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유이의 발언은 쓸쓸함보다 살아갈 수 있음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에반게리온의 표면적이자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이카리 유이는 그 사상을 당돌하면서도 가장 성실하게 표현하는 캐릭터이다. 다만 인간의 본연적인 외로움을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유이는 인류의 단일화라는 특이한 방법을 모색했다는 건데, 그것이 유이가 처음에 지휘한 인류 보완 계획의 요지이다. 인간을 지금과 같은 군집 체계에서 사도와 같은 단일 개체로 진화시켜 근원적인 불완전성을 해결하고 더 나은 인류로 만들자는 것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 원대한 계획은 작품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녀의 사랑하는 아들에 의하여 거절된다.

 

인류 보완 계획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결정적인 이유는 각각의 입장에 따라 그 동기도, 그 방법도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것을 오리지널 타입이라고 칭한 건 후에 실질적으로 인류 보완 계획이 발동되었을 때의 형태는 겐도우와 제레에 따라 또 다양한 방식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제레는 별개의 꿈을 꾸고 있었고, (어쩌면 그녀 스스로에겐 예정된 일이었을)유이의 소실이 겐도우에게도 미묘하게 다른 방식의 인류 보완 계획을 꿈꾸게 만든 것이다.

[에반게리온] 5. 인류 보완 계획 : 이카리 겐도우 타입/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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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류 보완 계획 : 이카리 겐도우 타입 

 

유이가 죽고 나서 생각을 지탱할 힘을 잃은 겐도우가, 인류 보완 계획이 본래 지니는 '최소한의 개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유이를 이어 그녀의 사상을 받쳐 주는 후유츠키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겐도우 옆에서 제법 용감한 의사 표현을 꽤나 했다.) 잠깐 TV판 12화의 한 장면을 보고 가자.

후유츠키 "어떠한 생명의 존재도 허락치 않는 죽음의 세계, 남극. 아니, 지옥이라고 해야 하나?"

겐도우 "그러나 우리 인류는 여기 서 있네. 생물로, 산 채로 말이네."

후유츠키 "과학의 힘으로 지켜져 있으니까 말이네."

겐도우 "그 과학이 바로 인간의 힘이다."

후유츠키 "그 오만이 15년 전의 세컨드 임팩트를 일으킨 거네.

그 결과가 이거지. 벌 치고는 너무 무시무시해. 이건 죽음의 바다 그 자체 아닌가."

겐도우 "그렇지만 이것이야 말로 원죄의 더러움이 없는 정화된 세계이다."

후유츠키 "난 죄 투성이가 되어도 인간이 살아 있는 세계가 되길 바라네."

여기서 이것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마지막 후유츠키의 대사가 제레가 원하는 인류 보완 계획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가장 중요한 대립 기준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초호기 속의 이카리 유이의 생각 그 자체이기도 하다.

본론으로 가서, 그렇다면 유이의 소실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카리 겐도우의 생각을 바꾸게 한 것일까? 이를 위해 우리는 이카리 겐도우의 캐릭터를 잠깐 살필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해선 다음에 더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지만 그의 인류 보완 계획을 알기 위해서는 몰라선 안 되는 설정이니까.

이카리 겐도우, 본명은 로쿠분기 겐도우로 유이의 남편이자 신지의 아버지(최소한 생물학적으로는) 되는 사람이다. 작품 내내 그는 시크한 태도로 일관하여 냉철한 인간상을 보이고 있지만, 그 드러나는 방식이 다를 뿐 누가 부자 관계 아니랄까봐 겐도와 신지는 아주 비슷하다. 특히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점에서 말이다.(유이의 소실 뒤 겐도우가 마음을 여는 유일한 상대가 만들어진 인형인 아야나미 레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라.) 단일한 생명체로 환원한다는 것은 유이의 경우 인간의 청사진을 제시한다는 취지였지만 겐도우의 경우 그저 타인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차원이었다. 결과론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의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유이의 생전에는 그 의견 대립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 같지 않지만, 유이가 초호기에 흡수되고 나서 인류 보완 계획이 겐도의 손에 들려 있었을 때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겐도우가 인류 보완 계획을 더러 부족한 마음의 보완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의 인격적 하자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겐도우가 발안한 인류 보완 계획! 벌써 17차 중간 보고서.

어쨌든 유이의 소실 후, 겐도우는 본격적으로 인류 보완 계획을 명시화하여 제레에 제출한다. 그 내용은 앞서 오리지널 타입에서 본 것과 같은 형태로, 집단적 존재로서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인간을 완전한 형태로 만들자는 것으로, 사도들을 무찌르는 것은 목적에서 전제 조건으로 바뀌게 된다. 제레의 생각은 겐도우의 것과 조금 달랐지만 전체적으로는 같은 맥락(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승낙했다.

후유츠키도 분명히 유이를 '사랑'했다.

그러나 겐도우가 이것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시기적으로 볼 때 유이의 죽음이 분명하며, 이를 통해 겐도우의 진정한 목적은 에바 초호기 안에 있는 이카리 유이의 영혼과 재회하여 그녀와 융합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오리지널 타입의 보완 계획과 같이 완전한 릴리스가 되자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제레와 같이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릴리스를 봉인하여 속죄 의식을 치르자는 것도 아닌, 아주 개인적인 방향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처음에 겐도우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후유츠키조차 전력을 다해 겐도우의 계획에 참여한 것도, 그 또한 이카리 유이에 대하여 보통이 아닌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레, 애초에 겐도우를 고용한 것 자체가 판단 미스였다.

물론 인류 보완 계획이 저런 개인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레가 알면 안 되었다. 하지만 계획 실행을 위해 초국적 집단인 제레의 힘과 경제력은 반드시 필요했고, 때문에 겐도우가 발안한 인류 보완 계획은 제레의 입맛에 맞는 버전이었다. 동시에 이것이 후에 겐도우와 제레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제레에게 제시한, 또 제레가 원하는 보완 계획은 어차피 미래가 없는 인류가, 속죄 활동을 통해 스스로 멸망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사도의 내습으로 멸망할 운명이지만 그런 타의적인 멸망이 아니라 스스로 명예롭게그 운명을 택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는 새로 태어나 온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제레는 생각하기 때문이다.(제레의 생각에 대해서는 곧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인간, 그 이상이라 함은….

하지만 실제 겐도우의 보완 계획은 달랐다. 우선 짚어 둘 것은, 그의 목적은 이카리 유이와의 영혼과 동등한 위치에서 융합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한데, 하나는 유이가 있는 초호기를 중심으로 임팩트가 발발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동등한 위치에 있기 위해서 자신이 단순한 인간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슬프게도, 그에게 있어 유이의 사랑을 듬뿍 받는 신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그 외엔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참 위험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조건을 달고 나타난 그의 보완 계획을 쉽게 말하자면 아담과 릴리스의 융합이라 할 수 있다. 재생된 아담의 육체를 자신의 몸 안에 심고, 그것을 릴리스의 영혼을 가진 레이 안에 넣은 후, 레이와 함께 릴리스 안으로 간다. 그렇게 하면 릴리스의 육체와 유이의 영혼이 담긴 초호기 안에서, 자신은 아담의 이름을 가진 채로 유이와 함께 인류의 신생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었다. , 간단히 말해서 겐도우는 새로운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를 그 자신과 유이에 대입하고 싶었던 것이었다.(미리 말하자면 그 계획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레이에 의해 거부된다. 유이와 겐도우의 미묘하게 다른 두 계획이 각각 신지와 레이에게 거부된 것을 상기해 보자.)

제레의 의장 킬 로렌츠. 그가 원하는 인류 보완 계획이란 무엇인가?

아무튼 제레의 입장(‘진정한 릴리스로의 진화가 아닌 아담의 정당한 재래를 통한 속죄 의식을 행하고자 하는)에서 보면 이런 방식은 겐도우가 스스로 신이 되겠다는 의지 표현을 하는 것과 같으며, 순수한 속죄와 인류 재생을 원하는 제레 입장에서 그런 더러운 처사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레는 또 이것과 별개의 인류 보완 계획을 희망했던 것이다.

[에반게리온] 6. 인류 보완 계획 : 제레 타입 A/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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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류 보완 계획 : 제레 타입 A

 

대충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어째서 인류 보완 계획이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었나, 알 수 있었을 테다. 개념 자체도 생소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진행 과정, 또 예상 결과가 하도 다양해 누구는 이걸 말하고, 누구는 저걸 말하면 그것이 서로 얽혀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는 설명이 되기 쉽다. 지금까지 총 두 가지의 보완 계획, 즉 완전한 릴리스가 되어 더 나은 인류가 되자는 유이 버전의 오리지널 보완 계획, 유이를 만나겠다는 목적 하에 스스로를 아담에 대입해 겐도우=아담, 유이=릴리스라는 새로운 창세기를 구상하는 겐도우 버전의 보완 계획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에바의 가장 거대한 흑막, 제레가 원하는 인류 보완 계획이란?

하지만 겐도우가 제레의 지원을 받기 위해 제레에게 제출한 인류 보완 계획의 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제레의 시선은 이것들과 또 다르다. 제레가 원하는 인류 보완 계획은 분할 개체군인 인간을 단일 개체로 융합, 완전한 존재로 만든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보완 계획과 일치하지만 아담에게 릴리스의 후손으로서 스스로 속죄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다. , 쉽게 말해 제레의 주장은 다 같이 죽긴 죽되 다른 사도에 의해서가 아닌 우리 스스로 죽음을 택하여 자존심도 지키고 재생의 기회도 얻자는 것이다. 이 경우 지구를 다스리는 생명체는 원래와 같이 아담이 되며, 속죄하여 정화된 인간은 사멸 후에 리린이 아닌 그들의 자손으로 부활한다는 식이다.(그 메커니즘은 불명이지만 제레는 어쨌든 그렇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리린의 조상, 릴리스와 그 가슴에 꽂힌 롱기누스의 창

그런데 제레의 보완 계획이 겐도우의 보완 계획과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다른 것(겐도우의 계획은 릴리스를 중심으로 우주의 이치를 거슬러 인류의 진화를 꾀하는 것, 제레의 경우 릴리스를 희생양으로 삼아 인류 전체가 우주의 이치에 맞게 사멸 및 재생하는 것.)으로 인해 제레의 계획에는 변화가 많이 생긴다. 에바를 움직이는 겐도우가 본인의 의도 관철을 위해 소위 말하는 시나리오와 다른 짓을 하도 많이 하는 바람에, 제레는 늘 울며 겨자 먹기로 계획 수정을 가해야 했던 것이다.(제레가 엔드 오브 에바에서 네르프에게 그런 잔혹한 공격을 한 이유,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갈 것도 같다.) 그러니 사건의 흐름에 따라 제레의 인류 보완 계획이 어떤 형태를 띠는지 설명하도록 하겠다. 총 세 가지 루트가 있다. 우선 처음엔 루트 A, 릴리스+롱기누스의 창 조합 루트이다.(이 명칭은 본인이 편의상 붙인 것이다.)

의식은 이 세피로트(세피로스)의 나무를 소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류가 아담을 멋대로 파괴한 후, 연이은 사도들의 내습으로 서드 임팩트가 발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비극을 막기 위해 제레와 네르프가 에바를 건조해 손을 쓰기로 하고, 나아가 그들은 스스로 서드 임팩트를 일으키는 인류 보완 계획을 창안한다. 제레는 이 때, 내습하는 사도들을 모두 무찌른 후에, 릴리스+롱기누스의 창 조합으로 보완 의식을 시행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서드 임팩트를 위한 <의식>이다. 양산기는 도구일 뿐.

저런 조합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서드 임팩트를 부르기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로, 일정한 수의 희생양-에반게리온 기체들-과 릴리스, 그리고 롱기누스의 창(릴리스 세트의 창은 퍼스트 임팩트 때 소실, 그래서 아담 세트의 창을 대신 쓰고 있다.)을 준비하면 세피로트의 나무(오프닝 초반에 나오는 그 이상한 문양을 이르는 것이다.)가 소환되어 릴리스를 통한 속죄 의식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제레에 의하면 사해 문서의 매뉴얼에 포함된 설정으로, 엔드 오브 에바의 그 기괴한 의식 장면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 사람들 손에 인류의 존망이 달려 있다

그런데 잠깐, 우리가 여기서 짚고 갈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 겐도우도, 제레도 원래의 목표는 보완(나쁘게 말하면 지금의 인류 멸망)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제레가 집착하는 사해 문서를 생각해 보자. 거기엔 어떻게 쓰여 있었을까? 아마 퍼스트 임팩트의 설명, 그리고 세컨드 임팩트의 예언(사실 인간의 선택권이 있었기 때문에 벌써 엉키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서드 임팩트에 대한 것일 테다. 여기서 서드 임팩트는, ‘사도에 의한임팩트를 말한다. , 에반게리온을 사용해 그것을 다 막으면,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생기냐에 대해선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인류 보완 계획이 도덕적 결함 없이 납득될 수 있기 위한 첫 번째 전제는 어쨌든 서드 임팩트는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며, 그래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손을 써야 해!’라는 논리가 가능하다. 제레는 이에 대해 우리는 더러운 종족이기 때문에 어쨌든 신의 증오를 사기 마련이며 그래서 죽어야 해. 세상은 반드시 멸망한다.’라는 뉘앙스를 계속해서 풍긴다. 감상자 입장에서는 마침 이 시기가 각 캐릭터들의 클라이맥스가 고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제레의 이런 생각(변명)에 대해 이견을 보일 여유가 없지만, 사실 에반게리온 전체에 내재한 인류 종말론의 이미지는 결국 순전히 제레와 네르프 스스로(보다 더 확실히 말하면 그들의 미지에 대한 공포심) 만든 것이다.

레이가 롱기누스의 창을 뽑아 들고 나왔다.

자신의 조상 아담을 위해 존재하는 롱기누스의 창에 맞아 죽다.

, 다시 본론으로 가서, 사도를 무찌르는 것은 세 가지 타입의 보완 계획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이기에 초반엔 겐도우와 제레 사이에 별 마찰이 없었지만 본격적으로 다툼이 시작되는 애니메이션 후반부에서, 드디어 겐도우가 일을 벌이고 만다. 22화 중, 우주에 있는 사도를 무찔러야 한다는 것을 핑계로, 릴리스를 속박하고 있던 롱기누스의 창을 뽑아 달로 던져 버린 것이다. 겐도우 입장에서는 사도를 무찔러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인 동시에, 릴리스를 제물로 삼아 아담에게 속죄하는 의미의 서드 임팩트를 일으키려는 제레의 계획을 정면으로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수였다. 이제 제레는 센트럴 도그마의 릴리스와 롱기누스의 창을 조합하여, 다른 희생양 에반게리온과 함께 의식을 행할 수 없게 되었다. 제레는 이 일로 겐도우를 더러운 배신자로 낙인을 찍고, 궤도를 수정한다.

신지 "피프스 칠드런? 네가…저…나기사 군?"

카오루 "카오루, 라고 불러도 돼. 이카리 군."

그 새로운 계획 루트 B를 위한 중심인물이 TV판 24화에서 처음 등장한다. 바로 인간이 만든 사도, 타브리스(자유 의지의 천사-라는 의미), 다른 이름으로는 나기사 카오루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분명 사도를 통해 서드 임팩트를 일으키겠다는 것은 네르프와 제레의 기본 입장에 전면적으로 위배되는 것인데, 카오루를 통해 제레는 대체 무엇을 하고자 했던 것인가?

[에반게리온] 7. 인류 보완 계획 : 제레 타입 B, C/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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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류 보완 계획 : 제레 타입 B, C

 

간단하게 맥락만 짚었는데도 인류 보완 계획이 수행자와 절차에 따라 벌써 총 다섯 가지로 나뉘고 있다.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하고자 노력을 해도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작업인데, 이 개념이 에반게리온 팬들의 머리를 얼마나 괴롭혔을까, 알 만 하다.

시작하기 전에 잠깐 재미로 밝히자면 보완 계획 : 제레 타입 B타브리스를 이용한 서드 임팩트 발발은 제레의 입장에서도 매우 즉흥적인 대안이었지만, 그것은 제작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애니메이션의 제작 방식이라 하면 콘티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기획서, 기획서를 바탕으로 한 각본과 최종 결과물의 순서가 있는데, 나기사 카오루라는 소년은 기획서 단계까지만 해도 사도가 아니었고, 다만 그가 데리고 온 고양이가 사도라는 설정이었다.(본래 22화로 배정될 예정이었던, 고양이와 전학생이란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회귀하여, 앞서 언급한 대로 사도를 통한 서드 임팩트는 모두가 막아야 하는 시나리오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레가 카오루라는 카드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나기사 카오루는 제레가 아담을 활용하여 인공으로 제작한 사도로, 카오루=아담의 영혼을 담은 그릇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어긋남이 없다.(카오루라는 그릇이 어떤 것인지는 차후 얘기하도록 하자.) , 사도이기 이전에 카오루는 아담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제레의 의지를 아담에게 표현해 그로 하여금 임팩트를 일으키게 한다면, 제레 입장에서는 인류의 속죄가 가능할 거란 판단이었다.

겐도우 "우리들에게 남겨진 시간은 얼마 없다.

하지만, 우리의 소망을 막는 롱기누스의 창 이제 없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마지막 사도가 나타날 것이다."

 

"그것을 없애면 소망이 이루어져.

이제 금방이야, 유이."

물론 이러한 속죄 방식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자멸한다는 기본 취지에 다소 어긋나는 터라 제레 입장에서도 이 루트 B가 아주 훌륭한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하지만 말했듯이 이것은 순전히 겐도우가 멋대로 롱기누스의 창을 달 너머로 날리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으며, 결국 루트 B는 제레의 현실과의 타협의 결과라 볼 수 있겠다. 자, 여기서 타브리스를 네르프 본부로 보내고 난 뒤, 제레 노인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가자.

후유츠키 "설마, 제레가 직접 보낼 줄이야!"

겐도우 "노인들은 예정에서 한 단계 서두를 셈이다. 우리들의 손으로."

"인간은 어리석음을 잊고 똑같은 과오를 되풀이 한다."

"스스로 속죄를 하지 않으면 인간은 바뀌지 않아."

"아담이나 사도의 힘은 빌리지 않는다."

"우리의 손으로 미래를 바꿀 수밖에 없어."

이것은 리뉴얼 TV판 24화에 타브리스가 터미널 도그마로 하강하면서 나오는 제레의 대사이다. 사실 대부분의 시청자는 이 상황에서 카오루가 사도라는 것만 얼핏 아는 상태이기 때문에, 제레가 피프스 칠드런이라는 명목으로 카오루를 네르프로 보내는 상황 자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제레의 뜻 모를 대사가 굉장히 있어 보이는 내용인 것 같지만, 사실 가만히 보면 모두 겐도우의 처사에 대한 불만이란 걸 알 수 있다.

특히 아담이나 사도의 힘은 빌리지 않는다.’라는 대사를 보자. 제레 역시 이 경우, 엄밀히 말하면 인공이기는 해도 타브리스라는 사도를 이용하여 임팩트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저런 대사를 날릴 자격 요건이 충분한 것 같지 않지만, 저것은 손에 쥔 아담을 통해 릴리스와 융합하려는 겐도우에 대한 질투 섞인 비난인 것이다. 우리는 겐도우처럼 치사하게 굴지 않아. 우리 손으로 사도를 보내 쿨하게 직접 속죄할 거야.’라는 뜻이다. 어쨌든 제레가 네르프에 사도를 임팩트 발발 목적으로 보낸다는 건 네르프 입장에서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고,겐도우 너, 네 맘대로 그렇게 했지? 어디 한 번 당해 봐라!’라는 제레의 작전은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물론, 그 타브리스가 서드 임팩트의 기로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리린인 신지에게 그 결정권을 넘기는 것이었다.

 

카오루 "너는 죽어야 할 존재가 아니야.

너희들에게는, 미래가 필요해."

"너와 만날 수 있어서 기뻤어."

재밌지 않은가. 보완을 바라던 세 명의 어른-유이, 겐도우, 킬의 바람은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각각 소년인 신지, 릴리스인 레이, 아담인 카오루에게 거절을 당했다. 특히나, 카오루가 태어나서 보고 관찰했던 리린은 머리에 죽을 궁리만 가득한 제레의 노인들일 뿐이었다. 산다는 것에 대해 제레와는 전혀 다른 시각을 보이는 ‘살고 있는 인간 신지를 만난 카오루가, 인류의 미래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이 소년에게 있겠구나, 하고 직감했던 것이다.

결국 루트 B도 실패!

자유 의지의 천사라는 이름 그대로 타브리스는 (신지의 의지가 개입된)자멸을 택하고, 속 좁은 제레의 노인들은 타브리스의 이런 선택을 배신이라고 칭했다. 아무튼 결국 제레는 인류 보완의 또 다른 루트를 모색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루트 C이자, 실제로 엔드 오브 에바에서 발현된 서드 임팩트와 매우 가까운 형태의 것이었다. 바로 초호기를 이용한 서드 임팩트이다.

S2 기관의 섭취. 이것을 계기로 초호기는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초호기를 이용한 서드 임팩트가 가능하게 된 것은 릴리스 베이스인 초호기가 생명의 열매인 S2 기관을 흡수(19화에서 생명의 열매를 가진 사도를 먹어 치웠다.)하여 신의 형상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즉, 지혜와 생명의 열매를 동시에 가진 에게 의탁하면 원하는 방향으로 인류 보완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이다.(하나 뿐인 롱기누스의 창을 겐도우가 자신 있게 우주 밖으로 던진 것도 이 때문이리라.) 다만, 초호기를 다루는 것이 이카리 겐도우 사령관인 만큼, 제레에게는 목적 달성을 위해 선행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속죄 의식을 위한 양산기도 진작에 준비 완료!

신이 된 초호기에 의탁하는 서드 임팩트는 마침 겐도우의 보완 계획과도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다만 문제는, 제레의 입장에선 겐도우의 의지가 그것(만들어진 신)에 개입되면 안 된다는 조건이 필요했으며, 제레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네르프 파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저 제레는 겐도우를 포함한 네르프 사람들은 다 몰살하되, 에반게리온만 챙겨서 본래 하려던 의식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갈등 관계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 바로 문제의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었다.

 

[에반게리온] 8. 인류 보완 계획 : 서드 임팩트 총정리/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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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인류 보완 계획 : 서드 임팩트 총정리

 

본격적으로 실제 발발한 서드 임팩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제 어느 정도 배경 설명이 되었으니 인류 보완 계획 및 서드 임팩트를 그 유형 별로 나누어 정리하고 가겠다. 여러분들의 머릿속에서 아직 찜찜하게 남아 있는 부분들을 좀 더 메꾸고 가자는 취지이다. 이것을 확실히 해 두면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 이해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내용도 많고 밀도도 높으니 주의해서 보길 바란다.

먼저 유이가 창안한, 오리지널 타입의 인류 보완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애초에 부정한 방법으로 지구에 온 릴리스, 그리고 그 자손인 우리 인류는 본연적인 불완전성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러나 우리의 손에는 지혜와 릴리스의 원본이 있으니, 에반게리온 초호기라는 새로운 릴리스의 몸을 만들고, 그 안에서 모든 인류의 영혼을 합일하여 완전성을 지닌 리린으로 다시 태어나자는 것이었다. 이 경우 에반게리온 초호기는 다른 사도와 같이 완전한 육체와 정신을 지닌,새로운 인류의 모습인 동시에, 새로운 릴리스그 자체로 신생하는 것이다.(극장판 데스 앤 리버스의 다른 이름이 사도 신생인 이유를 생각해 보자.)

다음으로, 인류 보완 계획이 그 목적과 조건에 따라 변형되어 에반게리온 작품 내에서 서드 임팩트로 발발하게 되는 루트는, 크게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귀여운 이미지로 인기가 높은 사도 사키엘

하나, 사도를 통한 서드 임팩트의 가능성이 있다. 사도가 아담과 접촉, 아담의 각성을 자극하여 이 별의 정식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도가 에바와는 달리 완전한 육체와 정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인간은 자격 없이 지구에 무단 거주했다는 오명을 남기고 사멸한다. 모든 타입의 인류 보완 계획이 이를 막는 것을 전제로 두고 있다.(제레 타입 B는 예외.)

릴리스의 특이한 가면 모습, 제레의 상징, 그리고 또…?

, 릴리스를 통한 인류 보완의 가능성이다. 제레가 처음 계획했던 시나리오로, 롱기누스의 창을 인간이 가지고 있던 만큼, 사도 내습을 모두 막고 나면 그것을 이용해 속죄 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이 경우 릴리스는 속죄 의식의 제물이 되고 인간은 역시 사멸한다. 다만 스스로 죄를 치르고 명예롭게 죽는 방식으로 사멸 후에 정당한 존재로의 부활이 가능하다.(고 제레는 생각했다.)

이 메커니즘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짚고 가자. 겐도우에 의해 릴리스의 정신이 레이에게 담긴 것은 일단 논외로 해도, 어쨌든 인간은 릴리스의 육체와 정신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본래 릴리스 세트의 롱기누스의 창은 퍼스트 임팩트 때 소실되었고, 사실 그것으로 인해 인간이 이렇게 불완전한 군집 체계로 태어난 모양이지만, 어쨌든 그 대신 아담 세트 롱기누스의 창을 사용하고 있다. 적절한 타이밍을 위해, 릴리스의 육체가 완전한 상태가 되기 직전에 창을 박아 성장을 멈추게 한 상태이다.(릴리스가 완전한 육체가 아니었던 이유는 초호기 등을 만들기 위해 그 일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다음에 확실히 언급하겠다.) 사도를 모두 무찌른 후에 창을 다시 뽑아 그것을 이용하면 의식의 준비가 완료된다.

언급할 거리가 너무 많은 탓에 일부러 피하고 있는 아야나미 레이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혹자는 사도가 아담에게 접촉해 아담 베이스의 서드 임팩트를 일으킬 수 있는 것과 같이, 릴리스의 정식 후손인 인간도 도구의 준비 없이 그냥 릴리스에게 직접 접촉하면 릴리스 베이스의 서드 임팩트를 일으킬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 모종의 원인(아마 롱기누스의 창의 소실)으로 인해 하나가 아닌 군집 체계로 진화했기 때문에, 단일 개체의 인간이 릴리스에 접촉한다고 해도, 인간은 완전한 형태의 릴리스의 후손이 아니므로 임팩트 발발이 불가능한 모양이다. 게다가 제레가 원하는 방향은 릴리스의 속죄이기 때문에 릴리스 베이스의 임팩트는 그들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셋, 카오루를 통한 서드 임팩트가 있었다. 겐도우에 의해 롱기누스의 창이 소실된 직후 당황한 제레가 급조한 시나리오이다. 이 경우 사도를 통한 서드 임팩트와 같다고 볼 수 있지만, 문제의 사도가 인간이 직접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 이 경우 비록 사도의 손을 빌렸지만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자멸을 택한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며, 제레가 노린 것도 이것을 속죄 의식으로 대행하여 인류의 명예로운 사멸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여기서 무난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카오루는 아담의 정신일 뿐, 육체는 아담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담의 정식 후손이라 보기 힘든데, 어떻게 카오루와 아담의 접촉이 서드 임팩트를 이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그러나 이 타브리스의 경우, 기존 사도와는 다르게 진짜 아담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담의 후손이라는 자격으로 그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육체와 접합, 그 자체로 정식 아담으로 부활한다는 점에서 기존 사도를 통한 서드 임팩트에 비해 훨씬 더 직접적인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어른들 욕심의 진정한 희생양, 이카리 신지

다음으로 넷, 에바 초호기를 통한 서드 임팩트 가능성이다. 겐도우 계획의 일부이자, 타브리스의 소실 후 제레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대안이다. 제레의 입장에서는, 본래와 같이 속죄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에바 초호기가 신에 가까운 형태라는 것(아래에서 다시 언급)을 고려해, 그 신에 의탁하여 속죄를 기도하자는 것이었다. 이 경우 신의 의지에 영향을 줄 겐도우의 소멸을 위해 제레는 네르프 전면 파괴라는 유혈 작전을 선행한다. 계획의 실패를 거듭한 제레는 이제 인류의 명예로운 멸망만을 목적으로 한다.(본래 제레의 순수한 목적은 인류 멸망을 막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릴리스, 그리고 아담을 품은 레이

다섯, 아담과 릴리스를 융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서드 임팩트의 가능성이 있다. 두 양립하는 우주의 존재가, 소위 말하는 금지된 융합을 한다는 것이다. 정확한 메커니즘은 불명이나 이 경우 지혜의 열매와 생명의 열매를 동시에 가진 이 탄생하여 수행자의 의지를 반영한 인류 보완이 일어난다. 아담의 육체를 수행하는 겐도우가 노리고 있는 보완 계획이었다. 겐도우의 경우 에바 초호기를 통하되 이런 금지된 융합을 수행하여 유이와의 재회를 희망했다. 차후 밝히겠지만 이것은 유이와 릴리스를 합한 레이의 존재 이유와도 직결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이름 그대로 금지된 융합이기 때문에, 어설프게 시도했다간 아담이든 릴리스든 모든 생명체가 멸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사도 중에서는 애초에 릴리스를 노리고 와서, 그와 접촉해 모든 생명체의 리셋을 원하는 타입도 있다.(아담 베이스의 사도가 릴리스와 접촉할 때의 결과는 작품 내에선 불명이나 후에 공식 설정으로 언급되었다.) 동시에 이것이, 겐도우가 굳이 레이를 만들고 자신의 몸 안에 태아 형태의 아담을 넣는 등의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데 대한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렇게 많은 경우의 수가 있었으나 어쨌든 발발한 서드 임팩트는 하나

, 이제 드디어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나타난 실제 서드 임팩트의 진상을 살피러 갈 준비가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할 새로운 문제들이 제법 나올 예정이지만, 일단 출발하자.

[에반게리온] 9. 인류 보완 계획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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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인류 보완 계획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이 파트는, 실제로 발발한 서드 임팩트의 진행 과정을 인류 보완 계획의 관점을 중심으로만, 단순하고 명백하게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TV판의 최종 두 편과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작품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 파트는 에반게리온 해석 여행의 종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에반게리온의 이해를 위한 첫걸음이기도 한 탓에, 이런 구성이 불가피했음을 밝힌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진행되는 인류 보완 과정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언급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을(또 가지게 될) 의문점에 대해서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밝힐 것이니 미리 양해를 구한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TV판이 확실히 전하지 못했던 서드 임팩트의 외적 전말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 의식의 형태는 우선 불완전한 겐도우 타입(레이가 겐도우의 손에 있던 아담 부분만 먹고 튀는 탓에 핵심인 겐도우의 의지가 빠지게 되었다.)제레 타입 C(신이 된 초호기 앞에서 인류의 자멸을 기도)가 섞인 형태인데, 미리 말하자면 아담+릴리스는 그 최종 선택을 신지에게 맡긴다.

영화가 시작하고, 제레는 일본 자위대를 통해 네르프 몰살을 시도한다.(우습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작전이 서드 임팩트를 막는 것으로 알고 파견됐다.) 그러나 핵심 인물인 겐도우는 막을 수 없었다. 그 시각 겐도우는 서둘러 레이를 데리고 문제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우선 손에 심은 아담을 레이의 몸에 넣어 레이와의 합일을 시도했다. 그러나 레이는 겐도우의 요구를 거절하고, 아담만을 몸에 품은 채 릴리스와 융합, 신지가 부르고 있다며 그를 찾으러 간다.

"자, 유이가 있는 곳으로 가자." -입이 방정이다, 겐도우.

그 때, 네르프 외부에서는 깨어난 아스카가 2호기에 탄 채로 양산기에 의해 파멸, 그 광경에 초호기 내부의 신지는 경악한다. 신지의 정신은 처참히 흐트러지고(제레는 겐도우의 아들인 신지의 생각도 자신들의 의사와 반할 것을 걱정했고, 때문에 오히려 이 사실을 반갑게 여긴다.), 동시에 초호기의 구속구가 파괴된다. 그 때, 달에 꽂혀 회수가 불가했던 롱기누스의 창, 새로운 신의 힘이 개방되는 것을 깨닫고 중대한 사태라 인식했는지, 스스로의 의지로 신지 앞에 귀환한다. 제레는 이렇게 오리지널 롱기누스의 창이 나타난 것을 보고, 신이 스스로 초호기의 속죄를 도우러 왔다고 해석, 확신을 가지고 릴리스의 분신인 초호기를 통해 의식을 시작한다.

롱기누스의 창이 초호기를 겨누고 있다.

그러나 롱기누스의 창에 대해서는 좀 더 할 말이 많아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사항은 뒤로 미뤄야 한다.(시조 민족)의 사도 제어 도구인 롱기누스의 창이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맡고 있는 역할 중에는, 영화가 제대로 말하고 있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말하지만 여기서 롱기누스의 창은 지혜의 열매와 생명의 열매를 함께 지닌 초호기가, 궁극 형태라 할 수 있는 생명의 나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구성 요소로 보인다. 그 말은 롱기누스의 창이 있어야 새로운 신이 완성 가능하며, 어쩌면 롱기누스의 창은 그것을 돕기 위해이 자리에 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롱기누스의 창은 초호기를 제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초호기의 의지와 함께움직인다.

어쨌든, 아홉 대의 양산기는 이제 초호기를 적소에 배치하고 본격적으로 의식을 거행한다. 이제 초호기는 마치 속죄양을 자처한 예수의 형상을 띠고 있다.(애초에 예수를 찌른 창이란 전설을 지닌 롱기누스의 창이 제레 타입의 속죄 의식에 꼭 필요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사해 문서의 매뉴얼에 따라, 서드 임팩트의 시작을 알리는 세피로스의 나무가 소환된다. 이제 양산기는 그들이 지닌 S2 기관(그 출처는 다음에 자세히 언급.)을 개방, 그로 인하여 강력한 폭발과 함께 지오 프론트의 실제 모습이 드러난다. 그 안에는 릴리스의 검은 달도 보인다.

그 시각, 금지된 아담과 릴리스의 융합을 수행한 레이는 거대한 모습이 되어, 하늘 위의 초호기를 만나러 온다. 그 기괴한 모습에 신지는 경악하지만, 이내 아담+릴리스는 카오루의 모습을 통해 그를 달랜다. 그리고 릴리스는 이 세상의 운명을 이카리 신지의 마음에 맡기기로 결정한다.(이것은 24화의 마지막에서, 아담인 카오루가 인류의 운명을 이카리 신지에게 맡겼던 것과 대응한다.) 인류의 새로운 탄생이냐 멸망이냐, 그것이 이카리 신지의 손에 달린 것이다. 그렇게 인류 보완이 시작된다.

내가 살든 죽든아무도 상관하지 않아. 모두 나를 귀찮게 여겨. 그러니까모두, 죽어 버려.

그의 말은 이제 그대로 현실이 된다. 아담+릴리스는 그 즉시 안티 AT 필드(AT 필드를 없애는 에너지로 이해하면 쉽다.)를 방사, 지구 전체로 퍼져 모든 생명체가 서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AT 필드를 소실, 서로의 형태를 잃고 본래의 LCL 용액(릴리스를 이루는 이기도 함.)으로 환원된다. 이제 인간의 영혼들은 아담+릴리스의 주변으로 모여 릴리스의 이라 할 수 있는 검은 달 안으로 다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양산기들은 아담+릴리스의 형상과 동화되어 그 수행을 돕게 된다.

"세상이 슬픔으로 넘치고 있고
허무함이 사람들을 감싸고 있고
고독이 사람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어요."

"그렇게 힘들었다면…이제 도망쳐도 좋아요."

신지의 응답이 한없이 제로에 가까워지는(자아의 붕괴를 의미) 동시에, 아담+릴리스의 안티 AT 필드가 그녀의 형체와 함께 계속해서 커진다. 거프의 문(우리의 영혼을 관장하는 곳이다.)이 열리고, 아담+릴리스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모으기 시작한다. 제레의 노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육체는 LCL 된다. 지구의 모든 릴리스 베이스 생명체가 그렇게 될 것이다. 킬은 이런 보완이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 그대로는 아니었음을 시인하지만 이내 만족한다는 눈치다.

이제 신지의 눈앞에는 갖가지 영상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신지만이 볼 수 있는 환상이 아니라, 인간이 보완되며 스스로의 AT 필드를 허무는 중에 나타나는, 모두의 마음의 풍경, 그 일부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것은 진행 중인 인류 보완의 실재하는 형태이며, 분명한 현실의 일부인 것이다.

그 때 겐도우는 유이를 만나고 있었다. 겐도우는 그녀에게 고백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며, 신지를 아프게만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고, 아니, 사실 자신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이에 유이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신지가 무서웠군요. 레이와 카오루도 겐도우의 곁에서 그의 마지막을 본다.

겐도우그 응보가 바로 이것인가내가 나빴구나, 신지.”

하지만 신지는 보완을 겪는 동안, 마침내 진심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괴로운 일들도 많았지만, 신지는 즐거웠고, 그 때의 기분은 진짜였다고. 다시 한 번, 타인을 타인으로 만나고 싶다. 인류의 보완을 거부한다.

레이 "다시, 타인의 공포가 시작되는 거야."

신지 "괜찮아."

"고마워."

이내 릴리스의 몸 안에서 초호기가 튀어나와 포효한다. 그리고 빛의 날개를 펼친다. 거프의 방은 다시 문이 닫히고 릴리스의 검은 달이 폭발한다. 인간의 영혼들은 LCL의 바다 속으로 회귀한다. 아담+릴리스의 몸도 분해된다. 에바 초호기는 롱기누스의 창을 이용해 다른 양산기들을 석화시킨다.

신지의 바람과 같이, 이제 LCL이 된 모든 개인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다시 육체를 구성할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서로 상처를 주는 일도 많기에 다시 지구에서 산다는 것이 마냥 쉽지는 않겠지만, 신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후 지구의 모습은 LCL 속에 잠든 개개인 모두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할 일을 마친 아담+릴리스의 몸은 조각이 나 지구로 떨어진다. 릴리스는 아마 이 부분에서 죽는 것으로 보인다. 그 안의 아담과 함께. 신세기가 도래한 것이다.

[에반게리온] 10. 릴리스의 분신, 에바 초호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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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릴리스의 분신, 에바 초호기 

 

지금까지 에반게리온 설정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복잡한, 인류 보완 계획을 이해하느라 수고 많으셨다. 어쩔 수 없이 뒤로 미룬 내용들도 많지만, 아마 앞으로 그 정도로 머리 아픈 개념은 없을 것이다. 이제 에반게리온 좀 아는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게 됐으니, 원점으로 회귀하여 보다 다양한 설정들을 함께 살피도록 하겠다. 그 중 가장 먼저, 에반게리온의 대표 기체인 동시에 가장 독특한 성격을 지닌, 에바 초호기에 대해 알아보자.

'범용 인간형 결전 병기' 에반게리온 그 초호기!

에반게리온 초호기는 게히른의 하코네 지부에서 생산된, 테스트 타입 모델이다. 다른 에바와는 달리 초호기는 릴리스의 육체를 바탕으로 제작된 기체이며, 그 사실은 게히른의 고위 간부 중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던 극비 사항이었다. 사도 대항용 이외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만든 첫 에바인 것이다. 또 초호기 건조 당시 E-계획을 이카리 유이가 지휘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초호기만을 릴리스 베이스로 만들자고 제안한 것 역시 유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제레는 이런 사실 때문에 초호기를 더러 릴리스의 분신이라 부르고 있다.

소중한 아들을 다치게 할 순 없지!

외적인 부분만 보자면, 에바 초호기는 다른 아담 베이스의 에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초호기는 작품 내에서 폭주 씬이 굉장히 많았던 케이스인데, 전원 공급이 없는 위기 상황에서도 상당히(사실 훨씬 더) 뛰어난 전투력을 보였다. 제루엘의 S2 기관을 흡수하기 전에도, 초호기는 에반게리온의 기동 원칙을 깔끔하게 무시했던 것이다.(당장 처음 등장했을 때에도 파일럿 없이 신지를 구해냈다.) 영호기의 경우 미쳐 날뛰기 위한폭주(다음에 자세히 언급하겠다.), 2호기의 경우 죽음 바로 앞에서 마지막으로 꿈틀대기 위한폭주만 보였던 걸 생각하면, 초호기만 유일하게 파일럿인 신지를 위해,전투를 위한폭주를 보인 것이다.

물론 에바 팬이라면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2004, 에바와의 접촉 실험으로 인해 유이의 영혼은 초호기의 코어에 흡수되었다. 초호기는 2014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고, 아들인 신지가 탑승할 때까지, 유이는 코어 속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 굳이 서드 임팩트 때 인류 보완의 이 초호기가 된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겐도우 사령관에게 가장 편애를 받는 기체는 명백히 에반게리온 초호기였다. 그 안에는 겐도우의 유일한 희망, 이카리 유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어인 유이나 파일럿인 신지 얘기는 다음에 더 자세히 하기로 하고, 이제 릴리스에 대해서 좀 더 확실히 알 필요가 있다. 초호기는 신지의 어머니 이카리 유이인 동시에,인류의 어머니 릴리스이기도 하니까.

이 분이 바로 릴리스!

릴리스는 흔히 아담에 이어 두 번째 사도라고 불리고는있지만, 아담과 대등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일부 시각에서는 아담과 함께 제1사도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 다른 시각에서는, 릴리스와 리린은 사도(Angel)가 아니다라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작중 인물에 의해 인간도 결국 하나의 사도라는 내용의 대사가 나오고, 또 숫자의 경우 지구에 도착한 순서로 매기는 모양이니, 용어 문제는 그냥 넘겨도 무방할 것이다.

이쯤에서 릴리스의 모습을 잠깐 보고 가자. 에반게리온과 비슷한 사이즈의 거인 형태로, 복원을 마치지 않은 다리 부근에서는 조그만(아마도 실제 사이즈의) 인간의 신체와 같은 부분들이 함께 자라고 있다. 릴리스가 인간의 기원임을 암시하는 디자인이다.

릴리스의 특이한 가면 모양

릴리스의 가면도 좀 더 자세히 보자. 특이한 재질의 보라색 가면에, 제레의 마크와 같은 문양이 있다. 제레의 마크가 이것을 바탕으로 디자인된 것인지, 아니면 제레가 그들의 마크를 박은 가면을 직접 릴리스에게 씌운 것인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데, 특히 가면의 질감과 자그마한 구멍들은, 릴리스가 태어난 검은 달’, 즉 하늘에 뜬 달에 보이는 크레이터와 꼭 닮은 느낌이다. 역시 이 거인이 검은 달에서 온 릴리스임을 암시하는 디자인이다.

한 때는 저 머리가 초호기의 혼이라는 설도 있었다.

여기서 또 하나 짚고 가자. 은근히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장면 중 하나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끝 부분에 에반게리온 초호기의 진짜 머리카락이 나오는 장면이다. 여기서 보면 초호기는 레이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초호기와 릴리스의 연관 관계를 잘 드러내는 연출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레이와 유이의 머리카락 색깔이 달랐던 이유도 알 수 있고, 릴리스를 샐비지(영혼을 꺼내는 메커니즘을 칭한다.) 하는 과정에서 릴리스의 DNA도 일정 부분 아야나미의 몸에 속하게 되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아무튼 확실한 건 겐도우가 특이 취향으로 레이의 머리를 염색한 것은 아니겠다.

그냥 넘어가기 힘든 헤어 컬러...

그런데 릴리스를 바탕으로 도대체 뭘 어떻게 초호기를 만든 것일까? 사실 릴리스 베이스에바라고 쉽게 말하기는 해도, 과정이 정확히 어떤 방식인지에 대해선 작품 내에 확실한 언급이 없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할 중요한 단서가 23화 후반부에 나오고 있다. 리츠코가 미사토와 신지 앞에서 레이의 육체들을 앞에 두고 대사를 읊조리는 부분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 틀지는 말자. 에반게리온은 리뉴얼이 꽤 자주 되었다. 처음 TV판이 방영되고, 그 다음에 무삭제판이라 불리는 완전판(비디오 버전)나왔다. 그리고 2003년 그 두 가지를 묶어 화질과 일부 장면을 개선한 버전이 또 새로 나왔다. 현재 사람들이 흔히 접할 수 있는 버전은 오리지널 TV판과 2003년 리뉴얼 버전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할 것은 비디오로 나온 완전판이다. 리뉴얼 버전이 완전판도 대부분 그대로 담고 있으나 바로 이 장면, 23화의 후반부는 특이하게도 오리지널 TV판 버전으로만 수록하고 있다.

바로 이런 식의 연출이다. 아주 난잡하다.

LCL 용액 안에서 의미 없이 웃고 있는 레이들의 모습 사이로, 뭔가 아주 난해한 그림들이 조잡하게 흐르고 있다. 리뉴얼판에선 아무래도 이런 산만함 때문에 오리지널 TV판 버전으로 수정한 모양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오직 비디오로 나온 에반게리온 완전판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장면 중 다수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 컷들을 수록하고 있어서 짚고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밑의 장면을 주목하자.

이 부분이다. 복원하면

이 장면이다. (아트웍 북 수록)

대충 뭘 말하는 장면인지 감이 올 것이다. 이것은 릴리스 몸의 반절에 해당하는 뭉텅이를 에반게리온 초호기의 베이스로 만드는 데 이용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것을 고려하면, 초호기가 지니는 릴리스의 육체는 복제 정도의 개념이 아니라 오리지널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 이 장면은 왜 십자가에 달린 릴리스의 하반신이 작품 내내 불완전한 모습으로 있었는지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그 정도의 훼손이 있었으니 회복 시간이 많이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리린이 제일 무섭다

릴리스는 분명 인류의 조상이 맞다. 그러나 제레가 게히른, 또 그 후의 네르프와 함께 릴리스에게 하는 짓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그녀(라고 하겠다.)의 몸을 뭉텅이로 잘라 에바를 만들고, 그녀를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피(LCL 용액)를 모아 연구 및 실전을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제레는 그녀를 속죄양으로 삼아 그녀의 자손들을 몰살하는 서드 임팩트까지 계획한다. 거기다가 그 타이밍을 핑계로, 아담의 롱기누스 창까지 릴리스의 가슴에 박아 그녀를 제어했다.

혹자는 아담을 더러 거짓된 계승자들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는 대인배의 극치라 평하던데, 물론 그것 역시 맞는 말이지만, 이런 점에서 보면 릴리스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인배가 아닌가? 자손들이 그녀를 부끄럽게 여김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미동도 없이, 그들이 원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떼어 주는 릴리스. 릴리스가 상징하는 것이 어머니인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닐까.

 

[에반게리온] 11. 아스카의 엄마, 에바 2호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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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아스카의 엄마, 에바 2호기 

 

위풍당당 에바 2호기!

에반게리온 2호기세 번째로 건조된 에반게리온 기체이다. 최초의 프로덕션 모델로, 영호기와 초호기를 건조할 때 나타났던 문제점들을 최종적으로 보완한, 사도 대항 전투 능력 극대화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에반게리온 기체는 기본적으로 붉은 혈액과 갈색 피부를 지니고 있으나 2호기는 에반게리온 시리즈 중에서 유일하게 자줏빛 혈액과 어두운 녹색 계열의 피부, 또 네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참고로 2호기는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약간의 디자인 변화가 있었다. 기존에 비해 좀 더 사람에 가까운 체형을 지니게 됐고, 얼굴 부분도 보다 날렵한 형태로 변했다. 이것은 아마도 사람에 가까운 에바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 변화가 아니었나 싶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나온 2호기의 설정 컷

외적인 설명은 차치하고, 이제 2호기의 코어 얘기를 좀 하겠다. 초호기에 이카리 신지의 어머니 유이가 있는 것과 같이, 2호기에는 아스카의 모친인 소류 쿄코 제플린이 담겨 있다. 에바 팬이라면 이 정도는 이미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좀 더 깊이 짚고 갈 부분이 있다. 우선 중요한 사실은, 접촉 실험 중에 코어에 완전히 흡수된 이카리 유이와는 달리, 쿄코의 경우엔 의도치 않게아스카에 대한 모성애만이 2호기에 남았다는 것이다. , 쿄코의 영혼이 둘로 나뉘어 한 부분만 코어에 남았다는 소리다.(이 사실은 나중에 영호기의 코어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니 꼭 기억하자.) 그 때문에 쿄코는 코어 실험 이후에도 육체적으로는 죽지 않았고, 모성애를 제외한 부분만을 지닌 채로(그러니까 미친 채로) 짧은 시간을 더 살다가 갔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쿄코가 육체적으로 죽은 뒤에도 2호기의 내부에 아스카에 대한 모성애만이 존재했다고 보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이것은 2호기 코어의 영혼에 대한 에바 팬들의 굉장히 흔한 오해 중 하나인데, 에반게리온 작품 내에서 육체와 영혼은 분명히 별개이며, 따라서 쿄코의 육체가 죽었다고 해도, 그 남은 부분의 영혼도 함께 사라진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분리된 모성애 부분이 코어에 있던 것을 생각하면, 해당 부분의 영혼 역시 쿄코의 육체가 숨을 거둔 때를 기점으로 2호기 속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2호기의 코어가 완성된 것은, 쿄코가 실험 후에 미친 시점이 아니라, 쿄코의 육체가 확실히 죽은 바로 그 시점이었으며, 아스카가 예비 파일럿 훈련을 시작한 것도 그 시기였다. 그러니 2호기의 코어는 쿄코의 남은 영혼이 복귀 가능한 때를 기다린 뒤에 완성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쿄코의 분리된 영혼은 코어 속에서도 끝내 합일하지 않고 두 부분으로 나뉘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넌, 아직 죽으면 안 돼!" / "나랑 같이 죽어 주렴."

그 하나의 근거로, 엔드 오브 에바의 ‘Air’ 편에서, 아스카가 엄마의 존재를 깨닫기 직전,널 죽게 하지 않을 거야, 너는 살아야 해.’라는 모성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아스카에게 익숙한 나랑 같이 죽어 줘.’라는, 미친 쿄코의 목소리도 같이 들린다. 이것은 아스카의 트라우마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연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스카를 사랑하는 어머니 쿄코와, 남은 부분의 자살한 쿄코가 코어 안에 함께(그러나 따로) 머무르고 있었다는 중요한 증거이다.

TV24화에서, 타브리스는 2호기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엄연히 자기 육체의 일부라 할 수 있으니까.) 에바 안에는 이미 영혼이 있기 때문에 동화할 수 없다고 하면서, ‘2호기의 영혼은 스스로 갇혔다.’고 표현한다. 2호기의 코어를 단순히 아스카를 사랑하는 모성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역시 이상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것은 코어 속의 쿄코가 애초에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2호기의 코어 속에는 분리된 쿄코의 영혼이 배타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함께 죽자꾸나…아스카."

말이 나온 김에 소류 쿄코 제플린(정확한 발음은 채플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가자. 그녀는 게히른의 독일 지부에서 E-계획에 전념하고 있던 연구자로, 2호기와의 접촉 실험에서 희생,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혼자 죽은 것은 아니었다. 쿄코는 죽기 전까지 딸인 아스카를 알아보지 못했고, 손에 든 인형을 자신의 딸이라 착각하며 여생을 보냈다. 쿄코는 그 인형을 아스카라고 불렀는데, 이후 그녀는 그 인형에 목을 매달고, 자신도 목을 매달아 가상의 딸과 함께 동반 자살을 한다. 안타깝게도 어린 아스카는 그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고, 이후 이 사건은 그녀의 의식 속에 트라우마로 남는다.

 

참고로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라는 이름에서, ‘랑그레이는 아스카의 부친 이름이다. 이 사람이 또 어떤 사람이냐 하면, 쿄코가 정신 병원에 격리되어 있을 때, 랑그레이는 병원 안에서 부인을 담당하는 의사와 성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쿄코의 장례식 날, 랑그레이는 그 의사와 벌써 결혼을 마친 상태이다.(지금 아스카가 엄마라 부르고 있는 사람이다.) 이 사실은 화면 없이 소리 등으로 상징적인 선에서만 묘사가 된 탓에, 대충 보면 놓치기 쉽지만, 아스카 일가의 비극을 여실히 드러내는, 매우 중요하고도 잔인한 연출이었다. 이것은 곧 쿄코가 생전에 남편에게서는 어떤 종류의 사랑도 받을 수 없었음을 나타내며, 결국 애초에 쿄코라는 사람은, 한 딸의 어머니라는 존재, 모성을 빼면 남는 게 없는 여자였던 것이다.

아스카 "괜찮아, 난 울지 않아. 난 혼자 스스로 생각해."

아무튼, 2호기 속에는 아스카의 모친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지와 달리 아스카는 엄마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보다시피 쿄코 쪽에서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 에바 기체와 파일럿의 기본적인 상성만 맞다면, 파일럿의 동기 부여와 의지만으로도 일정 수준의 싱크로율은 유지할 수 있는 모양이다. 때문에 신지, 레이, 아스카 세 명의 파일럿 모두 영혼의 존재와 직접적인 교감 없이도 전투에는 별 문제가 없는 싱크로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아스카는 그 중에서도 굉장히 우수한 싱크로율을 보인다. 후에 아스카 파트에서 자세히 언급할 예정이지만, 이것은 아스카가 에바 속 영혼과의 교감을 떠나, 오직 스스로의 프라이드 하나만으로 에바를 움직였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프라이드를 잃은 작품 후반부에서는 에바 기동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싱크로율이 떨어졌다.

레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에바는 움직이지 않아."

아스카 "마음을 닫고 있단 거야, 이 내가?"

"그래, 에바에게는 마음이 있어."

"그 인형한테?"

실제로 파일럿이 에바와 싱크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파일럿 스스로의 동기 부여라 할 수 있다. 아스카의 동기는 이 경우, 표면적으로는 2호기에 타는 것이 그 자체로 즐겁다는 것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에바를 타지 않고는 아스카라는 사람의 자존감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겠다. 레이가 에바 없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것과 같이, 또 신지가 자신은 에바를 탈 수 밖에 없다고 한 것과 같이, 아스카 역시 에바 없이는 남는 게 없는 소녀였던 것이다. 그러니 아스카의 프라이드가 처참하게 망가졌을 때, 어쩌면 쿄코가 그녀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스카는 결국 2호기 속에서 엄마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고, 끝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었다.

아스카너는 내 인형이니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아스카에게 있어서 2호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누군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에바란 그저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스카가 모친이 담긴 2호기를 더러 인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거 쿄코가 아스카와 인형을 혼동했던 사실과 미묘하게 대응한다. 아스카는 아마도 그 때의 상처를 자신의 에바에게 그대로 대입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저 대사 직후, 22화의 아이 캐치에서 나오는 영어 부제, 'Don’t be(그러지 마.)', 그런 아스카에 대한 쿄코의 걱정스런 한 마디가 아니었을까.

[에반게리온] 12. 2-A반의 비밀, 에바 3호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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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A반의 비밀, 에바 3호기

 

Q.신에바2(게임) 텍스트랑 리뷰 내용에 다른 부분이 있는 건 뭐죠?”

시작하기 전에, 유사 질문이 자꾸 오고 있어 이 리뷰에서 공식 설정으로 자주 언급하고 있는,게임 설정 텍스트에 대해 잠깐 짚고 갑니다. 게임 신에바2’의 텍스트에 안노가 참여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원작과 100% 연계 설정으로 보는 것은 곤란합니다. 프롤로그에 추가한 바와 같이, 게임 텍스트는 이 리뷰에서 다루는 공식 설정 중 네 번째 위치에 있으며, 그 이유는 특정 부분에서 원작 설정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리뷰 초반에 다룬 인류 보완 계획파트입니다.신에바2’는 제레의 인류 보완 계획을 원작과 전혀 다른 노선으로 잡고 있습니다. 굳이 여기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게임 속 제레는 롱기누스의 창을 없애고 에반게리온과 동화, ‘제레 멤버만 한정하여 신이 되는 것을 원합니다. 때문에 설정 텍스트 역시 해당 부분은 게임 내용에 맞춰 작성된 것입니다. 허나 제가 다루는 것은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게임 설정과 어긋나는 부분은 철저히 애니메이션 기반으로만 적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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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시엘이 남기고 간 귀중한 코어 샘플

 

신지와 그 친구들이 일본에서 열심히 사도와 싸우는 동안, 네르프 미국 지부에서는 에반게리온 3호기 4호기를 건조하고 있었다. 두 기체는 한 가지만 빼면 도색만 다른 세트 기체인데, 한 가지S2 기관으로, 4호기는 에바 최초의 S2 기관 탑재 예정 모델이었다. S2 기관은 아담과 사도의 코어 속에만 존재하는 생명의 열매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4호기의 S2 기관은, 5화 초반에 나오는 샴시엘의 코어를 연구를 통해 복원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연구가 어설펐던 탓일까, 코어 설치 테스트 도중 S2 기관이 자폭, 4호기는 물론 네르프 네바다 지부가 통째로 증발한다. 미니 세컨드 임팩트라고나 할까.

미국 네바다 지부 증발!

 

이 불의(?)의 사고에 겁을 먹은 미국은 즉시 3호기를 네르프 본부로 옮긴다. 이에 본부는 3호기의 기동 실험을 갖게 되고, 기체의 파일럿으로 스즈하라 토우지가 지정된다. 사도에 감염된 3호기의 기구한 운명은 다들 잘 알고 있을 테니, 여기선 3호기의 코어 얘기를 좀 하자. 3호기의 코어 안에는 누가 있을까? 작중에서 따로 언급된 부분은 없으나, 토우지의 어머니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 근거를 찾기 위해 우선 토우지가 소속된 2-A에 대해 알아보겠다.

현재 신지가 다니고 있는, 3도쿄 시립 제1중학교 2학년 A반은 아주 특별한 반이다.마르두크(Marduk) 기관에 의해, 반 전원이 예비 파일럿 후보로 등록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 에바 3호기에 탑승하게 되는 포스 칠드런은 필연적으로 이 2-A반 안에서 선발된다. 그러니까 애초에 3호기의 파일럿은 ‘2-A반의 누군가이며, 다만 토우지가 그 중에서 거르고 걸러 선택된 것이다.

명탐정 스파이 카지

그런데 잠깐, 마르두크 기관은 대체 뭐 하는 곳일까? 마르두크 기관은 표면적으로는 에반게리온 파일럿에 적합한 아이를 뽑기 위한 일종의 협회이다. 그러나 15화에서 카지의 조사에 의해 드러난 바와 같이, 실제로는 108개의 유령 기업으로 구성, 존재도 하지 않는 기관이었다. 결국, 마르두크는 네르프가 에바 파일럿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드러날 수 있는 문제를 감추기 위한 위장 기관인 것이다. , 에바 파일럿을 선택하는 방법은 사회에 공개할 경우 큰 파장을 일으킬 정도로 부적절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소리가 되겠다.

걱정하는 타입 / 갈구하는 타입

그렇담 대체 마르두크는 무슨 조건으로 2-A반 학생들을 한 곳에 모은 것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우선 에바 파일럿의 조건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에바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일단 파일럿 스스로 에바에 탈 의지와 동기가 충분해야 하겠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2-A반의 특수성을 제시할 수 없다. 예컨대 켄스케의 경우, 18화에서 미사토에게 직접 파일럿이 되고 싶다고 간청할 정도로 에바에 타는 것을 원했으나 파일럿이 될 수 없었고, 정작 파일럿이 된 토우지는 오히려 에바에 타는 것을 두려워했다. 물론 단순히 타고 싶다는 것과 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토우지에겐 동생을 위해 에바를 탄다는, 나름의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은 그 경우가 매우 다르지만, 어쨌든 뭔가 더 중요한 조건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 뭐가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에바 파일럿과 2-A반 학생들이 모두 14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혹시 14살이 아니면 에바 파일럿이 될 수 없는 것일까? 내 사견으로는, 정확히 14살일 필요는 없겠지만, 평균적인 발육이나 정신 상태 등을 고려할 때, 14살이라는 나이가 에바에 탑승하기 딱 적절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또 대체로 14살이라 하면, 대개 정서적으로 예민한 사춘기인 탓에, 에바 속 정체 모를 영혼과 교감하기 좋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가 참 많은 주인공 세 명

게다가 14살은 아이들처럼 마냥 철이 없는 나이도 아니고, 어른들처럼 마음이 탁한 처세술의 달인도 아니다. 생각해 보자. 신지도, 레이도, 아스카도 사회성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레이는 말할 것도 없고, 신지 역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아스카는 겉으론 밝고 명랑하나 실은 왜곡된 프라이드로 점철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성격은 현실 사회에선 문제가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에바를 타기 위한 충분한 내적 동기를 선사하기도 한다. 아까 켄스케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사실 켄스케는 2-A반 중에선 확실히 사회성이 좋은 축에 속했다. 학급 내에서 반장을 맡은 히카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아이들에겐 굳이 에바라는 또 하나의 자신에게 기댈 이유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켄스케는 성격이 너무 좋아서 탈락(?)

히카리는 너무 정상적이라서 탈락(?)

결국 이런 조건들로 따지면, 2-A반 안에서도 켄스케나 히카리와 같이 적합하지 않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마르두크에 의해 한 반에 모인 기준은 따로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 해답은, 현역 파일럿인 신지와 아스카에게 있겠다. 바로,코어 속에 담긴 어머니이다. 신지와 아스카가 에바 파일럿이 된 이유는,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에바 속에 그들의 어머니가 담겼기 때문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결국 에바 파일럿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코어 속에 파일럿과 상성이 맞는 영혼이 있느냐는 것이다. 설정 텍스트에서도 이에 대해 에바의 코어 속에는 파일럿의 모친이 있다.’고 확실히 명시하고 있으니(영호기는 따로 얘기할 것이다.), 이것은 에바 기동의 기본 메커니즘에 속하는, 하나의 확립된 전제로 수용하는 것이 옳겠다.

 

그렇게 놓고 보니, 별로 놀라운 우연이랄 것도 없이, 작품 내에 나오는 2-A반 학생들은 모두 어머니가 없다. 켄스케의 경우 아버지만 있고, 히카리는 부모님 없이 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산다. 또 토우지 역시 여동생과 아버지, 할아버지만 있다. 결국 이 모든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2학년 A반의 학생들은 모두 어머니가 없고, 그 어머니는 에반게리온을 위한 예비 코어에 희생된 상태일 것이며, 그것이 이 아이들이 한 반에 모여 위장 기관 마르두크에 의해 예비 파일럿 후보로 불리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뭔가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가 됐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하다. 왜 애초에 이 아이들, 딱 봐도 어느 한 명 가정 형편에 여유가 없는 아이들이 사도 요격 도시인 제3도쿄에 와서 살고 있는 것일까. 자세한 전말은 알 도리가 없지만, 내가 임의로 구상한 시나리오는 이렇다. 2-A반 학생들의 어머니는 과거 가난 등의 이유로 일정한 보수를 받고 네르프의 실험에 참여한다. 그 결과는 분명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었을 테고, 해당 가족에게는 금전적 보상이나 제3도쿄 이주권 따위가 부여되었을 것이다. 정말 잔혹한 발상이 아닐 수 없지만, 이 정도 시나리오는 되어야, 어째서 2-A반 학생들 전원이 마르두크에 의한 예비 파일럿 후보이며, 또 어떻게 임의로 선택된 파일럿에게 마침 맞는 영혼, 파일럿이 14살이 되는 2015년에, 3호기의 코어 속에 존재할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리츠코 "지금 있는 후보자들 중에서."
겐도우 "네 번째를 택한다는 건가?"
"네, 당장 코어 준비가 가능한 아이가 있습니다."
"맡기겠네."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첨언하자면, 리츠코는 17화에서 파일럿 선택 문제와 관련, 겐도우에게 당장 코어 준비가 가능한 아이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대사가 의미하는 것은 결국,코어파일럿은 동시에 고려해야 할 하나의 이며 네르프에는 이미 2-A반 전원의 상성에 맞는(, 각자의 어머니가 담긴) 선택 가능한 예비 코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리츠코가 그 중에서 적절한 코어를 하나 골라 3호기에 넣으면, 그걸로 준비 완료인 셈이다.

그러고 보면 토우지 제법 생겼다.

참고로 신에바2 게임에서는 파일럿에 따라 에바 안의 영혼과 만나는 장면(레리엘 파트)이 있다. 그 때 토우지를 조종할 경우에, 그가 만나는 것은 그의 어머니이다. 확인 사살이다.

동생 만나러 가는 자상한 오빠 토우지

마치기 전에, 3호기의 코어 속에 토우지의 동생이 있다는 주장도 있어서 반박하고 간다.완본 에반게리온 해독의 저자 키타무라 마사히로 또한 이 가설의 지지자 중 한 명인데, 그는 이 주장의 근거로, 위에서 언급한 리츠코의 대사 중 당장,최근 큰 부상을 당한 토우지의 동생을 염두에 둔 발언이며, 실제로 사고 이후 토우지의 동생이 작품에 나온 적이 없음을 들어, 그녀가 의식을 잃었거나 2호기의 쿄코처럼 미친 상태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설정의 빈 부분을 오용한 무리한 추측이 아닐 수 없으며, ‘2-A반과 마르두크 기관이라는 중요 설정의 의미를 퇴색시키기 때문에 타당성이 부족하다. 마사히로는 또 하나의 근거로, 해당 대사의 리츠코 목소리 톤이 매우 불길한 느낌을 준다는 점도 들었는데, 글쎄다. 굳이 토우지의 동생이 아니어도 마르두크와 코어의 반인륜적인 비밀을 아는 리츠코가, 그렇담 발랄한 톤으로 저 대사를 쳤어야 하나? 그렇지 않아도 이미 네르프는 충분히 잔혹하다.

[에반게리온] 13. 위원회의 흑막, 에바 양산기/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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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위원회의 흑막, 에바 양산기

 

드디어 나왔다. 에바 양산기!

에반게리온 양산기는 엔드 오브 에바에서 등장하는, 마지막으로 건조된 에바 시리즈이다. 넘버링으로 따지면 5호기부터 13호기까지, 아홉 대의 기체를 제레에 의해 일곱 국가에서 건조한 것인데, 이미 언급한 대로, 양산기는 서드 임팩트 발발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고, 때문에 원래 계획으로는12대가 건조될 예정이었다고 한다.(예수의 12사도를 재현하기 위한 목적인 것 같다.) 그러나 인류 보완 계획의 일정이,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의도치 않게 얽히는 바람 숫자가 좀 부족하지만제레는 양산기 아홉 대로 서둘러 의식을 거행했다.

"S2 기관 탑재형을 9대 모두 투입하다니!"

양산기의 특징이라 하면, 그 특유의 거대한 날개도 있겠지만, 역시 모든 모델에 S2 기관이 정식으로 탑재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겠다. 초호기가 S2 기관을 섭취한 것과는 별개로, S2 기관은 앞서 4호기에 설치하려 했던 샴시엘의 코어를 추가 연구를 통해 보완한 결과로 보인다. 비록 4호기는 네바다 지부와 함께 증발했어도, 해당 자료는 제레의 의장, 킬의 본국인 독일에 온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든, 양산기에 S2 기관을 넣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후에 양산기가 서드 임팩트의 도화선 역할을 맡을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세컨드 임팩트

2.5 임팩트 (뻥)

그런데 S2 기관과 서드 임팩트 발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어서 그러는 걸까? 잠깐 기억을 되살려, 세컨드 임팩트 당시에 아담이 지닌 S2 기관이 자폭하는 바람에 남극이 증발했단 사실을 상기하자. 그것은 아담이 가진 S2 기관이 안티 AT 필드를 방사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더, 에바 4호기의 코어 실험 중에도 S2 기관에 의해 미국 네바다 지부가 증발했단 사실도 잊지 말자. 그리고 엔드 오브 에바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양산기들은 후에 그들이 지닌 S2 기관을 스스로 개방하여 안티 AT 필드를 방사, 네르프 본부 아래의 검은 달을 드러내는 역할 등을 맡는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앞서 있었던 4호기의 사고 역시, 제레의 ‘S2 기관 개방의 모의 실험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도 나온다. 진실은 불명이나, 그에 대한 제레의 직접적인 반응이 작품에 나오지 않고, 또 양산기 건조 계획이 4호기 건조와는 별도로 있었던 걸 생각하면, 4호기에 S2 기관을 무리하게 넣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다.

아무튼, 양산기는 이 S2 기관 덕분에 엄빌리컬 케이블이나 내부 전원의 도움 없이도 2호기와의 전투에 나설 수 있었다. 게다가 S2 기관이 담긴 코어라니, 그것은 사도의 코어 그 자체이다. , 양산기는 코어의 완전한 파괴 없이는 죽지 않는다. 2호기가 ‘Air’편의 전투에서 간과했던 점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코어 안에 S2 기관이 남아 있었던 양산기는 다시 부활했고, 2호기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18화에서 초호기에 쓰인 더미 시스템. REI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보인다.

또 하나 양산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파일럿이 없다는 사실이다. 에바의 기동을 위해 꼭 필요한 두 가지는 파일럿, 기체와 파일럿을 매개하는 영혼이다. 그런데 어떻게 파일럿 없이 에바가 움직일 수 있을까? 그 비밀은 바로 더미 시스템에 있다. 더미 시스템이란 쉽게 말하면 인공 파일럿기술이라 할 수 있다. 18화에서 나온 것과 같이 파일럿이 타고 있는 에바에 더미 시스템을 씌우는 방식도 있고, 아예 더미 플러그를 만들어 에바 속에 넣는 방식도 있다. 후자의 경우가 양산기에 활용된 더미 시스템이다.

더미 플러그 레이 버전이다.

더미 시스템의 핵심은, 사람의 사고 패턴이 유발하는 신호를 에바에게 보내 안에 사람이 타고 있어요.’라고 속이는 것이다. 그 방법은 특정 대상의 영혼을 디지털 정보로 환원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의 영혼을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따라서 더미 시스템은 에바를 움직이는 정도의 기능만 가지고 있다. 어쨌든 더미 시스템은 모방할 대상이 필요하며, 네르프의 경우 레이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레이가 겐도우 보는 앞에서 노란 액체에 잠기는 것도 문제의 더미 시스템을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레이의 더미는 한 번 엄하게 쓰고 난 후엔 보기 좋게 (아마도 유이에게)거부 당했고, 그 후엔 쓸 기회도 없었지만.

지금은 더미 패치 중….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네르프의 더미 시스템이 레이의 마음을 지녔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더미는 인간의 감정과 무관,본능적인 사고 패턴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미를 사용한 에바의 전투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더미 시스템은 실제로 전투에 있어선 인간 파일럿에 비해 월등한 효능을 보인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인간 파일럿이 에바 속에서 느끼는 감정을 더미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동시에, 싱크로 이후 에바가 느끼는 고통 역시 일종의 기계인 더미는 느낄 수 없기 때문이겠다. 양산기가 엄청난 부상을 입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싸울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익숙한 그 이름, 카오루

참고로 양산기가 탑재한 더미의 모델은 레이가 아니라 카오루였다. 엔드 오브 에바에서 양산기에 투입되는 더미 플러그에 카오루라고 친절하게 쓰여 있다. , 양산기의 더미 시스템은 타브리스의 사고 패턴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작품 내에서 더미 시스템은 결국 레이, 아니면 카오루 기반이다. 왜 굳이 저 두 사람의 사고를 모방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지만, 두 사람이 각각 릴리스와 아담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담과 릴리스는 닮은 부분도 많으니까, 레이와 카오루(의 더미)라면 코어의 혼과 무관하게 모든 에바와 호응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영혼을 지닌 모든 생명에겐 AT 필드가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양산기 안에 파일럿이 없다고 하여 영혼도 없다는 것은 아니다. 영혼이 없는 에바는 움직이지 않는다. AT 필드도 생산할 수 없다. AT 필드를 더러 카오루가 영혼(마음)의 빛이라고 표현한 것을 잊지 말자. 양산기 역시 엔드 오브 에바에서 AT 필드를 생성하기 때문에, 그 안에는 정체를 모를 뿐반드시 영혼은 있다. 그 정체에 대해 내 사견을 붙이자면, 나는 그것이 제레가 세계 곳곳에서 특수한 기준으로 선택한 영혼이라 생각한다. 애초에 굳이 양산기를 여러 나라에서 건조했던 이유가, ‘인류의 보완이라는 중대한 의식을 위해 다양한 인종과 유형의 인간들을 양산기들로 하여금 대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다만 제레의 더미 제작 능력이 너무나 우월하여, 더미로 AT 필드 생산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또 모르겠다. 다만 그렇게 해석하면 게임 설정 텍스트와 상충하는 부분이 되기 때문에 정설로 두기엔 무리가 있다.

뭐 하는 물건인고?

마지막으로 양산기가 들고 있는 특이한 무기 얘기도 좀 하자. 참고로 이 무기, 실제 대본에는 (무거운 창)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무거운 창이 필요에 따라 롱기누스의 창이 되기도 하며, 후에 초호기의 두 손을 뚫는 긴 창이 되기도 하는 둥, 그 형태가 자주 바뀐다는 점에 있다. 이 부분은 에바의 설정 중 가장 설명이 빈약한 부분인 탓에 늘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확실히 잡고 가자. 사실 이 무기의 정체는 공식 설정에 의해 나와 있다. 97년 엔드 오브 에바를 극장에서 상영하던 때, 에반게리온 제작 스태프들이 공동 집필한 공식 팸플릿 ‘Red Cross Book’ 안에 이 무기에 대한 설명이 있다. 다음은 해당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EOE 팸플릿 Red Cross Book

롱기누스의 창 (카피) : 양산기가 사용하는 비행 무기. 롱기누스의 창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며 그 형태와 길이를 바꿀 수 있다. (중략)이 창은 릴리스의 보완을 목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으나, 공격력에 있어선 오리지널 롱기누스의 창과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물론 제레가 대체 어느 시점에, 또 어떤 능력으로 신의 도구인 롱기누스의 창을 복제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워낙 보통이 아닌 노인들이니 그러려니 하자. 공식 설정이 그렇다고 하는 이상, 다른 가설은 힘을 쓸 수가 없겠다. 사실 위 설명에서 중요한 부분이 하나 더 있는데, 팸플릿에 따르면 오리지널 롱기누스의 창은 사도 제어를 위한 도구인 동시에 보완의 도구가 될 수도 있음을 확실히 하고 있다. 여태 저 설정의 근거를 밝힌 적이 없기에 언급했다.

양산기가 다친 부위는 아예 설정 컷으로 나와 있다.

양산기는 제레의 모든 기술을 집약한 기체인 동시에 그들의 음모를 아주 충실히 담은 기체이다.(결국 나중에는 초호기의 의지에 복종하는 녀석들이지만.) 문제가 많은 기체가 아닐 수 없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아야나미 레이의, 에바 영호기이다.

[에반게리온] 14. 아야나미 레이, 에바 영호기 ①/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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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아야나미 레이, 에바 영호기 ①

 

에바 영호기 제작 중 모습으로 추정

영호기는 프로토 타입 에반게리온으로, 아주 오랜 기간 많은 실패를 거쳐 완성된 기체이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에바를 통틀어 가장 불안정한 기체이기도 해서, 초호기 다음으로 많은 폭주를 일으켰다. 그러나 같은 폭주라고 해도 초호기의 경우엔 항상 파일럿인 신지를 위하는 쪽으로 발생됐으나 영호기의 폭주는 파일럿인 레이는 물론 주변 사람들, 심지어 영호기 스스로에게 해악이 되는 형태로 나타났다. 에반게리온에서 폭주가 결국 에바의 코어 속 영혼의 행동 영역이었음을 감안하면, 아마 영호기 폭주의 원인도 그 코어 속에서 찾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코어 얘기로 가자. 어차피 문제의 핵심은 대체 영호기의 코어 속에는 누가 있나?’이니까.

우선, 이 질문에 대한 가장 흔한 대답 중 하나는 영호기 속에는 영혼이 없다.’이다.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흔히 신에바2의 설정 텍스트 중 레이는 모친이 없어 코어 제작에 난항을 겪었다.’라는 항목을 주요 근거로 삼으나, 막상 저 설정 텍스트는 레이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사실 외에는 아무 정보도 주지 않는다. 사실, 에바 속에 영혼이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의 가장 기초적인 설정이며 그것은 리츠코, 레이 등 많은 인물들의 대사 속에서도 확실히 드러난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앞선 글들을 통해 꾸준히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선 더 다루지 않고 진행한다. 영호기 속에는 반드시 영혼이 있다. 작품은 그 영혼의 정체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진 않지만, 그와 관련하여 제법 많은 힌트를 남긴 상태이다. 함께 보도록 하자.

영호기의 영혼 문제가 화두가 되는 첫 번째 장면은 5화에서 나온다.

"영호기, 제어 불능!"

겐도우 "실험 중지, 전원을 꺼라!"

"예!"

"영호기, 예비 전원으로 전환했습니다."

"완전 정지까지 앞으로 35초!"

리츠코 "위험합니다, 물러서 주십시오!"

미사토 "그래서, 그 때의 실험 사고 원인은 뭐였어?"

리츠코 "아직 모르겠어. 다만, 추정으로는 조종자의 정신적 불안정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여."

"정신적 불안정? 그 레이가?"

"응, 그 아이치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정신이 흐트러진 상태였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모르겠어. 하지만, 어쩌면…."

"뭐 짚이는 데라도 있어?"

"설마…아니, 그럴 리 없어."

이 장면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폭주 상태의 영호기가 굉장히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도, 주먹으로 겐도우가 있는 쪽을 정확히치고 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그것을 회상하는 리츠코가 혼잣말로 설마아니, 그럴 리 없어.’라는, 누가 봐도 그럴 리 있어 보이는 대사를 날렸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 사실을 보자.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폭주 상태의 행위는 그 영혼의 행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더욱이, 당시 탑승하고 있던 레이는 겐도우에게 나쁜 감정이 없는 게 분명하고, 오히려 이후 겐도우의 뜨거운희생으로 레이는 겐도우에게 푹 빠지게 된다. 그런데 그에 반해 영호기는 겐도우를 정확히 저격하고 있었다. 겐도우는 그게 마치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가만히(사실 다칠 것 같아서 좀 움찔하긴 했다.) 영호기를 주시하고 있었다.

, 이러한 관계 설정이 어떤 경우에 성립할까? 누군가는 겐도우를 굉장히 미워하고, 겐도우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여기서 영호기의 영혼에 대한 두 가지 강력한 가설이 발생한다. 하나는 아카기 나오코, 즉 리츠코의 어머니 되는 사람이자 겐도우의 내연녀가 영호기에 있다는 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카기 나오코가 죽였던, 초대 레이가 영호기에 있다는 설.

나오코의 경우에는 자신이 사랑했던 겐도우가 본인을 험담했다는 사실 때문에 겐도우를 미워할 수 있고, 겐도우는 찔리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당연히 여길 수 있다. 초대 레이의 경우에는,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혼이 영호기 속에 유폐되었다는 것 때문에 겐도우를 미워할 수 있고, 그 경우에도 겐도우는 찔리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은 두 가설의 경중을 따지기 힘들다. 두 번째 사실로 가자.

문제의 폭주 사건을 회상하는 리츠코의 설마아니, 그럴 리 없어.’라는 대사를 보자. 이 대사로 판단하자면, 리츠코는 뭔가 확실히 아는 것은 없지만, 본인 스스로 그럴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가진 모양이다. 이 경우에도 두 가설 모두 적용할 수 있지만, 저 대사가 나온 이유가 미사토의 물음,레이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다고? 무슨 일이 있었기에?’에 대한 대답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만약 문제의 해답이 나오코일 경우, 리츠코는 저 물음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레이가 불안해? 에바 속에서 뭔가 접했던 모양이지. 그렇다면 그건 무엇? 설마 5년 전 자살한 우리 엄마?라는 다소 무리가 있는 연상 작용을 거쳐야 한다. 오히려, 리츠코는 레이를 기반으로 한 더미 시스템의 비밀을 아는 여자로 작품 내에서 큰 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저 대사는 초대 레이 가설에 좀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증거 장면으로 가자. 14화의 후반에는 영호기와 초호기에 레이, 신지가 바꿔 탑승하는 기체 상호 호환 실험이 나온다. 초호기에 탄 레이의 경우, 꽤나 긴 명상을 거치긴 하지만 어쨌든 싱크로 자체에는 문제가 없어 (아마 더미 시스템으로서)합격했으나, 영호기에 탄 신지가 문제였다. 신지가 탑승한 후, 코어의 영혼과 파일럿이 교신하는 타이밍으로 보면 될 ‘A10 신경 접속 단계에서, 신지의 머릿속에 강렬한 이미지가 주입된다.

리츠코 "어때, 신지? 영호기의 엔트리 플러그는?"

신지 "뭔가 이상한 기분입니다."

"아아…뭐야, 이거? 뭔가, 머리에 들어오고 있어…직접적으로, 뭔가가…!"

"아야나미…아야나미 레이…? 아야나미 레이의 느낌이…."

"…아냐, 아야나미, 아닌 건가?"

처음에는 신지가 알고 있는 아야나미 레이의 모습이 보이고, 때문에 신지는 그것이 레이의 느낌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느낌에 괴리감이 있음을 확인한다.(이 과정에서 신지는 이유 모를 두통을 겪는다. 이미지가 너무 강렬한 탓인 것 같다.) 그 부분에서, 상당히 괴기스러운 작화로 그려진 꼬마 레이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 영호기의 작품 내 두 번째 폭주가 발생한다.

미사토 "무슨 일이야!"

"정신 오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영호기, 제어 불능!"

리츠코 "영호기가 신지를 거절한다고?!"

"레이, 도망쳐! 레이!"

그런데 이번 폭주는 앞선 폭주와는 또 다르다. 이제 영호기는 겐도우 대신 유리 바깥에 선 레이를 타깃으로 잡고 그녀를 공격한다. 게다가, 그것만으론 부족했는지 스스로의 머리를 벽에다 계속해서 처박는 자해 행위를 시작한다.

그런데 사실 이 파트에서 우리가 진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하나는, 레이가 영호기의 공격을 받는 와중에, 겐도우보다 훨씬 더 담담한 태도로 그 사실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레이는 겐도우랑 달리 움찔하지도 않는다. 거의 죽이고 싶으면 죽여.’ 수준의 태도.) 또 하나는 그 폭주에 대한 리츠코의 반응이다. 영호기의 시야에 리츠코는 제대로 보인 적도 없는데, 리츠코는 혼자서 영호기가 죽이려 했던 것은 나야, 틀림없어.’라는 의미심장한 방백을 남긴다.

우선은 폭주 그 자체에 대해 조명하자. 이번의 사건을 통해 영호기가 증오하는 대상에는 레이,영호기 그 자신이 추가됐다. 이 부분 역시 두 주요 가설에서 모두 설명이 가능하다. 나오코라면, 애초에 레이를 한 번 죽인 전력도 있으니, 레이라는 존재 자체를 증오할 법도 하다. 게다가 이미 스스로 삶을 포기한 사람이니, 영호기라는 새로운 자신을 파괴하고 싶은 것도 당연할 것이다. 반면 영호기가 초대 레이라면, 자신의 모습을 한 또 하나의 자신에게 묘한 혐오감을 느낄 법도 하다. 또 자신의 영혼이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유폐되었다는 사실이 그녀 스스로를 자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레이의 반응은 어떨까? 레이는 정말로 이 상황을 ‘무덤덤하게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워낙에 감정 없는 레이이긴 하지만, 미사토가 피하라고 했음에도 그 명령에 따르지 않고,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영호기를 똑바로 주시했다. 나는 그것이, 레이는 이미 충분히 영호기의 영혼과 오랜 기간 얽힌 상태(레이는 영호기와 싱크로하기 위해 7개월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이며,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연출은 영호기가 나오코라서, 레이가 명백히 피해자인 경우보다는, 본인의 입장이 좀 애매한 위치에 있어서 그래,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 후 리츠코의 반응도 재밌다. 분명 이 상황에서 리츠코는 영호기와 엮일 여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찔려서 영호기는 분명히 날 죽이려 한 것이다.’라 말하고 있다. 만약 코어 속에 있는 것이 그녀의 어머니이고, 리츠코가 이 상황에서 그에 대해 일정 부분 예측한 상황이라면, 그녀의 찔림은 풀어 쓰면 나는 지금 어머니가 과거에 사귀던 남자랑 관계를 맺고 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야.’라는 상당히 무서운 내용이 된다. 그보단 차라리, 그녀가 담당하고 있는 더미의 하나인 레이가 나를 증오하고 있을 거야.’라는 찔림이 훨씬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기호 1. 아카기 나오코?

어쩐지 이 글의 논조가 영호기 코어에 있는 것은 나오코가 아니라 초대 레이이다.’ 쪽으로 흐른다고 느낄 것 같다. 그렇다면 절반은 들킨 셈이다. 나는 영호기에 있는 것이 아카기 나오코라는 생각에는 반대한다. 참고로 이 가설은 얼마 전 3호기 얘기를 할 때에도 언급한 적 있는,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의 저자 마사히로가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는 설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이 가설을 팬이 모르고 있을 뿐 너무나 당연한 공식 설정 정도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그 정설을 확실히 반박하고 가겠다.

사실 이 가설의 가장 중요하고 커다란 허점은, 겐도우가 나오코를 영호기에 넣을 이유가 없다는 데 있다. 아니, 넣을 이유가 없는 것을 넘어, 영호기에 넣을 영혼 중 가장 피해야 할 하나가 있다면 그게 바로 나오코가 아닐까? 영호기의 코어 속에 나오코가 있다면, 그 파일럿인 레이와 마찰을 일으킬 게 너무 뻔하다. 그 땐 파일럿이 레이가 아니라 리츠코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영호기의 폭주 당시 그 대단한겐도우가 이성을 잃었다는 것은 문제의 폭주가 당연한 것이 아니다란 의미이며, 만약 겐도우가 굳이 나오코를 영호기 코어에 유폐했다면 그 사건은 당연한 것이 되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 영호기에 나오코가 있다는 주장은 작품 설정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비극 드라마에만 집착한 가설이며, 따라서 절대로 정설이 될 수 없다.

기호 2. 초대 레이?

그렇다면, 해답은 남은 후보인 초대 레이가 되는 걸까? 미리 말하자면,정확히 초대 레이는 아닐 것이다. ‘초대 레이 가설은 그 나름으로 나오코 가설 정도의 오류와 모순을 안고 있다. 초대 레이도, 2대 레이도 릴리스의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호기에 있는 것이 초대 레이라면, 릴리스의 영혼이 동시에 두 개가 존재하는 망측한 사태가 발생한다. 글이 너무 길어진 탓에, 여기서 잠깐 쉬고 가자. 그러고 나서, 에반게리온이 우리에게 준 영호기 코어에 대한 힌트몇 가지를 더 살피고 난 후, 최선의 결론을 한 번 얻어 보자.

[에반게리온] 15. 아야나미 레이, 에바 영호기 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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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야나미 레이, 에바 영호기 ② 

 

많이 쉬셨을 테니 바로 다음 장면으로 가자. 설명할 내용이 상당히 많다. 우선 23화에서, 사도 알미사엘이 영호기와 동화하여 레이의 마음에 침투한다. 이 때 레이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레이 "…누구? 나? 에바 안에 있는 나?"

"아냐, 나 외에 또 누군가를 느껴. 당신, 누구?"

이 장면에서 레이가 만난 것은 결국 에바 속의 자신이 아니라 사도였지만, 그렇다고 이 대사를 그냥 넘기면 곤란하다. 이것은 레이가, 평소에 에바 속에서 본인이 아닌 또 하나의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에바 속에는 최소한 레이와 연관성이 짙은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만약 영호기 속에 있는 것이 나오코였다면, 레이가 에바 속에서 또 하나의 자신을 의식할 이유도, 또 애초에 저런 연출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장면이 게임 속에서 나온다. 앞서 3호기에 대한 얘기를 할 때, 파일럿이 에바 속의 영혼과 마주하는 이벤트가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 때 신지, 아스카, 토우지는 모두 각자의 모친을 만나게 되지만, 레이의 경우, 14화에서 나온 괴상한 모습의 꼬마 레이가 나오며 이름 창에는 물음표가 뜬다. , 게임 설정에 따르면, 에바 영호기의 영혼은 꼬마 레이의 모습을 한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덤으로 이를 통해 14화에서 신지가 마주했던 꼬마 레이도 영호기의 코어 속 존재가 형상화된 것이 맞음을 알 수 있다.

"너는 왜 가짜 몸과 가짜 이름을 가졌니?"

결국 에바의 설정은 영호기의 코어 속에 있는 것이, ‘(특히 초대)레이와 같은 모습을 한 어떤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다만, 그렇다고 그것을 초대 레이 그 자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앞서 밝힌 것과 같이 초대 레이는 릴리스의 영혼이기 때문에 그것이 영호기에 유폐되었다면 2대 레이는 릴리스가 아닌 것이 된다.(그러나 사실 이 가정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밑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그렇다면 에반게리온의 설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어떤 해답을 낼 수 있을까?

이런 사악한 웃음, 2대 레이에겐 없었다.

결론을 먼저 말하겠다. 나는 영호기의 코어에 있는 것이,문제가 된 릴리스 영혼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에바 속에서 영혼의 분리 가능성은 이미 쿄코의 실험을 통해 확정된 것이다.(굳이 연관성을 따질 필요는 없지만 해당 실험은 영호기 코어 제작 전에 치러졌다.) 그렇다면 그 일부는 엄밀히 초대 레이와는 다르며, 구체적으로는 ‘2대 레이가 초대 레이와 공유하지 않고 있는 특정 부분이 영호기 속에 있다는 주장이 된다. 쉽게 말하면, 초대 레이(릴리스)가 지니고 있는 위험한 부분(결과적으로 나오코를 죽음으로 이끌었던)을 겐도우가 어떤 이유에서 영호기 속에 유폐했다는 것이다. 굳이 밝혀 따지자면 질투, 증오, 성에 대한 욕구 따위라 생각하는데, 그에 대해선 레이 파트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겐도우 "신지가 아닙니다. 레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초대 레이는 2004년에 제작되어 2010년 나오코에 의해 죽었다. 2대 레이는 그 시기에 제작되어 2015년 작품 내에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애초에 레이의 외관나이와는 무관하다. 인간과 소통한 경력으로 따지면 오히려 초대 레이가 우월한 수준이다. 그런데 초대 레이는 우리가 아는 2대 레이와는 확실히 달랐다. 나오코에게 겐도우의 험담을 하는 초대 레이의 대사와 표정은, 단순히 어린 아이가 어른에게 주워 들은 말의 전달이 아니라 상대의 괴로움을 즐기며 확실한 의도를 지닌쪽에 속했다. 이것은 유럽 신화의 릴리스와 그 이미지(마녀의 성품)가 일치하는 느낌이다. , 애초에 릴리스에게는 초대 레이가 지니고 있는 질투하는 여자의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나오코는 순간 그 존재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나오코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나요, 레이 양?"

레이 "쓸 데 없는 참견 말아요, 할망구야.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상관하지 마요, 할망구야."

"사람을 함부로 할망구라 부르는 거 아니에요, 이카리 소장님께 혼내시라고 말씀 드린다?"

"그치만 당신 할망구 맞잖아요."

"할망구는 고집이 세.

할망구는 이제 쓸모 없어."

"소장님이 그렇게 말한 거야."

초대 레이의 할망구 발언, 겐도우가 그렇게 하도록 시켜서 그랬다는 설도 많지만, 나는 초대 레이가 릴리스의 비범한 능력 따위로 겐도우와 나오코의 생각을 읽었거나, 그게 아니어도 최소한 본인의 의지로 나오코를 험담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카오루 또한 인간의 육체에 아담의 영혼을 가진, 레이와 꼭 닮은 존재였지만 그는 그 덕분에 먼 곳에서 자신을 관찰하는 미사토의 존재를 의식하고, 공중에 붕 떠서 도그마로 하강하는 등,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렇다면 레이 또한 인간의 영역을 넘은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동시에 영호기 코어=초대 레이의 일부가설이 맞다면, 2대 레이(완전한 릴리스의 영혼이라고 볼 수 없는)가 그런 능력을 제대로 보일 수 없었던 이유도 함께 설명 가능하다. 게다가 만약 겐도우가 레이에게 일부러 저 말을 하도록 시켰다면, 그건 겐도우가 나오코가 레이의 말을 듣고 화가 나 레이를 죽이고 본인도 자살할 것이다.’란 사실까지 예견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신의 영역이다. 사해 문서에도 그런 건 안 나와 있을 것이다.

"너 따위…죽어도 대신할 게 있다구, 레이…나랑 똑같이."

이 시점에서 잠깐 겐도우의 입장이 되어 고민을 해 보자. 초대 레이에 있는 것은 릴리스의 영혼이고, 릴리스의 영혼은 꼭 필요한 보완의 재료이다. 하지만 처지가 이렇게 되니, 남은 5년 동안 그 영혼을 보관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초대 레이가 나오코를 죽였던 만큼 2대 레이가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누가 알겠는가. 릴리스는 생각했던 것에 비해 까다로운 영혼이었다. 그렇다면 그 때 겐도우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영호기 속에 초대 레이의 문제가 된 부분을 유폐하고, 남은 부분으로 2대 레이를 만들어, 그녀에게 초대 레이가 가지고 있지 않은(혹은 잃었을) ‘어떤 감정을 가르친 후에, 보완 직전에 다시 그 둘을 융합한 ‘3대 레이를 만드는 것이 되겠다.

레이 "이게…눈물이야…흘리고 있는 건…나?"

가만히 보자. 2대 레이는 탄생한 후 겐도우에 대한 사랑을 배웠고, 죽기 직전에 외로움 눈물을 배운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인류의 보완에 대한 욕구의 완성일 것이다. 그 때 마치 그걸 기다렸다는 듯 겐도우는 초호기를 보내 초호기의 파일럿인 신지를 원하는 마음을 깨닫게 하고(다만 그게 너무 심한 게 탈이었다.), 역할을 마친 2대 레이는 영호기와 함께 숨을 거둔다. 그 두 영혼은 3대 레이 속에서 융합되어 부활하고, 겐도우의 생각엔, 보완을 위한 최선의 레이가 완성된 것이었다. 초대 레이에서 3대 레이까지, 단순히 영혼이 연속적으로 존재했다고 보기엔대 레이와 2대 레이의 명확한 다른 점도 설명하기 어렵고, 원대한 보완 계획에 있어 위험한 부분도 많았을 것이다.

카오루 "네가 바로 퍼스트 칠드런, 아야나미 레이네, 너는 나랑 같구나."

레이 "당신, 누구?"

한 단계 더. 애초에 24화에서 카오루가 동질감을 느꼈던 레이는 3대 레이였고, 비교적 짧은 시간 등장한 3대 레이 또한 대 레이와 같이 어딘가 비범한 구석이 있다. 카오루가 도그마에 도착했을 때, AT 필드 결계로 외부와의 연결을 막은 그 공간에 레이가 갑자기 나타나 신지와 카오루를 보고 있었고, 엔드 오브 에바 마지막에 신지 앞에 가만히 모습을 나타낸 것도 3대 레이였다(더 있지만 그건 레이 파트에서 따로 다루겠다.). 이것은 결국 보완을 시행하게 될 3대 레이 속에는 릴리스의 영혼이 온전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덕분에 레이는 다시 비범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단 소리이다.

신지 "아야나미는, 왜 이걸 타는 거야?"

그렇게 놓고 보면 2대 레이는 결여된 마음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능력을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아까 2대 레이가 릴리스의 영혼이 아닐 수 있다는 언급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미 레이=릴리스라는 공식을 체화한 상태라 혼란을 느끼긴 하겠지만, 사실 모든 레이가 릴리스의 영혼을 가졌다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다. 그 많은 레이 중 2대 레이 하나가 예외, 릴리스가 아닐 가능성,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다면 2대 레이가 초호기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카오루는 아담 베이스인 에바를 싱크로 없이도 자유롭게 움직였다.)릴리스의 영혼을 가진 레이를 아담 베이스인 영호기에 태울 수 있었던 겐도우의 배짱에 대해서도 꽤 자연스럽게 설명이 된다. 다만 역시 레이=릴리스공식을 깨면서 가설을 제창하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에, 나는 초대 레이(릴리스)의 일부정도로 양보한 것이다.

25화 中 초대 레이 "봐, 너의 몸 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있지?"

14화의 레이에 대한 언급 중 이런 부분이 있다. 아야나미는 스스로의 존재를 희박하게만 느끼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레이에게 사회성이 없다는 것을 떠나, 그 존재 자체에서 구멍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이며, 동시에 이 사실은 작품 내내 2대 레이의 자기 성찰 속에서 암시되는 부분이다. , 2대 레이의 구멍에 해당하는 부분은 영호기 안에 있었으며, 2대 레이에게 있어 그 부분은 굉장히 아프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부분인 동시에, 한편으론 그 때(영호기에 탑승한 때)유일하게 ‘진짜 자신이 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녀가 에바에 타는 이유를 더러 모두와의 연결 고리라고 표현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3대 레이 "아니, 몰라…아마 나는, 세 번째인 것 같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3대 레이는 깨어난 후 스스로를 아마 세 번째라고 밝혔다. 나는 처음에 이 부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그 때의 레이는 본인의 순번까지 꿰뚫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겐도우나 리츠코가 쓸 데 없이 너는 세 번째 레이야.’라 가르쳐 줄 리도 없고 말이다. 그러나 만약 2대 레이가 영호기와 그 영혼을 나누어 가진 탓에, 릴리스 영혼의 흐름에 결여된 부분이 있다면, 3대 레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스스로가 특정한 두 번의 변화를 거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엄빌리컬 케이블'에서 '엄빌리컬'탯줄을 의미한다.

에바의 코어 속 영혼은 기본적으로 파일럿의 모친이라고 한다. 어머니와 자식 관계가 영혼의 싱크로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왜? 단순히 모성이 강하기 때문에?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이유겠지만, 나는 그것이, 어머니와 자식은 하나의 몸 안에 두 개의 영혼을 지닌 바 있는 유일한 관계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에바라는 하나의 몸 안에서, 파일럿과 코어 속의 영혼이 공존하는 것과 꼭 같은 상황이다. 레이의 경우, 모친이 없기 때문에 코어를 만들기 어려웠던 건 맞지만, 굳이 어머니와 자식에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만들려고 한다면, 하나의 몸 안에 있었으나 두 개로 나뉜, 2대 레이와 나머지 부분을 지닌 영호기의 관계가 가장 적당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호기를 포함한 모든 에바 기체의 코어와 파일럿의 관계를 꽤나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

이제 앞서 보았던 작품 속 힌트를 다시 검토하고 가자. 두 번의 폭주를 통해 초대 레이의 일부는 겐도우와 2대 레이,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리츠코에 대한 영호기의 악감정은 실증이 없고, 다만 리츠코가 더미에 대해 느끼는 죄책감을 드러내는 연출로 보인다. 특히 두 번째 폭주에서, 영호기가 스스로를, 또 레이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어느 한 쪽이 죽지 않으면 하나의 영혼으로 합일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신지가 기체 교환 테스트에서 레이는 아니되 레이의 이미지를 지닌형상을 본 것도 그것이 초대 레이의 일부이기 때문이며, 게임 상에서 그 존재가 물음표라고 표시된 것은 사실 그 존재를 명확히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엄밀히 초대 레이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보완(TV 25화, 엔드 오브 에바) 3대 레이의 마음에 초대 레이와 2대 레이가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것도 초대 레이가 단순히 죽고 2대 레이에게 그 영혼을 넘긴 것이 아니라, 2대 레이와 함께 영호기 속에 남았다가 3대 레이에게 온전히 주입된 덕이 아닐까? 또 보완 중에 세 명의 레이가 대화할 때, 초대 레이가 날카롭고 완전한 릴리스의 느낌으로 2대 레이에게 말을 거는 연출도 중요한 부분이겠다.

1+1=1

이 가설이 맞다면 겐도우에게는 아마 릴리스의 영혼을 특정 부분만 분리하는 기술이 필요했을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니겠지만 이미 쿄코의 전례가 있었으니 불가능한 설정은 아닐 것이다.(애초에 영혼을 샐비지 하는 것 자체가 판타지) 그렇다면 게임 설정에 나온 영호기의 코어를 만드는 데 겪었던 어려움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일 것이다.

사실 영호기의 코어에 대한 고찰은 레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고찰과 직결된다. 예를 들어 이의 이름이 상징하는 '영'이 이미 영호기의 이름 안에 속하고 있다는 사실도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겠다. 레이에 대한 내용은 너무 많은 탓에 그녀에 대한 더 자세한 부분은 또 미뤄야 하고, 반대로 그 때 이에 대한 몇 가지 단서를 추가 언급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읽느라 수고 많으셨다. 에반게리온 기체와 그 영혼의 비밀에 대한 얘기는 이 정도로 마치기로 하자.

[에반게리온] 16. 제레, 게히른, 네르프, 그리고/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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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레, 게히른, 네르프, 그리고

 

세컨드 임팩트로 인해 발생한 재앙과 정치 분쟁 등으로, UN은 종합 군대 운용 집단 수준으로 전락했고, 그 바탕에는 알 수 없는 의도 속에 세계를 주무르고 있는, 제레라는 비밀 조직이 있다. 독일어로 영혼이란 의미를 지닌 제레는 총 15명의 멤버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극 내내 모습을 비추는 멤버는 12이 맞지만 리뉴얼 24화의 딱 한 장면, 카오루를 마주할 때만 15명의 멤버가 등장한다. 사실 설정 자체는, 예수의 12사도를 상징하는 12명이 맞고 후에 추가된 24화의 장면은 작화 오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 제레를 15명으로 만든 이 장면이 제레의 구성원 숫자 외에도 제법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만드는 탓에 후에 카오루 파트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제레 올 스타즈 스페셜?

제레의 구성원은 의장, 가끔 우리에게도 비싼 얼굴을 보이는 네 명의 멤버, 그리고 얼굴도 나오지 않는 나머지 멤버들이다. 이 중 얼굴을 보이는 다섯 명의 경우, 가끔 제레 안에서도 주요 회담을 할 때 모습을 비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제레하면 딱 떠올리는 이미지인 모노리스 형태로만 등장한다. 숫자만 쓰인 돌덩이 말이다. 모노리스에 쓰인 숫자는 의장 킬이 1번이고, 그들의 설정 모델이 프리메이슨인 점을 생각해 보면 그건 아마 가입 순서나 지위의 순서가 아닐까 싶다.

제레의 의장 로렌츠 킬!

제레의 기원과 정체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자체가 설정이다. 다만, 확실한 건 그들이 전 세계의 정부를 포함하여 UN을 손 안에서 굴리고 있으며 문제의 시나리오(반 농담으로 진짜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수준인 모양이다.) 이면의 사해 문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문서는 두 개의 달, 두 종류의 씨앗, 롱기누스의 창, 그리고 사도의 숫자와 정보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사해 문서에 에반게리온에 대한 정보도 담겼단 소리가 있는데 그건 루머이다. 참고로 현실에서 이 사해 문서1947년 발견된 것으로, 실제로 과거에 그 일부를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은 전력이 있어 에반게리온이 아니어도 꽤나 질척한 음모론을 만들었다는 후문.

왼쪽에 안경 쓴 양복 노인이 킬이다.

그렇담 이 제레의 의장, 로렌츠 킬은 어떤 사람일까? 우선 그는 얼굴 밑으로는 기계 인간인 모양이다. 이것은 엔드 오브 에바에서 보완이 진행될 때, LCL로 환원되고 남은 그의 옷 속에 인공 척추를 포함하여 상당한 양의 기계가 남았다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킬이 쓴 안경 비슷한 것도, 실제 그의 눈을 대신하는 정밀 기계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킬의 나이가 겉보기에 비해 훨씬 더 많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덕분에 제레라는 조직이 죽지 않는 기계 인간의 모임이며 보완을 위해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렸다는 설도 나오고 있으나 공식 설정은 아니므로 믿거나 말거나. 제레의 다른 멤버들 몸은 엔드 오브 에바에서 비추지 않았으니, 미래의 기술로 킬만 온 몸에 기계 떡칠을 했을 수도 있다.

로렌츠 킬의 진실

여담인데, 엔드 오브 에바에서 킬의 몸을 드러낸 연출은 조금 다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제레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인류 보완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통해 속죄를 바란다고 했지만, 킬이 저런 구질구질한 방법으로 삶을 연명하고 있는 걸 보면, 사실 그는 작품의 누구보다도 산다는 것에 집착한 인물일 수 있다는 거다. 킬이 몸 안에 꽁꽁 숨기고 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보완이 시작된 후에야 아무도 모르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물론 억지로 목숨을 연장해서라도 인류 보완을 이루고자 하는 제레의 의지를 나타낸 연출이라는 쪽이 공론이다.

인류 보완 위원회의 위엄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가서, 위에 언급했던 멤버 다섯 명의 주요 회담에 대한 얘기를 하자. 그 회담은 별칭 인류 보완 위원회 특별 소집 회의, 제레 중에서도 최고 간부 다섯 명이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는 중요 모임이다. 작품 전체에 걸쳐 딱 다섯 번 나온다. 그 다섯 자리에는 각각의 색깔이 있고, 그것은 멤버들의 출신 국가를 의미한다. 먼저 흰색은 독일의 킬, 노란색은 프랑스(후유츠키의 성우 모토무가 간사한 느낌의 목소리로 열연한 덕에 인지도가 높은 멤버), 파란색은 러시아, 초록색은 미국, 빨간색은 영국이다. 작품 속에서 국적이 확실히 나타나는 멤버는 14화에서 언급된 미국 하나(멤버들이 미국에게 징징대지 말라는 부분이 있다.)이고, 나머지 정보는 컬렉션 북에 기술된 내용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다섯 국가 중 네 개의 국가는 실제 UN 안전 보장 이사회(상임이사국)의 회원국이다. 중국이 없는데, 대신 독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째서 회의를 이런 음침한 곳에서 하는지에 대해선 불명

그 중에서 의장 킬의 출신 국가, 독일은 에반게리온 안에서 꽤나 비중이 큰 편이다. 우선 독일은 세컨드 임팩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 중 하나, 네르프 제3지부가 독일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거 카지와 미사토가 이 독일 지부에서 일했다. 에바 2호기의 파일럿 아스카도 독일에서 출생, 파일럿 훈련도 독일에서 받았다.

성경에서 일곱 개의 눈은 '완전한 앎'을 상징한다.

, 이 정도가 에반게리온에서 제레라는 조직을 물고 뜯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전부이다. 그저 제레라 하면, 재력은 물론 권력, 기술이 너무 대단해 에반게리온 설정의 구멍 막이라 보면 되겠다. 뭔가 현실적으로 힘들 것 같을 때 제레가 했다.’ 하나면 .’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정도. 그러니 이제 제레는 됐고, 하부 조직인 게히른과 그 후속 조직 네르프에 대해 살펴보자. 다만 제레에 비해 다들 아는 것이 많을 테니 간단하게만 짚고 가겠다.

아카기 나오코는 게히른의 1등 멤버였다.

세컨드 임팩트 이후, 제레가 가장 큰 힘을 쏟았던 조직은, 독일어로 ‘두라는 의미를 지닌 게히른이었다. 게히른은 에바의 개발을 위한 조직으로, 마기, 3도쿄 건설(지금의 네르프 본부 포함)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수장에 이카리 겐도우, 수석 과학자에 아카기 나오코로, 당시 게히른의 존재는 철저한 비밀 사항이었던 탓에, 세간에는 UN의 부속 기관 인공 진화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어째 그 이름이 오히려 게히른의 핵심을 찌르는 것 같지만. 게히른이 주요 임무를 완료한 후, 조직은 해체되고 그 대신 특무 기관 네르프라는 수행 조직이 등장, 게히른의 기존 임원들은 모두 네르프 소속이 된다.(그냥 게히른이 이름만 바꿨다는 소리.)

게히른이 바탕 작업을 맡은 조직이었다면, 세계에 총 일곱 지부를 두고 있는 네르프의 궁극 목적은 인류 보완 계획이다. 게히른과 네르프의 가장 큰 차이는, 게히른이 절대적으로 비밀 조직이었던 것에 반해 네르프는 표면적으로나마 사도 대항을 위한 공개 조직이란 사실이며, 안에는 제법 많은 부서(홍보부도 있다.)가 존재하고 상당한 수의 직원들이 입사, 나름의 신념을 걸고 인류 평화를 위한 일에 전념했다.

네르프의 상징에 대한 얘기도 좀 하자. 우선 네르프의 이름은 역시 독일어로, ‘신경’, ‘조직’,어떤 것에 맞서는 배짱등의 의미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의미가 네르프라는 조직의 역할과 가장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지혜의 열매를 상징하는 느낌의 게히른이란 이름과 상통하는 네이밍 센스.

네르프의 로고 디자인도 보고 가자. 붉은 잎의 정체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알게 된 이브가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엮어 입었다는 내용이 있다. 죄의식의 아이콘 제레와 네르프에게 딱 어울리는 상징이다. 엠블럼에 나오는 문구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피파가 지나가다의 끝 부분으로, 국내 도서 번역에는 하나님은 그 하늘에 계시며 모두 이 세상은 아무 일 없노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뭐랄까, 원문의 의미(고마워요 하나님, 덕분에 세상에 평화가 가득해요.)에 비해 좀 더 시니컬한 의미(하나님은 혼자 놀고, 세상은 잘도 굴러가네.)로 사용된 것 같다.

함장 "장난감(2호기) 하나 나르는 데 굉장한 호위를 하는 구만. 언제 UN이 택배 업체로 전직한 겐가?"

"모 조직이 결성한 뒤라고 기억합니다만……. 의회도 저 로보트에 기대를 걸고 있답니다."

"저런 장난감에 말인가? 멍청이들! 그럴 돈이 있으면 여기로 좀 줄 것이지!"

네르프는 공식적으로 ‘UN의 하부 조직이나 실질적으론 자금 지원만 받을 뿐 오히려 권력 자체는 UN의 우위에 있다는 느낌인데, 이는 제레가 UN을 지휘 하에 두고 있던 덕분이다. 8화에서 UN의 병력이 네르프의 장난감 운송 서비스 따위로 쓰이는 것을 보고 탄식하는 해군 함장의 대사는 네르프의 위치를 잘 설명하고 있다. UN 본부는 편의를 위해 그 위치도 네르프 본부 근처로 옮겼다.(21화의 신문 기사 내용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제레가 네르프를 받쳐 줄 때에만 가능하다. 제레가 등을 돌린 네르프의 최후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사도가 지구를 침략할 때가 곧 네르프의 전성기인 것이었다. 당초, 그러기 위한 네르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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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 주요 연표]

BC 40억 년

아담, 지구 도착

릴리스, 지구 도착

퍼스트 임팩트

1947

사해 문서 발견

195649

후유츠키 출생

1967429

로쿠분기 겐도우 출생

1977330

이카리 유이 출생

1985

617일 카지 료지 출생

1121일 아카기 리츠코 출생

1986128

카츠라기 미사토 출생

1991711

이부키 마야 출생

1999

후유츠키와 이카리 유이 만남

후유츠키와 겐도우 만남

이카리 유이와 겐도우 교제

2000

912일 카츠라기 조사대 소속 겐도우, 데이터만 들고 일본 복귀

913 세컨드 임팩트

카츠라기 박사 사망

나기사 카오루 출생

915일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 전쟁

920일 원자 폭탄에 의해 구 동경 파괴

2001

214일 밸런타인 조약 체결, 전쟁 종결

66일 이카리 신지 출생

912일 켄스케 아이다 출생

124일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출생

1226일 스즈하라 토우지 출생

2002

UN 조사대 남극 파견. 겐도우와 후유츠키 소속

218일 호라키 히카리 출생

2003

에반게리온 건조 시작

마기 계획 발안

후유츠키, 겐도우 권유에 게히른 가입

중국과 베트남 전쟁

일본 전략 자위대 창설

2004

이카리 유이 사망

이카리 신지, 겐도우와 별거 및 선생님과 동거 시작

겐도우, 인류 보완 계획 발안

초대 레이 탄생

2005

소류 쿄코 제플린 사망

아스카 파일럿 훈련 시작

2도쿄 대학에서 미사토, 리츠코와 첫 만남

미사토, 카지와 동거 시작

3도쿄 건설 시작

2007

UN의 본부 제2도쿄로 이전

미사토, 애인인 카지가 아버지와 닮았다는 이유로 이별을 고함

2008

마기 건조 착수

리츠코는 제2도쿄 대학 졸업 이후 게히른에 가입

2010

미사토와 카지, 독일 게히른에 소속

마기 완성, 같은 날 나오코와 초대 레이 사망, 레이는 나오코에 의한 교살, 나오코는 자살

네르프 탄생

2012

이카리 신지, 어머니 무덤에서 8년 만에 아버지와 재회

2014

아야나미 레이, 3도쿄 중학교 입학

아스카, 대학 졸업

엔트리 플러그 제작 완료

2015

사도, 내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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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 17. 사도, 내습/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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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사도, 내습 

 

2015, 드디어 세 번째 사도이자 아담의 첫 번째 후손인 사키엘이 나타난다.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기본 틀은 인간이 사도의 습격에 대항하는 것인 만큼 인 사도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은 작품 이해에 있어 꼭 필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사도에 대한 것은 에반게리온의 다른 설정들에 비해 그 묘사와 작품 속 설명이 상당히 명확한 편이라 이 공간에서는 많은 팬들이 모르고 있거나 간과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짚고 가는 것으로 하겠다. 여기서는 우선 네르프에 내습, 타브리스 제외 열 네 사도에 대한 것만 다루기로 한다.

제3사도 사키엘

사키엘의 기획서 단계 설정. 귀여움 따위 없다!

우선 제3사도 사키엘이다. 물의 천사로, 사도 중에서 아담, 그리고 에반게리온과 가장 닮은 형태이다. 사키엘의 디자인은 에바 파일럿의 플러그 수트와 상당히 닮은 느낌이라 과거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팬들이 많았다. 얼굴의 두 눈이 깜박이는 모습이 상당히 귀여운 덕에 사도 중에서 단연 인기 최고라 할 수 있다. 물의 천사라는 이름에 충실하기 위해 물에서 등장하며, 실제로 기획서에 나오는 초기 사키엘 컨셉은 누가 봐도 물의 사도, 맞다.

제4사도 샴시엘

4사도는 다리 없는 오징어를 닮은 샴시엘이었다. 사키엘 퇴치 3주 후에 등장한다. 낮의 천사라고 하는데 딱히 그와 연관된 연출 컨셉은 없었다. 혹자는 낮의 천사라서 낮에 왔다고 주장하나 그렇게 따지면 모든 사도가 낮에 왔다. 아무튼 샴시엘은 후에 4호기와 양산기에 넣을 S2 기관을 선사한 중요한 사도였다. 선배인 사키엘이 대체로 방어적인 모습을 보인 것에 비하면 샴시엘은 보복이라도 하듯 초호기를 공격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하필 그 땐 신지 쪽이 훨씬 더 적극적이었던 탓에 패배.

제5사도 라미엘

9화에 나온 라미엘의 잔해

기획서 단계의 라미엘

다음은 제5사도 라미엘이다. 번개의 천사로, 사키엘과 함께 두 에피소드 연속 출연자인 덕에 존재감이 상당히 우월한 편이다. 움직일 때 마치 성악을 하는 듯 요상한 공명음이 울린다. 추상적인 예술 작품을 보는 느낌에 그리기도 쉬운 덕에 사키엘과 함께 사도 중에서 인기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라미엘은 크기도 상당히 커서, 6화 때 격퇴한 이후 9화까지 잔재로 남아 출연한 바 있다. 라미엘의 독특한 디자인에 대해 많은 에바 팬들은 라퓨타에 나오는 거대 비행석을 모델로 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 안노 감독이 진작 디자인 모티브를 밝힌 상태이다. 바로 1983년 애니메이션 미래 경찰 우라시맨('출동! 러쉬맨'이란 제목으로 1993년 MBC 방영)47화에 나오는 메카닉인데, 딱 보면 , 라미엘 맞구나, 싶을 것이다.

미래 경찰 우라시맨의 장면

6사도는 가기엘, 물고기의 천사이다. 아스카의 데뷔 무대를 멋지게 장식했던 사도로, 이후 다수의 후배들과 함께 신극장판에서 짤리는 비극의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제6사도 가기엘

가기엘의 코어는 저 안에 있다.

제7사도 이스라펠

7사도인 이스라펠은 음악의 천사로, 몸을 둘로 나누는 특수 능력이 있었다. 간과하기 쉽지만 이스라펠은 에반게리온 세계관의 영혼 분리 가능성의 근거로 들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둘로 나뉘기 전의 이스라펠의 얼굴(?)은 태극 문양이었다.

제8사도 산달폰

8사도는 태아의 천사, 산달폰이다. 이름 그대로, 마그마 속에서 미처 부화하지도 않은 태아 형태로 발견되어, 연구를 위해 포획하려다 실패한 2호기에 의해 숨을 거두었다. 산달폰은 인간의 성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은 천사이기도 한데, 해당 에피소드의 주요 주제 중 하나가 이었단 사실을 엮어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제9사도 마타라엘

마타라엘은 정말 울고 있는 것일 수도….

9사도는 비의 천사 마타라엘이다. 6사도 가기엘 이후 실적이 영 부진했던 선배들의 무능력 논란에 정점을 찍은 사도였다. 생긴 건 거미를 닮았고 코어의 위치는 불명이나 알 필요도 없이 라이플 총에 맞고 사망했다. 참고로 전략 자위대는 이 녀석을 더러 제8사도라 칭하고 있는데, 이것은 제레와 겐도우가 2사도인 릴리스의 존재를 외부에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연출이었다. 안노가 저 정도의 힌트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란 것이 새삼 무섭다.

제10사도 사하퀴엘

기획서 단계의 사하퀴엘, 너무 다르다!

10사도는 사하퀴엘이다. 하늘의 천사로, 이름과 같이 하늘 위에서 천사와 같이 등장했다. 기획서 설정 단계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인 사도 중 하나로, 후에 제루엘의 팔로 활용된 휴지 컨셉의 몸은 본래 사하퀴엘의 전투가 어떤 모습으로 기획된 것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사하퀴엘의 전략은 결국 폭탄 그 자체인 몸을 네르프 본부에 부딪쳐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식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서드 임팩트가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그 진의를 파악하긴 어렵다. 설정이 말하는 아무 생각 없는 사도중 하나가 이 녀석일 수도 있겠다. 다만 후발 주자인 이로울이 사하퀴엘의 몸에 기생하고 있었다는 흥미로운 주장도 나왔으나 진실은 알 수 없다.

제11사도 이로울의 AT 필드

다음, 11사도는 공포의 천사 이로울이었다. 세균 사이즈의 마이크로 머신 형태로, 해킹이라는 상당히 특이한 방식으로 침투했던 터라 네르프 입장에선 가장 큰 위기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때 카지는 네르프의 센트럴 도그마에 침입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겐도우는 제레에게 이로울이 네르프에 침투한 적이 없다며 패기 넘치는 거짓말을 한다. 네르프와 제레가 같은 편이 아니란 사실을 처음 연출한 에피소드였다. 참고로 겐도우의 이 거짓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차후 따로 다루는 것으로 한다.

제12사도 레리엘

신지+레리엘?!

12사도는 밤의 천사 레리엘이다. 눈에 보이는 둥그런 구 형태는 그림자이며 역으로 그림자 부분이 본체라는 설정. 다만 후에 초호기가 그림자라고 했던 구체에서 등장한 것은, 안노에 의하면 멋진 연출을 우위에 두기 위한 설정 허용. 사도의 내부는 허수의 공간 디라크의 바다(디랙의 바다라는 실제 물리 용어와 같은 개념이나 깊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라 한다. 네르프는 제레에게 자세한 사실을 숨겼지만, 레리엘은 가장 처음으로 에바 속 인간에게 관심을 보인 사도이다. 제작진 츠루마키의 인터뷰 자료에 의하면, 어린 신지가 신지에게 말하는 장면은 사실, 레리엘이 신지에게 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처음엔 신지에게 사도가 직접 말을 거는 식의 연출을 시도했으나 아무래도 이상한 그림이 나오는 탓에 저렇게 상징적인 선에서만 묘사를 그쳤다. 참고로, 어린 신지가 입고 있는 셔츠의 무늬는 의도적으로 레리엘의 무늬와 동일하게 그렸다. 이 정도의 힌트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스텝들이 또 새삼 무섭다.

점액균 형태의 제13사도 바르디엘

제14사도 제루엘

제15사도 아라엘, 자세히 보면 중간에 코어가 있다.

기획서 단계의 아라엘

13사도 바르디엘과 제14사도 제루엘은 상당히 유명한 만큼 여기서 따로 언급할 사항은 없는 탓에 넘긴다. 다음 제15사도는 새의 천사 아라엘이었다. 아라엘이라는 이름은 신의 빛,신의 시선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이름에 상당히 충실한 사도 중 하나였다. 레리엘에 이어 애초에 목적 자체가 인간의 심리를 관찰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앞서 레리엘이 신지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어린 신지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과 같이, 이 경우에도 아스카의 마음에 등장한 어린 아스카가 사도의 역할을 대행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후 알미사엘의 경우 역시 사도가 레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생각하자.

제16사도 알미사엘

알미사엘 "내 마음을 너에게 나누어 줄게. 이 기분, 어때? 아프지?"
레이 "아파? 아이건, 쓸한 거야."
"모르겠어."
"우린 다 같이 있는데, 넌 혼자인 게 싫은 거지? 그걸 쓸쓸하다고 하는 거야."

16사도 알미사엘, 신지를 맡은 레리엘, 아스카를 맡은 아라엘에 이어 레이의 마음에 침투한다. 알미사엘은 레이에게 자신이 느끼는 기분을 얘기하고, 그것을 아픔이라고 표현한다. 레이는 그것을 더러 아픔이 아닌 쓸쓸함이라고 사도에게 가르쳐 준다. 애초에 단일 개체로 존재하는 사도에게는 외로움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레이 또한 본인이 지니고 있던 쓸쓸함을 배우게 된다. 그 레이의 마음과 동화된 알미사엘은 레이의 모습으로 신지에게 가는 한편, 영호기를 통해 거대한 형체를 만든다.

알미사엘이 만든 '사도의 탑'

이렇게 생겼다.

이 형체는 설정에 의하면 ‘사도의 탑이라 불리는 것으로, 여태껏 나타났던 모든 사도들의 이미지가 융합된 모습이다. 이것은 곧, 알미사엘이 이미 다른 사도들에 대해 아는 것으로 생각하여 사도 간의 연계가 실제로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도 있고, 단순히 영호기가 기억하고 있던 사도들의 이미지를 알미사엘이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어느 쪽이든, 이것은 알미사엘이 레이를 통해 쓸쓸하다는 것을 배운 후, 레이의 욕구를 표출하는 동시에 본인의 욕구, 자기와 같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있는 것에 대한 바람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잠깐 나오는 연출이긴 하지만, 결국 단일 개체인 사도 역시 사실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근원적인 외로움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쓸쓸함은 사도에 대해 결코 열등한 부분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알미사엘은 자궁의 천사인데, 23화는 이에 대해 레이의 자폭 직전 영호기가 사도를 코어에 담는 모습을 임신한 여성과 같이 묘사하고도 있지만, 관련된 숨은 상징이 하나 더 있다. 다만 그 부분은 레이의 캐릭터와 연관성이 짙은 부분이라 레이 파트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사도의 얼굴

17사도 타브리스의 경우 아담의 영혼 그 자체를 담고 있으니 논외로 하고, 지금까지 아담의 자손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조금 더 본질적인 이야기로 가자. 사도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그 사도들의 조상, 아담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에반게리온] 18. 사도, 천사라는 이름의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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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도, 천사라는 이름의 적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에서 사도는 내용 전개에 있어 하나의 핵심이다. 단순히 에피소드 구조가, 주인공이 사도를 무찌르는 식이라서가 아니라, 주인공이 대항하는 천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도라는 단어는 천사와는 어감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공식적인 영어 표현으로 사도는 ‘Angel’이 맞고, 굳이 그것을 천사라고 해석하지 않아도 긍정적인 의미를 상당 부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에반게리온은 선악의 대결 구조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작품이다. 오히려, 주인공인 신지가 탄 초호기는 악마와 곧잘 대응되는 릴리스를 베이스로 만든 것이고, 오프닝에서 초호기가 펼치는 날개 또한, 대본에서 악마의 날개로 표기되는 것이니, 에반게리온은 가히 인간이라는 악마가 천사에 대항해 싸우는 내용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에반게리온이 작품 외적인 요소로도 많은 관심을 끌었던 근본 배경에는 사도라는 존재가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도란 것은 대체 정체가 뭘까?

오프닝 영상 중 초호기의 날개

작품 속에서 사도가 지칭하는 존재는 일관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17편에서 살폈던 열 네 사도는 확실히 사도에 속하고, 타브리스 또한 마지막 사도불리고 있다. 그들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아담은 첫 번째 사도로 지칭되고 있으며, 그와 동일한 지위에 있는 릴리스는 제2사도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작중에서 확실히 언급된 바는 없다. 인간인 리린은 제18사도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 역시 확실한 설정으로 볼 수 없다. 이렇게 사도라는 개념이 포함하는 대상 자체가 불명확하기 때문에 사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확실히 하기 힘든 것이다.

아담도 다리가 네 개네?

이런 사도들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그들의 조상인 아담에 대해 아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아담은 지구에 온 두 개의 씨앗 중 먼저 도착한, 생명의 열매를 지닌 존재이다. 에반게리온은 아담을 이용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유전적으로는 아담과 거의 일치한다. 릴리스 베이스인 초호기의 경우 예외라고 할 수도 있지만 초호기 안에도 역시 아담의 유전 정보가 일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확언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담은 빛의 거인이라고 불리는 만큼 그 외관이 아라엘과 같이 하얀 빛으로 가득하다. 때문에 아담의 육체적 특징은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극에 나온 아담의 모습에는 그 어깨에 구속구가 달린 상태인데, 알다시피 에반게리온 기체들도 같은 부분에 구속구를 달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더러 아담과 에반게리온 사이의 공통점을 암시하기 위한 디자인으로 생각하지만, 아담의 다른 일러스트에서는 그의 어깨에 구속구가 없다는 점을 볼 때, 카츠라기 조사대나 제레가 아담에게 인공적으로 씌운 것이라 보는 게 맞겠다.

아담은 리뷰 초기에 언급했던 것과 같이, 시조 민족이 아주 오래 전 하얀 달에 넣어 지구로 보낸 존재였다. 그러나 아담이 자신의 임무를 채 완료하기도 전에 검은 달이 지구에 추락했고, 그 안의 릴리스는 롱기누스의 창도 잃는 바람에 아담보다 먼저 스스로의 봉인을 풀고 말았다. 아담이 여전히 잠든 동안 릴리스는 그녀의 후손인 인간을 낳았다. 제루엘 전투 당시를 보면, 제루엘은 자신의 목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간들에게도 공격을 시도하고 있는데, 사도들은 어쩌면 본능적으로 인간에 대한 악감정을 품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그들이 번성해야 했을 지구에 멋대로 자리를 깔고 앉은 인간들에 대한 근원적인 분노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공격하려는 제루엘

문제의 퍼스트 임팩트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제레의 카츠라기 조사대는 아담을 발견한다. 그들이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담이 지닌 생명의 열매, 그러니까 S2 기관이었다. 카츠라기 조사대는 소위 말하는 접촉 실험을 시행했다. 에반게리온에서 접촉 실험은 총 3번 나왔다. 아담과 한 번, 유이와 초호기 사이에 한 번, 쿄코와 2호기 사이에 한 번이다. 그것으로 보아 접촉 실험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신에 가까운 존재사이의 연계 시도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세 경우 모두 인간과 코어 사이의 접촉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S2 기관의 위치는 확실히 알 방법이 없으나 초호기가 제루엘을 통해 S2 기관을 흡수하는 과정을 묘사한 방식과, 사도에게 있어 코어의 중요성이 지니는 의미 등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S2 기관은 코어 속에 존재하는 조직 혹은 구성 물질로 보는 것이 맞겠다. 그렇다면 세 번의 접촉 실험은 모두 인간과 코어 사이의 접촉 시도로 볼 수 있겠고, 그 세 번의 결과는 공통적으로 영혼의 이동을 담고 있었다. 아담의 경우, 나기사 카오루의 탄생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아담을 함부로 건드린 결과

아무튼, 조사대는 S2 기관이 심상치 않은 현상을 보이는 걸 알고 곧장 롱기누스의 창을 이용해 아담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실패, 다행히 완전한 의미의 세컨드 임팩트는 막았지만, 지구는 큰 재앙(릴리스 입장에서)을 맞게 된다. 아담은 그 때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안티 AT 필드를 방사했고, 그와 동시에 거프의 문도 열게 된다. 여기서 영혼의 집이라 할 수 있는 거프의 문을 연 것은, 아담이 일정과는 달라도 서둘러 자신 베이스의 사도를 깨워 그들 속에 영혼을 주입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이며, 반대로 이 순간을 사도들의 탄생 시기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사도의 기원에 대한 얘기를 좀 하고 가자. 탄생한 시기, 그러니까 그 육체 안에 하나의 영혼이 주입된 것은 세컨드 임팩트 당시라고 해도, 사도의 탄생에 대한 의문점은 그 외에도 상당히 많다. 그들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제시하는 사도들이 있으니 짚고 가겠다.

산달폰의 등장 방법은 바로 이런 부분에서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녀석이 네르프 본부를 공격하기도 전에 인간이 먼저 사도를 발견한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산달폰은 그 때, 마그마 깊숙한 곳에서 아직 부화하지도 않은 태아 형태로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통해, 사도들은 2015년에 완전히 성장하여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화산 속이나 바다 속과 같은 깊숙한 곳에서 의 형태로 몰래 자라는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하퀴엘아라엘도 사도의 기원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 두 사도는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지구 밖에서 등장했다. 그러니까, 최소한 저 두 사도의 경우엔 지구가 아니라 우주에 잠들어 있었다는 말이다. 만약, 세컨드 임팩트로 인해 큰 폭발이 발생했고, 그것으로 인해 사도의 이 지구 주위로 흩뿌려진 것이라면, 저렇게 지구의 중력을 뚫고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알에 대해선 명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두 사도는 특히 그 크기가 굉장히 거대한 탓에, 만약 지구에서 성장한다면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역으로 저 둘의 경우엔 지구 밖에서 성장할 필요가 있었고, 그들이 지구 밖에서 탄생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필요에 의한 과정의 일환이 아니었나 싶다. , 사도의 씨앗은 사고로 인해 흩뿌려진 것이 아니라, 의지(사도들 자신이든 그들을 낳은 존재이든)에 의해 해당 위치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에반게리온 기획서

에반게리온 기획서는 사도의 탄생에 대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기획서 단계의 설정이 실제 TV판과 연계를 맺고 있느냐에 대해선 불명이지만, 태초에 시조 민족이 사도들의 알을 미리 만들어 두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경우, 아담은 사도들의 생물학적인 조상이 아니며, 다만 지구에 먼저 온 것, 혹은 오기로 한 것이 아담이었기 때문에, 후에 단계적으로 탄생할 사도들의 조상은 필연적으로 아담이 된다는 식이다. 기획서와 작품 사이의 간극이 상당하기 때문에 무턱대고 이것을 설정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곤란하지만, 확실히 매력적인 가설이 나올 수 있다.

가기엘은 아담이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왔을까?

생각해 보면, 사실 사도들 중에서는, 아담과 릴리스를 명확히 구분하여 오는 경우가 없었다. 아담의 영혼을 지닌 타브리스마저도 릴리스를 얼굴 바로 앞에서 마주하고 나서야 그것이 아담이 아님을 인식했을 정도였다. 네르프가 도그마에 릴리스를 둔 이유도, 그것을 아담으로 오인하고 내습하게 될 사도들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이 있는데, 그 가설을 제시하기 위해선 우선, 아담과 릴리스가, 동일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아주 비슷하여, 그 후손들조차 차이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극 안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많이 풍겼지만 실증할 근거는 없었는데, 여기서 기획서의 설정을 빌려 말하자면, 애초에 사도들이 조상을 찾는 방법의 핵심은 생물학적인 메커니즘을 통한 이 아니라, 행성 안에 존재하는 씨앗이라면 누구라도 좋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아냐…이것은, 릴리스?!"

1행성 1씨앗, 즉 하나의 행성에는 아담이든 릴리스이든 하나의 씨앗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법칙이며, 따라서 예외가 없다면 후에 눈을 뜬 씨앗의 후손들은 씨앗의 존재를 구별할 필요도 없이 다만 씨앗만 찾으면 된다는 본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지구의 케이스는 있을 수 없는 특이 사항이었고, 때문에 지구에 태어나는 사도들 입장에선 아담과 릴리스를 구별할 이유도, 구별할 방법도 없었다는 것이다. 게임 설정에선 사도들의 목적이 다양하며, 어떤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어떤 것은 아담을 찾으러, 혹은 릴리스와 접촉하여 지구를 리셋하기 위해 온다는 등 많은 목적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모든 항목들이 꼭 사도가 대상을 아담이다, 혹은 릴리스이다, 하고 인지한다는 전제를 깔지는 않았다. 사도들은 다만 다양한 목적을 위해 씨앗을 찾았을 뿐이다.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이렇게 이해하는 편이, 극의 후반부 타브리스가 릴리스 앞에서 깨달음을 얻는 장면에 대한 보다 깨끗한 설명을 가능케 할 것이다.

"나랑 하나가 되지 않을래?"

다만 사도들이 공통적으로 서드 임팩트와 같은, 혹은 유사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 이유에 대해선 언급할 거리가 하나 있다. 아담의 영혼을 가진 타브리스를 제외하면 가장 마지막 사도라고 할 수 있는 알미사엘, 레이의 마음 안에서 밝힌 것과 같이 사도들은 단일 개체임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알미사엘이 레이에게 가장 먼저 제시한 물음(요구)나와 하나가 되지 않을래?’라는 것이었고,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인류가 지니고 있던 보완의 욕구와 동일한 맥락이었다. , 사도들 역시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게, 서로 하나이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으며, 이것을 사도들이 서드 임팩트를 향해 움직이는 목적의 근거로 볼 수 있단 것이다.

산달폰은 정말 2호기를 '공격'한 것일까?

사실 사도는 그런 부분이 아니어도 인간과 참 많이 닮았다. 샴시엘의 유전 정보는 인간의 것과 99.89%가 유사하다고 했다. 사다모토의 코믹스에서는, 같은 퍼센트가 에반게리온에게 적용되었다. 그러니 아담이든 릴리스이든, 인간이든 사도든, 서로 유전적으로는 거의 동일하다고 봐도 좋다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열매가 생명이냐, 지혜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산달폰은 부화한 직후 아주 낮은 톤의, 아기가 우는 음성을 냈고 에바 2호기를 마주했을 때 녀석의 행위는 인간의 아기가 그러는 것과 같이 물고 빠는 것에 가까웠다. 생긴 것만 달랐을 뿐 인간이 낳은 아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신지 "저…사도란 건, 뭘까?"

아스카 "뭐야, 이런 때에?"

"사도, 신의 사자, 천사란 이름을 가진 우리들의 적…왜 싸우는 거지?"

물론 사도들은 인간과 달리 생명의 열매를 지니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지혜의 열매를 지닌 우리와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것 같다. 그러나 극이 전개됨에 따라 인간이라는 종족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배우기도 하면서 사도 역시 많은 성장을 거치게 된다. 인간이 사도와의 싸움을 통해 생명의 열매를 손에 넣은 것처럼, 반대로 사도들 입장에서도 인간만이 지닌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신지는 물었다. 사도라는, 천사의 이름을 가진 적, 과연 우리는 그들과 꼭 싸워야 하는 것일까? 그 물음에 대해, 작품은 한편으로는 대답하고 있다. 두 존재는 어쩌면, 서로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에반게리온] 19. 타브리스, 최후의 사자/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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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타브리스, 최후의 사자

 

"사실은 일단 수렴하고 나서, 그 후에 원인을 파악하는 거야."

아스카가 정신적으로 죽은상태에서, 에바 속의 영혼도 혼자 갇힌 바람에 2호기를 조종할 수 있는 파일럿은 없었다. 그 때, 오직 아담의 영혼을 지닌 카오루만이 그것을 운용할 수 있었다. 초호기를 상식적인 선에서만 다루던 2대 레이와 차이를 보이는 부분 중 하나다. 레이의 경우 겐도우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했고, 때문에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를 명확히 알 수는 없었을 테다.난 좀 특별한 아이인 것 같아.’ 정도의 수준으로만 미약하게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카오루는 달랐다. 하나의 육체 속에 머물고 있었던 덕분인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고 강했다. 덕분에 타인에게도 따뜻하고, 감정적으로 열려 있었다. 카오루가 이카리 신지의 친구가 되고자 했던 이유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확실한 의중은 파악하기 힘들다. 다만, 카오루는 제레가 아닌 또 하나의 리린-이카리 신지-을 만나고, 그가 이해할 수 없었던,사는 것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카오루 "여, 나 기다리고 있던 거야?"

신지 "아니, 별로, 그런 건 아닌데…."

"오늘 뭐 해?"

"음, 테스트도 마쳤고, 이제 샤워 하고 집에만 가면 돼."

"돌아갈 집. 집이 있다는 건 행복한 거야."

- 잃은, 아담 베이스의 사도의 마음을 대변하는 대사가 아닐까?

카오루가 천사 모양의 돌(밑에서 자세히 얘기하겠다.)에 앉아 신지와 처음 만났을 때, 마침 그 아이는, 인간이 근원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외로움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오루는 그런 신지가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극복하고, 상대와의 관계를 통해 스스로 웃을 수 있게 되는지, 옆에서 가만히 살폈다. 이내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 숨겨둔 얘기를 밤이 새도록 꺼내는 신지를 보며, 카오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신에 필적하는 힘을 손에 넣으려는 남자가 있다."
"우리 외에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열려는 남자가 있다."
"그 안에서 희망이 나타나기 전에 상자를 닫으려는 남자가 있다."

그 얘기는 잠시 덮어 두고, 카오루와 제레 얘기를 좀 하겠다. 제레의 입장에서, 카오루의 존재 목적은, 아담 베이스의 서드 임팩트였다. 그것은 릴리스의 속죄를 전제로 깔고 있어야 하며, 그 역할은 자칭 리린의 대표인 제레가 대신 수행하게 된다. 카오루와 제레의 관계를 아는 것은, 카오루라는 캐릭터의 이해에 있어 아주 중요한 핵심이나, 안타깝게도 애니메이션에서 그들이 소통하는 장면은 딱 한 부분이다. 에바 영호기가 자폭하면서 남긴 호수에서의 대화이다.

"희망…? 그게 리린의 희망이란 말인가요?"

사실 그나마도 이 장면은 원판에 없었고, 후에 완전판에서 새로 추가된 부분이다. 역으로, 이 장면은 안노가 생각할 때 작품 이해에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 의미이다. 과연, 실제로 하얀 달과 검은 달, 아담과 릴리스에 대한 무거운 비밀들이 이 짧은 대화에서 처음으로 밀도 있게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 짚고 가자면, 이 장면은 앞서 얘기했던 것과 같이 제레가 12명이 아닌 15명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미사토는 제레의 존재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된 부분이다. 미사토의 경우, 애초에 제레의 모노리스가 독특한 개체인 만큼 대화 상대인 카오루만이 그들을 보는 설정이 큰 문제가 되진 않지만, 여태 12명이었던 제레가 이 한 장면에서만 숫자가 바뀐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작화 미스로 보는 것이 무난한 해석이나, 혹자는 이 때, 제레가 죽은 사도들의 역할을 대행하며 카오루 앞에 선 것(이 경우 이스라펠은 둘로 취급한다.)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아마 뭐 그런 되도 않은 가설이 다 있냐고 하겠지만, 잘 한다고 산달폰과 마트리엘이 빠진 코믹스에선 이 부분의 제레가 13명으로 나온다는 찝찝한 사실.

"우리의 희망을 너에게 맡긴다."

이 장면에서 카오루가 서 있는 곳 역시 천사 모양의 돌인데, 아까와는 미묘하게 다른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천사의 돌상당히 많은 의미를 함축하는 디자인이라 여기서 따로 다루겠다. 신지와 만났을 때 카오루는 천사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앉아 있었고, 그것은 카오루와 돌 사이의 미묘한 연계를 암시한다. 제레와의 대화 장면에서 카오루는 돌 위에 서 있고, 천사의 돌은 머리 부분이 잘려 있다. 해당 장면 바로 뒤, 카오루는 초호기에 의해 머리가 잘린다. 해당 사건 이후, 다시 등장하는 천사의 돌의 잘린 목 부분에는, 빨갛게 피가 흐른다.

카오루의 최후를 암시하는 목 잘린 천사의 돌

사실 이 돌은, 카오루 외에도 여러 대상과 연계를 맺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엔드 오브 에바의 거대 릴리스(엄밀히 말하면 아담+릴리스)이다. 사실, 이후 등장하는 천사의 돌에는 보다 커다란 날개가 있는 탓에, 양산기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것이 더 무난하다. 카오루가 양산기의 더미가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암시 또한 유효한 것이다.

그런데, 천사의 돌에는 여성의 가슴이 있다. 게다가 저 자세, 엔드 오브 에바에서 나오는 릴리스와 거의 흡사하다. 그녀 역시 결국 목이 잘렸기 때문에, 동일한 설명이 가능하다. 따라서 천사의 돌은 카오루, 양산기, 아담+릴리스를 포함하여, 상당히 다양한 암시를 담은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에반게리온 TV판이 이미 작품 안에서 루프의 여지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다른 근거는 없기 때문에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카오루 "니가 퍼스트 칠드런이네, 아야나미 레이."

"넌, 나랑 같구나."

"이 별에 사는 몸은, 모두 리린의 형태를 가진 건가?"

레이 "당신, 누구?"

카오루가 레이를 만나는 장면이 또 굉장히 중요하니 함께 보자. 그녀에게 우리는 꼭 같은 존재야, 하고 말하는 부분에서, 카오루는 웃었다. 그런데, 카오루의 웃음에 대해 안노가 직접 적어 넣은 캡션이 있다. 바로, 배신의 미소(うらぎりのほほえみ)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째서 배신일까? 카오루의 미소는 레이를 향한 것이나, 그 배신은 레이가 아닌 제레를 향한 것이었다. 다른 말로, 지금 카오루가 레이에게 행하고 있는 것, 그녀에게, 그녀 자신의 존재-릴리스-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 제레와의 계약을 어기는 일이란 소리가 된다. 릴리스는 특히 제레의 입장에서 봤을 때, 속죄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녀를 제어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했다. 애초에 릴리스의 영혼을 레이라는 육체에 따로 담아 보관하는 것, 그런 의도가 담겼을 테다. 그러나 만약 레이가 본인의 진짜 정체를 깨닫게 되면, 그것이 인류 보완에 있어 커다란 변수가 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배신의 진행은, 카오루가 터미널 도그마로 강하하는 부분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카오루 "자, 나를 없애 줘.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죽어."

"그리고, 너는 죽어야 할 존재가 아니야."

신지를 보는 카오루

레이를 보는 카오루

그리고 미소

"……."

카오루가 터미널 도그마로 갔을 때, 동행한 사람은 사실 두 명이 있다. 우선 초호기에 탄 신지, 그리고 3대 레이였다. 카오루는 레이가 릴리스의 영혼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스스로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상황을 보면, 마치 카오루가 레이에게, , 저것이 바로 너의 진짜 육체야, 하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카오루가 릴리스를 보며 놀라는 장면을 더러, 혹자는 레이를 위해 일부러 놀라는 척을 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는 문제인 만큼 놀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신지와 레이에게 타브리스가 본인의 마음을 전하려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레이가 카오루의 뒤를 따라 도그마에 엄청난 AT 필드를 방사하며 등장하고, 그 등장한 레이가 있는 곳을 카오루는 알고 있었다. 신지와 마지막 대화를 한 후에, 카오루는 죽기 전 레이를 향해 그 의미가 묘연한 슬픈 미소를 짓는다. 카오루가 레이에게 주는 배신의 미소, 그 두 번째이다. 참고로 이 사건 직후, 그러니까 엔드 오브 에바의 첫 부분에서, 레이는 겐도우의 안경을 깨뜨리고 혼자서 릴리스에게로 간다. 상황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카오루의 최후

사실 카오루는 터미널 도그마로 가기 전에 이미, 자신의 최후를 각오했던 것으로 보인다. 2호기를 통해 초호기를 저지하긴 했지만, 2호기의 머리와 목 주변을 집중적으로 노렸던 신지와 달리, 카오루의 2호기는 초호기의 중요하지 않은 부위만 공격하며 시간만 끌었다. 도그마에 있는 릴리스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또 그 사실과 자신의 마음을 릴리스(3대 레이)에게 전하고 난 후, 미련이 없다는 듯 배신의 천사 카오루는 자신이 사랑한 리린인 신지에게 운명을 맡긴다.

알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 내가 있는 거잖아요.”

제레는 릴리스와 리린을 죄인으로 여기고 그들 자신을 포함한 인류의 속죄를 바랐지만, 정작 그 역할을 맡은 카오루는 오히려, 릴리스와 그 후손인 리린에 대해 깊은 관심과, 그것을 넘은 애정을 가지게 된다.

도그마에 자신과 같이 영혼과 육체가 분리가 되어 외롭게 레이를 기다리고 있는 릴리스를 보며, 카오루는 제레의 노인들과는 또 다른, 리린들의 다양한 희망의 무게를 깨닫게 된다.

"너를 좋아한다는, 거야."

신지라는 순수한 열 네 살의 아이가 느끼는 아픔과 고독, 그리고 그의 마음에 내재하고 있는 산다는 것에 대한 믿음, 단 하루라는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그의 바로 옆에서 느끼게 된다.

카오루 "인간이 싫은 거야?"

신지 "별로…그냥,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아버지는 싫었어."

신지 '…왜 내가 카오루 군한테 이런 얘길 하고 있지?'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쩌면 카오루는, 아담을 대신하여 릴리스와 리린을 용서했던 게 아닐까? 어리석은 제레의 노인들은 그것을 배신이라고 칭했지만, 카오루가 사랑한 신지 역시 그런 그의 행위를 배신이라고 착각했지만, 이미 그 순간, 인간의 원죄는 용서를 받은 모양이다. 조금 이른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에반게리온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진정한 보완은 사랑을 통해 서로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온다.’라는 것이다. 최후의 사자 타브리스, 그는 그걸 가장 먼저 깨닫고 행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나는…널 만나기 위해 태어난 건지도 모르겠어.”

[에반게리온] 20. 리비도와 데스트루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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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리비도와 데스트루도

 

에반게리온에서 영혼이란 개념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 자체가 애초에 매우 추상적인 개념인 탓에, 감상하는 입장에선 대충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여러 상징적 장치들과 연출, 또 장면 구성의 의도 등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선 몇 가지의 개념들을 보다 더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때문에 다소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 되겠지만 작품이 담고 있는 요소는 분명 맞으니, 머리를 깨우고 함께 보도록 하자.

후유츠키 교수님의 형이상 생물학 연구실

에반게리온은 영혼이라는 개념 설명을 위해 형이상 생물학이라는 요소를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후유츠키가 전공했던 분야이며, 그의 연구소에서 아주 잠깐 나오는 용어이긴 하지만, 작품 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배경 설명을 돕는다. ‘형이상 생물학이란, 철학 용어에 더 가까운데, 에바에선 한 사람의 경험과 마음, 형체가 있는 무언가로 변환한다는 요지의 과학 개념으로 쓰인다. 간단히 말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어떤 에너지를 바탕으로 실체화하여 물리적 형체를 이루게 된다는 내용이다. 에반게리온에서 사람의 형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영혼, 자아가 그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혼이 없으면 AT 필드도 없다.

모든 생명체는 특정한 영혼,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영혼들은 거프의 방에서 탄생하며, 리린의 경우, LCL과 영혼의 융합 형태로 볼 수 있다. 영혼이 LCL을 특정한 형태로 만들어, 그것을 그릇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혼이 없으면, LCL은 특정한 형상을 잃고, 본래의 액체 상태로 환원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이 바로 ‘AT 필드이다. 영혼은 AT 필드를 만들고, 그 필드의 힘으로 LCL사람의 몸으로 만든다. 반대로,안티 AT 필드라는 개념도 있어서, 그 경우 자아의 상실과 더불어 사람의 형태를 잃게 만든다. 엔드 오브 에바에서 안티 AT 필드로 인해 그 형체를 잃고 LCL 상태가 된 사람들을 상기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패턴 블루의 의미란? 그림 이해하려 하지 말 것.

고체도, 액체도, 기체도 아닌 무엇

그런데 리린과 달리, 아담과 릴리스, 그리고 사도들의 경우, LCL 외의 다른 구성 물질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파동-입자 물질이다. 그 경우, 영혼이 없어도 형체를 유지할 수 있다. 다만 그 안에 영혼이 주입되면, 엔드 오브 에바에서 단순한 형태의 하얀 거인이던 릴리스가 레이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과 같이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모양이다. 파동-입자 물질이란, 리츠코의 말에 따르면, 입자와 파동의 특성이 혼합된 특이한 물질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로, 거대 아담+릴리스의 손이 마야의 육체를 관통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 물질은 안티 AT 필드에 소실되지 않는 모양이다. 엔드 오브 에바에서 사람들과 달리 에반게리온 기체들과 아담+릴리스가 형체를 잃지 않는 이유이다. 유이가 에반게리온을 영원히 사는 존재라고 표현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레이는 인간과 생물학적으로 다른 존재

참고로 리뷰 10편에서, 초호기의 머리 색깔이 레이와 같다는 점을 근거로, 레이의 몸에는 유이의 DNA는 물론 릴리스의 DNA 정보도 포함된 것 같다고 했는데, 이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릴리스가 지니고 있던 파동-입자 물질이 특정한 경로를 통해 레이에게 존재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혼이 없는 존재는 형체를 유지할 수 없는데, 더미 공장의 수많은 레이들이 그 형체를 가지고 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레이의 육체는 리린과 같은 단순 입자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게 되겠지만, 그 덕분에 레이의 몸은 일반적인 물리 법칙도 무시할 수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파동-입자 물질은 실제 물리학에서의 파동 입자 이중성이란 개념과 흡사하다. 세상의 물질은 표면적으로는 입자이나, 질량이 없는 광양자 등도 존재한다는 것으로, 양자 역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양자 역학은 에반게리온에서 은근히 중요한 설정이기 때문에 다음에 또 언급하겠다.

리비도 데스트루도

, 그런데 대체 리비도데스트루도는 뭘까? 두 개념은 실제 철학 및 과학 심리 용어로, 현실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다만 에반게리온에서 리비도와 데스트루도는 측정 가능한 정신 에너지란 전제를 깔고 있다. 영혼을 좀 더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AT 필드를 지속적으로 발생시키는 물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영혼은 다른 영혼의 간섭에 영향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은 심할 경우에 영혼은 물론 형체의 훼손까지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은 각자의 AT 필드를 통해 그런 사고를 방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또 AT 필드가 너무 강하면 서로에게 해악이 될 수도 있다. ,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적절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하여, 그 영혼이 AT 필드를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는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을 조절하는 본연적인 에너지가 바로, 리비도 데스트루도이다.

살겠다는 것. 리비도.

리비도에로스와 비슷한 개념으로,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정신 에너지이다. 데스트루도와 함께 ()에서 생명체라는 유()가 탄생하기 위한 두 가지 전제 조건 중 하나이다. 리비도는 우리가 흔히 성욕정도로 생각하는 개념이나, 실은 더 포괄적인 의미로, 사랑과 같은 건설적인 에너지를 모두 포함한다. 리비도가 구축하는 정신의 구조물은 본능인 이드(Id), 자아인 에고(Ego)이며 에반게리온에서 그 역할은 AT 필드란 개념이 대행하고 있다.

REI 00N : DESTRUDO RELEASE / 데스트루도 방사

그리고 그 결과

데스트루도는 리비도와 표면적으로 대립하는 개념으로, 흔히 타나토스(Thanatos)란 단어로 대신 쓰인다.죽음에 대한 동경,파괴 본능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데, 얼핏 부정적인 개념인 것 같지만, 리비도와 함께 우리가 존재하기 위한필수적인 정신 에너지이다. 리비도가 사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자극하면, 그것을 막기 위해 데스트루도(타나토스)가 발현되어 우리의 심리 상태는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에반게리온에서 이것은 안티 AT 필드와 대응하는 개념이다. 23화에서는, 리츠코가 더미 레이를 파괴할 때 데스트루도를 방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AT 필드와 안티 AT 필드는 모두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는 개념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특히 에반게리온에서, 문제는 현재의 인류와 같이, 서로의 AT 필드로 구분된 채로 사는 것이냐, 혹은 인류 보완 이후와 같이, 각자의 AT 필드 없이 하나의 커다란 자아만을 가지냐는 것일 뿐, 영혼이라는 개념은 한 단계 위에 있다. 에바와 파일럿의 교감을 위해 가장 전제로 두는 것이 영혼의 존재이며,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리비도와 데스트루도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더미 시스템은 따라서, 영혼을 모방하는 것인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풀어 쓰면 특정 대상의 사고 패턴, 리비도와 데스트루도의 패턴을 모방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리츠코 "샐비지, 스타트!"

"라져, 제1신호를 송신!"

"에바 신호 수신, 거부 반응 없음!"

"다음, 제2신호, 제3신호 송신!"

"거부 반응 없음. 데스트루도 반응 없습니다!"

이 리비도와 데스트루도라는 개념이 실제로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것은 바로 20화에서, 신지가 형체를 잃고 초호기 안에 흡수된 때였다. 육체를 다시 인양하기 위해, 모니터가 띄우는 정보가 바로 리비도 및 데스트루도 측정 그래프였다. , 여기서 문제. 형체를 잃은 신지를 다시 AT 필드를 지닌 존재로 바꾸기 위해 둘 중 어떤 에너지가 필요할까? 정답은, AT 필드와 대응하는 개념인 리비도이다. 때문에 신지의 인양 작업 또한, 리비도의 자극이 주가 되었을 것이며, 그 딜레마는 실제로 신지의 내면 묘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신지의 파일럿으로서의 자아만 형상화된 상황

작품 속에서 육체 샐비지 작업은 총 두 번이 있었는데, 한 번은 유이의 케이스, 한 번은 신지의 케이스였다. 그러나 둘 다 결과적으론 실패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두 사람이 스스로 육체로의 회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지의 경우 마음을 먹고 다시 자력으로 본인의 모습을 찾았지만.

신지의 마음에 존재하는 리비도에 대한 묘사는, 은근히 작품 속에서 꽤나 집중적으로 다루는 편이다. 10화에서 아스카의 유혹에 대한 신지의 순수한 반응으로 시작해, 온천에서 미사토와 아스카의 대화로 판타지를 느끼는 소년의 흥분, 또 레이의 가슴을 만진 것이 그에게 주는 리비도 등. 실제로 신지와 에반게리온 사이의 싱크로가 계속해서 상승했던 이유, 14세의 아이들이 에반게리온에 탑승하기 좋은 이유 또한 이와 연관 지어 설명할 수 있겠다.

열혈 소년 신지의 모습?!

제루엘과의 전투에서 신지가 400% 싱크로를 기록하는 장면에선 신지의 데스트루도 에너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신지는 유독 이상할 정도로 희열 가득한 웃음을 보이고 있다. 평소 그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이상한 연출이 아닐 수 없으나, 에바와의 높은 싱크로와 관련, 데스트루도 에너지의 상승으로 설명하면 확실히 납득할 수 있다. 신지의 저 표정은 과연 데스트루도, 파괴에 대한 욕구 그 자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의 신지는 정상이 아니다.

보완의 시작을 알리는, 파괴 본능 데스트루도의 형이하화

그리고-.

리비도와 데스트루도 개념이 특히 중요한 파트가 바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다. 영화의 초반, 신지는 타인과의 벽(AT 필드)을 아주 단단히 쌓아 올린 상태였고, 그것은 바꿔 말하면 삶에 대한 스트레스, 즉 리비도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은 수치를 지닌 상태라 할 수 있겠다. 아스카의 가슴을 보고 욕구 불만의 신지가 자위를 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이 나쁠 정도로 가감 없는 연출이었다. 이후 신지와 초호기를 통해 서드 임팩트, 즉 모두의 AT 필드가 소실되기 시작하는 순간에는, 데스트루도의 극대화를 표현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신지가 아스카의 목을 첫 번째로 조르는 장면에서 앞서 봤던 제루엘과 싸웠을 때의 사악한 웃음이 개별 레이아웃으로 동시에 나오며, 어린 아이가 그린 것 같은 상당히 잔인한 그림들(리비도와 데스트루도는 보통의 경우 어린 시절에 절정을 이루며, 실제로 아이들의 행위나 그림 등에 자주 나타난다.)이 연이어 등장한다. 안티 AT 필드에 대응하는 개념인 데스트루도의 발현을 역시 구체적으로 보이는 노련한 연출이었다.

에바 3호기(바르디엘) 목을 조르는 레이 더미 초호기

더미 시스템 이야기도 마저 하고 가겠다. 리비도와 데스트루도는 에반게리온의 기동을 위한 기초적인 정신 에너지라 할 수 있으며, 반대로, 영혼이 없이 그 사고 패턴만 모방하는 더미의 경우 철저히 인간의 감정은 배제한 채, 리비도와 데스트루도만으로 에바를 기동한다. 그 중에서 먼저 묘사가 되었던 레이 더미 초호기와 바르디엘의 싸움을 보면, 초호기는, 레이 패턴의 더미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으나, 레이의 사고 패턴이라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행위가 괴팍하고 잔혹하다. 이것을 리뷰 13편에서는 레이의 감정이 개입된 것이 아니란 이유로만 설명했으나, 이제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할 수 있겠다. 더미 시스템에 존재하는 인공적 데스트루도, 감정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고 나오는 탓에 그런 비인간적인 전투가 나온 것이다. 과연 18화에서의 초호기는 파괴 본능의 화신 그 자체였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더미 시스템이 좀 더 발전된, 카오루 더미 양산기의 경우, 거기서 한 술 더 뜬다. 데스트루도는 물론이거니와, 리비도의 특성까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엔드 오브 에바는 17세 등급이었던 만큼 리비도의 표현도 꽤 자연스럽게 연출했다. 에반게리온 팬들 사이에서 상당히 화제가 되었던 장면 중 하나가, 양산기가 2호기를 애무(?)하는 장면이었다. 이것을 감독이나 연출자의 더러운 취향 정도로 여기고 말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장면은 더미가 가지는 리비도와 데스트루도의 작용 과정을 가장 구체적이고 성실하게 표현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댓글 중에서, 양산기를 왜 굳이 저리 흉하게 디자인했나, 하는 질문이 있었는데, 저 두 가지 원초적 정신 에너지를 강조하기 위한, 그러니까 파괴 본능과 성에 대한 욕구만으로 형체를 이룬 기체가 양산기라는 점에서 보면, 저 음흉하고 징그러운 모습은 지나칠 정도로 적절한 디자인이었다.

삶과 사랑의 욕구 리비도, 파괴 및 보완의 욕구 데스트루도(타나토스)는 에반게리온의 숨은 설정이긴 하지만 분명히 표현된 것이며, 연출 속에서도 꽤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 내용은 에바 팬들 사이에서도 거의 알려진 부분이 없고(인터넷 자막엔 데스트루도가 나오는 부분을 오역한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한 분석 역시 전무한 수준이나, 에반게리온 연출의 깊이를 알기 위한 하나의 핵심이기 때문에 짚어 보았다. 지루한 이론 수업은 이 정도로 해 두자.

[에반게리온] 21. 카지, 거짓과 침묵/에서 계속.

 

 

더보기

21. 카지, 거짓과 침묵 

 

사키엘, 3사도, 네르프의 첫 사도 대항 전투. 녹음 자료를 일부 획득함.

샴시엘, 4사도, 화상 자료를 얻어 복사한 상태. 초호기의 전투 장면을 송신하겠음.

라미엘, 5사도, 잔해의 일부를 얻어 분석한 상태. AT 필드에 대한 정보 획득.

가기엘, 6사도, 육안으로 확인. UN에게서 정보를 얻음. 2호기와의 전투 정보를 송신하겠음.

이스라펠, 7사도, 눈으로 확인, 11-B를 통해 자료 송신할 예정. 구성 물질의 샘플을 얻음.

산달폰, 8사도, 스틸 컷을 얻은 상태. 진화 상태에 따른 정보는 알 수 없음.

마타라엘, 9사도, 육안으로 확인. 정전 사태를 이용하여 새로운 샘플을 획득.

사하퀴엘, 10사도, 사진을 가지고 있음. 57-F를 사용하여 기록할 예정.

이루엘, 11사도, 육안으로 확인. 관련 정보는 네르프에서 손을 쓴 상태. 직접 정보 모아 송신할 예정.

레리엘, 12사도, 에바 초호기 다시 폭주.

바르디엘, 13사도, 마츠시로 시설 안에서 데이터를 얻는 데 성공.

제루엘, 14사도, 육안으로 확인. 에바 초호기의 부활과 폭주. 영상 정보를 송신하겠음.

-카지 료지의 메모 중

2015 : The Last Year of Ryohji Kaji(카지의 마지막 해)라는 1997년 출판 자료가 있다. 에바 각본을 담당한 야마구치 히로시가 집필한 것으로, 카지가 작품 내 여러 설정에 대해 적은 메모가 사진 등과 함께 담겨 있다. 아주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카지의 시각에서 보는 매력이 또 있기 때문에, 에바 해석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위에 옮긴 내용은 카지가 제레에게 사도의 정보를 몰래 넘기고 있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되며, 제9사도 마타라엘 사태와 관련, 네르프가 갑자기 정전이 됐던 것이 카지 및 제레에 의한 것이었음도 알 수 있다. 또 이루엘의 네르프 침투 사실(제레의 시나리오와 일정 및 내용 차이가 있는 모양.)을 겐도우가 정보 조작을 통해 은폐했음에도 불구, 제레의 노인들이 쉽게 속지 않았던 이유 또한 설명할 수 있다.

위의 메모는 아마 제레 소속 간첩으로서 카지가 네르프 및 사도를 관찰한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카지는 일본 정부 소속 간첩이기도 하지만, 앞서 리뷰 17편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정부는 릴리스의 존재 자체를 모르며 따라서 사도 넘버링이 네르프 및 제레와 아예 다르다. 게임 설정에 따르면 공개 정보에서 릴리스라는 항목은 아예 없다. 미사토와 같은 네르프 고위 관계자 또한 릴리스에 대해선 그저 퍼스트 임팩트의 발발 요인 중 하나로만, 막연하게 알고 있었을 테다. 그러니 위 메모는 제레의 편에 선 카지가 적은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카지는 애초에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카지라 하면 흔히 바람둥이란 단어를 떠올리는데, 그러고 보면 그것은 카지의 사랑에 대한 얘기 뿐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에 녹아 담긴 하나의 가치관에 더 가까운 단어인 것 같다.

카지 "좀 야위었네."

리츠코 "유혹할 셈이야? 하지만 안 돼. 무서-운 언니가 보고 있거든."

그러나 좀 더 정확히, 카지는 바람둥이도 아니다. 그가 신뢰한 사람은 어쩌면 미사토 하나였고, 그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여성도 미사토 외엔 없었다. 리츠코나 마야에게 찝쩍거리긴 했지만(미사토의 약을 올리는 게 목적인 것 같다.) 그 가벼워 보이는 모든 행동들은 결국 카지가 지니고 있는 진중함을 가리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다. 정부, 제레, 네르프 소속의 삼중 간첩으로서, 그는 심각하고 진지하게 보여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최대한 가볍고, 책임감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게 의심을 피하기 위한 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경박한 사람이었다.

신지 "카지 씨는 좀 더 진지한 사람일 줄 알았어요."

카지 "쉬운 사람이라고 너무 막 말하는 거 아냐?"

겐도우 "또 자네에게 빚을 졌군."

카지 "갚을 생각도 없잖아요. 그 자료 말입니다만, 더미도 적당히 섞어 만들어 놨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카지의 행적을 함께 따라가 보자. 카지는 7화에서, 겐도우의 통화 상대로 처음 등장한다. 통화의 내용은 제트 얼론(이하 JA)에 대한 계획을 담고 있다. JA는 에반게리온을 대체할 수 있는 인간의 병기이며, 만약 그것이 실용화가 된다면 네르프 권력의 약화는 물론 겐도우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초호기의 처리 문제와 직결될 수 있기 때문에, 겐도우 쪽에서 먼저 손을 써야 할 부분이었다. 미사토가 직접 나선 것을 빼면, JA의 고장 및 복구 등 모든 것이 (그녀가 직감한 대로)겐도우의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카지 "이미 여기까지 복원이 된 상태입니다.

강력 베이클라이트로 굳혀 뒀지만…."

"…살아 있습니다. 틀림 없이."

"인류 보완 계획의, 요소군요?"

8화에서는 카지가 처음으로 얼굴을 보였다. JA에 이어 다음 임무를 맡은 상태로, 그 임무란 바로 아담의 수송이었다. 그것을 위해 2호기 역시 카지와 함께 운반했다. 아담의 육체는 독일에서 얻었다는 것으로 보아 제레의 의장 킬이 관리하는 부분이었을 테다. 그렇담 그 아담을 카지가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아담은 이미 에바 제작 및 타브리스 등 제레의 목적 달성을 위해 충분히 이용한 상태였고, 따라서 태아 상태의 아담에 대한 제레의 관심은 의외로 크지 않았을 수 있다. 또 아담의 샘플 자체는 하나가 아닌 것으로 보이니 오리지널과 카피를 바꾸는 식으로 위장하면 훔치는 게 가능했을 법도 하다. 물론 그런 방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들킬 가능성이 높겠고, 실제로도 금방 들켰다.

"A-17 발령이네요. 왜 말리지 않았죠?"

카지 "이유는 없어요. 정상적인 발령입니다."

멈추는 엘리베이터

미사토 "…어머?"

카지 "정전인가?"

"설마, 그럴 리 없어."

정말로 꺼지는 불

"…이상하네. 사고인가?"

10화에서는 카지가 정체 모를 여성과 함께 A-17 발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네르프에 대한 정부 예산 동결과 네르프 권력 축소를 위한 정책인 모양이다. JA 계획과 함께, 일본 정부의 네르프에 대한 시각이 매우 좋지 않음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 시기엔 아직 네르프와 제레가 같은 노선을 공유하고 있었고, 때문에 카지는 네르프와 일본 정부 사이에서 이중 간첩 활동을 하는 인물로만 묘사된다. 허나 11화에서 네르프 정전 사건이 발생, 그 사건이 제레를 배후에 둔 카지의 짓이었다는 묘사가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네르프와 제레의 갈등 상황, 삼중 간첩 카지의 이미지가 나오기 시작한다. 카지가 이렇게 위험한 스파이 활동을 하는 것은 본질적으론 진실에 닿기 위함이었다. 결국 일본 정부 역시, 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무능력한 집단이란 것을 깨달은 카지는, 이제 네르프와 제레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진실을 탐색한다.

카지 "저게 사도인가, 일을 할 때가 아니네."

그 첫 행보는 13화에서 나온다. 이로울이 침입했을 때, 카지는 센트럴 도그마 주변의 관찰을 시도하고 있었다. 당시 카지는 도그마 통로 레벨 28에서 사도의 발광을 포착하며, 해당 장면에서 시그마 유닛(13화에 나온 에바 시뮬레이션 기체와 그 장소) 아래 모든 센트럴 도그마 통로가 60초 안에 닫힐 예정입니다.’라는 방송이 흐른다. 참고로 마기가 있는 곳이 레벨 40으로, 숫자가 낮은 쪽이 더 깊은 곳임을 의미한다. 그러니 그 때 카지는 이미 아주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던 것이다. 센트럴 도그마의 릴리스에 대한 정보는 네르프와 제레가 함께 숨기고 있던 중요 비밀인 만큼, 아마 이 부분은 카지의 독단 행동이었을 것이다. 같은 근거로 15화에서, 마르두크에 대한 조사 역시 카지의 독자적 행보겠다. 해당 장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또 다시.

카지 "여, 숙취는 다 깬 거야?"

미사토 "덕분에. 이게 너의 진짜 일인가?"

"카츠라기에게 숨긴 건 잘못했네."

"이건…에바? 아냐, 설마…!"

"그래, 아담이다."

"아담? 그 제1사도가 여기에…?"

이어 15화의 마지막 장면, 카지는 릴리스가 존재하는 도그마로의 침입을 시도하다 미사토에게 발각되었다. 그러나 카지는 그 사실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미사토가 보는 앞에서 도그마의 문을 연다. 두 사람의 눈에 보이는 건 하얀 거인 릴리스. 그러나 카지는 그 거인을 더러 아담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의문에 대해 두 가지의 가설이 나올 수 있다. 하나는, 이 때 카지는 사실 그것이 릴리스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미사토에게 일부러 그 사실을 감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미사토가 카지의 을 이어 받는 유일한 여성인 만큼, 굳이 그녀를 속이는 상황 연출이 필요하지 않단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카지의 입장에서, 아담과 릴리스의 차이에 큰 의미를 두어 거짓말을 하는 이유 또한 쉽게 설명할 수 없다.

동일한 존재?!

그러니 남은 하나의 가설인, 당시 카지는 정말 그것을 아담이라고 생각했다는 쪽이 더 적절하겠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겐도우에게 아담의 샘플을 건넸던 것은 바로 카지였다. 그리고 당시 겐도우는 카지가 들고 있는 게 최초의 인간 아담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카지는 왜 도그마에 있는 것이 아담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무래도 그는, 그 하얀 거인이, 자신이 얼마 전 겐도우에게 건넸던 아담이 성장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모양의 차이가 심하긴 하지만, 앞서 10화에서 산달폰이 상식을 초월한 스피드로 진화하는 걸 함께 보았던 카지인 만큼 그 부분을 크게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 같진 않다.

그 오해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겐도우나 제레와 같은 위치에 있지 않는 이상, 지구에 생명의 시조가 아담 외에 하나가 더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언급하자면, 릴리스나 검은 달의 존재는 철저한 극비 사항이었다. 일본 정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겐도우가 아담을 최초의 인간이라고 표현한 것만 봐도 그가 카지를 속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사실을 숨긴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쩌면 제레는, 인류의 시조가 흔히 악마로 생각하던 릴리스라는 사실 자체를 숨기고 싶어 했으며, 나머지 인류가 그 사실을 모르는 사이 속죄 의식을 대행하려 했을 수 있다. 제레 타입의 인류 보완 계획은 본질적으로 인류의 시조에 대한 열등감을 담고 있던 만큼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사실 우리의 현실 세계 얘기를 해도, 종교가 말하는 인류의 조상은 아담과 이브이지 릴리스가 아니니까. 물론 그런 지엽적인 이유를 들지 않아도, 아담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릴리스인 만큼, 그에 대해 필요 이상의 마찰과 간섭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릴리스의 존재를 최대한 숨기는 쪽이 좋았을 것이다.

여기서

강조한 부분을 자세히 보자.

여기서 하나 더. 카지가 들고 온 아담에는 특이한 문구가 있어 짚고 간다. 자세히 보면, ‘Who is you? He is living. Why?(너는 누구? 녀석은 살아 있다. ?)라는 글씨가 있다. 저 글의 정확한 정체와 의미는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어떤 사람이 문제의 아담에 대해 가졌던 의문이 아닐까 싶다. 많은 아담 샘플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영혼도 없을 텐데!) 녀석이라면 특히 더욱.

튀는 사진 한 장?

아담과 릴리스에 대한 거짓말은 에반게리온이 담고 있는 하나의 주제 모티브이다. 앞서 사도에 대한 얘기를 할 때에도 천사 이라는 점에서, 에반게리온은 기존의 권선징악 테마를 밑바닥에서부터 부정하고 있는 작품임을 언급했다. 혹시 오프닝 영상에 간간이 나오는 텔롭 중 ‘ADAM’이라는 명사만 흰색 바탕에 검정 글씨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이것은 검정 바탕에 흰색 글씨로 나오는 다른 명사들과 달리, 아담에 대한 내용은 근본적으로 반전 요소를 담은 거짓이라는 걸 암시하는 부분으로도 볼 수 있다.

미사토 "싫어…이상한 거 넣지 마! 이런 때에 말야…뭐야?"

카지 "선물이야. 8년 만의."

"응…?"

어쨌든, 문제의 거인이 릴리스였다는 진실은 작품이 마무리될 즈음에서야 밝혀진다. 시청자들에게는 24화의 타브리스의 입을 통해 처음 전해지며, 미사토에게는 카지가 죽기 전 자신이 자력으로 모은 데이터를 건넴으로써 전해지게 된다. 진실은 내용을 떠나 카지가 지켜 왔던 삶의 이유와 목적 그 자체로 볼 수 있으며, 의지와 믿음은 미사토를 통해, 그리고 그 미사토의 의지는 또 엔드 오브 에바의 신지를 통해 이어 흐르게 된다.

카지 "신지, 나는 여기서 수박에 물 주는 일 말곤 할 수 없어.
하지만, 너에겐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아무도 강요하지 않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해.
자신이 지금 뭘 해야 하는지."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아무튼 이런 저런 극비 사항을 공유하며 계속 한 길을 걷던 겐도우와 제레의 노선이 본격적으로 얽히기 시작한 것은 19화에서, 초호기가 S2 기관을 흡수하며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된 때였다. 그것은 릴리스의 속죄가 아니라 새로운 신의 탄생을 노린 겐도우 계획의 일환이었고, 상황을 봐선 카지도 그 내용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겐도우와 제레가 목적을 달리하는 때 카지는, 제레에 비해 네르프 쪽이 자신이 원하는 진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 모양으로, 결과적으로 겐도우 타입의 보완을 돕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제루엘 전에서 망설이는 신지를 초호기에 타도록 유도한 것이 바로 카지였기 때문이다. 이후 카지는 제레가 납치한 후유츠키를 풀어 주는 등 본격적으로 ()네르프 행로를 밟았으며, 결국 21화에서 제레가 보낸 사람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제레의 말을 빌리자면, 겐도우 목에 건 방울이 울릴 의지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후유츠키 "자넨가?"

카지 "오랜만이군요."

"이러면 자네는 목숨을 잃을 거야."

"진실을 향해 가고 싶을 뿐입니다. 제 안에 있는…."

카지의 죽음 얘기를 좀 더 하겠다. 리뉴얼 21화에는 TV 방영 당시엔 없던,아담의 샘플을 겐도우에게 넘긴 걸 들킨 것 같아.’라는 대사가 추가되었다. 카지를 죽인 하나의 원인과 함께, 보완 계획에 있어 아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출이었다. 카지를 죽인 암살자에 대해선, 데스 앤 리버스에서 미사토의 울먹이는 대사가 함께 나오는 탓에 카지를 죽인 게 미사토가 아니냐는 소리가 꽤 많이 나왔으나, 그 부분은 안노가 (드물게도)작품 설정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것 중 하나이다. 카지를 죽인 사람은 작품에 이름이 나오지 않는 사람이란 것이다. 참고로 카지를 죽인 게 미사토라 주장했던 사람들이 제시한 근거 중 하나가, 총살 장면 직후 미사토의 이름이 걸린 아파트 문이 나온다는 것이었으나, 이후 리뉴얼 버전에선 해당 장면을 없앴다.

카지 "사람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
자기 자신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걸."

"뭐,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좀 더 알려고 노력하는 거야.
그래서 재밌는 거지, 인생은."

카지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에반게리온 주제의 핵심을 곧잘 찌른다. 비중을 떠나 카지를 이해하는 것이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유이다. 카지는 미사토를 사랑했지만, 8년 만에 만난 그녀에게 진짜 하고 싶었던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마 그것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카지가, 미사토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카지가 진실에 집착하는 이유와, 그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 코믹스에서는 꽤 상세히 다루고 있지만 애니메이션에선 일절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세컨드 임팩트 세대인 카지는 분명 처참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재밌다고 표현하는 그의 기개는 정말 멋지지 않은가. 죽는 순간에도 가벼운 웃음을 얼굴에서 놓지 않던 그였지만, 그 때의 웃음은 그의 진중함을 가리기 위한 거짓 웃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때의 카지는 이미 최선을 다해 그가 갈구한 진실에 도달한 상태였을 테니까 말이다.

"-여, 늦었잖아."

[에반게리온] 22. 미사토 ① 손에 쥔 십자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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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미사토 ① 손에 쥔 십자가 

 

카지의 마지막 선물

에반게리온에서 세컨드 임팩트 세대의 대표 캐릭터 세 명을 대라면 카지, 미사토, 리츠코를 들 수 있다. 세 명의 어른은 각각 아스카, 신지, 레이와 얽히며 여러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 특히 그 중에서 신지는 카지와 미사토 등 임팩트의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감정 이입 대상이며 결과적으로 카지와 미사토가 지녔던 을 이어 받는 아이가 된다. 확실히 카지와 미사토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고, 구체적으로는 진실을 찾는 것, 그것을 위해 때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두 사람의 가치관이었다. 미사토의 경우 네르프의 고위 관계자가 되어, 카지는 여러 집단의 스파이 활동을 하며 각자 그들만의 방법으로 진실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카지는 위험한 방법을 택했던 만큼 애인이었던 미사토를 두고 세상을 먼저 떠났고, 그 전에 마치지 못한 남은 과제는 육체적 사랑을 통해 미사토에게 넘긴 상태였다. 누구에게도 확실한 믿음을 보이지 않았던 카지 료지, 그런 그가 믿고 사랑했던 미사토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에반게리온의 서비스 서비스 담당

카츠라기 미사토, 나이는 29, 혈액형은 AO, 163, 체중 47, 굳이 쓰리 사이즈를 적으면 33-23-32. 그녀의 주량과 식습관을 고려하면 참으로 미스테리한 체형. 네르프의 작전 부장을 맡고 있다. 계급은 작품 초반 대위에서, 중반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계급 명칭이나 기획서 일러스트 설정 등을 근거로, 그녀가 본래엔 자위대 출신이었을 거란 주장도 꽤 나왔다. 세컨드 임팩트를 목전에 두고 경험한 여성으로, 그 때의 일로 인하여 오른쪽 가슴 아래에는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다. 그녀 자신에겐 아픈 과거의 상징으로 작용하는 모양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카츠라기 박사로, 세컨드 임팩트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녀가 네르프에 일조하게 된 주요 경위 역시 아버지를 죽게 만든 존재에 대한 복수였고, 또 그것을 위해 진실을 필요로 했다.

동물 학대 사례

그녀는 사도 사키엘이 내습하기 얼마 전에 제3도쿄로 이사했으며, 이후 본인의 주장으로 서드 칠드런 이카리 신지의 보호자 명분으로 둘이 함께 살게 된다. 가족과 정상적인 사랑을 나눈 경험이 거의 없던 그녀인 만큼, 단란한 가정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이유로 후에 아스카가 일본에 왔을 때에도 그녀를 같은 집에 살게 했고, 펜펜과 함께 잠시 동안은 제법 보기 좋은 31() 가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지가 다른 두 사람의 보호자 역할을 맡고 있다는 느낌. 그럴 만도 한 것이, 미사토는 살림 감각이 전혀 없고 특히 요리 실력이 굉장히 나쁜 모양이다. 한 번은 동료 리츠코를 초대하여 인스턴트 카레를 만들어 대접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한 숟가락 먹은 펭귄이 그 자리에서 기절했을 정도였다.

펜펜 방

여기서 그녀의 집을 소개하겠다. 네르프가 제공한 아파트로, 이후 세 사람이 함께 살아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제법 넓은 집이다. 중앙의 화장실 바로 위에 있는 조그만 공간은 아까 카레를 먹고 기절했던 펜펜의 방(2번 냉장고)으로, 내부 인테리어가 보이는 대로 꽤 고급스러운 느낌. 펜펜에 대한 얘기를 잠깐 하자면, 안노 감독이 분위기 환기를 위해 동물 마스코트를 원하여 사다모토가 그린 것이었다. ‘온천 펭귄이라는 에반게리온 오리지널 종으로, 사람의 음식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TV나 신문을 즐겨 보는 걸 봐선, 실험 따위로 태어난 돌연변이일 가능성이 크다. 등에 맨 의문의 가방에 대해선 휴대용 냉동 시스템이란 주장이 나온 바 있다. 작품 후반엔 아파트의 안보가 위험한 탓에 신지의 반 친구인 호라키의 집으로 보냈다. 참고로 이 녀석, 확실하진 않지만 엔드 오브 에바에서 인류 보완에도 참여했던 것 같다.(심지어 축하해도 했다!)

"(아마도)축하해!"

기획서 단계카츠라기 미사토

으응?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녀는 기획서 단계에서 설정이 거의 변하지 않은 캐릭터 중 하나이다. 이건 여담인데, 안노는 세일러 문의 팬이기도 했다. 레이의 이름은 히노 레이(세일러 마스)의 이름에서 영감을 얻었고, 미사토라는 캐릭터도 사실 우사기(세일러 문)가 어른이 된 모습을 모티브로 했다는 후문. 성우(미츠이시 코토노)를 동일하게 기용한 것은 물론, 사다모토가 미사토의 머리를 우사기와 비슷하게 그렸던 것도 같은 이유로 보인다. 또 사다모토의 말에 의하면 미사토는 상당한 자동차 매니아로, 그녀의 집엔 관련 잡지가 엄청 쌓여 있다는 설정. 아무튼 미사토는 신지와 함께 작품 시작 단계에서 이미 캐릭터가 섬세하게 잡혀 있었고, 실제로 안노의 제작 성명(우리들은 무엇을 만들려고 하는가?)에 따르면 에반게리온의 공식 주인공(신지와 미사토)이다. 신지가 서드 임팩트의 중앙에 서는 아이라면, 미사토는 세컨드 임팩트의 중앙에 섰던 어른이며,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서툴다. 두 사람 다 상처를 입는 것을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방법도 모른다.

1. 쉬는 날

2. 일 있는 날

다만 신지가 무작정 타인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며 그것을 피하기만 하는 타입이었다면, 미사토타인과의 관계를 최대한 넓히되 표면적인 교제만 유지하며 그 안에 자신을 숨기려는 타입이었다. 사실 신지야 아직 한창 사춘기인 만큼 그럴 수 있다 쳐도, 미사토는 서른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른인 만 하는 사춘기 소녀의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일본에 오기 전에 독일에서 미사토와 알고 지냈던 아스카는, 그녀에 대해 사는 방식이 가식적인 것 같다고 평했다. 앞서 살폈던 카지가 자신의 진중함을 가리기 위해 가볍고 내실 없는 사람인 것으로 스스로를 위장했다면, 미사토는 자신의 나약함 어둠을 가리기 위해 강하고 밝은 사람인 것으로 위장했던 것이다. 표면적인 선에서 사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모습이 잘 통했지만,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는 달랐다. 신지의 눈에 비친 미사토의 모습은 위선이었고, 그런 그녀에게서 도저히 안식을 찾을 수 없었던 신지는 그녀의 집에서 나오기도 쉬웠을 거다.

카지 "아스카는 아직 어리니까 말야."

아스카 "나도 이제 어른이란 말예요!"

더욱이 카지를 잃고 난 후 스스로를 위장할 여유가 없게 된 미사토, 위기에 빠진 아이들을 위해 어른스러운 대응도, 적절한 판단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마음을 떠나보냈다. 이 부분과 연계하여 아스카 얘기를 잠깐 하면, 그녀가 미사토에게서 마음을 돌린 건 특히 카지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아스카도 카지를 사랑했고, 때문에 그에게 육체적인 섹스어필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카지는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를 거부했다. 허나 아스카가 보기에 미사토라는 사람 역시 정신적으로 성숙한 여성이 아니었고, 때문에 그녀를 은근히 라이벌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15화에서 카지의 진짜 마음을 확인한 아스카는 패배 의식에 빠져 미사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바로 다음 16화에선 그렇게 무시하던 신지에게마저 싱크로 경쟁에서 패배, 그녀의 프라이드는 바닥을 향하고, 미사토는 그런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때를 기점으로 아스카의 마음은 미사토의 집에서 떠났을 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안노의 말을 빌려, 에반게리온은 그런 주인공들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작품이라는 것일까.

카츠라기 박사

미사토에 대한 더 깊은 고찰에 앞서, 먼저 살필 사람이 있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 카츠라기 박사이다. 그는 게히른의 멤버였으며, 생명의 열매, S2 기관의 원리를 처음으로 제창한 사람이었다. 1999년에 그가 발표한 슈퍼 솔레노이드 이론(S2 이론)은 아담이 지닌 불가사의한 동력원, 그러니까 무한의 나선 에너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론 자체가 패러다임의 혁신인 탓에 엄청난 비판을 받았던 것 같다. 여기서 굳이 핵심을 언급하라면, 특정 나선 궤도를 따르는 운동은 마찰력의 제약 및 에너지의 보충 없이 일정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응용한 연구라 한다.(너무 깊게 따지지는 말자.) 카츠라기 박사는 그런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인공 S2 기관을 상용화하여 인간 세계에 도움을 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결과적으로 세컨드 임팩트의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 카츠라기 자신이란 사실은 안타까운 아이러니였지만.

세컨드 임팩트 현장

박사는 2000년에 제레의 지원을 받아 카츠라기 조사대를 구성한다. 그는 자신의 S2 이론을 증명한다는 목적 겸, 아담에 대한 접촉 실험을 위하여 남극으로 떠나게 된다. 결국 이론은 맞는 것으로 증명이 됐지만,예정된 세컨드 임팩트에 의해 그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제레의 의장 킬은, 그런 카츠라기에 대해 독단에 빠져 현실은 망각한 채 발견의 기쁨에만 매달려 사는 부류정도로 표현했다. 그런데 카츠라기 박사의 딸인 미사토에 따르면, 저 말은 일견 맞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카츠라기 박사는, 겐도우와 닮은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언제나 일이 우선이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뒷전인 그런 사람. 때문에 미사토의 어머니는 항상 울고만 있었다고 한다. 미사토에게 아버지는 없는 존재나 같았고, 외로운 어머니 밑에서 좋은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잡혀, 아버지가 가족에게 남기고 간 마음의 짐을 떠맡았다. 사람들은 카츠라기 박사에 대해 섬세하고 예민한 타입이라 평했지만 그녀는 부정한다. 아버지는 약하고 어린 아이 같다고, 그래서 현실에서 도망쳤던 거라고 말이다. 미사토의 어머니는 결국 박사와 이혼했고, 미사토는 오히려 그 사실을 반갑게 생각했다. 카츠라기 박사는 그 일에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나, 미사토는 그것을 더러 자업자득이라 표현했다.

카츠라기 박사의 유품, 십자가 목걸이

그런데 물론, 카츠라기 박사가 딸인 미사토에게 관심을 잘 가지지 않았던 건 맞겠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하나의 의문점이 있다. 바로 2000년에, 그가 남극에 원정을 갔을 때 미사토 또한 거기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사토의 어머니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이혼 후엔 미사토의 보호자가 아버지 한 사람 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때의 남극은 보통 위험한 곳이 아니다. 그렇다고 박사가 아주 죽으러 간다는 각오를 했을 것 같진 않지만, 어린 딸을 데리고 가기엔 역시 많은 무리가 따르는 여행이었다. 그러니 자세한 건 몰라도, 남극 동반 원정은 딸에 대한 카츠라기 박사의 관심이며, 그 방법이 서툴렀을 뿐 딸을 사랑한다는 표현의 일환이 아니었나 싶다. 가만히 놓고 보면, 남극 UN 지부에 있는 미사토의 모습은 마치, 유이가 초호기와의 접촉 실험을 하던 날, 그것을 구경하던 어린 신지와 꼭 겹친다. 카츠라기 박사가 아담과의 접촉 실험을 미사토에게 보였던 이유는, 과거 유이가 신지를 데리고 온 것에 대해 나무라는 후유츠키에게 했던 말과 같이, 딸에게 인류의 밝은 미래를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비록 그 부녀의 여행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말이다.

이 장면은

18화에서도 반복.

세컨드 임팩트가 발생했을 때, 미사토에 비해 카츠라기 박사가 얼핏 봐도 훨씬 더 많은 상처를 입었던 것은, 아마 온몸으로 딸을 막아 지켰기 때문으로 보인다. 남은 힘으로 미사토를 구명 캡슐 속에 넣고, 얼굴엔 눈물처럼 피를 흘리며, 그가 지니고 다니던 십자가 목걸이를 그녀에게 맡긴 채로 숨을 거둔다. 그 작은 목걸이 안에는, 카츠라기 박사가 세상을 살면서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이 담겨 있었을 테다. 가족에 대한 사랑,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도 말이다. 미사토는 아버지가 싫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줬던 게 또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를 생각할 때면 늘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미사토가 네르프에 와서 사도와 싸우는 가장 큰 이유도, 따지고 보면 아버지를 대신하려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십자가 목걸이는 하나의 부적이다. 제루엘이 미사토의 바로 앞에서 빔을 쏘려던 순간, 십자가 목걸이를 꽉 쥐고 있는 그녀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손에 쥔 십자가

그녀가 사도를 무찌르는 이유는,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라기 보단, 12화에서 리츠코가 지적한 것과 같이 사도에 대한 모종의 복수 심리로 볼 수 있다. 실제로 15화에서 카지에게 그녀 스스로 그렇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 때문에 미사토의 작전 중에선, 현실적인 가능성은 무시한 채 감정적 진취로만 이룬 것들이 제법 많았다. 특히 12화 사하퀴엘 전 당시 작전의 성공률은 0.00001% 수준이라니, 말 다했다. 에피소드의 부제-She Said, "Don't Make Others Suffer for Your Personal Hatred.(당신 개인적인 증오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마.)"-는 그런 그녀에 대한 리츠코(혹은 미사토 자신)의 일침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말로 단순히 복수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사토가 손에 쥔 십자가는 카츠라기 박사가 그녀에게 남기고 떠난, 가족에 대한 어설픈 사랑이기도 했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동시에 십자가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 그대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책임감의 상징이기도 했다.

에반게리온의 십자가 상징

우주 탄생?!

십자가 얘기가 나온 김에, 관련 내용을 좀 더 밝히고 마치겠다. 에반게리온에는 십자가 상징이 상당히 자주 나온다. 우선 가장 유명하게는, 사도가 죽을 때의 십자가 모양의 발광. 이 부분은, 엔드 오브 에바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모을 때에도 같은 형상이 나오는 걸 봐선, 육체에서 영혼이 나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한 연출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프닝의 십자가. 코멘터리를 보면, ‘에반게리온제목이 나오기 전에 파란 광선이 원형으로 퍼지고 이어 화면이 붉게 물드는 것, 재밌게도 우주의 탄생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제목이 나오는 부분은 십자가 형상으로 화면 전환을 처리했다고. 아이 캐치의 경우에도 같은 방식의 연출을 사용했다.

오프닝과 아이 캐치의 십자가 광선

이런 표면적인 묘사 외에도, 좀 더 숨은 상징들이 있다. 21화에서 유이가 초호기에 흡수된 후에, 겐도우가 인류 보완 계획을 발안하는 장면을 보자. 유심히 보면, 겐도우의 그림자가 커다란 십자가를 지고 있는 형상이다. 주변에 그런 그림자를 만들 물체가 없기 때문에 확실히 의도적인 표현이다. 겐도우가 앞으로 새로운 인류를 위한(?) 시나리오를 쓰게 된다는 점에서, 그가 등에 지게 될 책임과 또 치르게 될 죗값을 표현하는 것이겠다. 역시 유사한 상징으로, 4화에서, 신지가 에반게리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네르프를 나간 후 한적한 길을 걷는 장면이 있다. 은 아주 커다란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신지가 무겁게 지고 있는 운명은 결코 피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님을 표현한 장면으로 보인다. 안노 감독의 말에 따르면 에반게리온은 퍼즐과 같다. 언급한 부분 외에도 흥미로운 연출이 많지만 나머지는 발견의 재미를 위해 남겨 둔다.

[에반게리온] 23. 미사토 진심을, 신지에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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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미사토 ② 진심을, 신지에게

 

미사토 "그렇구나, 아버지랑 만나기 싫나 보다?"

"나랑 같네."

이제 1화에서, 미사토가 신지를 데리러 가는 장면을 보자. 신지와 처음 대면했을 때, 미사토의 첫 대사는 미안, 기다렸지?’였다. 참고로 신지와 미사토 사이의 대화엔 기다림의 테마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신지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대사 역시 같은 테마를 지닌,돌아오면, 다음을 계속하자.’였다는 사실. 와중에 사키엘을 무찌르기 위한 자위대의 폭탄이 투하되고, 신지를 팔로 감싸는 미사토. 그런 그녀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에 신지는 처음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네르프로 오는 차에선, 신지가 겐도우에 대한 속내를 밝히고, 미사토는 나랑 같네.’라며 동질감을 느꼈다. 나중에 초호기 앞에서 갈등하는 신지를 두고 그의 마음을 정말로 걱정했던 건 미사토 하나였다. 신지에게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말라던 그녀는, 신지에게 이미 상당한 감정 이입이 된 상태였고, 그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미사토 "신지, 뭘 위해서 여기에 왔지?

도망치면 안 돼, 아버지에게서, 무엇보다, 너 자신에게서!"

"아까 그 일, 신경 쓰여?"

신지 "네."

"그렇게 남의 얼굴만 잔뜩 걱정하고 있으니 그렇지."

이후로 미사토는 신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1화와 같이 좋은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신지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이 미사토라는 캐릭터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 중 하나가, 어린 신지를 놓고 그의 성격에 대해 상당히 비꼬는 투로 말한다는 것이다. 4화에서 가출한 신지에게 따뜻한 말 대신 에바에 타기 싫네? 그런 마음으로성가셔!’라는 대사를 기분 나쁜 어투로 날린 것도 그렇고, 12화에서 아스카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그에게 쓸 데 없이 차가운 태도로 반응하는 것도 나쁜 의미로, 유명한 부분이다. 생각해 보면, 그건 아마도 신지에게서 얼핏 보이는 자기 모습에 대한 혐오감의 발현일 것이다. 그런 그녀를 보면, 사춘기 아이들의 마음을 살필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런 어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어린 미사토는 세컨드 임팩트의 지옥을 겪었고,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실어증도 겪었다. 다행히 이내 회복한 그녀는, 이후 대학에서 만난 동료 리츠코의 말에 의하면 여태 말을 못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엄청난 수다쟁이가 되었지만. 덤으로 미사토는 공부도 꽤 했던 모양으로, 리츠코와 함께 제2도쿄 대학에 다니게 됐다. 그녀 나이 딱 스물이 되던 2005년엔 카지와 사귀어 동거를 시작, 역시 리츠코의 증언에 따르면 1주 내내 집 안에 박혀 섹스 마라톤을 즐긴 전력도 있다. 그렇게 육체적 관계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 보완 중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싶었단다. 그랬던 그녀가 카지와 이별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카지의 모습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라 한다. 사실 그와 만나게 된 이유도 같았겠지만.

카지 "카츠라기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야. 나한테 사과할 것 없어."

미사토 "아니, 선택한 게 아냐. 그냥, 도망쳤던 거야. 아버지에게서!"

"난 겁쟁이야. 나쁜 여자야!"

-뭐가 부끄러워? 좋아하는 남자한테 보여 주고 싶었던 거잖아? "아냐!"
-어떨까? 사실, 아버지한테 보여 주고 싶었던 거지? "아니란 말야!"

미사토는 소위 말하는 변형 일렉트라 콤플렉스(소녀가 가지는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지닌 캐릭터로 많이들 해석한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애착과 갈증, 그와 닮은 다른 남자를 통해 충족하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사토가 (특히 성적인 의미로)마음을 열었던 두 명의 남자, 카지 신지, 사실 그녀 아버지의 단점(워커홀릭 기질과 인간관계에 서툰 것)을 나눠 가지고 있던 만큼 미사토에겐 그 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보상받으려는 욕심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미사토가 카지와의 관계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스스로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은 아마 그런 자신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겠다. 사실 그녀와 카지 사이의 관계는 극에서 충분히 묘사가 되었기 때문에 다들 납득하겠지만, 다른 한 명, 신지에게 그녀가 성적인 오픈 마인드를 가졌다는 것에 대해선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확실히, 미사토와 신지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보호자와 보호를 받는 자아니다. 그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잠깐 뒤로 미루기로 하고, 빼면 섭섭한, 휴가 마코토에 대한 얘기도 하고 가겠다.

한 차에 타고 본부에 가는 휴가와 미사토. 원래 이랬나?

미사토 "미안해."

휴가 "괜찮아요, 당신과 함께라면."

"…고마워."

휴가는 작품 후반(특히 카지가 죽은 이후)에 미사토에게 상사가 아닌 다른 의미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가장 직접적인 대사는 (자폭으로 죽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괜찮아요, 당신과 함께라면.’으로, 그렇잖아도 눈에 띄게 미사토 주변에서 나대기 시작한 그의 의중을 확실히 찍고 갔다. 덕분에 이부키 마야와 함께, 오퍼레이터 3인방 중 존재감 꼴찌라는 불명예는 확실히 피한 상황. 아무튼, 그런 완곡한 대쉬에 대해 미사토 또한 알고 있었던 것 같으나, 그에 대한 확실한 반응은 나온 적 없다. 마냥 싫지는 않은 눈치. 그러나 정말 어쩌면, 딱 봐도 숫기 없는 휴가가 그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것, 또 미사토 역시 그 즈음엔 본인 말마따나 누구라도 괜찮은상태였던 만큼, 우리에게 보이지 않은 뭔가가 있었을 수도? 물론 엔드 오브 에바에서 휴가가 연출한 미사토와의 환상을 보면, 역시 총각 설정을 쭉 유지했다는 쪽이 더 납득이 간다.

미사토 "그 때도, 난 카지 군을 이용했던 거겠지."

카지 "이제 됐어, 그만!"

"난 나한테 실망했어!"

다시 카지 얘기로 가서, 그는 분명히 미사토가 처음으로 진심을 주었던 남자가 맞고, 반대로 미사토는 그에게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여자였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없다. 그 이유는 언급이 없으나 아마 서로의 길을 가기로 한 후, 사랑의 감정은 배제하고 에 집중하겠다는 표현이겠다. 부끄러운 과거가 껄끄럽기도 할 테고 말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들은 사랑을 숨기지 못했다. 15화에서 아버지에 대한 얘기, 또 카지에 대한 미안함을 고백하며 드러난 치부를 자책하는 그녀에게 카지는 키스로 그것을 대신 덮어 주었다. 미사토와 카지의 마지막 동침, 그는 자신의 유지(遺志)를 담아 그녀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었다. 그의 죽음에 미사토는 많이 울었지만, 이내 털고 일어나 그가 남긴 과제를 시작한다. 그녀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맥주 광이었지만, 카지의 죽음 이후엔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캔 커피로 취향도 바꾼다. 이제 그녀 안엔 두 사람의 유지가 흐르는 것이다. 하나는 아버지의, 또 하나는 카지의.

그렇다면 남은 한 명의 남자, 신지는 어떨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사토에게 신지는 단순히 어린 소년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많다. 신지가 미사토를 처음 봤던 것은 미사토가 보낸 사진을 통해서였다. 몸매가 훤히 드러난 사진과, 가슴 부분을 주목하라는 멘트가 붙은 사진. 참고로 사진 속의 글자는 안노 감독이 직접 적은 것이고, 립스틱 자국은 가이낙스의 실제 여성 스태프의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무튼, 사진만을 놓고 판단하면, 미사토는 신지에게, (상식적으로 그렇게 해야 할)보호자로서가 아니라, 잠재적인 사랑의 상대, 이성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려는 것 같다. 물론 미사토의 개방적이고 쾌활한(척 하는) 성격으로 보아 가벼운 장난 정도로 여기는 게 무난하겠지만, 문제는 작품 후반 미사토의 신지에 대한 행동이, 결코 무난한 쪽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당장 공식 팸플릿의 캐릭터 소개에도, 미사토를 더러 신지의 가족+동료+상사+애인이란다.

미사토 "신지, 들어갈게."

"신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 밖에…."

신지 "하지 마요!"

이 논제의 중심에 있는 장면은 23화에서 나온다. 2대 레이가 죽고 난 후, 절망에 빠진 신지에게 위로가 되겠답시고 미사토가 그의 옆에 앉는 장면이 있다.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면, 미사토가 아이의 손을 잡으려다 실패한 수준에 그치지만, 단순히 손을 잡기 위해 지금 내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 밖에 없어.’ 따위의 대사를 날릴 이유는 없다. 또 신지의 거부 반응도 필요 이상으로 강하다. 해당 부분이 만약 성인 남녀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장면이었다면,섹스라는 단어가 아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상황 연출이다. 그래도 구체적인 표현이 없는 만큼, 이 장면을 깨끗한 채로 그냥 두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가이낙스 발행 필름 북에는 이 부분에 대한 주석에서,미사토가 신지에게 그녀의 몸을 주려고 한다.’고 기술했으니, 오 마이 갓. 게다가 이 장면에는 좀 더 직접적인 상징도 있다. 미사토가 침대에 앉기 전 신지의 뒤로 비치는 의자가 어떤 행위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 물론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미사토 "걱정 말어, 저런 애한테 손을 댈 리는 없잖아!"

리츠코 "당연하잖아!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너란 애는…!"

에반게리온에서 신지에게 이성의 이미지를 선사하는 캐릭터는 미사토아스카, 두 사람이다. 동년배인 아스카가 그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미사토가 신지에게 이성의 의미로 접근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더 정확히, 그러면 안 된다.) 미사토,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2화에서 리츠코에게 전화로 저런 남자 아이에게 손을 댈 리가 없잖아!’라고 당당하게 말한 그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손을 대려고 했던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그런 방법이 자신에게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니면 좀 더 이기적으로, 신지를 통해 카지를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서? 물론 생각해 보면, 미사토가 유일하게 마음을 줬던 남자는 카지 하나였고, 그런 카지와 소통했던 가장 중요한 방법은 성적인 접촉이었다. 사람과의 관계에 서툰 그녀이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이 그런 것이라 생각했을 수 있다. 여기서 아까 말했던 대로, 신지 속에도 그녀의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있다는 걸 상기하면, 이 부분 역시 그녀의 변형 일렉트라 콤플렉스 증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여기서 잠깐,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은, 심리 과학 관련 개념,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이론을 상당히 많이 차용하고 있다. 인물의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루는 후반 에피소드 중, 18, 19, 20화는 연속으로 심리학 용어를 영어 부제로 썼다. 세 용어가 생소할 테니 여기서 간단히 설명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먼저 18화의 부제, ‘Ambivalence’를 보자.반대 감정 병존이란 뜻으로, 개인의 마음 안에 전혀 다른 성격의 두 마음이 병존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인간 마음의 근간을 이루는 리비도와 데스트루도. 블로일러가 1911년 처음 제창한 용어이다. 프로이트는 이 개념을 양가성이라 칭하며 특히 사람이 겪는 가학적 단계의 중요 특징이라 밝혔다. 18화는 더미 초호기가 바르디엘을 파괴하는 에피소드였는데, 특히 더미가 지닌 데스트루도에 대한 설명으로도 부제를 이해할 수 있겠다.

19화의 영어 부제는 ‘Introjection’이었다.내적 투사라는 뜻으로, 역시 프로이트가 자주 언급하는 개념이다. 타인의 행동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무의식적으로 동화시키려는 정신 기제, 보통 자아가 불안을 없애기 위해 사용한다. 대개 모든 사람들이 겪는 것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키우기 위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이다. 19화는 제루엘 전을 통해 신지가 강력한 데스트루도를 발현하고, 초호기와의 400% 싱크로를 이루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내적 투사라는 부제는 넓게는 에반게리온과 파일럿 사이의 싱크로 자체를 조명하는 용어로 볼 수도 있고, 좁게는 신지와 초호기의 동화가 이라는 완전한 자립을 이끌었다는 부분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음으로 20화의 영어 부제는 ‘Oral stage’였다. 많이들 들어 알고 있겠지만 구강기라는 뜻이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리비도 발달 이론의 핵심이다. 리비도는 성적 본능의 에너지이며, 프로이트는 그 단계를 집중 부위에 따라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잠복기, 생식기로 나눴다. 그 중에서 구강기는 어머니의 젖을 빠는 시기로,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처음으로, 또 아주 강력하게 발휘하는 시기이다. 동시에 자기와 비()자기를 구별하는 자아 기능이 발달하는 때이기도 하다. 20화에서는 신지가 초호기 속에 흡수되어 그 안의 유이를 느낀 후, 다시 사람의 형태를 찾게 되는 과정을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 빗대어 그리고 있다. 그러기 위해 리비도의 자극이 필요했다는 것은 앞서 따로 짚은 바 있으니 이 정도로 설명하고 넘긴다.

미사토 "펜펜, 이리 온."

"그래, 외로운 건 나였네. 누구라도 좋다는 거였어."

어쩌다 무슨 심리학 수업이 된 것 같지만, 어쨌든, 이렇게 에반게리온은 심리학 개념, 그 중에서도 프로이트의 이론을 제법 구체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그의 학설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리비도나 데스트루도와 같은, 정신 본능 에너지와 그 욕망들은, 절대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발달 기간 중 그릇된 방법으로 표출 통로가 막히게 되면, 어른이 되어 부적절한 방법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사토와 같이 아버지와 가정의 부재 등으로 적절한 리비도의 발현 단계를 거치지 못했을 경우, 이성(理性)으로 감추었던 욕구가 결국 어떻게든 표출되기 마련이며, 미사토가 신지에게 보호자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은 농담이 아니라 그녀 마음에 내재하던 욕망의 어긋난 발현으로도 볼 수 있다.

카지-이게 나의 전부야. 비밀 번호는, 우리들의 첫 추억. 그럼, 잘 지내.

미사토 "울리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며 초조해 하는 건 이제 그만할 거야.
-너의 마음, 받았으니까."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었던 일이, 또 사랑하는 카지를 잃었던 일이, 미사토를 이 정도로 망가뜨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와중에도 자력으로 재기할 힘을 잃지는 않았다. 신지, 심지어 펜펜에게도 스킨십을 거부당한 그녀가, 카지의 음성 메시지만 계속해서 들으며 넋을 놓던 그녀가, 더는 울지 않고 카지와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길을 걷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도 알게 된 덕분일까. 특히 레이에 대한 의문을 시작으로 카지가 남긴 데이터를 조사하며 그녀는 진실에 아주 근접한 인물이 되며, 동시에 내면의 성장도 함께 이루게 된다. 미사토와 함께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신지, 아스카와 비교할 때 미사토가 진정으로 어른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특히 엔드 오브 에바에서, 의지를 잃은 신지를 초호기로 보낸 것은 결국 미사토였다. 생각해 보면 신지를 초호기에 태운 것은 항상 미사토였지만, 지금의 그녀는 4화의 감정적인 비꼼, 12화의 어설픈 냉정도 아니다. 사도에 대한 복수는 없었다. 개인적인 증오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죽음과 바꾸어 소년에게 세상을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전하려는,어른 미사토의 조언만이 있었다. 미사토의 진심이, 비로소 신지에게 닿았던 것이다.

BGM E-13 [Short Composition] (rhythm only, modified)

"어른의 키스야."

미사토는 조용히 신지의 손에 자신이 가지고 다니던 십자가 목걸이를 쥐어 준다. 언젠가 죽음 바로 앞에 섰을 때 자기 손에 꼭 쥐고 있던 것. 아버지의 유지. 가족에 대한 사랑이며, 인류의 미래에 대한 희망 비슷한 것. 그것은 아직도 십자가 목걸이 안에 온전히 남아 있었고 미사토는 신지에게 그 뜻을 전했다. 그리고 이어 어른의 키스. 카지가 자신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세상에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마음의 전달 방법. 카지가 자신에게 진실을 전한 방법. 미사토는 신지에게 그 진심도 건넸다. 동시에 미사토는 그 키스와 함께, 신지에게 서투르게 흉내만 냈던 보호자의 역할에도 그 끝을 고한다. 신지에겐 그것이 어른의 시작이 되길 바라며.

미사토 "이제부터는 너 혼자야. 전부 너 스스로 정하는 거야."

신지 "난, 안 돼. 안 돼요."

"지금 울어도 어떻게 되는 게 아냐!"

"자신이 싫은 거지. 그래서 남도 상처 입히는 거겠지.
그치만,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어도 그건 니가 직접 정한 거잖아?
가치가 있는 거야 신지야, 너 자신의 일인 거야.

얼버무리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미사토 씨도 인 주제에!"

"이라서, 뭐가 어떻다는 건데?
너, 여기서 관둘 셈이야?
지금 너 아무 것도 안 할 거면, 나 너 용서하지 않을 거야,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야!"

"지금의 니가 전부가 아니란 말야.
나중에 잘못을 알고 후회하겠지. 나는 그 반복이었어.
하지만, 그 때 마다, 앞으로 전진했다는 기분이 들었어."

"알았니? 신지. 한 번 더 에바에 타서 결판을 내렴.
에바에 탄 자신에 대해.
뭘 위해서 여기에 왔는지,
뭘 위해서 여기에 있는 건지.
지금 너 자신의 해답을 찾아 봐."

"그리고 결론을 내거든, 반드시 돌아오는 거야.
약속이야."

카지 "너에겐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아무도 강요하지 않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해.
자신이 지금 뭘 해야 하는지."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스카 말대로, 카펫, 바꿔 둘 걸 그랬네. 그치, 펜펜?"

마지막 카펫 발언은 에바 팬들 사이에서 아주 흔한 논쟁의 대상인데, 그에 대한 가장 흔한 가설은, 엔드 오브 에바의 장면 중 아스카와 신지가 싸우는 중에 커피를 바닥에 흘린 것과 연계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허나, 다음에 자세히 다룰 부분이지만 그것은 보완의 장면으로 보는 것이 더 맞다. 게다가 커피를 흘린 바닥은 명백히 카펫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 대사는 그 장면과 별개로 보는 게 좋다. 해석의 여지는 많지만, 개인적으로 이 발언은, 어른이 된 미사토의, 아스카라는 아이에 대한 미련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스카에게 따뜻한 손길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 말이다. 신지에겐 운 좋게, 어떻게든 자신의 진심을 전할 수 있었지만, 아스카에게는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 아스카를 감싸지 못하고 적절한 처신도 없이 자신의 아픔 속에만 박혀 살았던 것. 아스카가 원하는 집을 만들어 주지 못했던 것. 그리고 그녀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지 못했던 것. 그 모든 것에 대한 후회가, R-20 구역의 차가운 바닥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던 중에, 불현듯 그녀 마음 한 구석에서 파도처럼 아프게 몰려왔던 것일 테다.

"카지 군…나 이걸로, 된 거지?"

지금 막 이별한 신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 아스카, 그리고 외로움을 견디게 해 준 펜펜에 대한 그리움에 이어, 그녀는 마지막으로 카지를 생각한다. 그의 유지를 받아 신지에게 이어 줬던 것에 대한 코멘트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가 마중이라도 나온 듯이 그녀의 시선은 하늘로 향하고 있다. 폭발 직전 그녀 곁에 선 레이는, 보완을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온 릴리스인 모양이다.

그리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장면이다. 신지와 아스카가 하늘을 보며 가만히 누워 있는 그 순간에, 미사토는 십자가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나무에 걸린 하얀 십자가는 아마, 새로운 세상의 어른이 될 두 아이에 대한 미사토의 마음 그 자체였을 것이다. 미사토가 마음의 힘으로 다시 사람의 형태를 가지게 될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그녀의 유지가 신지 속에 확실히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돌아오면, 다음을 계속하자."

"그만 둬요!"
"…미안해."

"사람 하나 못 살리는 게 무슨 과학이야, 신지를 돌려 줘, 돌려 달라고!"

"…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렴."

"신지, 이제 여긴 너의 집이야."

"다…다녀왔습니다."

"어서 오렴."

"미안-! 기다렸지?"

[에반게리온] 24. 리츠코 어머니와 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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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리츠코 ① 어머니와 딸

 

리츠코 "돌아가시기 전날 밤,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마기는 세 명의 자신이라구.
사실 프로그램을 미묘하게 바꿔 놓았어.
난 어머니는 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말야.
어머니로서의 엄마는 알 수 없겠지.
그래도 과학자로서는 존경도 했어."

"…그치만 말야, 같은 여자로서는, 증오하기까지 했어."

아카기 리츠코, 네르프의 수석 과학자이자 기술 부장이다. 에반게리온 관련 연구와 개발, 유지 및 수리 등을 맡고 있다. 그녀는 과거 에반게리온 계획을 지휘했던 게히른의 유명 과학자 아카기 나오코의 딸, 2도쿄 대학을 졸업한 후에 어머니를 따라 게히른에 왔고 그녀 밑에서 일을 시작했다. 여러 의미로, 그녀는 항상 어머니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던 여성이다. 지금은, 리츠코에겐 미사토라는 꽤나 매력적인 동료가 있지만, 그녀에게도 개인적인 일에 대해선 거의 함구하는 수준이며, 특히 감정적인 부분에 대해선 일절 언급이 없다. 두 사람 다 아버지 없이 자랐기 때문에 공유할 감정이 많을 것도 같지만, 아는 대로 리츠코는 미사토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마음의 빈 곳을 채우고 있었으며, 아마 그런 부분에서 나온 윤리적 가책,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던 것 같다. 미사토가 그랬듯, 리츠코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 역할의 부재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해 마냥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진 않다. 처음으로 미사토에게 자신의 속내를 밝혔던 13화에서의, 어머니에 대한 그녀의 대사 과학자로서는 존경했고, 어머니로서는 알 수 없고, 여자로서는 증오했어.’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리츠코에게 어머니란 나오코가 아니라 마기 그 자체라 보는 편이 더 맞겠다.

나오코 "마기 캐스퍼, 마기 발타자르, 마기 메르키오르."

"마기는 세 명의 나야. 과학자로서, 어머니로서, 여자로서의 나."

리츠코 "세 명의 엄마네요."

마기 시스템은 아카기 나오코 박사가 제작한 삼중 슈퍼컴퓨터이다. 사람의 사고 패턴을 담은 인격 이식 OS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마기 7세대 이후로는 나오코 박사의 인격 중 세 단면을 그대로 옮긴 상태로 구동 중이다. 에반게리온의 작동 역시 이와 유사한 방식이라고 리츠코가 미사토에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특히 사고 패턴의 복사와 모방이라는 점에서 더미 시스템과 운용 방식이 일치한다. 실제로 13화에서 시도했던 실험 내용은 프리브노 박스(생명 과학 용어 프리브노 상자와 동일하나 에반게리온에선 시그마 유닛 공간 안의 한 구역으로 보는 것이 맞다.)의 시뮬레이션 기체를 코어 없이 파일럿과 마기의 힘으로 작동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광역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 마기인 만큼, 네르프 본부는 물론 일본 정부의 정책 결정에도 크게 관여하고 있다. 사도 이로울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고, 이후 엔드 오브 에바에서 제레가 마기를 우선 점거하려던 이유 역시 거기에 있었다.

여러 지부의 마기 현황

마기-1 메르키오르과학자로서의 나오코, 마기-2 발타자르어머니로서의 나오코, 마기-3 캐스퍼여자로서의 나오코를 대신하고 있다. 그 세 부분의 인격이 다투는 식으로 마기는 의사를 결정하며, 최선의 결론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일부러 인간의 딜레마를 활용한 것이다. 간단한 예로, 어떤 작전을 수행하기에 앞서, 마기 세 부분의 인격이 자체 투표를 시작한다. 과반이 찬성할 경우 쉽게 수행 가능하며, 민감한 사안의 경우 만장일치 원칙을 우선으로 한다. 이 트리오 딜레마 구성의 마기는 세계에 총 여섯 대가 존재하고 있다. 네르프 본부의 오리지널 마기를 포함하여, 일본의 마츠시로, 독일의 베를린과 함부르크, 미국의 매사추세츠, 중국의 베이징에 마기의 다른 몸체가 있다. 다만 4호기와 함께 증발한 네르프 네바다 지부를 생각하면, 지금은 없겠지만 본래 마기는 총 7였던 것 같다. 한 가지 더, 엔드 오브 에바에는 마기의 시스템 정보가 모니터에 뜨는데, 자세히 보면 대뇌,소뇌,연수 등의 뇌 관련 생체 용어를 하부 조직 명칭에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마기는 두뇌라는 이름의 게히른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13화는 '안드로메다의 위기'의 오마쥬!

마기는 이후 네르프가 철저히 의존하는 메인 시스템이 된다. 반대로 마기만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다면 네르프의 정복은 별 문제도 아니다. 더 정확히는, 마기 하나면 제3도쿄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13화의 이로울 역시 그 사실을 이해한 모양으로, 마기를 점거하여 네르프 자폭을 시도했다. 다만 그 자폭 타이밍을 보아, 이로울 역시 본래 목적은 아담을 찾는 것이나 마기 속의 정보를 통해 도그마에 있는 존재의 정체(릴리스)를 간파, 네르프 파괴를 원하게 됐다는 가설도 있다. 말이 나온 김에 13화의 영어 부제도 살피고 간다. "Lilliputian Hitcher"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 사람들을 칭하는 것으로, 이로울이 마이크로 사이즈의 사도였다는 점에서 녀석이 네르프에 침투하는 것을 재치 있게 비유한 제목이겠다. 13화는 전체적으로 1971년 영화 안드로메다의 위기의 테마와 소재를 많이 차용했다. 2008년엔 같은 원작 소설을 공유한 동명의 미국 드라마도 나왔으니 흥미 있는 사람은 각자 감상하는 걸로 하자.

타입-666 방화벽. 중앙의 용어도 보자. 대뇌(Cerebrum), 소뇌(Cerebellum), 연수(Medulla oblongata)?

엔드 오브 에바에서, 제레는 다른 다섯 대의 마기를 이용하여 오리지널 마기 시스템을 공격한다. 처음에는 그들 역시 굳이 피를 보지 않고 마기만 안전하게 차지하여 네르프를 지휘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겐도우의 명을 받은 리츠코가 타입-666 방화벽(발동 이후 62시간 동안 외부 침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기능)을 오리지널 마기에 설치, 마기의 해킹을 막았고, 결국 제레는 자위대를 투입하여 네르프 전면 파괴라는 유혈 작전을 감행했다. 타입-666 방화벽에서 666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악마의 숫자로 유명하다. 네르프가 신의 섭리를 거스르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악마에 대입한 작명인 모양. 참고로 당시 리츠코는 이 방화벽을 설치하면서, 그녀가 원하는 타이밍에 마기가 네르프와 함께 자폭하도록 프로그램 조작도 수행했다. 결과적으로는 여자로서의 나오코인, 캐스퍼가 배신하여 실패했지만.

오해를 낳은 장면

마기 각 부분의 이름은 세 명의 동방 박사의 이름을 사용했다.(마기라는 이름 자체가 동방 박사를 의미한다.) 예수가 탄생했을 때, 별을 보고 동쪽에서 찾아와 아기 예수를 경배했다는 점성술가들인데, 종교인들에게는 멜키욜, 발타살, 가스팔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할 것이다. 새로운 신의 탄생을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될,현명한 존재가 마기라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작명 센스. 마기에 대한 얘기는 이 정도로 하되 잠깐, 13화에 나온 마기 내부에, 뇌와 같이 생긴 물체가 있는 탓에 생긴 루머 하나를 짚고 간다. 혹시 마기 안에 실제 나오코의 뇌를 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은근히 흔한 오해인데, 마기는 나오코가 죽은 날 분명히 완성된 상태였다. 또 나오코가 제법 높은 곳에서 투신했음을 생각하면, 뇌가 그렇게 온전한 상태일 수 없다.

아무튼, 이렇게 마기는 세 부분의 인격을 나눈 아카기 나오코 박사 그 자체이며, 마기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그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나오코를 아는 것이 중요하겠다. 나오코는 딸인 리츠코와 표면적인 선에서는사이가 좋았던 것 같지만, 단편적으로 말하고 넘기기엔 복잡한 구석이 많은, 가깝고도 먼 관계였다. 알다시피 리츠코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작품 전체에 걸쳐 언급 한 번이 없는 상황. 때문에 혹자는 리츠코가 시험관 아기라는 주장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나오코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겐도우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리츠코 정도의 딸을 가졌을 정도면, 나오코는 이르면 10대 후반에서 늦어도 20대 초반에 어머니가 되었을 것이다.(리뷰 16편의 에바 연표를 보자. 겐도우와 리츠코의 나이 차이는 18살이다.) 그러니 미안한 생각이지만, 나는 리츠코가 소위 말하는 의도치 않게 낳은 아이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보는 쪽이 나오코 본인이 느끼는 어머니 역할에 대한 반성과,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상술이 작품 안에 따로 없는 것. 또 리츠코가 어머니에게 느끼는, 특히 같은 여성으로서의 악감정을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리츠코는 옛날부터 남자랑은 잘 어울리지 못했지?
역시 여자 혼자의 손으로 키운
미안해, 그게 아니라 늘 혼자 지냈던 탓이겠지.
싫다, 그치? 자기 편할 때만 엄마인 척 하구 말야.

나오코 "…엄마, 인가…."

21화에는 나오코 스스로, 리츠코를 너무 혼자 살게 했다며 자책하는 멘트가 있다. 리츠코가 남자와 잘 지내지 못하는 것도 그것 때문이라면서, 편할 때에만 어머니인 척 해서 미안하다고도 했다. 어머니로서의 자격에 대한 반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딸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던 것은 또 아닌 모양이다. 실제로 중년의 나오코는 오직 겐도우 한 사람만 보고 살았던 것 같으니 말이다. 딸이 게히른에 왔을 때에도 겐도우와 사랑을 나누는 것을 쉽게 들킨 걸 보면, 딸의 눈치를 특별히 본 것 같지도 않다. 중요한 건 자신의 사랑이었다. 이카리 유이가 죽었을 때, 혼잣말로 원하는 대로 되었다던 나오코는 많이 기다릴 것도 없이 겐도우와 육체적 관계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오코 "정말로 괜찮은 거죠?"

겐도우 "응, 자기가 한 일은 후회하지 않아."

"거짓말! 당신은, 아직도 유이 씨를 잊지 못하잖아요."

"그치만 됐어요, 나는."

나오코는 겐도우가 유이를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한다(나오코와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겠다는 겐도우의 간접적인 언급이 있다.)는 말이 거짓인 줄도 알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반대로 겐도우 입장에서는, 나오코를 철저히 이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사랑(?)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나오코의 여자로서의 인격, 캐스퍼를 강화한 것이, 그녀의 사후 네르프를 결정적인 위기에서 두 번이나 구제했기 때문에, 상당히 훌륭한 전략이었다. 실제로 13화에서 최종적으로 이로울을 막았던 것은 캐스퍼였다. 참고로 가장 먼저 몸을 내줬던 것은 과학자로서의 나오코인 메르키오르. 겐도우를 사랑하는 나오코의 마음은, 과연 그녀의 딸인 리츠코도 감히 이기지 못할 만큼 강했던 게다.

나오코 '이 아이, 어딘가유이 씨?!'

"아야나미 레이 관련 자료는 이미 모두 삭제. 기록은 백지어떻게 된 거지?"

그런 그녀의 마음이 흔들린 것은, 겐도우가 아니라, 유이를 아주 꼭 닮은, 수상한 어린 아이 때문이었다. 겐도우는 어린 레이에 대해, 아는 아이를 대신 맡았을 뿐이라 간단하게 말했지만 나오코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모든 보고서에 그 아이에 대한 기록이 말소된 상태였으나, 자력으로 레이에 대한 정보를 캐냈다. 그렇게 레이가 유이의 클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레이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강인한 그녀였지만, 겐도우가 당신더러 할망구라 했다면서, 레이가 웃으며 그녀를 자극했을 때, 그녀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레이의 모습 속에서 자신이 질투했던,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던 유이의 얼굴을 본 나오코는, 순간 그 아이가 너무나 두려웠던 것이다. 레이와 자신의 연적 유이를 순간 혼동한 그녀는 그 자리에서 레이를 목 졸라 죽였고, 잠깐의 정적 이후, 상황을 깨달은 그녀는 결국 자살한다. 다만 이 부분에서, 나오코가 레이를 죽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온 바 있다. 초기 대본에는 나오코가 레이의 목을 조른 후에, 레이가 다시 숨을 찾는 연출이 있으며, 레이가 죽는 순간에 대한 묘사가 확실하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초대 레이가 릴리스인 만큼, AT 필드로 자신을 보호한 후 역으로 나오코를 죽였다는 무서운 설도 나온 적 있다. 딱히 근거는 없지만 재밌는 가설이라 살짝 첨언했다.

리츠코 "신지가 무사하단 걸 아는 즉시 남자와의 밀회…라?"

"남 말할 자격 없지?"

겐도우가 맡고 있는 어린 레이와, 게히른의 수석 과학자인 아카기 나오코 박사의 죽음은 분명히 큰 사건이었을 테다. 그러나 사건의 정확한 전말은 겐도우 정도의 사람이 아닌 이상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걸 떠나, 나오코의 뒤를 잇게 되는 리츠코가, 그 사건에 대한 자세한 사실을 알게 되면, 에바 영호기의 파일럿이 될 2대 레이를 쉽게 대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당장 필자의 주장을 기반으로 하자면, 에바 영호기에 담긴 영혼은 리츠코의 어머니를 죽인 초대 레이의 일부이며, 따라서 리츠코가 사건의 진상을 알 경우 영호기의 처우에 대한 평정심을 잃을 게 분명하다. 게다가, 차후 밝히겠지만 아야나미 레이가 존재하기 위한 리츠코의 역할은 여러분이 간단히 생각하는 수준 그 이상이다. 리츠코가 에반게리온의 비밀에 대해 네르프의 다른 간부들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이 아는 것도 어쩌면 레이를 위한 것이겠다. 굳이 따진다면, 리츠코는 겐도우 타입의 보완 계획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그녀에겐, 겐도우가 자신을 특별히 생각한다는 증거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리츠코가 레이에 대한 겐도우의 진짜 의중을 알게 된 것은 아마 작품 후반 제레를 통해서였을 것이며, 자신이 레이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이유가, 그녀가 기대했던 겐도우의 사랑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그녀는, 이내 바닥이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만다. 그 비극의 실태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같은 방법. 같은 이유.

리츠코는 그녀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같은 남자를 공유했다는 것 외에, 공통적으로 아야나미 레이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물론 마지막 순간을 빼면, 두 명 다 그 감정을 특유의 이성으로 억누를 수 있었던 것 같지만 말이다. 실제로 코믹스에서는, 감정에 북받친 리츠코가 레이의 목을 조르려는 등 훨씬 더 직접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리츠코가 더미 레이를 파괴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건의 순서 등을 고려할 때 역시 제레의 호출 사건으로 볼 수 있는데, 그녀에게 레이는 인정하기 싫지만 사랑의 라이벌이었다. 그런 레이가 서야 할 자리에 겐도우가 리츠코를 대신 보낸 것으로 인해, 그녀가 겐도우에 대해 유지하고 있던 최소한의 자존심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겐도우, 또 레이와의 관계를 필두로 한 모녀의 평행 사건들그 자체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리츠코는 어머니를 특히 여자로서 싫어했고, 그래서 자신의 모습 속에서 어머니를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말 없는 모범생 리츠코가, 대학에 간 즉시 머리를 어머니와 전혀 다른 노란색으로 염색한 것, 그런 의미에서 해석할 수 있다. 원래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머니와 꼭 닮은 빛깔이었으니까.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이, 그녀는 결국 어머니와 꼭 같은 길을 걷고 말았다. 무슨 신의 장난일까. 나오코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레이였던 것과 같이, 겐도우의 총에 죽음을 맞는 리츠코가 마지막으로 봤던 것 역시, 아야나미 레이였다. 가엾은 모녀에게는, 질투의 대상이자, 잔인한 죄의 상징이었던.

[에반게리온] 25. 리츠코 Love is destructive/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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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리츠코 ② Love is destructive 

 

리츠코의 왼쪽 눈 아래에는 점이 있다. 눈물이 흐르는 길에 점이 난 여성은, 슬픈 사랑을 하게 된단다. 23눈물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2대 레이의 죽음과 함께 에피소드의 큰 축이며, 그 말은 리츠코 또한 레이와 함께 에반게리온이 담는 비극의 중심에 있다는 말이다. 리츠코라는 캐릭터는 꽤나 분명하고 충실히 표현되고 있는 편이며, 그래서 그녀에 대한 감상적 오해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 안에는, 퍼즐과 같이 숨은 부분이 꽤 많고, 쉽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겐 의외로 의문의 중심에 선 여성이기도 하다. 하여, 본 리뷰에서는 리츠코가 조용히 숨기고 있던 몇 가지 아픈 얘기를 살짝 들추고자 한다.

리츠코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는 바로 고양이이다. 그녀가 키우는 고양이가 작품 속에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나, 설정에 따르면 리츠코는 상당한 고양이 애호가이다. 생각해 보면, 리츠코의 책상에는 커플 고양이 인형이 있고, 사용하는 컵에도 고양이 그림이 있다. 친한 동료 카지 역시 리츠코의 취미를 아는 모양으로, 15화에선 그녀에게 마츠시로 고양이 기념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22화에선 미사토가 리츠코에게 애완 고양이로 외로움을 달래는 사람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네.’라고 했던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겐도우와 리츠코 사이의 관계를 모르는 미사토의 오해를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고, 해당 부분의 포커스는 미사토와 신지, 아스카의 관계에 잡혀 있지만 리츠코 입장에서 다시 생각할 가치가 있는 장면이다. 이 정도를 주지한 상태에서, 23화의 초반 부분으로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하겠다.

리츠코 "그렇구나, 죽었군요."

"네, 아마도 그렇겠죠. 고양이도 수명이 다 있어요."


"그만 울어요, 할머니. 시간 나면, 찾아 뵐게요. 끊어요."

"그래, 그 애가 죽었구나."

이 장면은 간단하지만 임팩트가 크다. 표면적 의미는 장면 속에서 충분히 잡을 수 있다. 리츠코에겐 할머니가 있으며, 그녀가 리츠코 대신 키우던 고양이가 죽었다. 건조한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하며, 리츠코는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한 마디, 그래, 그 아이 죽었구나.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장면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어째서 굳이 여기에 이 장면을 넣었냐는 것이다.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와 무게감을 고려하면, 이 안에는 반드시 중요한 의미와 상징이 있을 것이며, 리츠코에 대한 심층 해석은 따라서, 이 장면의 분석으로 시작한다.

리츠코 "교토에서 뭘 했지?"
카지 "어라, 그거 마츠시로에서 산 거야!"
"속이는 건 소용 없어. 친구로서의 충고야."

우선 이 할머니에 대한 독특한 주장이 있어 짚고 가겠다. 이 할머니가 작품에 이미 나온 적이 있다는 것이다. 15화에서 카지가 마르두크 기관에 대해 조사하는 중, 그와 대화를 나눴던 아주머니 말이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스파이였다. 그런데 같은 에피소드에서 카지가 리츠코에게 마츠시로 기념품을 주는 장면이 있는데, 리츠코는 카지가 몰래 교토(고양이 아주머니와 만났던 장소)에 갔던 사실은 물론, 그가 조사한 내용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눈치다. 마르두크 기관은 리츠코가 개입한 유령 조직인 만큼 민감한 사항은 맞지만 리츠코가 그걸 어떻게? 여기서 만약 23화에 나온 리츠코의 할머니가 고양이 아주머니와 동일 인물일 경우, 또 리츠코가 그녀와 업무 차원에서도 교류를 한다면 배경 설명이 (좀 지저분하긴 해도)가능하단 것이다. 이 가설을 전제로 둔다면, 23화의 대사 죽었구나, 그 아이.’카지의 죽음을 암시하는 대사로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근거 없는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가설이다.

통화 내용의 중심이 되는 고양이를 보자. 리츠코에게 고양이란 외로움의 상징이다. 미사토가 펜펜을 기르던 이유와 같이, 그녀는 제3도쿄에서 혼자 살았을 것이고, 그 적막을 이기기 위해서 반려 동물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미사토가 카지와 사랑을 나누며 쓸쓸함을 극복한 것과 같이, 리츠코도 겐도우에 대한 사랑으로 고양이에 대한 애착을 좀 덜게 된 것 같았지만, 이야기가 후반으로 가면서 겐도우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된 리츠코는 다시 또, 그녀에겐 외로움의 상징인 고양이로 눈을 돌린다. 그러니 23화의 통화 장면은, 리츠코의 사랑이 파국을 맞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통화를 마치고 화면이 비추는 곳. 흰 고양이 인형, 그 시선을 무시하며 다른 곳을 보는 검은 고양이 인형은 마치 리츠코겐도우의 관계를 보는 느낌이다.


"제16사도의 잔해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회수 작업 진행 중에 있음."
"에바 영호기의 코어 부분은 고열 고압으로 인하여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
"D16 알림. 작업을 계속 진행할 것. 자위대의 승인 필요 없음."

이 부분은 잠깐 두고, 23화 영호기 자폭 직후 장면으로 가자. 영호기의 잔해를 정리하는 리츠코의 모습. 뒤에 깔리는 무전 음성을 들으면 알겠지만, 리츠코는 지금 레이의 시체를 거두는 중이다. 아마 3대 레이를 위한 영혼 인양 작업에 필요한 재료일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우리가 유심히 봐야 할 이유는, 이 일은 극비에 부친다.’는 리츠코의 대사와, 그녀의 유독 어두운 반응 때문이다. 물론 영혼 인양 작업의 특수성을 생각해 보면 이 작업은 극비 사항으로 하는 게 당연할 것인데, 논제의 핵심은 대사를 치는 리츠코의 태도에 있다. 대본에는 해당 대사 직후에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리츠코라는 기술을 포함하고 있어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아카기 박사님."

리츠코 "이 사항은 극비로 합니다. 플러그는 회수. 관계 부품은 처분하도록."

"라져, 작업, 서둘러!"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상기할 것이 바로 앞서 살핀 통화 장면이다. 리츠코는 지금 영호기 속의 레이를 회수하여, 다시 그녀에게 영혼을 주고, 생명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고양이에게도 수명은 있어요.’라 말하며 자신이 아끼는 고양이를 보내야 했던 리츠코가, 수명이 없는 레이의 사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녀가 표정 없는 얼굴로 죽었구나, 그 애.’라고 했던 것도, 레이의 죽음에 대해 예견한 장면일 수 있다. 인과 관계를 떠나 상징적 복선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어도 필자는 앞서 2대 레이의 죽음이 겐도우에 의해 계획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리뷰 15)했으니, 리츠코 역시 그 사실을 알았을 수 있다. 자기가 아끼던 고양이는 한 번 죽으면 끝인데, 겐도우가 아끼는 레이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겐도우의 마음이 자기가 아니라 바로 앞의 레이에게 있다는 사실을, 하루가 다르게 느끼고 있는 그녀는, 자신과 겐도우의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았던 거다. 할머니를 위로했지만, 정작 위로를 받고 싶은 건 자기 자신이었다. 그러나 리츠코에겐 누구 하나, 아끼던 고양이가 죽었다고 말할 상대가 없었다. 그 따위 문제에 대해 귀를 열고 들어 줄 사람도, 여유도 이 세상에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하는 일이라곤 레이를 거두어 그녀를 다시 겐도우 앞에 세우는 것이라니. 리츠코는 그런 멍청한 상황 속에서 모두 다 버린 채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리츠코의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것 극비에 부친다는 것에 대하여, 완본 에반게리온 해독의 키타무라는 특이한 가설을 펴고 있다. 리츠코의 이 반응은 물론, 단순히 레이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발설 주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인정한 시점에서, 그는 또한 영호기의 코어 속에 나오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 리츠코가 본 것이 LCL 죽은 나오코를 형상화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호기의 영혼에 대한 생각 자체가 애초에 필자와 다르지만 발상이 재밌어 짚고 간다. 우선 반박을 하자면, 영호기의 영혼은 나오코라 볼 수 없으며(리뷰 14), 리츠코가 본 것은 코어가 아니라 플러그 내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키타무라는 LCL이 육체를 형상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20화에서 초호기에 흡수된 신지가 자신의 의지로 플러그 수트를 형상화한 전례를 들었다. 엔드 오브 에바에서 말하는 인류의 부활 과정도 그와 다르지 않고, 실제로 LCL에 존재하는 영혼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형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본 리뷰(특히 20)에서도 확실히 설명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사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코어 속의 영혼과, 플러그 내부 LCL 속의 영혼은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영호기 플러그 내부에 존재하는 LCL에 사람의 영혼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2대 레이이다. 만약 키타무라의 주장과 같이 코어 속에 존재하는 것이 나오코라 해도, 2대 레이의 의지가 남은 LCL을 사용하여 나오코를 만들 이유는 없다. 그러니 그의 주장은 LCL과 영혼 형상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나온 가설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를 필자의 주장과 합하면 좀 더 납득이 가는 가설을 만들 수 있다. 정말로 LCL2대 레이의 영혼이 녹아 그 의지로 어떤 형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만약 겐도우라면 어떨까?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2대 레이가 죽기 직전의 연출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레이는 신지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그를 위하여 죽음을 택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겐도우의 환상이었다. 그 정도로 겐도우에 대한 2대 레이의 마음이 강했음을 의미하지만, 혹시 리츠코가 플러그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본 것도, 그 환상이 빚어낸 겐도우의 이미지였다면? LCL의 형상화 과정은 영혼의 생각과 큰 연계를 맺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겐도우와 레이 사이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그 광경 앞에서, 리츠코가 당황하여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나는 것도, 특별히 그것을 극비에 붙이려고 했던 것도 설명할 수 있다.

"……."

다음 장면으로 가자. 앞서 봤던 할머니와의 통화 장면과 거의 같은 시각, 같은 구도로 나오는 장면이다. 우연히 컴퓨터에 열린 사진은 겐도우와 나오코, 자신의 모습. 나오코와 겐도우의 표정은 리츠코에 비해 밝으며 둘 사이의 거리 또한 본인에 비해 가깝다. 겐도우가 순위를 매긴다면 자신은 한참 뒤에 있다는 걸 알지만, 리츠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그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잠시 후, 제레가 그녀를 불러 심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카리의 해임에는 충분한 이유겠군?"
"후유츠키를 무사하게 돌려 보낸 이유를 모르는 남자도 아닐 텐데."
"새로운 희생자가 필요하겠군. 이카리에 대한."
"그리고 진실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마침 제레는 겐도우의 배신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22화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달로 날린 겐도우가 제레와는 영원히 적으로 남을 존재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 장면의 핵심에 있는 대사는 겐도우에 대한 다른 희생자 진실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이다. 두 대사가 지칭하는 타깃은 바로 다음 장면에 나오는 리츠코인 게 분명하다. 수수께끼와 같은 대사를 넣고 바로 다음 컷에 특정 인물의 모습을 아무 설명 없이 삽입하는 연출은 안노가 가장 즐겨 쓰는 퍼즐 기법중 하나이다. 앞서 카지를 죽인 것이 미사토가 아님을 설명하면서, 리뉴얼 땐 카지 총격 직후 미사토의 문패가 나오는 연출을 삭제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안노는 이런 연출 방식에 대해 분명히 의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연출은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반대로 이 장면의 구성을 통해, 감독의 의도가 확실히 리츠코를 가리키고 있음을 추리할 수 있겠다.

후유츠키 "레이가 살아 있는 걸 알면 노인들이 시끄러울 걸?"
겐도우 "제레의 노인들에겐 다른 것을 낸 상태야, 걱정할 것 없다."

이제 리츠코의 심문 장면이 나온다. 순서로 보아, 리츠코의 사랑에 대한 갈등이 절정에 달하는 부분인데, 이후 리츠코의 행동이 신지를 불러 레이 더미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리츠코의 심경 변화에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한 장면이며, 이 장면에 대한 이해가 리츠코에 대한 심층 분석의 핵심이겠다. 제레의 입장에선 아까 언급한 대로, 그녀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한 장면이며, 동시에 겐도우에 대항하여 희생을 일구는 것이기도 했다. 겐도우 입장에선 또, 레이에 대한 심문을 거부하기 위해 리츠코를 대신 보낸 것인데, 그 말은, 제레가 표면적으로 요구한 것은 영호기의 파일럿이되, 3대 레이의 부활은 겐도우 타입의 보완 계획의 핵심인 탓에 제레 역시 겐도우가 순순히 레이를 넘길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았단 소리이다. 그러니까 리츠코가 제레 앞에 선 것은 겐도우에게도 제레에게도 작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제레가 그녀에게 넘긴 진실이 뭐냐는 것이다. 나오코에 대해? 레이에 대해? 아니면 겐도우의 보완 계획? 겐도우의 보완 계획은 제레 역시 잘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므로 아닐 것이고, 앞의 두 건에 대해서도 리츠코가 모르고 있다는 보장이 없다. , 유능한 과학자 리츠코는 언제나 사실에 대해 열린 사람이며, 다만 로직이 아닌 사랑에 대해선, 그녀가 겐도우에게 조금 특별한 사람일 거란 믿음때문에 그의 곁에 남은 것이었다. 그러니 제레가 말하는 진실은 그런 종류의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 진실이란, 리츠코가 겐도우 옆에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 믿음에 대한 것이며 리츠코에겐 같은 말로 사랑에 대한 것이리라.

"우리들도 조용히 일을 진행하고 싶다. 자네에게 이 이상의 굴욕과 괴로움은 주고 싶지 않네."

리츠코 "저는 아무런 굴욕도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만."
"강한 여성이군. 이카리가 옆에 두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

그러나 제레의 심문은 결코 평범한 질의응답 시간이 아닌 것 같다. 가장 먼저,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의문은 어째서 리츠코는 벗고 있는가?’이다. 팬 서비스 연출이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리츠코가 그런 위치에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대본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 리츠코가 옷을 완전히 벗은 채로 제레 앞에 선다.’고 기술하는 만큼, 이 장면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표현된 것이다. 보이는 선에서 해석하고 가자. 이 장면은 우선 리츠코라는 여성에게 제레가 모멸감을 주어, 원래 그것이 레이가 당해야 했을 일인데, 겐도우의 의사에 따라 리츠코가 대신 그 수모를 겪게 됐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슨, 카지를 버리는 대신 후유츠키를 옆에 남겼던 것과 같이(후유츠키를 무사히 돌려보낸 의미를 모르는 남자도 아닐 텐데.’라는 제레의 대사는 이것을 의미한다.), 이번에 겐도우는 레이 대신 리츠코를 버리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리츠코 입장에선 아픈 진실이 되며, 결국 그녀는 겐도우에 대항하는 새로운 진실이 되어 그의 행동을 제약하는 세력이 된다. 그 자체로 제레의 계획이자, 겐도우의 선택이자, 리츠코의 의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심문 장면에는 조금 더 깊이 숨은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자네를 준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겐도우라구."

어쩌면 이 장면은, 제레나 혹은 그 하부의 사람들이, 리츠코를 상대로 강간한 것을 상징적으로 연출한 장면일 수도 있다. 물론 강간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넓게 생각하여 단순히 옷을 벗은 채로 남자들 앞에 서게 만든 정도로 이해하는 게 무난한데 다만, 프라임 타임에 방영한 애니메이션인 걸 고려했을 때, 저 정도의 연출이 TV에서 허용 가능한 최대한의 수준일 뿐, 실제 상황은 강간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행위가 나타났을 수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레는 리츠코에게 굴욕을 주어 미안하다고 표현했으며, 그에 대해 리츠코는 저는 아무런 굴욕도 느끼지 않습니다만.’이라 대답했다. 그 반응에 대해 새삼 감탄하는 제레는 그렇다 쳐도,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질렀던 걸까? 만약 원래 요구와 같이 레이가 그들 앞에 섰다면, 노인들은 레이를 상대로 겁탈할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설마, 그런 일이 으레 있던 상황이었으며, 다만 특수한 상황이라 레이 대신 리츠코를 상대로 하던 일을 했던 걸까? 이런 다소 충격적인 가설을 전제로 한 보다 자세한 얘기는 차후 레이 편에서 다시 다룰 기회가 올 것이다.

'…레이 대신…내가…?'

신지 "네, 여보세요?"

리츠코 "가만히 듣기만 해. 네 가드는 풀렸어. 나올 수 있을 거야."

리츠코 "진실을 보여 줄게."

BGM Air on the G sting By Johann Sebastian Bach

미사토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리츠코 "…응, 알아. 파괴야. 사람이 아니잖아.

그런데…그런 것에게조차 나는 졌어.

이길 수 없었어!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나는 어떤, 어떤 굴욕이라도 참을 수 있었어.

내 몸 같은 거,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었어!"

"근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알고 있었으면서…!

바보였어. 나는!

우리 모녀 둘 다 그냥 바보야!"

"날 죽이고 싶다면 그렇게 해.
아니 그렇게 해 주면 좋겠어."

모멸감을 주는 심문을 받고 나서, 리츠코는 깨닫게 된다. 나는 겐도우에게 있어, 레이의 대용품에 불과했던 거야. 사랑받고 있는 게 아니었어. 제레 앞에서 그 수모를 겪으면서, 리츠코는 겐도우만 생각하며 모든 고통을 감내했는데, 겐도우에 대한 사랑 하나로 버텼던 그녀가, 이 자리에 너를 보낸 게 바로 겐도우야.’라는 제레의 한 마디에, 결국 무너지고 만 것이다. 복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을, 그에게도 똑같이 느끼게 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을 시작한다. 다시 네르프에 온 그녀는 조용히 신지를 불렀다. 그녀의 계획은 신지와 함께 도그마로 가서, 그가 보는 앞에서 더미 레이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은 아마, 그녀가 겐도우에게 할 수 없을 복수의 대행이었을 것이다. 레이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겐도우에 대한 마지막 항의였을 것이다. 겐도우 대신 그의 아들 앞에서 그가 아끼는 레이를 파괴하는 것. 겨우 그 정도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사실 겐도우에게 레이라는 존재는 정말 리츠코가 생각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제 더미도 크게 필요 없는 상황이었고, 겐도우는 그저 리츠코가 자신을 배신한 것에 대해 조금 언짢았을 뿐이었다. 어쨌든 더미 레이를 파괴한 일로 리츠코는 겐도우에게 불림을 받아 감금을 당한다. 사건 이후 처음 만난 겐도우에게, 그녀가 처음으로 꺼낸 한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고양이가 죽었어요.”

리츠코 "할머니에게 맡겼던, 고양이가 죽었어요.
신경도 제대로 못 써 줬는데,
갑자기,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됐어요."

겐도우 "왜 더미를 파괴했나?"


"파괴한 것은 더미가 아녜요. 레이예요."

"다시 묻겠다. 왜 파괴했나?"


"당신에게 안겨도 기쁘지 않게 됐으니까.
내 몸을 맘대로 해 보시죠? 그 때처럼!"

"너에게 실망했다."


"실망?!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으면서!
나한텐,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나 어떻게 하면 좋아요, 엄마!"

내가 사랑하던 아이가 죽었어. 그러나 당신은 물론, 아무도 나를 위로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무척이나 아팠는데, 당신은 그 많은 레이 중 하나를 잃었다는 이유로, 나를 더러운 걸레로 만들었던 거야. 그러나 끝내 겐도우는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고, 그것을 기점으로 리츠코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사랑하는 고양이와, 사랑했던 남자를 잃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어머니도 버렸는데, 그렇게 증오했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그 어머니 마기였다. 그래, 어머니라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마지막 일을 꾸민다. 방화벽의 설치, 그리고 자폭 프로그래밍. 엔드 오브 에바에서, 그녀는 겐도우와 재회한다.

"엄마…."

"마지막 부탁이야. 엄마, 함께 죽어 줘요."

"작동하지 않아?!"

"캐스퍼가 배신….

엄마는, 끝까지 딸보다 자기 남자를 택한 거군요…!"

그러나 나오코는 끝내 딸을 배신했다. 리츠코는 절망했고, 겐도우는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리츠코, 자네를 정말로, 사랑했다네.”

"거짓말쟁이."

이 대사는 영화에서 무음 처리가 되었지만 성우 야마구치 유리코가 인터뷰를 통해 안노에게 연기를 위해 대사를 들었음을 밝혔다. 물론 굳이 밝히지 않아도 예측 가능한 범위였다. 겐도우의 말을 듣고 슬픈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내뱉은 말 거짓말쟁이, 나오코가 같은 소릴 듣고 겐도우에게 했던 말과 같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와 달리, 리츠코는 괜찮지 않았을 거다. 그런 파괴적인 사랑, 그녀는 원한 적 없다. 극장판 25화의 제목 ‘Air’는 그녀의 최후 때 흐르는 음악인, 바흐 G-선상의 아리아(Air on the G String)를 의미한다. 이 슬픈 악곡과 함께 리츠코의 비극도 끝이 난다. 리츠코는 겐도우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릴리스는 사실 리츠코에게도 부활의 자격을 주었다. 참 아프게 살다 간 모녀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의미였을까?

[에반게리온] 26. 레이 마음 저 편에/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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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레이 ① 마음 저 편에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아담은 이브와 결혼하기 전에, 또 한 명의 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정체는 바로 릴리스, 아담과 함께 흙으로 만든 여성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릴리스는 성품이 굉장히 악한 편이었고,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리린이라고 불리는 악마 자식이 태어났으니, 에반게리온이라는 판타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아담과 릴리스, 그리고 이브의 이름을 가진 에바. 이브는 성경이 말하는 최초의 인간 여성으로,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이용해 만든 존재이다. 아담을 이용해 사람이 만든 에바, 그리고 이브의 자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 어머니가 악마 릴리스였던 리린. 선악 구도에 대한 반전을 담은 작품인 만큼 작명에도 이렇게 많은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 작품의 제목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신세기는 방영 당시 기준 21세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창세기라는 뜻도 함께 담고 있는 것이다. 에반게리온Eva(이브)Angel(사도)을 합친 단어이기도 하며, Evangel(복음)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동시에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에바(Eva)가 사도(Angel), 즉 생명의 시조와 융합하여 인류가 보완(Evangelium)에 이르게 된다는 서드 임팩트의 내용 자체로도 생각할 수 있으니, 네이밍 센스가 보통이 아니다.

에반게리온 팬이라면 익숙할 물결 장면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안노 감독은 캐릭터 이름이나 에피소드 제목 등에서 언어의 중의적 속성을 활용한 의미 부여 효과를 자주 노린다. 나중에 언급할 레이의 이름도 그렇지만, 앞서 살폈던 타브리스의 이름인 나기사역시, 19편에서 설명한 대로 사도라는 의미를 내포한 동시에 발음 그대로 물결이 밀려오는 곳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사실 해변 메타포는 에반게리온 작품 안에서 상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캐릭터의 심리 묘사 중에 자주 등장하는, 해안의 물결 장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해와 소통의 상징인데, 카지의 대사 중 여자와 남자 사이엔 넓고 깊은 강이 있어.’라는 부분과 대응하는 동시에 엔드 오브 에바 마지막 장면에서 아스카와 신지가 (둘의 사이가 아닌)하나의 물가를 곁에 끼고 함께 누울 수 있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리는 것이다. 카오루라는 캐릭터는 근본적으로 사도와 리린 사이의 이해와 소통을 맡은 만큼 이름 자체에 해당 메타포를 지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에피소드 제목에도 안노의 중의적 언어 사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선 TV26화의 제목을 보자.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 짐승인데, 표면적으로는 할란 엘리슨의 1969년 소설 제목을 딴 것이지만 의도적으로 사랑에 해당하는 글자를 한자가 아닌 가타가나 아이로 적은 덕분에, 해석에 따라 세상의 중심에서 (I)를 외친 짐승이 될 수도 있다. 에반게리온의 중요한 주제 두 개가 결국 사랑자기 자신인 만큼 두 의미를 의도적으로 한 단어 안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극장판 사도 신생 역시 비슷한 장난을 담고 있다. 영어 제목은 ‘Death and Rebirth(죽음과 신생)였는데, ‘사도는 일본어로 시토라고 읽히고 죽음과역시 시토라 읽기 때문에 두 제목은 같은 발음을 공유하고 있다. 신극장판의 네이밍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에반게리온 Q는 일본어 (갑작스러운)과 영어 Quickening(촉진, 태동)’, 그리고 글자 그대로 의문의 의미를 영리하게 한 곳에 담은 것이며, ‘신 에반게리온또한 의도적으로 한자 표기를 피하여 새로운/진짜의라는 의미와 영어 ‘Sin()’의 의미를 교묘히 아우르고 있다.

참 무서운 아이

이 정도로 하고 다시 릴리스 얘기로 가자. 마녀의 성품을 가지고 아담을 찼던 악마의 부인 릴리스. 물론 전설과 애니메이션의 설정은 기본적으로 별개로 취급해야 하지만 기본 모티브를 동일하게 차용한 작품인 만큼 이해를 돕기 위한 선에서의 활용은 유효하다. 실제로 작품 안에서 레이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앞서 살핀 것과 같이 릴리스의 영혼 그 자체를 온전히 담고 있던 초대 레이는 2대 레이와는 다르게 전설 속의 릴리스에 좀 더 매치가 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나오코가 어린 꼬마를 자신의 연적이라 착각할 정도로 초대 레이의 눈 안에는 질투를 넘은 어떤 것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릴리스라는 존재는 제레의 입장에서는 속죄를 통한 죽음과 부활 의식을 치르기 위하여, 또 겐도우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신을 만들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 릴리스의 까다로운 제어가 불가결했다. 용이한 관리를 위해 레이라는 그릇에 릴리스의 영혼을 따로 보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오코 건과 같은 마찰이 생기자 겐도우는 릴리스의 영혼이 그렇게 다루기 쉬운 게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인류 보완은 사도의 내습을 완전히 막은 뒤, 그러니까 아무리 빨라도 2015년은 되어야 실현할 수 있을 텐데(실제 서드 임팩트는 2016년에 발생한다.) 그 긴 시간 릴리스의 영혼을 인간이 컨트롤해야 한다는, 아주 중요하고 어려운 숙제가 생긴 것이다.

레이라는 캐릭터가 담고 있는 이미지는 굉장히 많다. 우선 가장 유명한 것으로 카구야 히메 이야기. 어느 늙은 노인이 대나무 안에서 예쁜 여자 아기를 발견하고 곱게 키웠는데, 그 아이가 다 자라서 달로 가게 됐다는 내용의 일본 전래 동화이다. 달에서 온 릴리스와 겹치는 심상이 많은 데다 안노가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던 세일러 문또한 카구야 히메를 모티브로 채용한 작품인 만큼 에반게리온과 실질적인 연계가 있을 법 하다. 또 일각에서는 레이라는 캐릭터를 현실계와 환상계의 접점에서 둘 사이의 소통을 돕는 무당의 이미지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 에반게리온의 중요 소재 중 하나인 인간과 사도(‘’)의 소통에 있어 생명의 시조의 영혼을 담은 레이가 큰 역할을 하게 되므로 납득이 가는 발상이다. 또 하나는 제작 스태프가 밝혔던 늑대 인간모티브로, 달이 되면 본래 모습을 찾는 짐승을 역시 달에서 온 레이의 이미지에 대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핏 우스운 연결 고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달의 주기와 레이 사이에는 상당한 연관 관계가 있으니 곧 자세히 짚게 될 것이다. 아무튼 레이라는 캐릭터가 이렇게 커다란 인기를 끌며 세대와 시대를 초월해 다양한 시각의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녀 속에 녹아 있는 무수한 심상과 모티브 덕분이라 할 수 있겠다.

성격도 외모도 완전 반대

그녀의 프로토 타입 캐릭터, 평범하다.

사다모토의 인터뷰에 따르면, 레이라는 캐릭터는 붕대를 감은 소녀라는 노래를 듣고 영감을 받아 만든 캐릭터라고 한다. 해당 노래 가사 중에 새하얀 붕대로 얼굴을 감싸고 방에서 나오는 일이 없다는 부분이 있는데 가만 보면 레이 그 자체인 수준이다. 아무튼 안노가 목표로 했던 캐릭터 이미지는 만질 수도, 정체를 알 수도 없지만 어쩐지 곁에 두고 싶은 소녀였단다. 레이의 눈을 빨갛게 디자인한 것은 작품 속의 이유(카오루와 함께 인간과 다른 존재임을 암시하는 것)와는 별개로, 레이의 초기 디자인이 이렇다 할 특징 없는 여자 아이 캐릭터였던 탓에 포인트를 필요로 했으며 또 기획 당시 에반게리온 게임 제작 담당 스태프들이 도트 캐릭터 구별을 위해 따로 요구를 했다는 모양. 그리고 에반게리온 캐릭터는 한 눈에 봤을 때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들였다고 한다. 사다모토는 그것을 위해 특별히 헤어 디자인에 신경을 썼다고 밝혔는데, 예를 들어 음의 이미지를 부여한 레이의 경우 몽롱한 느낌이 드는 엷은 블루포인트가 되는 붉은 눈동자를 가지게 됐으며 양의 이미지를 부여한 아스카의 경우 머리와 눈동자를 기준으로 레이와 완전한 색상 대비(붉은 머리와 푸른 눈)를 이루게 됐다. 다만 신지의 경우 수수한 흑발로 어느 쪽에나 동화할 수 있는 색상 설정이다.

수업 태도는 불량한 편?

안노의 말에 따르면, 아야나미 레이는 그녀가 죽어도 다른 누군가 자신을 대신할 수 있음을 아는 소녀이며, 때문에 그녀는 삶 자체에 그리 큰 가치를 두고 있지 않다. 에반게리온의 많은 캐릭터가 서로 표면적인 관계만을 유지하고 있다면, 레이는 존재 자체가 표면적인 선에서 그치는 소녀인 것이다. 애초에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가능성 자체가 부여되지 않은 불운한 아이. 그녀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그것을 가질 수도, 가지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 생활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학교에 와서도 대부분의 시간은 창문 밖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같은 반 토우지의 말에 따르면 레이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침울한 소녀. ()에 가까운 레이. 그녀는 어떤 아이일까?

만남 1

만남 2

레이의 첫 등장은 다들 기억하고 있겠지만 1화에서 미사토를 기다리던 신지가 우연히 시선을 둔 곳에 서 있던 교복을 입은 레이였다. 이 장면은 사실 그녀에 대한 미스테리 중에서도 중심에 놓여 있는데, 의견이 분분하지만 필자는 그것이 시간을 거슬러 온 3대 레이라고 생각한다. 그 부분은 나중에 더 자세히 얘기하는 걸로 하고, 신지가 정식으로레이를 처음 봤던 것은 네르프 안에서였다. 신지가 초호기 탑승을 거부하자 그를 대신하기 위해 몸에 붕대를 감은 채 헐떡이던 소녀. 결과적으로 아야나미 레이는 신지가 에반게리온에 타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였던 셈이다. 당시 레이가 그렇게 큰 부상을 입었던 것은 가까운 과거의 영호기 탑승 실험 때문이었는데 그 때엔 레이의 신변을 그렇게 걱정하던 겐도우가, 여기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초호기에 태우겠다고 하는 건 아무래도 신지에게 자극을 주기 위한 노림수였던 모양이다. 참고로 사키엘과의 전투에서 초호기가 부상을 입었던 부분은 눈과 팔로, 당시 레이가 다쳐 붕대를 감고 있던 부위와 일치하여 재밌는 평행 사건을 만드는 부분이었다.

신지, 좀 많이 놀라는 것 같다.

긴장을 푸는 레이

그리고 겐도우의 안경

겐도우는 2대 레이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레이가 부상을 입었을 때 화상을 마다하지 않고 그녀를 구하려고 했던 겐도우의 모습은 네르프 안에서도 하나의 사건이었다. 아들인 신지에겐 도통 사랑을 주지 않던 그가 레이에게 진득한 애정을 보였던 것, 그녀가 유이의 클론인 만큼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를 대입했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 또한 겐도우 타입의 보완을 위한 작전이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리뷰 15편에서도 밝혔지만, 초대 레이의 까다로운 영혼을 보완에 용이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겐도우는 선행할 작업이 있었다. 레이는 겐도우와 그 안의 아담과 융합한 후, 초호기에 탑승한 신지와 최종적으로 합일하여 신이 될 소녀였으니, 그 과정이 자연스러운 경로를 따를 수 있도록 겐도우는 의도적으로 그녀의 인간 관계를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2대 레이가 겐도우의 안경을 중히 여기며 그에게 의지하게 된 것도. 이후 신지에게 서서히 접근하여 호감을 가지게 된 것도 결론적으로는 모두 겐도우의 시나리오였다는 소리가 된다. 후에 다시 영호기 기동 실험을 했던 날, 레이는 겐도우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겐도우의 안경을 지닌 채로 엔트리 플러그 안에 탑승한다. 실험이 무사히 끝나고, 레이는 목을 뒤로 젖히며 눈을 감는데, 그녀의 입 주변에서 조그만 공기 방울이 나온다. 레이가 그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음을 묘사하는 연출이었다. 그런 만큼 심리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인 겐도우의 안경을 부적의 용도로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인연의 시작

신지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

그러나 라미엘을 무찌르고 난 후, 그녀의 무사를 확인하고, 또 그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하며 눈물을 보였던 것은 겐도우가 아니라 신지였다. 그리고 레이도 그에게 진심으로 웃어 보였다. 이후 레이의 신지에 대한 마음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겐도우의 안경 하나만 소중히 생각하며 다른 사람과의 인연은 조금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그녀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5화 中

레이 "너, 겐도우 사령관님의 아들이지? 아버지를 믿을 수 없니?"

신지 "당연하지! 그런 아버지 따위!"

고생이 많다, 신지.

15화 中

같은 사람

신지 "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야?"
레이 "몰라…그걸 물으려고 여태 날 보고 있었던 거니?"

15화에서 신지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레이에게 묻는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야? 레이는 그에게 모르겠어, 하고 답한 후, 그걸 묻고 싶어서 계속 날 보고 있었던 거야?’라고 물었다. 이 장면은, 5화에서 신지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자 감정 표현이 없던 레이가 돌연 변모해 인상을 쓰며 그의 뺨을 때렸던 상황유의미한 대비를 이룬다. 이제 레이의 마음 안에서는 겐도우가 아니라, 신지가 더 크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레이 "기다려요! 아직, 신지가!"

레이는 절대적으로 명령에 따르는 아이였고, 어떻게 보면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소녀였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명령을 어기기 시작한다. 최초의 사건은 16화의 레리엘 전 당시였다. 신지가 사도 속으로 흡수된 후, 미사토는 아스카와 레이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는데, 레이는 처음으로 작전 부장의 지시를 거부한다.기다려요! 아직, 신지가!” 비슷한 말을 입에서 막 꺼내려던 아스카도 레이의 이 반응에 짐짓 놀란 눈치였고, 후에 신지에 대해 나쁜 말을 하며 그녀를 자극했던 것 또한 멍청한 인형이라고 생각했던 레이의 변화를 아스카 역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6화 中

보면 알겠지만 그냥 막 집어 던진다.

신지 "이제 그런 경험 하기 싫어."
레이 "그럼 자고 있어."
"자고 있으라니?"
"초호기엔 내가 타."

16화 中

같은 사람

레이 "오늘은 자고 있어, 나머진 우리가 할 테니까."
신지 "그치만, 이제 괜찮아."

"그래, 다행이네."

세 여자(미사토, 레이, 아스카)의 걱정 속에서 무사히 귀환한 신지. 눈을 뜬 그의 앞에는 레이가 앉아 있었다. 15화에서 5화의 장면과 대비를 이루던 것과 같이, 16화에선 6화의 장면과 또한 의미 있는 대비를 이루고 있다. 당시에도 꼭 지금과 같이 누운 신지 앞엔 레이가 있었고, 그녀는 건조한 목소리로 작전 내용을 읊었다. 신지는 에바에 타기 싫다고 했고, 그녀는 그렇다면 타지 말라 했다. 신지를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 대신 타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레이는 신지를 정말로 걱정하고 있었다. 신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레이는 신지에게 말했다. 오늘은 자도 돼. 나머진 우리가 대신 할게.” 예상치 않은 전개에 당황하며 괜찮다고 말하는 신지. 그런 그에게 "그래, 다행이야." 하며 그녀, 웃었다.

신지 "미안해! 쓰레기 말곤 만진 거 없어."
레이 "고, 고마워…!"

"고마워…, 감사의 말…처음으로 했던 말…."

"그 사람에게도 한 적 없는데…."

그 날을 기점으로 둘 사이의 관계는 빠른 속도로 진전한다. 17화에서 토우지의 부탁으로 레이의 집에 함께 들르게 된 신지는 레이의 더러운 방을 직접 정리해 주었고, 그런 신지에게 레이는 얼굴을 붉히며 고맙다고 말했다. 신지와 토우지가 돌아간 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생각에 잠긴 레이. 지금 그녀는, 겐도우에게도 한 적 없는 감사 표현을 신지에게 했다며, 자신의 마음에 대해 고민하는,순수한 10대 소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어 18화에서는 3호기의 파일럿이 된 토우지가 레이에게 그녀의 마음을 가르쳐 주는 장면이 나왔다.

토우지 "신지를 찾는 거라면 여기 없어. 니가 다른 사람을 걱정하다니, 별 일이네?"

레이 "잘 모르겠어."

"니가 걱정하는 건 신지야."

"그래? 그럴 수도있겠다."

"…맞대도."

후에 바르디엘이 된 에바 3호기를 공격해야 할 시점에서, 그녀는 또 한 번 명령에 상관하지 않고 공격을 망설인다.타고 있어, 그 애가.” 3호기 안에 타고 있는 것이 토우지이며, 따라서 그를 공격하는 것이 신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 것이란 사실을 레이도 알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아는 것도, 관심도 없던 그녀가 이렇게 많이 변한 것이다.

미사토 "레이! 기체를 버리고 탈출해!"

레이 "아니, 내가 없으면 AT 필드도 사라지고 말아. 그러니까, 안 돼…."

레이의 자신이 되기 위한 반항2대 레이의 최후를 그렸던 23화에서 절정에 달한다. 여기서 레이는 작전 명령 자체를 어기고, 영호기와 함께 자폭을 택한다. 이유는 하나였다. 신지를 구하기 위해서. 명령에만 집착하던 레이라는 소녀가, 연을 맺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준 한 소년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이는 결국 와의 관계를 통해 진짜 를 찾게 된 소녀의 이야기이며 에반게리온의 가장 중요한 주제 의식이기도 하다. 미사토의 말을 거역한 채 모드 D로 옮겨 죽음 바로 앞에 선 2대 레이는 엄밀히 말하면 레이가 아니게 된 것이다. 영혼의 그릇, ()에 가까운 존재도 아닌, 그저 사람의 마음을 가진 14살의 소녀가 영호기 안에 타고 있었다.

[에반게리온] 27. 레이 ② 피를 흘리지 않는 여자/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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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레이 ② 피를 흘리지 않는 여자 

 

리츠코 "아야나미 레이의 갱신 카드."

"전해 주는 걸 깜박했어.
미안하지만 본부에 갈 때 레이한테 전해 주렴."

유대의 전설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 여성 릴리스, 이브와는 달리 주장과 소신이 아주 뚜렷한 여자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남편인 아담의 말을 거역하기 일쑤였고, 그런 그녀를 미워하게 된 아담은 릴리스가 말썽을 피우면 신에게 고자질을 했단다. 화가 난 신은 릴리스에게 을 내렸고, 그녀는 출산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 남은 평생 하루에 수십 명의 아기를 고통 속에 낳아야 하고, 그렇게 낳은 아기는 금방 죽고 마는 그런 저주였다. 그렇게 끔찍한 고문을 받던 릴리스를 구원한 것은 악마 루시퍼였다. 루시퍼는 릴리스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신의 저주를 봉인하여 그녀를 악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에반게리온의 팬이라면 이 전설이 말하는 릴리스의 저주가 낳은 아기들이 바로, 불완전한 군체로 진화, 그리고 유한한 생명을 가진 리린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허나 여기서 갑자기 또 전설 얘기를 꺼낸 이유는 따로 있다. 일단 에반게리온에서 악마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네르프라는 걸 염두에 두고, 시작해 보자.

레이 "비켜 줄래?"

먼저 살필 장면은 5화에 나온다. 아주 유명한 장면인데, 신지가 레이 위로 엎어져서 그녀의 가슴을 만지게 된 상황이다. 놀란 신지는 어수룩하게 변명하지만 막상 레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 다만 그녀가 화를 냈던 것은, 아끼던 겐도우의 안경을 신지가 멋대로 쓰고 있던 것 때문이었다. 손에 남은 가슴의 감촉에 어쩔 줄 모르며 당황하는 신지와,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비켜 달라 말하며 방을 나서는 레이. 우습게도 이게 두 사람이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자세히 살필 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무지개 상징, 또 하나는 레이의 건조한 반응이다.

갑자기 웬 무지개?!

우선 두 사람이 바닥에 엎어졌을 때, 배경에 은은히 비치고 있는 무지개를 보자. 이것은 순수한 소년 소녀의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한 장식적 연출로 보는 것이 무난한데, 하필 무지개는 이후 신극장판 포스터에서 안노가 직접 선택한 주요 키워드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의도적인 상징일 가능성도 크다. 다만 그렇다면 이 무지개는 신극장판과 공유하는 설정이 될 수 있기에 앞으로 더욱 주목할 부분이 된다. 또 무지개는 실제로 성경에서 상당히 중요한 상징물인데, 그 내용은 신극장판의 이해에 더 도움이 되는 부분이니 일단은 보류한다. 다만 구판 한정으로 이 무지개 상징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범위가 있어, 다음 편에서 따로 언급하기로 한다.

신지 "아, 아니, 난…그, 뭐였…더라…."

그냥 나가는 레이

여기서 본격적으로 다룰 부분은 바로 레이의 반응이다. 레이의 신체 나이 14. 한창 자라는 소년 소녀임을 고려하면 적절한 반응은 당연히 신지 쪽이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몸의 반응에 대해 둔감한 레이. 이 상황을 표면적으로 해석하면 이렇다. 레이라는 소녀는 그간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러니 자신의 몸이 또래 소년에게 미치는 영향도 이해할 리 없고, 따라서 이 상황은 결국, 레이의 폐쇄적인 사회 환경에 대한 단적인 묘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레이는 책도 많이 읽는 편이고, 중학교도 벌써 2년 째 다니고 있다. 말도 없고 친구도 한 명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녀가 자신의 나체에 대한 아무런 관념이 없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어쨌든 육체적으로 레이는 사춘기가 맞고, 최소한 본능적 반응이라는 게 있을 터. 거기다 그녀의 사회성 결여를 표현하기 위해, 굳이 신지가 그녀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을 삽입한 연출 의도 역시 쉽게 넘길 수 없는 부분이다. 나는 이것이,레이는 성욕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레이도 물론 신지를 좋아하게 되지만, 육체적인 사랑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또 이것은, 특히 나중에 아스카가 신지에게 육체적인 섹스어필을 하는 장면들과 자연스럽게 대비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여, 나는 레이가 생식 능력이 없는 여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레이 "신지의 향기가 나…."

리뷰 26편에서, 제작진이 레이 안에 넣은 주요 모티브 중 하나가 늑대 인간이었다고 밝혔다. 그 말은 레이의 몸이, 달이 상징하는 이미지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거나, 혹은 그녀의 육체가 달과 실질적인 연계를 맺고 있다는 소리이다. 물론 릴리스검은 달에서 왔고, 우리가 하늘에서 보는 달도 검은 달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겠지만,에서 꺼낼 수 있는 상징이 하나가 더 있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벌써 알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보다 직접적인 힌트가 담긴 장면으로 간다. 14화 기체 교환 실험 부분이다. 레이가 초호기에 탔을 때, 그녀는 마치 꿈을 꾸는 느낌으로 여러 이미지를 마주하게 된다.

"산, 거대한 산, 오랜 시간 변하여 온 것."

"하늘, 푸른 하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태양, 유일한 것."

"물, 기분 좋은 것, 이카리 사령관님."

"꽃, 같은 것들로 가득해. 필요 없는 것들도 가득해."

"하늘, 붉은 하늘, 붉은 색, 붉은 색은 싫어."

"흐르는 물, 피, 피 냄새. 피를 흘리지 않는 여자."

"붉은 흙으로 만든 인간. 남자와 여자로 만든 인간."

레이의 독백장면은, 쉽게 넘길 수도 있지만 제법 많은 의미와 수수께끼를 담고 있다. 다만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바로 피를 흘리지 않는 여자라는 대목이다. 이에 앞서 그녀는 물은 기분 좋은 것. 붉은 색은 싫어.’라고 했는데, 그녀가 담고 있는 물의 이미지는 또 따로 얘기할 부분이니 넘기는 걸로 하되, 그녀가 붉은 색을 싫어한다는 것은 조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워낙에 선호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소녀라, 이렇게 무언가를 지칭하며 싫다고 표현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붉은 색을 싫어하는 걸까? 이 질문의 해답이 바로 피를 흘리지 않는 여자에 있다. 레이는 어떤 뜻에서 이런 말을 했을까? 우선 확실히 해 둘 것은, 레이도 피를 흘린다. 당장 1화에서, 그녀의 몸에 피가 났던 장면만 생각해도 알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피는 다치면 흐르는 그 혈액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진짜 육체인, 릴리스가 피 대신 LCL을 흘린다는 사실을 암시한 부분으로도 볼 수 있지만, 2대 레이는 릴리스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피를 말하는 걸까?

아마 그것은, 여자가 흘리는 피, 월경을 지칭하는 것일 테다. 레이는 어떤 이유에서 월경을 하지 않으며, 따라서 스스로를 피를 흘리지 않는 여자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바로 뒤의 독백에서 남자와 여자의 생식 과정으로 심상을 연결하는 걸 봐도 알 수 있으며, 그녀가 붉은 색을 싫다고 표현하는 것도, 생식 능력이 없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 기제로 보인다. 물론 빨강이 싫다는 건 좀 더 넓은 의미, 예컨대 아스카가 선호하는 색깔이 빨강임을 연계하여 그녀와의 대비를 강조하는 부분으로도 볼 수 있지만, 지금은 레이 자체를 조명하는 단계인 만큼 피를 흘리지 않는 여자라는 말이 담고 있는 월경 메타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겠다.

월경은 이름 그대로 달과 큰 연관을 맺고 있다. 월경은 달의 주기에 가깝기 때문에, 사람의 탄생이나 죽음과 함께 달의 영향을 받는 인간 현상으로 많은 문화권에서 신비화되곤 한다. 레이의 주요 이미지인 달과 직결되는 소재인 만큼 에반게리온 또한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은유적인 선 안에서 다양한 월경 메타포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레이는, 월경을 하지 않으며, 신지가 자신의 가슴을 만졌을 때 감정 변동을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도, 생식 능력이 없는 그녀의 육체가 성에 대한 관념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째서?

뭐 하는 걸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더미 탱크 장면을 관찰해 보자. 사실 레이는 학교에 있는 시간과 파일럿 활동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LCL 용액이 가득 담긴 더미 탱크 속에서 지내고 있다. 2대 레이는 더미가 아니라 육체 안에 영혼을 담고 있는 어엿한 인간인데, 왜 계속 탱크 안에 잠겨야 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레이가 더미 시스템의 정보를 항상 최신으로 유지하기 위해, 그녀의 기억 내지 사고 패턴을 주기적으로 전송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가설이지만, 나는 여기서 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주장을 꺼내려 한다. 저 더미 탱크가 바로, 레이에게서 생식 능력을 앗아간 주범이라는 것이다.

데스트루도 방사!

리뷰 20편에서도 설명했고, 또 다음 편에서도 다시 언급하겠지만, 레이의 몸은 보통 인간의 육체와는 다르다. 모든 리린은, AT 필드를 이용, 자아가 구상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LCL을 형상화하여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레이의 몸은 사도나 에반게리온과 같이 파동-입자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레이는 육체 안에 영혼을 담고 있어도 자신의 육체를 구성하는 메커니즘 자체가 인간과는 다르다. 23화에서, 리츠코가 레이 더미를 파괴하기 위해 더미 탱크 속에 데스트루도 에너지를 방사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데스트루도, 즉 안티 AT 필드 에너지를 일반 사람들에게 방출한다면, 그들의 LCL은 육체를 유지하는 힘을 잃고 엔드 오브 에바에서 묘사한 대로 액체 상태가 된다. 그러나 레이의 몸은 LCL 베이스가 아니기 때문에, 데스트루도 에너지를 받으면 육체가 환원되는 게 아니라, 23화의 레이 더미가 그랬던 것과 같이, 말 그대로 몸이 부서지게된다. , 레이는 인공 리비도 및 데스트루도를 이용해 정신 에너지를 적정 수준으로 조절하지 않으면 그 육체를 유지할 수가 없다. 레이에게 있어 리비도 에너지란 자신의 몸이 분리되지 않도록 돕는 접착제와도 같은 셈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더미 탱크이며, 그 에너지의 조절을 리츠코 박사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코믹스에서는, 리츠코가 레이에게 네가 몸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내 덕분이야.’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이 맞다. 결과적으로 레이의 육체를 유지하는 것은 전적으로 리츠코의 일이니까. 레이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항상 따로 챙겨 먹는 약이 있다. 그 약의 확실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이, 더미 탱크 밖에서도 레이가 오랜 시간 육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리비도 에너지를 적정 수준으로 조절하는 약물 요법이 아닐까 싶다. 그녀가 밥을 거의 먹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소화하여 그 에너지로 몸을 유지하지만, 레이의 육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만 그 형체를 보존할 수 있는 적정 수준의 AT 필드이다. 지금은 리츠코의 약물 요법으로 더미 탱크에 그렇게 의지하지 않아도 되지만, 초대 레이가 있던 당시엔 상황이 좀 달랐을 것이다. 그 땐 나오코의 도움도 없이, 아마 겐도우 스스로의 기술만으로 레이를 보존했을 것이며, 초대 레이가 탄생한 이후 오랜 시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테다. 여기서 덤으로, 앞서 나오코가 초대 레이를 교살하는 장면에서, 릴리스의 영혼을 온전히 가진 그녀가 어째서 AT 필드로 자신의 몸을 지키지 않았나, 하는 질문이 나왔는데, 지금이라면 답할 수 있겠다. 초대 레이는 인간에 의해 AT 필드의 발현 능력이 제어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엔드 오브 에바에선 레이가 겐도우 앞에 섰을 때, 그녀의 팔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다소 그로테스크한 연출이 있다. 겐도우는 그런 레이를 보며 시간이 없다. AT 필드가 더는 너의 육체를 유지할 수 없게 한다.’라고 말했다. 이제 이 장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리츠코는 더미 시스템을 파괴했고, 따로 제작한 약물도 바닥이 났다. 그리고 레이는 자력으로 AT 필드를 적정 수준으로 제어할 수 없는 상태였다. 특히나, 3대 레이는 자신의 육체에 대해 미약한 관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자신의 영혼이 기다리는 진짜 육체는 따로 있으니까.) 상황이 더욱 나빴을 것이다.

레이가 먹는

앞서 리츠코 박사가 더미 시스템을 파괴한 후 겐도우를 만나서,내가 파괴한 건 더미가 아니라 레이예요.’라 말했는데, 그러고 보면 정말 맞는 말이다. 더미 탱크와 그녀의 도움 없이는 이제 아야나미 레이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레이는 겐도우 타입 보완 계획의 핵심이고, 결과적으로 겐도우는 서둘러 자신의 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곤란하게 되었다. 리츠코의 배신을 제레의 작전이라고 설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겐도우는 롱기누스의 창을 달로 던져 제레의 작전을 망치려고 했지만, 반대로 제레는 또 리츠코를 통해 겐도우의 작전을 망치려고 했던 셈이다.

23화를 아우르는 세 개의 겁탈 이미지

또 제레의 리츠코 심문 과정에서, 그녀가 레이 대신 그 자리에 섰다면, 그리고 만약 제레가 그녀에게 행한 일본래 레이가 겪을(혹 어쩌면, 자주 겪고 있던) 이었다면, 그것은 분명 성()적인 행위를 수반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이 레이 증명하는 수단이 되기도 할 것이며, 심하게는 그 특성을 이용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그 상황을 굳이 강간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갈 이유는 없지만, 실제로 23화는 미사토신지, 사도레이(곧 언급할 부분이다.), 그리고 제레리츠코 사이의 세 가지 겁탈 이미지를 담고 있으며, 현실의 어두운 단면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는 작품 후반인 만큼, 제레가 무슨 짓을 해도 결코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신지 "아, 오늘 청소할 때 걸레 짜고 있었지?

그 때, 뭐랄까 꼭 엄마 같은 느낌이었어."

레이 "엄마…?"

다시 원래 의제로 돌아가서 정리를 좀 하자. 레이에게 생식 능력이 없다는 것, 즉 그녀가 월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레이의 리비도 및 데스트루도 에너지가 타의에 의해 제어되고 있는 탓으로 보인다. 실제로 여성의 월경은 리비도 에너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캐나다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리비도는 월경 주기와 큰 연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리비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고 일정 수준으로 그것을 제어하게 되면, 인간은 생식 능력 자체를 잃을 수 있다.

"응, 뭔가엄마가 빨래하는 그런 느낌이었어."

"언젠가 레이는 좋은 주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15화의 이 엘리베이터 장면에서, 신지는 레이에게 너는 좋은 주부가 될 수 있을 거야, 하고 말했다. 여기서 신지가 레이에게서 어머니 유이를 느낀 근거에 대해선 다음 편에서 얘기하는 걸로 하고, 우선 레이의 여성성 결여를 중심으로 이 장면을 다시 보자. 아마 이 때의 레이는, 자신이 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레이가 신지의 말(특히 엄마’)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것보면, 어쩌면 생식 능력이 없는 것이 그녀 스스로에게 하나의 콤플렉스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14화에서 피를 흘리지 않는 레이붉은 색이 싫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신지의 말은 그녀의 아픈 구석을 건드린 셈이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는 그녀의 반응은 따라서 여러 의미로부끄러움을 표현한 부분이겠다.

릴리스, 그리고 악마

아까 전설 얘기를 꺼냈던 이유, 이제 다들 알 수 있을 것이다. 에반게리온에서 흔히 악마로 비유되는 것은 바로 네르프이다. 겐도우에 의해 레이가 생식 능력을 잃은 이 상황, 전설 속에서 신에 의해 출산의 고통을 겪던 릴리스를 루시퍼가 구원했다는 이야기와 꼭 상통한다. 이렇게 전설을 설정으로 활용한 방법이 굉장히 재밌지 않은가!

아스카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거 아냐?"

레이 "…꿈?"

"그래.꿈 꾼 적 없어?"

"……."

마치기 전에 하나 더. 혹시 레이는 을 꾸지 않는 게 아닐까? 19화의 아스카와 레이 사이의 꿈에 대한 대화를 듣고 있자면, 레이는 어쩐지 꿈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눈치. 사실 꿈이라는 건, 프로이트의 말에 따르면, 리비도의 주요 발현 경로이기도 하다. , 리비도의 작용 과정이 정상적이지 않은 레이는, 아예 꿈을 꾸지 않거나, 꾸더라도 평범한 범주 속엔 없는 경험을 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그녀는 겐도우에 의해 생식 능력, 꿈을 꿀 능력도 잃게 된 것이다.

의도적인 겁탈 이미지 연출

굳이 꿈 얘기를 하지 않아도, 인간 심리의 본연을 이루는 리비도와 데스트루도를 제어한다는 것은, 사람의 성격과 마음을 억지로 구기고 찢고 조종한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감정 표현을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는 거다. 초대 레이의 일부가 영호기에 유폐된 탓에 2대 레이의 감정 표현이 어색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걸 떠나, 애초에 레이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느낄 능력 자체가 부여된 적이 없다. 꿈을 꾸지 않는 여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여자, 그리고 피를 흘리지 않는 여자, 그게 바로 아야나미 레이였다.

자세히 보면 양이 늘고 있다.

그런 레이에게 그녀의 진심을 가르친 것은 다름 아닌 사도였다. 자궁의 천사, 알미사엘 말이다. 알미사엘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킨 레이의 상기된 얼굴, 사도를 코어에 담는 영호기의 모습23화가 담고 있는 세 가지 겁탈 이미지의 한 부분으로 자주 해석된다. 그런데 알미사엘이 레이의 마음에 침투했을 때, 사도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 특정 부위에서 다량의 피를 흘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얼핏 그림자로 여기고 넘기기 쉬운 장면인데, 팔 부분의 그림자와 비교하면 확실히 다른 색깔을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그 양도 조금씩 늘고 있다. 이것은 알미사엘을 통해 안노가 상징적인 수준에서 월경 메타포를 연출장면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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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이게…내 마음…?! 신지와 하나가 되고 싶은 거야?!"

알미사엘은 자신의 마음을 레이에게 건네는 동시에 레이의 마음을 받아 반대로 다시 그녀에게 진짜 마음을 가르쳐 줬다. 거대한 레이의 형상이 된 알미사엘은 신지가 탄 초호기로 향했고, 신지에 대한 사도의 행위는 2대 레이가 생각도 하지 않았던, ()적인 애무였다. 알미사엘의 힘을 빌려, 레이는 눈물을, 그리고 피를 흘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죽기 전에,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에반게리온] 28. 레이 Soul's Refrain/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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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레이 ③ Soul's Refrain

 

지금까지 레이에게서 결여된 부분에 대해 살펴봤으니, 이제부터는 레이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에 대해 조명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다. 레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도처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1화에서 미사토를 기다리는 신지 앞에 나타난 것을 시작으로, 엔드 오브 에바에서 보완을 위해 미사토나 리츠코를 주시하고 있는 등 다양한 경로로 등장한 의문의 레이 말이다. 또 하나는 신지의 내면 영상에서 보이는, 기차 안의 레이이다. 실제로 신지에게 말을 걸고 소통을 했기 때문에 단순히 시각적인 환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렇게 레이가 보통의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가진 이유는 그녀가 릴리스의 영혼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아담의 영혼을 가진 카오루 또한 자유롭게 AT 필드를 방사하는 등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스카 "너도 이번엔 함께 가."

레이 "난 안 가."

"…고기, 싫은 걸."

레이와 릴리스의 관계에 대해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몇 가지 재밌는 사실을 짚고 가겠다. 우선, 레이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앞서 그녀가 음식이 아닌 정신 에너지를 통해 육체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고, 그 이유로 소화 능력이 부실하기 때문이란 설명이 더 옳겠지만, 그걸 떠나서 그녀는 지구 유기체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으니 동물의 몸을 먹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지니고 있을 법도 하다.

또 비슷하게 연결할 수 있는 것으로, 레이는 을 아주 좋아한다. 선호하는 장르는 알 수 없지만, 사회 환경에 관심이 없는 그녀가 세상 이야기를 담은 책을 즐겨 읽는다는 설정은 얼핏 이상하게 들린다. 이것은 마음의 공백이 심한 그녀, 책 속의 가상 세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감정을 느끼려는 보상 심리의 발현이 아닐까 한다. 그게 아니어도, 단순히 책을 지혜의 상징으로 보아, 그녀가 본래 지혜의 열매를 지닌 릴리스의 후신이라는 암시로도 생각할 수 있다.

너무 유심히 볼 필요 없다.

9화에서 레이가 보고 있던 책을 살짝 보고 가자. 우선 흥미로운 부분은 아스카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쓰인 책이란 점이다. 책의 내용은 그림으로 파악하건대 RNA, 코돈, 플라스미드 등에 대한 내용이다. 글은 잘린 부분도 많고 일부 해석해 봐도 구성 자체가 산만하기 때문에 넘긴다. 아무튼 중학교 2학년이 읽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내용이다! 게다가 2대 레이의 나이는 불과 5. 겐도우가 가정 교육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몰라도, 이 설정은 레이가 보통 소녀가 아님을 증명하는 부분이 된다. 레이가 책을 이해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 레이는 두뇌가 굉장히 비상한 것 같다. 사실 생각해 보면, 아스카는 레이를 우등생이라 부르는데, 레이는 수업 태도가 좋은 것도 아닌데다 학력으로 따지면 이미 대학을 졸업한 아스카가 월등한 수준이므로, 아마 그 말은 레이가 의외로 매우 박식하고 명석하다는 뜻일 테다. 결국 이것은 그녀의 정체가 극도의 지혜를 지닌 릴리스라는 사실을 둘러 암시한 것일 수도 있다는 소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책 주제가 단백질 합성 및 유전에 대한 내용이란 건데, 어쩌면 이 역시 레이가 지닌 인공 육체에 대한 하나의 암시일 수 있겠다.

왼팔 복원 사례 1

왼팔 복원 사례 2

왼팔 복원 사례 3

레이는 릴리스의 영혼을 담은 그릇이지만, 사실 육체적인 특성 또한 릴리스와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리뷰 10편에서 언급한 대로 그녀의 머리 색깔초호기와 같은 하늘색이며, 이를 통해 그녀의 육체엔 유이의 것은 물론 릴리스의 DNA 정보 또한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덤으로 그녀의 몸은 사도, 에반게리온과 같이 파동-입자 물질로 이뤄져 있음을 꾸준히 설명했다. 4화에는 리츠코가 그녀의 몸을 스캔하여 관찰하는 장면이 있는데, 모니터에서 사도의 육체 분석 화면과 유사한 패턴의 에너지를 볼 수 있어, 그녀의 몸에 대한 중대한 힌트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초호기는 2화와 19화에서 팔을 잃은 후 스스로 복구하는 모습을 보인 바 있는데, 이후 엔드 오브 에바에서 AT 필드 부실로 팔을 잃은 레이에게도 같은 연출을 사용하여 둘 사이의 연계를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레이의 몸에 릴리스의 특징이 잔존하고 있는 이유는, 당시 샐비지 기술이 불완전했던 탓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네르프가 이미 더미와 리비도 제어 시스템 등을 체계적으로 갖추고 있는 걸 봐선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겠다. 사실 과정의 문제를 떠나 레이의 몸이 파동-입자 물질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녀가 후에 겐도우의 몸과 결합하게 될 존재이기 때문이다. AT 필드를 상실하면 육체를 잃고 LCL 상태로 환원되는 인간과 달리, 레이의 몸은 다만 그 경계를 잃고 타인과 결합 가능한 상태가 된다는 식이다.

물론, 레이는 기본적으로 유이의 복제 인간이 맞고, 따라서 인간과의 육체적 접점 또한 상당히 많이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게 바로 레이의 중간계적 특성의 하나가 된다. 그런데 잠깐, 왜 하필 유이의 복제여야 했을까? 그 해답은 명확하게 제시할 수 없지만, 아마 겐도우에게 있어 자신이 마음을 열 수 있는 존재는 유이 한 사람이기 때문에, 후에 그와 결합하게 될 릴리스의 그릇도 최대한 그녀와 닮은 존재이길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런 이유가 아니어도 레이의 탄생 배경에는 유이의 샐비지 실패가 있고, 시기적으로 릴리스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 필요할 때 경우 좋게 그녀의 육체를 사용했다고 보는 편이 무난하다.

"……!"

아무튼 레이가 유이의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지 또한, 어릴 때 기억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그녀 안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신지가 유이를 기억하게 만든 건 레이의 유이를 닮은 외모 때문은 아니었다. 신지의 상기 과정이 레이와 유이 사이의 외적 유사성에만 기인한 것이었다면 오히려 훨씬 더 일찍 알았을 것이다. 그가 어머니를 생각하게 만든 건 레이의 얼굴이 아니라 걸레를 짜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 레이는 단순히 유이와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라, 성격 또는 행동의 유사성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레이가 유이의 영혼을 가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DNA라는 개념은, 육체적 정보로만 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DNA는 실제로 사람의 성격과 사고 패턴에도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레이라는 개체는 어떻게 보면 이카리 유이의 딸이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성격 부분에서도 공유하는 특성이 많았지 싶다.

에바의 시작과 끝

어쨌든 결과적으로 신지가 그 날 레이에게서 본 것은 어머니 유이이기도 하되 어머니 일반, 모성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레이란, 신지에게 있어 두 명의 어머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 안에는 유이도, 인류의 어머니 릴리스도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레이는 육체적으론 어머니가 될 수 없는 존재였지만, 근본적으론 인류에 대한 모성애를 대표하며 모두를 이끄는 역할을 맡게 된다. 1화에서 신지를 보고 있던 의문의 레이는 신지를 마중하기 위해, 엔드 오브 에바의 마지막에선 배웅하기 위해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던 것 같다. 두 레이를 같은 존재(구체적으로는 3대 레이)라고 주장했던 가장 큰 이유이다.

레이가 사는 곳. 3호 분실과 402호.

그에 대한 남은 얘기는 밑에서 다시 잇기로 하고, 이제 23화로 간다. E-계획이 발동한 센트럴 도그마의 깊은 구역, 인공 진화 연구소의 3호 분실, 레이가 처음 태어나고 자랐던 곳. 신지는 리츠코가 소개하는 그 방을 보면서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5화에서, 리츠코의 부탁으로 레이의 집에 가게 됐던 때. 레이가 살던 그곳은 3도쿄의 외곽 지역, 버려진 아파트 단지의 가운데에 있었다. 그 많은 건물 중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레이가 사는 402 한 곳 뿐. 거대 도시 변두리에 이웃 하나 없이 혼자 사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현대인의 삭막한 관계에 대한 극단적인 비유라는 생각도 들었다. 3호 분실은 어둑하고 지저분한 것이 사람이 살 만한 공간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녀가 살던 402호도 꼭 같았다. 레이는 집에서 사는 게 아니라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었다. 참고로 402에서, 42는 일본어로 읽으면 죽음으로라는 뜻이 되며, 중간의 0은 레이와 같은 발음으로 읽을 수 있어서, 이 호수가 ()에 대한 욕구를 내재한 레이의 성격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다.

레이라는 이름은 숫자 0과 같은 발음이기도 하지만 다르게는 , 영혼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두 단어 모두 레이의 중요한 속성인 만큼 일부러 중의적 효과를 노린 것 같다. 참고로 레이의 성 아야나미,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비단 물결, 카오루의 성인 나기사(물결이 닿는 곳)와 연계하여 의미를 찾을 수도 있고, 구판 한정으론 단순히 구축함의 이름을 땄을 뿐이라 생각해도 좋다. 에반게리온의 많은 캐릭터가 군함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주요 여성 캐릭터들이 항공 모()함의 이름을 가진 것과 다르게, 유독 레이만 구축함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데 대해선 특별히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다. 설명한 대로 레이는 인간의 어머니가 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레이의 아파트에서 남겨 둔 하나의 상징, 무지개에 대해 짚고 가자. 사도와 관련하여 무지개 상징을 대폭 추가한 신극장판과는 달리, 구판의 무지개는 특별히 신화적인 의미를 띠는 것 같지 않지만, 레이의 특징과 연계하여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23화에서 리츠코가 밝힌 바와 같이, 그녀의 심층 의식을 이루고 있다는 물과 빛이 무지개에 담겼다는 점이다. 3호 분실과 꼭 같은 구조의 아파트 방에서 무지개가 뜬 것은 레이가 지닌 이미지의 핵심을 돌려 표현한 묘사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에바에 탄다는 것은 곧 태초로의 회귀라 할 수 있다.

보다 중요한 얘기는, 어째서 물과 빛이냐는 것이다. 레이의 심층 의식을 이루는 근간이 왜 하필 물과 빛일까? 우선 추측해 보건대, 물과 빛은, 엄마 뱃속의 태아가 느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두 감각이다. 은 태아를 보호하는 양수, 은 태아가 자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극으로 말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에반게리온과 그 파일럿은, 흔히 산모와 태아 사이의 관계로 자주 비유된다. 탯줄을 의미하는 엄빌리컬 케이블, 파일럿을 담은 생명의 씨앗엔트리 플러그. 그리고 양수를 대신하는 LCL , 에바와 어머니 사이의 연관 관계는 에반게리온의 중요한 테마이기도 하다. 아무튼 더미 시스템의 핵심이 되는 레이이기에, 불필요한 자극을 막고, 싱크로 향상을 위해 순수한 두 가지 자극만을 레이에게 주입한 것일 수 있다.

레이와 비커 이미지

그렇다면 이제 둘 중 물의 이미지만 놓고 생각해 본다. 물이라 함은, 인체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자, 지구의 생명체가 살기 위한 근본이 된다. 세계의 많은 신화와 전설, 문학과 예술에서 물은 생명의 상징 그 자체이다. 물은 또한 언제나 흐르고 있으며, 때문에 영혼과 역사의 흐름이라는 은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레이의 물은 조금 다른 구석이 있다. 오프닝에서 짧게 묘사한 레이는 옆에 조그만 비커를 세워 두었다. 같은 비커가 그녀가 살던 아파트 방에도, 23화의 3호 분실에도 놓여 있어 레이의 숨은 상징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비커에 담긴 물은, 흐르지 않는다. 그 안에 담겨 가만히 고여 있다. , 레이라는 비커에 담긴 릴리스의 영혼은 흐를 수 없다. 그저 타의에 의해 묶여 있을 뿐이다.

레이의 육체 스캔 이미지

다음으로 빛의 이미지는 또 어떤가. 빛이라는 것도 지구의 생명체가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빛의 자극 없이 뱃속의 태아는 눈을 뜰 수 없다. 그러니 빛은 지구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레이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파동-입자 물질에 대한 암시로도 생각할 수 있는데, 현실에 존재하는 유사 물질이 바로 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파동도, 완전한 입자도 아닌 어떤 것. 그것은 레이의 육체인 동시에 또한 그녀가 지닌 중간계의 특성중 하나가 된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3호 분실의 물과 빛의 이미지레이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 맞다.

그 외에도, 레이를 표현할 때엔 대개 물과 빛의 심상을 한 데 엮어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10화에서 수영하는 그녀의 모습 역시 물 위에 비치는 빛을 활용, 유사 메타포를 제시하고 있으며, 당장 엔딩 영상을 봐도 레이, 물결, 달빛 이 세 가지 이미지가 전부이다. 레이와 달 사이의 관계에 대해선 여태 여러 측면에서 살폈지만 말이 또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언급하고 가겠다. 바로 오프닝 영상에 등장하는 세피로트의 나무이다.

유대 신비 주의의 핵심!

DVD 영상 해설에 따르면 이 나무는 인간이 도달 가능한 최고 정신까지의 길을 나타내고 있단다. 제레가 의식을 시작할 때 이 나무가 나온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에반게리온을 카발라 주의로 해석하는 근거가 되는 부분이나, 몰라도 크게 상관이 없는 터라 본 리뷰에서는 이 정도 수준으로만 언급하고 마는 점 양해를 구한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세피로트의 나무 표식인데, 여기서 현실계와 환상계의 접점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영혼이다. 거기다 영혼에 상응하는 점성술 기호는 달 모양이라 한다. 리뷰 26편에서 레이를 더러 두 세계의 소통을 돕는 무당이라 표현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끝으로, 이제 다시, 의문의 레이 형상에 대해 설명하겠다. 도로 중앙에 가만히 서 있는 레이의 모습. 신지는 그 당시 실제로 레이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단순 환각이 아니며, 2화에서 레이를 봤을 때 그 형상을 정확히 상기한 걸로 봐선, 명백한 현실의 일부이다. 레이 환상에 대해, 단순히 복선을 위한, 혹은 엔드 오브 에바의 마지막 연출과 함께 완결 구성을 위한 만화적 허용이라 생각하면 그만이겠지만, 어차피 본 리뷰의 목적이 그런 게 아니므로 하던 대로 상세한 분석을 해 보자. 앞서 이 레이 환상을 릴리스의 특이 능력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1화의 레이 또한 엔드 오브 에바에 나온 레이와 의상을 비롯하여 같은 이미지를 지닌 동시에, 그 시각 2대 레이는 큰 부상을 입은 데다 신지라는 소년을 몰랐기 때문에 그녀를 2대 레이라 생각하는 건 억측이다. 게다가 3대 레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게 확실하므로 필자는 의심할 것 없이 1화의 레이 또한 시간을 거슬러 온 3대 레이라 주장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거다. 물론 3대 레이는 릴리스의 영혼을 온전히 담고 있고, 따라서 비범한 능력을 가진 게 당연할 수 있으나, 좀 더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싶다.

저 글자는 누가, 왜 적은 걸까?

리뷰 20편에서 이미 그 해답을 제시한 바 있다. 레이의 육체는 파동-입자 물질이며, 따라서 그녀는 물리적 법칙을 무시할 수 있다. 굳이 물리 법칙을 강조하는 이유는, 관련 단서가 작품 안에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23화의 3호 분실로 간다. 레이의 방을 자세히 보면, 벽에 특이한 글씨가 적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단어들은 양자 역학에서 자주 쓰이는 주요 개념이다. 양자 역학이란 소위 말하는 ‘가능성의 물리학’으로, 미시 세계의 입자가 시간, 공간 등 기존 물리 법칙을 무시하며 운동한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다양한 이론을 제시하는데, 그 덕에 과학과 철학의 틀을 깼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이란, 에반게리온 설정의 핵심이기도 한 인지론을 칭하는 것으로, 간단히 말하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AT 필드를 통해 세상을 구성한다는 개념 말이다. 물론 양자 역학과 인지론을 동일한 선에 놓고 이해하는 것은 학문적인 시선에선 옳지 않으나, 에반게리온이 굳이 해당 개념을 작품에 빌려 쓴 이유는 (학문적인 의미와 별개로)'존재의 가능성 자체'를 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우리 마음이 세상을 구축한다는 것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이후 세계에 대한 예측의 기준이 되기도 하여 다음에 또 언급할 것이다. 결국 레이의 방에 적힌 양자 역학의 개념은, 특히 레이의 몸이 가상의 파동-입자 물질이라는 점에서, 그녀가 전통적인 물리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설정 허용의 근거(처음에 언급한 기차 안의 레이 또한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선행할 얘기가 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룬다.)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에 대한 중대한 힌트가 된다.

BGM Soul's Refrain (Aqua Groove Mix) (Ayanami)

길고 험한 여정을 마치고 인류 보완을 하루 앞둔 날. 레이는 조용히 눈을 떴다. 둥근 달도 환하게 뜬 어두운 밤. 레이는 언제나 ()를 동경했고, 그토록 바라던 대로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이 날 텐데, 이제는 두렵다고 한다. 지금의 레이는 겐도우에 대한 증오, 신지에 대한 사랑도 온전히 담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 밤, 혹시 레이는 처음으로 꿈을 꾼 게 아닐까. 조용히 문을 나서는 레이. 바닥엔 부서진 안경. 거짓 사랑에 끝을 고하는 레이.

につつまれた素肌 푸른 그림자에 감싸인 살갗은

のなかで かにふるえてる 시간 속에 고요히 흔들리고 있어

行方いかけるように 생명의 행방을 묻는 것 같이

指先をもとめる 손끝은 나를 바라고 있어

타브리스 덕에 비로소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알 수 있었던 3대 레이는, 보완의 날, 겐도우보다 먼저 릴리스 앞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겐도우? 어차피 배신할 생각이었다. 이제 레이는 더는 그의 인형이 아니니까. 레이가 기다린 건 겐도우가 아니라, 다만 그 안의 아담이었던 것 같다. 더는 겐도우가 힘을 가질 수 없도록. 그리고 신지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도록.

그 사람이 넘긴 진심은, 아팠다.

きしめた運命のあなたは 부둥켜안은 운명의 그대는

季節にさく まるではかない철 따라 피는 덧없는 꽃과 같아

希望のにおいをして 희망의 향기를 가슴에 남긴 채

 あざやかな姿 허무히 지는 그 산뜻한 모습으로

りなさい 나에게로 돌아와요

まれる 태어나기 전에

あなたがごした大地へと 당신이 살던 대지로

このりなさい 이 팔에 다시 안겨요

めぐりうため 다시 만날 수 있도록

奇跡こるよ 何度でも 기적은 일어나요 몇 번이라도

"다녀 왔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보완이 시작된다.

[에반게리온] 29. 아스카 적어도, 인간답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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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아스카 ① 적어도, 인간답게

 

아스카, 넌 그저 14살의 작은 소녀야. 그렇지 않니?

14살은 현실에 맞서, 배우기 싫은 것도 배워야 하는 시기.

어떤 어른이 되고 싶니?

-성우 미야무라 유코아스카에게

아스카 "엄마! 엄마! 나, 됐어요, 인류를 지키는 엘리트 파일럿이요! 세계 제일이에요!
누구에게도 비밀이지만 엄마한테는 가르쳐 줄래!
많은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 줄 거예요. 그래서 외로울 일도 없어요!
그러니까 아빠가 없어도 돼. 쓸쓸할 일이 없는 걸!
그러니까 봐요, 날 봐요 엄마!"

"……!"

에반게리온 2호기의 파일럿이 됐다는 확정 통보를 받고, 어린 아스카는 설레는 마음으로 엄마를 만나러 갔다. 무슨 실험 때문에 정신을 놓은 후론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기쁜 소식을 들고 가면 또 모를 일이다. 아빠가 더는 자기와 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며 항상 울던 엄마였다. 손에 든 인형을 아스카라 부르면서 함께 죽자고 그랬지만, 이제 진짜 아스카인 내가 에바 파일럿이 되었으니 얘기가 다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특별히 대해 줄 테니 더는 외로울 이유가 없다. 그런데 아스카가 문을 열었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줄에 목을 매단 채로 죽어 있는 엄마였다. 딸이라 부르던 인형과 함께.

기획 단계의 아스카

아스카는 일본, 독일 혼혈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소녀로, 마르두크 보고서에 따른 세컨드 칠드런이다. , 애초에 그녀는 재능과 무관하게 게히른에 의하여 에바 파일럿으로 내정된 아이였다. 그 배경에는 어머니의 접촉 실험이 있었다. 게히른 독일 지부 과학자였던 쿄코는 2호기에 아스카에 대한 모성만 남겨 둔 채로 세상을 버렸다. 하필 쿄코가 사망한 날 아스카가 정식 파일럿이 됐다는 것은, 2호기의 정상적인 운용을 위해 남은 부분의 영혼도 필요했으며 그래서 남은 영혼이 회수 가능할 때를 기다렸다는 소리가 된다. 키타무라는 심지어 게히른 측에서 쿄코를 살해한 후 자살로 은폐했을 가능성도 언급했다. 아무튼 2호기의 코어 안에는 이제 아스카를 사랑하는 쿄코와, 나머지 부분의 쿄코가 함께 담겨 있다.

영혼의 상관 관계?!

참고로 에반게리온 기체의 눈 디자인이 코어 속 영혼의 존재를 암시한다는 재미난 주장이 있어 짚고 간다. 우선 유이의 온전한 영혼을 담고 있는 초호기가 눈이 두 개이고, 영호기의 경우 레이와 함께 릴리스의 영혼을 나눠 가지고 있으니 눈이 한 개, 2호기의 경우 두 부분의 영혼이 함께 들어 있으니 눈이 네 개라는 식이다. 덤으로 양산기의 경우 영혼의 정체가 불명인 만큼 아예 눈이 없다는 것.

아스카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면 싫다기 보단 저런 상황 자체를 즐긴다는 느낌이다.

아무튼 2호기의 쿄코는 여러 이유에서 초호기의 유이와 달리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유이는 코어 속에서도 자신과 아들 신지에 대한 인식이 뚜렷했고, 때문에 전투에 있어선 거의 언제나 아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지만, 아스카는 달랐다. 카오루의 말을 빌려 쿄코의 영혼은 코어 깊은 곳에 박혀 있었고, 아스카는 순전히 본인의 능력과 프라이드 하나로 2호기를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에바 파일럿이 될 운명이었으나, 그녀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머리도 비상해 13살에 이미 대학을 졸업했고, 운동 신경도 굉장한 수준이라 싱크로만 유지할 수 있다면 2호기로 하늘도 달릴 정도. 게다가 외모 또한 출중하여 학교에선 아이돌 스타가 따로 없다. 다만 한자 정도만 마저 익힐 목적으로 굳이 학교에 다니는 상황.

아스카 등장!

아스카 "서드 칠드런? 잠깐 와 봐라."

위엄을 강조하는 방법

그녀의 이런 특출한 능력과 프라이드는 서로의 존재 근거가 되며 지금의 아스카를 이룬다. 제작진에 따르면 아스카는 누구보다도 위에 서고 싶어 하는 소녀라고 한다. 상징적인 의미에서는 물론, 물리적인 공간에서도 그녀는 아래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처음 그녀가 등장한 장면을 생각해 보자. 자신이 설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을 뒤로 당당히 선 그녀의 실루엣. 신지를 견제하며 그를 부를 때에도 에스컬레이터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고, 2호기의 강점에 대해 강의를 하던 때에도 발 디딜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신지를 내려다 봤다. 강박이라 해도 좋을 만큼 항상 높은 곳에서 자신의 우월을 강조하는 것이다.

달의 소녀, 태양의 소녀

아스카는 간단히 말해 태양의 소녀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제작진이 레이에게 달의 이미지를 부여했음을 설명했는데, 아마 이와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아스카에게는 태양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 앞서 봤던 아스카의 등장 컷에서도 그녀 뒤로 밝게 비치는 태양이 있었고, 엔드 오브 에바에서 아스카의 최후를 그릴 때에도 태양을 비추는 연출이 있다. 그 외에도 아스카와 태양 이미지를 연계한 장면 구성들은 확실히 의도적인 수준이다. 25화에서 주요 인물의 보완 과정을 조명할 때에도, 레이를 비추는 불이 바닥에 달의 형상으로 닿는 것과 대비하기 위해 아스카의 경우 노란 태양 형상을 그려 넣었다. 그녀를 대표하는 레드 컬러링과 함께, 아스카의 화끈하게 타오르는 성격과 강인한 품성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또 다르게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태워 빛을 내야만 하는 그녀의 운명에 대한 암시이기도 했다.

잘 봐라잉

그렇게 누구보다 위에 서서 태양처럼 밝게 빛나야 했던 그녀이기에, 다른 두 명의 파일럿은 중대한 견제 대상이었다. 당장 먼저 만나게 된 서드 칠드런, 이카리 신지. 매가리 없는 한심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카지의 말을 듣자면 싱크로 수치가 상당히 높고 실적도 꽤나 좋은 편이라고. 따라서 그에게 자신의 실력과 우월함을 증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과제였다. 8화에서 아스카는 신지를 2호기에 태운 채로 아주 훌륭한 데뷔 전투를 보여 주었다. 가만 보면 그녀 입장에선 난생 처음 마주하는 거대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이 승리를 거둔 셈인데, 그 배경에는 어떻게든 신지 위에 서겠다는 그녀의 프라이드가 있었던 거다.

아스카 "헬로? 네가 아야나미 레이네, 프로토 타입 파일럿."

레이 "…."

"난 아스카,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잘 지내자."

"내가 왜?"

"그렇게 하는 편이 편하니까."

"명령이라면 그렇게 할게."

(뭐냐, 얜?)

신지는 됐고, 그렇다면 다음 타겟은 아야나미 레이. 학교에 온 즉시 그녀는 퍼스트 칠드런을 찾았다. 이유는 같다. 자신의 대단함을 보이지 않고는 갑갑해 견딜 수 없으니까. 언제나 그렇듯 높은 돌단 위에 서서 레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 소녀, 보통이 아니다. 아스카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성의 없이 대답하는 그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먹고 사는 아스카에게 이런 타입은 계산 밖이었다. 아스카 입장에서 레이의 이런 반응은 명백한 거부 행위였고, 결국 그녀에 대한 아스카의 마음은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꾸준히 혐오 일로를 걷게 된다. 그러나 어떻든 실적과 싱크로 수치로 따지면 아스카는 실질적으로 레이 위에 서 있었고, 때문에 아스카는 안심하게 된다. 누구도 자신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 전제만 있다면, 아스카는 확실히 괜찮은 아이였다. 반 친구들과도 나름 무난하게 지냈고, 미사토에게도 마음을 열었다. 내키진 않지만 작전에 따라 신지, 레이와 협력도 하면서, 이스라펠, 산달폰, 마타라엘, 그리고 사하퀴엘을 무찌르며, 계속해서 승리를 거둔다. 여전히 혼자 이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어쨌든 누가 봐도 명백한 넘버 원은 아스카였다. 그게 그녀의 여유였고, 그 사실 하나로 아스카는 잘 지낼 수 있었다.

분리 불안 / 애착 행동

그런데 아스카가 이렇게 여러 면모에서 우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큰 몫을 했다. 그녀 스스로 대단한 아이가 될 수 없으면, 누구도 자신에게 사랑을 주지 않을 거란 불안이 깔려 있었다. 25화에서 아스카의 보완 과정 중, 텔롭은 그녀 마음의 결여를 분리 불안이란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분리 불안이란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서 적절하지 않은 방법으로 독립했을 때, 특정 대상에 대해 특이한 애착 증상을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아스카에게 그 대상이란 2호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적절하지 않은 독립이라, 말하자면 아스카는, 과거 엄마가 함께 죽을 것을 명령한 아이였다. 어쩌면 이렇게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잘못인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아빠의 사랑을 받고 자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리뷰 11편에서 언급한 대로 그녀의 아버지는 쿄코가 죽기 전에 이미 그녀를 담당하는 의사와 바람이 난 상태였다. 결국 아스카에게 있어,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누구의 도움 없이도 혼자 설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의 생존 전략이다. 가장 가깝게 지낸 엄마라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으니 무리도 아니다. 엄마는 같이 죽자고 하고, 아빠는 내가 필요 없다고 한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아스카는 철저하게 혼자여야 했다. 당연히 울지도 말아야 했다. 마음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걸로 끝장이니까.

머리에 주목하자.

그런 아스카에게 있어, 에바 파일럿은 가히 천직이라 할 수 있다. 에바에 타고 있으면 세상 사람들의 모든 관심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 아스카가 머리에 늘 끼고 있는 붉은 핀을 보자. 사실 그건 에바 기동을 위한 인터페이스 헤드셋이다. 신지나 레이가 에바에 탑승할 때에만 착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머리에 헤드셋을 액세서리인 양 달고 다닌다. 학교에서는 물론, 수영을 할 때도, 심지어는 온천에서도! 에바 2호기에 대한 애착 증상인 것이다. 그녀 입장에선 2호기의 파일럿인 아스카야 말로, 유일하게 세상에 있어도 괜찮다고 허락을 받은 단 하나의 자신이었다. 물론 진짜 아스카는 다른 데 있었다. 22화에서 정신 공격을 받았을 때, 아스카의 두 가지 숨은 모습이 나온다. 하나는 쿄코가 품에 안고 있던 인형의 모습으로, 또 하나는 새로 맞은 엄마가 선물한 원숭이 인형으로. 그러나 아스카는 두 모습 다 거부했다. 전자의 경우, 엄마의 뜻을 거부하고 다만 이 세상에 살기 위하여. 후자의 경우, 믿을 수 없는 남과 관계를 맺지 않아도 자립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래서 인형은 필요 없다.

레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에바는 움직이지 않아."
아스카 "마음을 닫고 있단 거야, 이 내가?"
"그래, 에바에겐 마음이 있어."
"그 인형한테?"
"알고 있을 텐데."
"허, 네가 먼저 말을 걸다니, 내일은 눈이 내리겠다?"

"……."
"뭔데, 내가 에바에 탈 수 없는 게 그리도 기뻐?
하아, 기계 인형 비슷한 너한테 이런 동정을 받을 정도라니 나도 이제 끝이구만!"
"난 인형이 아냐."
"시끄러! 남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는 주제에. 넌 이카리 사령관이 죽으라면 죽겠네?!"

"그래."

"……!"

"역시 인형 맞잖아! 너 같은 애 인형 같아서, 너무 싫었다구!"

레이에 대한 아스카의 혐오는 이런 측면에서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녀에게 레이는, 어쩌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아스카와 꼭 닮아 있다. 정확히는 쿄코와 함께 죽었어야 했던 아스카 말이다. 그녀는 레이에게 물었다. 이카리 사령관이 너에게 죽으라고 시키면 죽겠느냐고. 그 질문에 레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아스카에게 그 반응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자신에게 있어 그 질문은 한심한 가정 따위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을 지배하던 기억이었다. 엄마는 딸로 삼은 인형에게 죽음을 권했다. 그것을 거부한 대가로 아프게 살고 있는 그녀의 가치정면으로 부정하는 레이를 보고, 아스카는 참을 수 없었을 거다.

"…모두 다, 모두 다 너무 싫어!"

기어코 레이의 뺨을 때리고 만 그 승강기 안에서, 레이는 실은 아스카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했다. 사실 그 날의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선 마지막이었다. 레이는 아마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감지했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으로 아스카에게 먼저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 날 아스카는 싱크로 문제와는 또 별개로 생리 탓에 고생을 하고 있었다. 엄마 따위, 절대로 될 일 없다며 이를 가는 아스카의 마음을 레이도 조금은 알았던 게 아닐까 싶다. 아스카가 자신의 모성을 부정하는 건 과거의 아픈 기억 탓이기도 하고, 엄마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할 테다. 그런데 레이는 설명한 대로, 인류의 어머니 그 자체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이유에서 인간의 어머니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혹시 레이는 자신이 할 수 없게 된 어머니의 역할을, 또는 최소한 그 마음을 아스카에게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결과적으로 아스카는 신지와 함께 새로운 세상에서 가장 처음으로 눈을 뜨는 여성이 되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스카는 과연 레이 대신 다음 세상의 어머니가 되는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이 대화, 정확히는 레이가 아스카에게 넌지시 전하려 했던, 그러나 아스카가 거부한 메시지(부탁)는 작품의 완결에 대한 하나의 복선이었던 셈이다.

"인형 따위, 필요 없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해!"

그러나 진짜 아스카는 항상 울고 있었다. 인형을 들고.

아스카는 마치 고양이와 같다. 혼자이길 원하면서, 외로운 건 싫다. 누군가 자신을 함부로 만지면 화를 내면서도, 만져 주지 않으면 또 화를 낸다. 아스카가 진정 원하는 건, 아마 그녀 스스로도 몰랐겠지만, 고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진심 어린 온기였을 것이다. 그녀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다른 사람의 진심이 따뜻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던 탓이다. 엄마와 아빠가 가르쳐 준 세상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철저히 혼자 사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에 대한 혐오로 점철된 자기애로 치장한 채, 아스카는 나약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프라이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아픈 것인데, 왜 아픈 줄도 모르고 그녀는 다만 어른이 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어린 아스카가 인형을 집어 던진 것이다. 어른이고 싶어서.

카지 "아스카는 아직 어리니까 말이다."

아스카 "에?! 재미 없어."

"난 이제 충분히 어른이란 말예요. 어른이에요!"

카지 료지는 그런 점에서, 아스카가 동경하는 궁극적인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족 하나 없이도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얽매일 필요 없이 자유와 여유를 만끽할 줄 아는 사람. 멋진 어른이 되기 위하여, 아스카는 그런 남자를 필요로 했다. 카지는 그런 아스카를 어리다는 이유로 거부했지만, 어차피 아스카에겐 카지의 사랑이란 어른이 되기 위한 중요한 조건과도 같았다. 그래서 그의 무심한 반응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던 거다. 문제는 같은 집에 살게 된 미사토였다.

"어차피 난 불결한 어른들의 사교 따윈 하고 싶지 않은 걸. 위선자, 완전 싫어!"

카지가 원하는 어른이란 것이, 미사토를 칭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된 아스카는 서서히 그녀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기 시작한다. 이 부분이 바로 아스카의 카지에 대한 애착일렉트라 콤플렉스로 해석하는 근거가 된다. 사회적인 의미로 미사토는 아스카의 어머니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데, 만약 아스카가 그 역할을 수용하게 되면 동시에 카지는 아스카의 사회적인 아버지가 되는 식이다. 아스카가 끝내 미사토를 거부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카지를 남성으로 남겨 두기 위한 이유가 가장 컸다. 카지가 품은 사람이 자신이 아닌 미사토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납득했지만, 가슴으로는 결국 수긍할 수 없었던 거다. 그렇게 막연하게 기다리던 카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신지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희망도, 어른이 되는 길도 모조리 잃고 만다.

미사토 "신지야, 유 아 넘버 원!"

아스카 "아, 지고 말았네, 아주 간단하게 이겨 버렸네!
이렇게 쉽게 지게 되다니 솔직히 조금 억울하긴 해!
대단해! 훌륭해! 강해, 너무 강해 어쩜 좋아!"

"아, 무적의 신지 님! 우리도 덕분에 좀 편하게 지낼 수 있겠네!
하지만 우리도 너무 뒤처지지 않도록 힘을 내지 않으면…"

레이 "…안녕."

잘 알고 있겠지만, 아스카를 파멸로 이끌었던 건 바로 지금의 아스카를 만들어 준 프라이드 그 자체였다. 카지와 미사토의 관계를 알게 된 후 그녀의 컨디션이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는 동시에, 신지는 반대로 겐도우의 칭찬 등 적절한 동기 부여 덕으로 싱크로 수치가 날로 상승하고 있던 참이었다. 결국 16화에서, 아스카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다. 지고 만 것이다. 이제 넘버 원은 신지였다. 이제 아스카에겐 여유가 없다. 더는 잘 지낼 수 없게 되었다. 당장 같은 에피소드에 등장한 레리엘과의 전투가 그 양상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아스카의 활약은 없다.

레리엘 전에서도

바르디엘 전에서도

제루엘 전에서도

아라엘 전에서도, 아스카는 이길 수 없었다.

레리엘 전에서 아스카가 한 일은 신지가 디라크의 바다에 빠지는 원인을 제공한 정도. 사도를 무찌른 것은 신지가 탄 초호기였다. 다음 사도는 바르디엘이었다. 아스카는 사도의 기습 공격으로 가장 먼저 짐이 됐을 뿐, 도움을 준 일은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사도를 처리한 건 역시 신지가 탄 초호기였다. 그렇다고 신지가 떠난 제루엘 전에서 레이 위에 설 수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스카는 정말 전력을 다해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사도에게 힘으로 완패했다. 결국 사도를 처치한 것은 귀환한 신지였다. 아라엘 전에서는 어땠나. 아스카는 처음에 레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으란 명령을 받는다. 그녀에겐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 위에 서려고 했던 아스카에게 인형 비슷한 레이 뒤에 서라니, 그런 전투 배치는 파일럿으로서 사형 선고와 같았다. 결국 파일럿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작전 부장의 명령을 무시한 채 그녀는 아라엘에게 정면으로 대항한다. 그러나 그 날, 마음 가장 깊은 곳의 치부를 모두 들키면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다. 사도를 무찌른 것은 자기가 그렇게 무시하던 영호기의 레이였다. 이에 아스카는 절망한다. 고르고 골라 자길 구한 사람이 레이라니, 그 여자라니!

신지 "…다행이다, 아스카."
아스카 "시끄러워! 다행은 무슨, 고르고 골라서 저딴 여자한테 도움을 받다니,
저런 여자 따위에게…! 이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았어!"


"싫어, 싫어 전부 다 싫어!"

아스카 "난 울지 않아! 난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

어렸을 때,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 줬던 엄마가 자기를 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히 세상을 떠났을 때, 어른들의 가증스런 눈물을 보면서 아스카는 다짐했다. 다시는 울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그 완강한 다짐이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깨지고 말았다. 히카리를 옆에 둔 채 그녀는 끝내 울었다.

아스카 "나, 이길 수 없었다? 에바로. 이제 내 가치는 없어. 어디에도….
싫어…너무 싫어…그치만 제일 싫은 건, 나 자신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알미사엘이 내습하고, 아스카는 다시 불려 나갔다. 이젠 뭐,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체념했다. 그런데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다. 2호기는 아예 움직여 주질 않았다. 모든 게 끝이었다. 2호기를 움직일 수 없는 아스카, 살 자격이 없는 아이였으니까.

"…움직이지 않아…."

그래서 그녀는 죽기로 했다. 아주 예전에, 엄마가 같이 죽자고 했을 때, 아스카는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사는 쪽을 택했다. 나는 엄마의 인형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틀린 결정이었던 걸까,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을 말이다. 다만 남이 자신을 죽이는 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죽을 거면 스스로 죽겠어. 그것이 그녀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어느 빈 집에, 의자에는 가지런히 옷가지를 개켜 놓고, 욕조에 물을 채워 그 안에 들어가 누웠다. 태양이 적나라하게 자신을 비추는 곳에서, 동맥을 끊고, 피로 물을 적시며, 그녀는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간다.

"이제 내가 여기 있을 이유는 없어….
아무도 나를 봐 주지 않는 걸. 아빠도 엄마도, 누구도."

작품은 이 비극적인 장면을 제법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천하의 아스카가 아무리 상황이 나쁘겠기로서니,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을 납득하기 힘들어 한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TV판에서는 그나마 욕조 속을 애매하게 채색한 탓에(심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해석의 여지를 두는 것 같지만, 비디오로 출시한 완전판에서는 욕조 안이 아주 진한 핏빛을 띠고 있다. 24화의 후반 부분이나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아스카가 병실에 계속 누워 있던 것도 당연히 이 사건 때문이었다.

TV판 / 완전판

하지만 이 죽음은 쿄코 때와는 반대로, 타의에 의해 거부된다. 네르프가 아스카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헌데, 정보 부원은 마치 그녀가 죽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절묘한 타이밍에 그녀를 발견했다. 휴가와 미사토가 예상한 대로, 제레는 타브리스를 위해 파일럿에 의한 2호기 기동을 막아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늦게 그녀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 아스카가 욕조 속에서 팔을 끊고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야 어쩔 수 없이그녀를 찾았다고 보고하여 병실 안에 수용한 것이다. 제레가 얼마나 잔인한 집단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 맞지?"

레이가 아스카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조언 말이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에바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그 말은 단순히 에바 기동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아스카가, 아니 사람이 살기 위해선 가장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닫힌 마음의 끝에는 죽음이 있고, 열린 마음의 끝에는 희망이 있는 법. 적어도 인간답게, 아스카가 마음을 열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에반게리온] 30. 아스카 If You Can't Be Mine/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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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아스카 ② If You Can't Be Mine 

 

토우지 "뭐냐, 또 부부 싸움?"

신지, 아스카 "아니거든!"

아스카는 신지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또한, 서로에 대한 오해로 비극을 자초한 소년 소녀의 이야기는 작품이 가장 힘을 주어 묘사하는 갈등 관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신지와 아스카 사이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갑갑한 느낌을 유지하는 편이, 오히려 연출 의도에는 가장 가까운 감상이 될 수 있다. 에반게리온의 일부 에피소드를 러브 코미디 장르로 만든 둘의 관계는, 사실 같은 반 친구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교실 안의 연애 기류에는 언제나 또래 아이들이 가장 민감한 법. 그러니 정답은 이미 17화에 나왔고, 최소한 이 시점에선 두 사람의 감정이 특별하단 걸 전제로 깔고 시작해도 무리가 없겠다.

카지 "그럼, 잘 알지. 신지 넌 이 세계에서 꽤 유명하다구! 훈련도 없이 에바를 기동한 서드 칠드런!"

신지 "아뇨, 그런…그냥 우연인 걸요."

물론 신지 역시, 처음엔 아스카의 단순 경쟁 상대에 불과했다. 두 사람이 만난 8화로 가자. 모두가 점심을 먹는 중에 깔리는 라디오의 내용을 들어 보면, 어떤 사람에게 애인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자기보다 강아지를 더 아끼게 됐다는 사연이다. 당시 아스카가 느낀 그대로가 아닌가 싶다. 독일에선 모든 사람이 나만 보고 칭찬해 줬는데 여기선 그 시선을 나눠 받게 됐다. 신지라는 녀석, 영 실속 없어 보였지만 카지도 그를 칭찬한다. 하여 아스카는 가기엘과의 전투에서 그를 굳이 옆에 태워 자신의 솜씨가 굉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참고로 여기서 아스카가 신지 때문에 사고 언어 회로를 바꾸고, 그를 바탕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전혀 맞지 않는 두 사람도 노력하면 마음이 통하게 될 수 있다는 메시지로도 볼 수 있다.

아스카 "신지! Gutten Morgen!"

신지 "구…구뗀 모르겐…."

"이 몸이 말을 걸어 주셨으면 좀 더 기쁜 표정을 짓는 게 어때?"

9화로 가자. 신지와 같은 반이 된 아스카는 먼저 아침 인사를 하며 접근한다. 신발 보관함을 가득 메운 편지를 발로 무참히 짓밟는 그녀를 생각해 보면 확실히 신지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모양. 물론 아직은 단순 견제에 가깝다. 때문에 이스라펠 1차 공격 실패로 두 사람이 합숙 훈련을 하게 됐을 때, 아스카는 경악했다. 그런데 이게 카지의 계획이었다는 사실. 그는 아마 아스카가 자신이 아닌 또래인 신지에게 건강한 호감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 싶다.

아스카 "나 말곤 할 사람 없잖아요?"

미사토 "레이!"

레이 "네."

"……!"

미사토 "이거 원, 작전을 바꿔서 레이에게 맡기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아스카 "몰라, 이제 싫어! 안 해!"

히카리 "신-지-너!"

히카리 "따라 가라구! 여자를 울린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냐!"

훈련의 일부로 싱크로 게임 중인 아스카와 신지. 두 사람이 너무 안 맞는 중에 미사토는 자극을 주려는 의도로 레이를 불러 신지와 붙였다. 그 둘의 완벽한 하모니에 당황한 아스카는 방을 나갔고, 히카리는 신지에게 화를 내며 다그쳤다. 이 상황에서 아스카를 울릴 사람이 있다면 미사토 아니면 레이일 텐데, 그럼에도 히카리가 신지를 지목한 것은 그녀가 아스카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소녀의 감이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진실이다. 실제로 히카리는 극에서 아스카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래서 18화의 아스카는 자기도 모르게 신지에 대한 마음을 히카리에게 내비쳤다. 신지는 굉장히 둔한 바보일 뿐이라고. 의심할 것도 없이 자기 마음도 모르는 신지에 대한 불만이겠다.

신지 "저…."

아스카 "아무 말도 하지 마."

"하겠어, 나."

어쨌든 히카리 말을 듣고 신지는 아스카를 만나러 간다.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 아스카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 그게 중요하다. 그녀는 신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스카에게 신지가 오는 것기대 범위 안의 일이었고, 신지가 그 바람을 충족해 줬기 때문에 아스카는 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아스카 "미사토는?"

신지 "철야 작업, 아까 전화 왔어."

"그럼 오늘 밤은 우리 둘 뿐이네?"

"……." / "……?"

"이건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제리코의 벽! 이 벽을 조금이라도 넘어 오면 넌 사형이야! 어린 애는 일찍 자도록!"

합동 2차 공격을 하루 앞둔 밤, 미사토는 처음으로 두 사람을 두고 집을 비웠다. 이에 아스카는 목욕하고 수건만 두른 채 신지에게 말했다. 집에 우리 둘 뿐이라고. 물론 신지는 그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스카는 괜히 이불을 들고 미사토 방으로 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이건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제리코의 벽이야! 쓸 데 없이 문을 한 번 닫았다가 다시 열어 저 말을 하는 것도 재밌다. 아스카는 분명 신지의 어떤 반응을 기대했던 것이다. 사실 제리코의 벽은 무너지는 게 맞다. 성경에 따르면 굳건한 건 사실이지만, 사람들의 함성 소리로 무너뜨린 벽이었다. 필요한 것은 용기와 도전일 뿐. 그러나 신지가 그런 깊은 뜻을 이해할 턱이 있나. 아스카는 벽 뒤에 혼자 엎드린 채 그가 반항하며 문을 열기를 기다렸지만, 신지는 오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히 실망했을 것이다. 그녀 입장에선, 이게 신지의 첫 번째 거부 행위였다.

그러나 아스카가 슬며시 잠이 들고, 자신을 억누르던 이성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되자, 그녀의 본심이 나오고 만다. 잠결에 신지 옆으로 온 것이다. 아스카는 꿈에서 엄마를 찾는 것 같았다. 언제나 혼자 설 수 있다고 외치던 그녀였지만 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별한 엄마도 보고 싶고, 옆에는 사람을 끼고 함께 자고 싶은, 사랑이 필요한 외로운 소녀였다. 신지는 이 시점에서 괜히 아스카의 가슴을 봤다가 혼자 자극을 받아선 멋대로 키스를 시도하지만, 그녀의 눈에 맺히는 눈물을 보곤 포기한다. 서로에 대한 욕망은 있지만 엇갈리고 마는, 남자와 여자의 타이밍이다.

"열 팽창? 완전 간단한 거 아냐?"

"내 경우엔, 가슴을 따뜻하게 하면 조금 더 커질 수 있는 걸까나?"

"여기 봐, 신지!"

"……?"

"Back Roll Entry!"

10화로 가자. 여행을 포기한 세 명의 파일럿은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담으로 신지만 입수하지 않고 숙제를 하고 있는데, 16화에서 그가 사실 수영을 할 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온다. 아무튼 아스카는 왠지 자꾸만 신지의 시선을 끌려고 한다. 괜히 가슴을 신지 얼굴 가까이 대기도 하고, 열의 팽창을 자기 가슴에 비유하는 등. 물론 소심한 신지는 얼굴만 붉힐 뿐 그녀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잠시 뒤 물에서 나오는 레이에게 신지의 눈이 가는데, 눈치를 챈 것일까, 아스카는 일부러 신지를 불러 그의 시선을 자기에게로 돌렸다.

"신지…?!"

"바보, 무리하고 있잖아."

다행히 끝은 좋은 날이었다. 용암 속에서 위기에 처한 아스카를 구한 게 바로 신지였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아스카는 그 사실을 굉장히 기쁘게 여겼다. 그녀가 바라는 신지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아스카는 다시 한 번 마음을 열게 된다.

아스카 "있지, 신지, 키스해 볼래?"

신지 "응? 뭐라고?

아스카 "키스 말야. 너 한 적 없지?"

"…응."

"그럼, 하자!"

"뭐?! 왜?"

"심심하니까!"

15화에서 아주 중요한 장면이 나온다. 데이트를 부탁 받았던 아스카는 남자가 별로란 이유로 자리를 뜨고 집에 온다. 신지 혼자 있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았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에 대한 또 하나의 작은 증거가 된다. 신지의 첼로 연주를 듣고 감탄하며 칭찬하는 아스카. 마침 미사토가 늦을 거라는 전화가 왔고, 또 한 번 집 안에 둘 뿐인 시간이 왔다. 아스카는 제법 강한 수를 놓았다. 갑자기 신지에게 키스를 요구하는 그녀. 분명 적극적인 자세이긴 한데, 아스카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심심하니까!’라는 핑계가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믿은 신지는 정말로 시간 때우기 정도의 의미만 부여한 채 키스에 임했다.

"……."

그게 문제였다. 아스카가 기대한 키스는 그런 게 아니었다. 아스카는 민망해 신지의 코를 잡았는데, 그 정도면 신지가 살짝 반항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쓸 데 없이 숨을 참고 두 손은 아예 놓고 있었다. 퍼렇게 질린 채로 침만 섞고 있었다. 결국 되도 않은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아스카는 화장실로 달려가서 가글하는 흉내만 냈다. 자존심이 꽤 상했을 것이다. 그나마 남은 체면 지키겠답시고 엉뚱한 말 몇 마디 지껄여 보지만 분명 그녀, 속으론 울고 있었을 거다. 이 사건은 그녀에게 있어, 자신에 대한 신지의 거부 행위 그 두 번째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카지가 미사토를 데리고 집에 왔는데, 그의 몸에선 미사토의 향수 냄새가 잔뜩 풍긴다. 그 밤, 아스카는 두 남자에게 동시에 버림을 받은 기분이었을 게다.

"라벤더 향…."

16화의 탈의실 장면에서, 아스카는 주먹으로 사물함을 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표면적인 이유야 물론 싱크로 싸움에서 신지가 아스카를 이겼다는 것인데, 사건의 배치를 고려해 보면 진짜 이유는 따로 있는 것 같다. 레이가 나가는 걸 기다렸던 것도 어찌 보면 신지에 대한 그녀의 마음, 아스카 본인에겐 감추고 싶은 굴욕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정말로 아스카가 이 시점에서, 신지를 경쟁 상대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면, 레리엘 속에 흡수되었다가 귀환한 신지를 걱정해 몰래 숨어 있던 장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아스카는 여전히 신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19화에서 더미에 씐 채 3호기를 공격한 후 신지가 기절했을 때에도 아스카는 레이와 함께 그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16화에서 화를 냈던 대상은, 신지 이전에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 그의 반응, 이렇게 멍청하게 남의 반응 따위에 의지하기 시작한 자신의 약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옳겠다.

아스카 "이리 줘!"

"Hallo, Mutter. (안녕, 엄마!)

Wir haben uns lange nichts gehoert. (되게 오랜만에 얘기하네요.)

Ah ha! Niemals! (에이, 아녜요!)

Er ist ein einsamer Mensch (아 걘 주로 혼자 지내는 것 같아요.)

Ja. Ja. Wirklich? (, , 정말?)

Das ist aber toll. Fantastisch! (그거 대단하네요, 굉장해!)

Ich werde jetzt ins Bett gehen. (이제 자러 가야 할 것 같아요.)

Gute Nacht. (안녕히 주무세요.)"

"진짜 엄마 아냐. 그치만 싫은 건 아냐. 조금 어색할 뿐."

"…?! 왜 내가 너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데?!"

22화로 가자. 최근 2호기를 타고 있으면 미친 쿄코의 모습이 자꾸 보인다. 함께 죽어 달라는 엄마의 싫은 그 모습. 저녁을 먹던 중 독일에서 전화가 온다. 아스카 엄마란다. 관심을 보이는 신지에게 지금의 엄마는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걸 설명하고 잠깐 진심 섞인 얘기를 하는 아스카. 그러다 문득 대화 상대가 신지였다는 사실을 깨닫곤 불쾌하다는 듯 화를 냈다. 본인도 몰랐고, 알았어도 인정할 수 없었겠지만, 그녀의 마음은 아직도 신지에게 열려 있었던 것이다.

"기분 나빠…."

"미사토랑 바보 신지가 있던 물에 누가 들어갈 것 같냐.
미사토랑 바보 신지가 사용한 세탁기 따위 누가 쓸 것 같냐.
미사토랑 바보 신지가 사용한 화장실 따위 누가 쓸 것 같냐."


"미사토 싫어, 신지도 싫어, 퍼스트는 더 싫어! 아빠도 싫어, 엄마도 싫어! 그치만, 나 자신이 제일 싫어!"

"다 됐어, 너무 싫어! 어째서 내가, 내가!"

늦은 저녁, 화장실 안에 가만히 선 아스카. 눈에 보이는 것은 미사토와 신지가 차례로 몸을 담갔던 욕조의 물. 아스카는 화가 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쓰던 화장실을, 세탁기를, 욕조를 왜 내가 함께 쓰고 있지? 앞선 리뷰에서 설명한 대로 이란 사람의 마음을 상징하는 물질이다.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아스카가 마개를 뽑고 욕조 물을 흘려 버리는 것은 곧 두 사람의 마음을 자신과 더는 공유하지 않겠다는 거부의 표현과도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마음을 신지가 거절했으니까. 그 분함을 잊지 못해서, 더 정확히는, 그런 사소한 일에 얽매이는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의지할 데도 없는데, 자존심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이어 아라엘과 싸우게 된 아스카는 제루엘 전에서의 완패 등으로 컨디션이 바닥을 찍은 상태였다. 그래도 레이 뒤에는 설 수 없어, 명령을 어긴 채 어떻게든 앞에 나섰다. 그런 그녀에게 정신 공격을 강행하는 사도.

거부, 걱정, 분리, 집착, 의존, 결여, 죽음, 나는 인형이 아냐! 같이 죽어 줘! 난 네가 싫어!

비디오 버전에만 있는 텔롭

아라엘은 우선 아스카의 심층 의식 속에 박힌 여러 키워드를 꺼낸다. 매우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특히 죽음이란 단어가 높은 빈도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TV 방영 당시 편집 처리 되었던 텔롭이 있어 짚고 간다. 섹스라는 단어인데, 워낙 이미지가 강한 단어인 탓에 비디오 버전에만 남아 있다. 정신 공격 장면 중 형태를 파악할 수 없는 글자는 모두 섹스라는 단어를 하얀 칠로 덮은 것이고, 이는 아라엘의 정신 공격을 겁탈 행위로 해석하는 주요 근거가 된다. 죽음과 섹스, 그에 대한 혐오와 미묘한 동경 속에서 아스카는 살았던 셈이다.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입니다. 잘 부탁해요!" / "너, 바보야?"

"찬-스!" / "그러니까 날 봐요!"

다음 장면을 보자. 익숙한 아스카의 모습이, 목소리만 달리 하고 반복하여 나온다. 그녀가 자주 하는 행동유명 대사를 여러 성우가 대신 맡아 연기한다. 순서는 미사토, 레이, 히카리, 리츠코, 그리고 마야. 꽤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은 장면이다. 전혀 다른 사람이, 개인의 행동과 버릇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다면, 개인의 자아별개의 것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아스카는 그렇다고 말한다. 나를 모방할 수는 있어도 그건 진짜 내가 아니야. 나를 만드는 건 따로 있어. 혹시 그녀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아스카가 되기 위해, 억지로 높은 곳에 서려고 했던 건 아닐까? 남과 다르게 되고 싶어 외로움을 견디며 혼자이길 선택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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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 줘, 도와 줘요! 카지 씨!"

과연 바로 다음 장면에서, 아스카는 혼자 선로 위를 걷고 있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순간, 길을 온통 막으며 역행하는 정체 모를 넋의 집단이 나타난다. 기괴한 모습을 한 그들을 자세히 보니 아스카 자신이었다. 여태 본 적 없는 자신의 다른 모습, 아스카는 두려웠다. 이어 저 멀리 보이는 그림자. 카지라고 생각해 크게 불렀는데, 아무 대답이 없다. 아스카에게 카지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카지 "아스카는 아직 어리잖니."

사도는 그 해답을 찾으려는 듯 아스카 안에 있는 카지를 꺼내 본다. 즉시 나온 장면은 바로 15, 카지의 품에서 미사토의 향수 냄새를 맡았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녀의 마음은 그 날의 풍경을 미묘하게 바꿔 놓았다. 향수 냄새 대신에, 카지의 품에는 쀼루퉁한 표정을 짓고 신지가 서 있는 것이었다. 그는 아스카 안에 존재하는 신지이다. 자신의 마음을 거절했는데, 카지는 신지만 감싸고 있다. 두 사람은 아스카를 집에 둔 채 문 밖으로 나선다. 두 남자에게 버림을 받고 좌절한 그 밤의 충격, 아직도 그녀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것이다.

"왜 네가 거기에 있는 건데!"

동시에 이 장면은, 본래 아스카가 마음을 쏟은 유일한 남자가 카지였는데, 어느 순간 신지라는 녀석이 그 자리에 함께 있게 됐다는 비유이기도 하다. 아스카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네가 뭔데 그 자리에 서 있는 건데? 어째서 네가 감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내 마음을 이리도 아프게 만드는 건데? 그렇다. 이게 바로 그녀의 마음에 대한 해답이다. 그녀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은 진심이다. 아스카는 신지를 좋아하고 있었다. 신지는 아스카를 잡아 주지도, 구해 주지도 않았는데, 그녀도 모르는 사이 신지는 마음 한 가운데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아라엘에게 공격을 당하는 중에도, 그녀는 은밀히 신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나 그는 오지 않았다. 사도의 겁탈로 철저히 망가진 후, 그녀는 카지에게, 그녀가 되고 싶었던 어른에게 묻는다. 어떡하면 좋으냐. 카지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를 구한 건 레이였다. 그 한심한 꼴을 보면서 신지는 참 다행이라고 했다. 아스카는 살기 싫었을 것이다. 그런데 알미사엘 전에서는, 위험에 빠진 레이를 구하기 위해, 신지가 등장하는 것이다. 내게는 오지도 않았으면서! 신지는 레이를 구하려고 했고, 아스카를 버리려고 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스카는, 이미 마음으로는 죽은 사람이었다.

쿄코 "…죽게 하지 않겠어."

아스카 "…엄마!"

아스카가 눈을 뜬 곳은 2호기의 플러그 내부. 바깥은 상황이 나쁘다. 폭격 때문에 2호기도 흔들리고 있다. 다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 같이 죽어 달라는 목소리. 그런데 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있다. 역시 엄마였는데, 뭔가 달랐다. 여태 잊고 있던, 진짜 우리 엄마! 너는 죽으면 안 돼. 내가 지킬 거야. , 아스카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자식을 지키려는 어머니의 마음. 그게 바로 에반게리온의 AT 필드였다. 그러나 부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모든 마음을 무력하게 만드는 롱기누스의 창 앞에 2호기는 무릎을 꿇고 만다. 다시 한 번 겁탈을 당하는 아스카. 그녀는 바보 신지 따위 기대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녀의 말하기 방식을 감안해 보면, 전투 중에 그런 말을 꺼냈다는 건 역시, 혹시나 하는 기다림을 마음에 깔고 있었던 것 같다. 아스카의 신지에 대한 마지막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신지는 그녀의 부름에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바보 신지 따위, 기대할 수 없는데!"

끝으로 신지가 아스카의 목을 처음 조르는 장면으로 간다. 이 부분은 사실 다양한 측면에서 관찰하고 해석할 수 있는 중대한 장면이라 다음에 또 자세히 다룰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아스카 입장에서만 봐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 싶다. 아스카는 항상 기다리고 있었다. 신지가 자신을 구할 날을. 그러나 신지는 결국 오지 않았다. 두 번이나 겁탈을 당하는 와중에도 신지는 오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거절한 신지, 보완에 앞서 두려움에 떨며 그녀에게 구해 달라고 소리를 치든 식탁을 엎든, 그녀가 흔쾌히 그의 손을 잡아 주고 싶었겠는가. 신지가 싫기 때문이 아니라, 좋아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녀의 자존심을 뭉갠 소년에게, 진심과는 별개로, 잠깐이라도 좋으니 자기가 느꼈던 아픔을 전하고 싶었을 게 분명하다. 아스카는 신지를 보며 가엾다고 차갑게 얘기했다. 자신과 꼭 같은 상황이란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신지 "날 좀 구해 줘, 응? 아스카가 아니면 안 된단 말야."

아스카 "-싫어."

에반게리온의 많은 캐릭터가 그렇지만, 아스카도 다른 사람에게 진심을 전하는 방법을 모른다. 사실 그녀의 마음은 생각하는 것과 달리 간단하다. 신지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의 마음을 배신하지 않고 함께 있어 줄 사람을 갈망했다면, 아스카는 다만, 자신과 진심을 나눌 단 한 사람을 찾고 싶었을 뿐이다. 여태 그녀가 바라던, 또 받았던 건 군중의 주목과 관심이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려는 중에 그녀도 알게 됐을 것이다. 정말 필요한 건 사람의 진심이다. 마음의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건 진짜 사랑이다. 그래서 카지에게 기댔는데, 그는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를 거절했고, 그래서 신지에게 마음을 열었는데, 두 사람의 마음은 어긋나고 말았다.

"…가엾구나."

BGM Thanatos - If I Can't Be Yours (Loren & Mash)

Now it's time, I fear to tell

이제 시간이 됐어요, 말하기 두렵지만

I've been holding it back so long

오래 전부터 이 말을 담아 두고 있었어요

But something strange deep inside of me is happening

내 마음 안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I feel unlike I've ever felt and it’s making me scared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기분, 그래서 두려워요

That I may not be what I think I am

내가 생각했던 내 모습이 아닌 것만 같아서

"니가 전부 내 것이 되지 않는다면, 나, 아무 것도 필요 없어!"

보완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그러니까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기 시작하는 공간에서, 아스카는 신지에게 말했다. 네가 완전히 내 것이 되지 않으면 나,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사실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니다.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뿐, 아스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내가 네 것이 될 수 없다면 나, 견딜 수 없을 거라고.

What of us? What do I say?

우린 대체 뭘까요? 뭐라고 하면 좋나요?

Are we both from a different world?

우리 두 사람은 다른 세계에서 온 걸까요?

'Cos every breath that I take, I breathe it for you

숨을 쉰다는 게, 전부 그댈 위한 한 숨, 한 숨이라서

I couldn't face my life without you

당신 없는 삶을 마주할 수가 없어요

And I'm so afraid there's nothing to comfort us

우리를 위로할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게 너무 무서워요

What am I

난 대체 뭐죠

If I can't be yours….

내가 만약 그대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인류의 보완이 시작된다.

[에반게리온] 31. 신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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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신지, 죽음에 이르는 병

 

후유츠키 "왜 여기 꼬마가 있는 거야?"
나오코 "이카리 소장의 아드님입니다."
"이카리, 여기는 탁아소가 아니야. 오늘은 중요한 날이잖아."
유이 "죄송해요, 후유츠키 선생님. 제가 데리고 왔어요."

"유이, 오늘은 자네 실험이잖나?"
"그 때문입니다. 이 아이에게 밝은 미래를 보이고 싶어요."

신지가 3살 때였다. 엄마인 이카리 유이는 인류의 밝은 미래를 아들에게 보이고 싶다며 그를 코어 실험 현장으로 데리고 왔다. 그 날, 유이는 아들이 보는 앞에서 죽었다. 슬퍼할 사이도 없이, 신지는 아버지 겐도우에게 버림을 받았다. 겐도우의 부탁으로 선생님 집에서 자라며, 신지는 11년이라는 시간을 가족 없이 보냈다. 딱 한 번, 11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무덤에서 겐도우와 만난 적이 있지만, 복잡한 심경 탓일까, 이번에는 신지 쪽에서 겐도우를 피했던 모양이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단지 싫었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의 아픈 기억 때문에 사람 자체가 무서웠던 것일 테다. 신지는 언제나 그랬다. 가장 가까운 부모가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세상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아스카와 꼭 닮았다.) 어설프게 마음을 줬다가는, 이내 그 마음이 고스란히 상처로 돌아올 거야, 그게 바로 신지가 세상에 대해 배운 전부였다.

신지 "……."

미사토 "아 맞다, 아버지한테 ID 카드 받지 않았니?"

"아, 네!"

"여기…."

"고마워."

상태가 영 좋지 않다.

그랬던 신지가 14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초호기 파일럿이 필요하니까. 편지가 말하는 바도 명료했다. 쓰여 있는 글자는 하나,오너라.’ 동봉한 ID 카드와 함께 종이에 가득한 검은 매직 칠은 보안을 위해 네르프 쪽에서 한 것 같은데, 유심히 보면 종이가 꽤 찢겨 있다. 굳이 겐도우가 찢어 보낼 이유도 없고 종이 배달이 어려운 것도 아니니, 우리는 여기서 신지가 편지를 찢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참 오래 기다린 아버지의 편지인데, 쓰인 말이라곤 안부 한 마디 없는 명령에 가까운 지시, 당연한 반응이겠다. 붉은 펜으로 글자를 마구 칠한 것을 봐도 신지의 심리를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저렇게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어도, 미사토와 만날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결국 신지의 마음 깊은 곳에선 아직 아버지를 원하고 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나를 버린 아버지가 너무 싫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사랑이 받고 싶다는 어린 아들의 마음. 다 떠나서, 한껏 찢었다 어설프게 테이프로 붙여 놓은 이 편지, 내가 보기엔 아버지에 대한 신지의 마음 그 자체.

겐도우 "탈 거면 빨리 타라! 안 탈 거라면 나가라!"

어차피 신지는 서드 칠드런으로 내정이 된 상태였고, 사도 내습 시기 또한 명확했기 때문에, 겐도우가 굳이 그리 촉박한 타이밍에 신지를 불렀단 것은, 유이가 신지를 도울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는 소리이다. 과연 아들과 재회한 어머니는 아무 조건 없이 에바를 움직여 신지를 지켰다. 신지가 초호기에 타서 무슨 짓을 해도, 결국 이길 것임을 겐도우는 진작 알았겠다. 하지만 신지 입장에선 그렇지 않았다. 3년 만에 본 아들에게 무정한 톤으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아버지를 보고 신지는 절망했다. 아버지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겐도우는 그저 타든가, 말든가선택하란다. 당연히 신지는 거절했다. 저런 아버지를 따르고 싶을 리가 있겠는가. 주위 사람들은 다시 곁을 떠나고, 너무나 익숙하게도 신지는 필요 없는 인간이 되었다.

에바에 타지 않는 파일럿은 필요 없다?

이미지가 꽤 다른 기획 단계의 신지, 남자다?!

현실은 나디아

신지는 내성적이다. 가만히 보면 도저히 외향적인 아이로는 자랄 수 없는 성장 환경이었다. 부모도 없이 낯선 어른과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마음 편히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의지할 상대도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이 아무리 친절하게 그를 대했다 해도 가족이 아닌 만큼 신지의 마음은 편할 수가 없다. 별 수 없이 주위 어른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을 것이고, 다만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어야 했다. 1화에서 초호기 탑승을 거부했던 신지가 결국 에반게리온에 타게 된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들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으니까. 최소한 그렇게 하면 나를 필요로 하니까. 오히려 신지가 에바 탑승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은 작품 초반이었고, 그 땐 토우지 동생의 부상 등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겐도우의 칭찬을 받은 이후로는 그 자체가 에바에 타는 이유가 되었다.

'도망치면 안 돼!'

카지 "괴로운 게 싫니? 좋아하는 건 찾았고?"
신지 "……."
"뭐, 괜찮아. 많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상냥할 수 있는 거야."

"그건 나약한 게 아냐."

그러나 신지가 초호기에 타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레이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손에 묻은 피, 그리고 나 자신에게서 도망치면 안 된다는 것. 신지는 자신이 옳다 생각한 일엔 제법 강단이 있다. 그리고 그 기반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다. 소심하고 눈치도 많이 보지만, 그 말은 곧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섬세하게 신경을 쓴다는 말이며 실제로 큰 장점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주위 사람의 성격과 환경 탓에 이 유형의 성격이 부정적으로만 비치는 점은 크게 아쉽다. 신지는 최소한 스스로의 잘못을 알고 반성할 줄 아는 소년이다. 자신이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에도 공감할 줄 안다. 게다가 신지는 사도를 무찌르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작품 속 유일한 인물이었다. 자신의 상처에 민감한 대신 남의 상처에도 함께 민감한 타입.고통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상냥할 수 있어. 그건 나약함과는 다른 거야.’ 17화에서 카지가 말했던 신지의 장점이다. 정답이다.

신지 "목표를 센터에 넣고 스위치."
리츠코 "사람이 시키는 일엔 조용히 따른다, 그게 저 아이의 처세술 아냐?"

미사토 "증말, 자꾸 네, 네 짜증이 나네. 남자면 좀 더 시원하게 굴어, 응?!"

신지, 정말 고생이 많다.

3화에서는 신지가 처음으로 미사토의 명령을 어긴다. 토우지와 켄스케를 함께 태운 채 철수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도망치면 안 된다, 자신이 만든 주박에 얽매인 행동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2화에서 미사토나 리츠코가 지적한 신지의 단점에 대한 나름의 피드백이기도 했다. 단순히 센터에 넣고 스위치를 누르는 게 아니라, 또 어른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르는 편리한 처세술이 아니라, 진짜 신지를 보이고 싶다는 용기에 더 가깝다. 다행히 결과도 좋아 사도를 무찔렀는데, 미사토의 반응은 영 이상했다. 어제는 너무 소극적이라고 핀잔을 줬던 사람이, 오늘은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며 화를 낸다. 아직 신지는 어리고, 그래서 미사토의 반응에 혼란을 느꼈을 법 하다. 게다가 같은 반의 토우지도 동생을 다치게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때렸다. 에바를 타도, 내려도 욕을 먹는다. 그래서 신지는 결국 집을 나갔다.

자살 명소 오와쿠다니

4화에서는 신지의 가출 경로를 그리고 있다. 많은 장소가 있지만 안개가 낀 거대한 산을 따로 주목하자. 실제 장소로, 하코네의 오와쿠다니 분화구이다. 그런데 여기, 사실 자살 명소로 유명한 곳이다. 따라서 신지가 오와쿠다니에 올라 주변을 보고 있는 장면은 무심히 볼 게 아니라, 신지의 첫 번째자살 시도로 볼 수 있는 부분인 셈이다. 다만 안노 히데아키가 직접 밝힌 대로, 신지는 죽고 싶으나 죽을 용기가 없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단 다시 살기(정확히는 죽지 않기’)로 한다. 그의 마음을 정말로 돌린 것은 바로 반 친구들이었다. 켄스케 역시 어머니 없이 자랐는데, 신지와는 달리 오히려 에바 파일럿을 동경하고 있었다. 토우지는 어떤가. 동생 때문에 처음에는 신지를 원망했어도, 결국 신지의 처지를 알고는 진정으로 그를 감싼다. 자신이 괴롭게 여기는 현실을 오히려 갈망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그리고 내 고통에 공감하고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다는 걸 배운 신지는 다시 한 번 에바에 타기로 한다. 초호기에 타도 괜찮다는, 바꿔 말하면 이 세상에 있어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은 셈이니까.

신지는 듣기 위해 이어폰을 끼는 게 아니다.

듣지 않기 위해, 끼는 것이다.

신지 얘기를 하면 뺄 수 없는 게 바로 SDAT, 그가 자주 듣는 카세트 플레이어이다. 수퍼 디지털 오디오 테이프의 약자. 신지가 듣는 트랙이 거의 25번 아니면 26번이기 때문에, TV25, 26화의 내용과 연계하여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지의 닫힌 마음을 묘사하는 25화와 신지의 성장을 조명한 26화 사이에서 맴도는 심리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 4화에서 잠깐 미사토의 말을 어기고 진짜 자신을 찾으려 했던 신지는 결국 트랙을 리버스 하여 트랙 25돌린다. 원래의 자신이 되겠다는 것이다. 물론 굳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모습은 대개 세상과의 단절을 상징한다. 엔드 오브 에바에서는 배터리가 다 되었음에도 상관하지 않고 이어폰을 끼고 있는데, 그 정도로 신지의 스트레스가 높은 상태임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음악을 듣는 걸까? 트랙 25‘You Are The only one’, 트랙 26푸른 전설(팔콤의 유명 액션 RPG 이스 시리즈의 캐릭터 송, 보컬은 미츠이시 코토노.)이라는 곡이다. 다만 23화에선 트랙 25가 다른 곡으로 나와 곡 자체에 특별히 담긴 의미는 없는 모양.

아스카 "꽤 좋은데! 그런 것도 할 줄 알았어?"
신지 "특별히 재능이 있는 건 아냐."

15화에서 나온 바에 따르면 신지는 5살 때 첼로를 시작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시켰을 테다. 첼로를 계속하는 이유 또한 아무도 멈추라고 한 적이 없어서란다. 하지만 아예 흥미가 없는 건 아닌 모양이고, 아스카 또한 한 번 듣고 칭찬을 했으니 신지가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표현한 건 겸손한 반응이겠다. 사실 신지가 연주한 바흐의 프렐류드는, 첼로를 연습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결코 쉬운 곡이 아니다. 첼로 고수가 켜기에도 현 옮김이 빠르고 복잡한 편이라 15화에 나온 신지의 연주 실력 정도면 엄청난 수준이다. 데스 앤 리버스에 나온 평행 우주(라고 일단 표현하겠다.)의 신지는 훨씬 더 유려한 연주를 하고 있어, 신지가 에바 없는 세상에서 보통 소년으로 자랐다면 아주 훌륭한 첼리스트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말이 나온 김에 데스 앤 리버스의 현악 4중주 캐논 연습 장면을 보고 가자. 사실 이 장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에반게리온의 전체 스토리가 신지의 꿈 얘기라 주장하기도 한다. 스토리 궤도에서 있을 수 없는 네 사람의 만남, 2도쿄의 다른 학교 강당이라는 장소 설정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당연히, 신지의 여정과 주변 캐릭터와의 관계에 대한 상징(어쩌면 인류 보완 과정 그 자체)으로 해석하는 게 맞겠다. 신지가 첼로를 들고 강당에 왔을 때 텔롭이 말하는 ‘18개월 전이라는 구체적인 시간 제시가 그 증거가 된다. 에반게리온 TV 방영 시점을 기준으로 18개월 후에 데스 앤 리버스를 개봉했기 때문이다. 신지는 익숙한 바흐 프렐류드와 함께 혼자 조율을 하고, 두 번째로 아스카가 강당에 왔다. 첼로와는 옥타브가 아예 다른 바이올린. 조율 후에는 신지와 같이 바흐의 곡으로 연습을 한다. 다음으로 레이. 첼로와 바이올린 사이의 음색을 내는 비올라로 조율은 하되 연습을 따로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신지와 비슷한 곡을 골라 함께 연습을 했던 아스카와 의미 있는 대비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카오루는 메인이 되는 제1바이올린을 들고 조율도 없이 시간에 맞춰 바로 연주를 시작한다. 이어 흐르는, 네 사람의 완벽한 하모니.

연습을 마치고 나가는 신지

캐논(Canon)은 기준, 규칙 등을 의미하며, 하나의 선율 안에서 모방과 변용을 거듭하여 하나의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는 곡이다. 하나의 틀과 미묘한 응용이라, 과연 에반게리온 아닌가 싶다. 영화의 데스 파트가 끝이 난 후, 강당에 혼자 남은 신지는 첼로를 들고 밖으로 간다. 연주는 훌륭했으나 연습일 뿐이었다. 이제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변주를 시작한다.

아스카 "좋은 아침, 이카리!"
신지 "어, 좋은 아침!"
"오늘 뭐 한다고 했지?"
"파헬벨의 캐논."

바이올린 담당, 아스카는 신지에게 어떤 사람인가? 명백히 끌리긴 하나, 그 기분이 정확하게 뭔지 신지 본인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굳이 표현하자면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욕정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 진심을 표현할 용기가 없던 신지는, 아스카가 잠에 빠졌을 때 몰래 키스 시도를 하는 정도(더 나가면 물론, 엔드 오브 에바에서의 자위도 포함할 수 있겠다.)로만 마음을 드러낼 뿐이었다. 사실 보완 직전 그가 아스카에게 밝힌 진짜 마음은 너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고 언제나 너와 함께 있고 싶다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분명한 사랑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에반게리온에서 보는 신지의 행동은 결국, 환경이 왜곡한 사람의 진심이다.

신지 "좋은 아침!"
레이 "……."

응답하지 않는 레이. 이 부분을 자세히 보면 아스카가 키득, 웃는다.

계속 웃는 아스카. 레이를 보며 의아하게 여기는 신지. 세 사람의 미묘한 관계에 대한 상징이다.

신지, 아스카와 달리 조율 하는 레이

아스카 "…거짓말."
신지 "……?"

"너, 누구라도 괜찮은 거지? 미사토도 퍼스트도 무서우니까, 아빠도 엄마도 무서우니까!"
"살려 줘, 아스카."
"그냥 나한테 도망치고 있는 거잖아!"
"도와 줘, 아스카!"

"정말로 남을 좋아한 적이 없는 거잖아!"

레이와 미사토 두 사람 다 신지가 굉장히 아끼던 사람이긴 해도, 아스카와는 그 의미가 좀 달랐다. 특히 두 여성은 신지와는 근본적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미사토의 경우 자꾸만 부담이 되는 사랑을 줬고, 레이의 경우 어머니와의 연계를 알게 된 후 미묘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신지에게 진짜 사랑의 상대는 아스카 하나였다. 비올라를 담당한 레이가 중간에 서서 자신의 역할을 전하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허나 레이가 보완에 앞서 부른 아스카는, 신지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다른 사람이 무서워 차선으로 자신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랑이 아니었다.

아스카 "늦었잖아!"

카오루 "미안, 미안!"

단체 조율, 혹은, 인류의 보완?

카오루 "시작한다?"
신지 "응."

신지가 사랑한 사람이 또 하나 있다. 역시 아스카와 함께 바이올린을 담당, 카오루. 여기서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물론 플라토닉에 가깝다-만 원하는 대로 생각하자. 어떻든 신지는 카오루라는 타인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꺼내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 사실 카오루는, 신지의 인생에 걸쳐, 처음으로 분명히 너를 좋아해라고 말한 사람이었다. 미사토와 같이 무서운 사랑, 레이와 같이 미묘한 사랑, 아스카와 같이 애매한 사랑도 아니었다. 신지는 상처가 무서워 다른 사람에게 한 적이 없는 말이었다. 감동한 신지는 마음을 놓고 카오루에게 진심으로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신지 "호의…?"

카오루 "너를 좋아한다는 말이야."

신지 "배신했겠다…내 마음을 배신했겠다…!"

초호기의 가슴을 찌르는 2호기

그런데 카오루가 사실은 적, 사도였다는 걸 알게 된 신지는 그가 내 마음을 배신했다며 화를 냈다. 카오루가 조종하는 2호기는 초호기의 가슴을 찍는데, 나는 이 장면이 신지의 마음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신지는 카오루가 자기 가슴에 비수를 찔렀다고 느꼈을 테니까. 결국 이 사건으로 신지는 에바 탑승을 거부한다. 에바에 타라고 해서 무리인 걸 알면서도 파일럿이 되었다. 그런데 토우지의 동생은 물론 토우지도, 거기다 카오루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을 자신의 손으로 다치거나 죽게 만들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신지는 생각했다. 그래서 엔드 오브 에바에서, 그는 초호기에 타지 않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결정은 결과적으로 아스카가 양산기에 의해 처참히 죽임을 당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두려움에 묶인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 더 큰 비극을 부르는 것이다.

신지 "카오루가 훨씬 더 좋은 애였어요. 카오루가 살았어야 해."

죽을 사람은 나야.

그런데 죽은 사람은 카오루….

카오루의 죽음으로 절망한 신지는 또 한 번 죽음을 결심한다. 엔드 오브 에바의 첫 장면은 카오루를 만난 호수 근처에 서 있는 신지의 모습이다. 많은 사람이 간과하고 넘기는 부분인데, 신지의 얼굴이 이상하지 않은가? 서 있는 위치도 애매하다. 날씨가 덥고, 따라서 땀을 엄청 많이 흘렸다는 설명으로 끝을 낼 수도 있지만, 나는 조금 더 위험한 쪽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신지는, 자살을 하려다가 실패한 것 같다. 다시 한 번 안노와 사다모토가 말한 신지의 죽고 싶어도 죽는 게 무서운 아이라는 설정을 적용해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부분이다.

"도와 줘, 아스카."

결국 다른 사람도, 죽는 것도 무서워 더는 피할 공간이 없게 된 신지는 아스카를 찾아 간다. 언급한 대로, 사실 아스카 역시 자살 실패로 거기 누워 있었다. 그 와중에, 아스카를 보면서 신지는 자위를 했다. 이 장면은 리뷰 20편에서 설명한 대로 신지의 리비도 수치, 삶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태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역으로 신지가 자살에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또 진짜 타인은 바로 옆에 있는데, 끝내 자기 안에서만 타인을 찾아 헤매다 위안하고 또 절망하는 신지에 대한 짧고 강렬한 묘사였다. 어차피 살 이유를 잃은 신지에게 윤리 의식이 작용이나 했을까, 난 정말 더러운 놈이라며 자책하는 목소리도 공허하다.

"그 손은, 뭘 위해 있는 거야?"

신지는 긴장을 하거나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 손을 꽉 쥐었다 펴는 버릇이 있다. 신지의 성장을 담고 있는 중요한 상징이 된다. 1화에서 레이의 피가 묻었던 손. 5화에서 레이 가슴을 통해 처음으로 여성을 느꼈던 손. 24화에서 카오루의 목을 따 죽였던 손. 아스카 앞에서 자위하고 정액이 잔뜩 묻었던 손. 보완에 앞서 아스카의 목을 졸랐던 손. 보완 중에, 모두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신지에게 레이가 물었다.그렇다면 그 손은 무엇을 위해 있는 거야?’ 손은 사람의 마음과 같다. 그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상처를 줬기 때문에 신지는 손, 그러니까 그 마음도 포기하려 했다. 그러나 손은 그저 혼자 쥐고 펴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느끼기 위해 있는 것이다. LCL의 경계 없이 모두가 하나가 된 바다에서, 신지는 결국 레이와 몸을 다시 나누어 악수를 청했다. 과연, 사람은 손으로 목을 졸라 남을 죽일 수도 있으나, 아스카가 신지에게 보인 것과 같이, 따뜻한 온기로 사람을 구할 수도 있다.

너와 나를 죽인 손, 너와 나를 구한 손

그 사이가 바로, 고슴도치의 딜레마

4화의 제목인 고슴도치의 딜레마는 쇼펜하우어가 쓴 우화에 나오는 말이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서로 몸을 기대어 온기를 나누려 하는 두 마리 고슴도치가, 너무 가까우면 서로의 침에 찔려 아프고 그렇다고 너무 떨어져 있으면 추위에 떨어야 한다는 딜레마 말이다. 사람이 사춘기를 거쳐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곧 서로 상처를 주지 않는 선에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리츠코는 말했다. AT 필드로 나와 너를 분리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숙명이다. 에반게리온의 인류 보완 계획은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고슴도치의 가시 부러뜨리기와도 같았다. 하지만 아프지 않기 위해 본래의 모습을 버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고슴도치는 고슴도치만의 사는 방식이 있고 사랑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 말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그리고

'나'라고 하는 존재의-

실존

16화의 제목 죽음에 이르는 병은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제목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정신의 죽음, 절망을 의미한다. 16화에서 신지는 절망에 대해 얘기한다. 언제나 싫은 것에서 도망을 쳤고,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 에바에 매달려 사는 지금. 진짜 신지는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았다. 에바 파일럿이 아닌 자신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사실 키에르케고르의 주요 메시지는, 사람은 실존하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다만 시대 사상에 따라, 그 형태는 신앙에 귀의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실제로 에반게리온은 신지가 결국 초호기와 작별을 선언, 신의 위치에 선 본인의 의지로 새로운 세상을 구축하는 이야기를 담은 만큼, 키에르케고르 사상의 오마주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겠다.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마음 안에는 크든 작든 고뇌하는 햄릿, 이카리 신지가 살고 있다. 신지라는 캐릭터는 안노가 본인의 성격을 대입한 캐릭터이기도 한데, 실제 신지의 유명 대사 도망치면 안 돼.’는 안노가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하나의 다짐으로 삼았던 말이며, 엔드 오브 에바의 마지막, 신지가 아스카 위에서 오열하는 장면은 특별히 연기 지도를 위해 거기서 울고 있는 사람은 신지가 아니라 나야.’라는 말도 했다. 매사에 자신이 없고, 의지도 부족하며, 그저 남이 시키는 대로, 눈치만 잔뜩 보며 세상을 사는 사람. 신지는 어쩌면 모두의 숨은 이야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에반게리온은 그런 아이가 결국 다른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고, 아픔을 두렵게 여기지 않고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신지는 굳이 따로 설명할 이유도 없다. 그냥 보고, 있는 그대로 느끼면 좋겠다. 편한 죽음 대신 아파도 사는 것을 택하고, 회귀가 아니라 독립을 택하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헤헷."

[에반게리온] 32. 인류 보완 계획 : 유이 타입/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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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인류 보완 계획 : 眞 유이 타입 

 

"가끔은 이렇게 밖에서 마시는 것도 좋잖나?"
후유츠키 "아, 네."
"자네는 유능하긴 한데, 사람 사귀는 걸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단 말이여."
"죄송합니다."

"그런데 후유츠키, 생물 공학에 대해 흥미로운 레포트를 쓴 학생이 있던데, 이카리란 학생을 아나?"
후유츠키 "이카리? 아뇨?"
"내가 자네 말을 좀 했더니, 꼭 만나 보고 싶다고 그러더군. 곧 자네에게 갈 걸세. 잘 좀 부탁혀."
"이카리라고 하셨죠. 알겠습니다."

후유츠키 "이거, 읽어 봤네. 몇 가지 의문점이 있긴 한데…굉장히 흥미로운 레포트였어."
유이 "감사합니다."
"이카리 유이라고 했지?"
"네."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취직? 아니면 연구소에서 활동?"

"아직 생각해 보진 않았습니다. 거기다 제3의 선택도 있지 않습니까?"
"응?"

"가정을 꾸리는 것도 생각하고 있답니다. 물론 좋은 사람이 있을 때 이야기겠지만요."

"……."

후유츠키 코조, 교토 대학 형이상 생물학 전공 교수이다. 사람 사귀는 걸 즐기는 타입은 아니나, 2001, 동료 교수 소개로 이카리 유이라는 학생을 만난 이후 좀 변했다. 그를 만나려 한 것은 유이 쪽이 먼저였는데, 아마 그의 연구가 E-계획에 꼭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 사실을 몰랐던 후유츠키는, 그녀의 명석함, 상냥함, 그리고 당당함 등에 매력을 느껴, 전공도 비슷할 겸 사적으로 교류하며 유이와 친분을 쌓아 나가기 시작했다.

겐도우 "어떤 인물에게서, 당신의 소문을 들었거든요. 한 번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후유츠키 "술에 취한 채 싸웠다고, 의외로 어리석은 녀석이구만."

"남에게 호감을 사는 건 잘 못합니다만, 미움 받는 건 익숙해 있죠."

"……."

그러던 어느 날, 후유츠키에게 경찰서에서 전화가 한 통 왔다. 로쿠분기 겐도우라는 사람을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잘 알고 있었다. 같은 학교 학생인데다, 나쁜 의미로 유명한 녀석이었다. 알고 봤더니 술에 취해 누군가와 싸우고는 신분 증명이 되지 않자 자신을 보증인으로 지목했다는 것이다. 아는 누구에게 당신 이야기를 많이 들었단다. 그 땐 그냥 넘겼으나, 지나고 생각해 보니 유이가 가르쳐 줬을 테다. 얼마 후 유이와 산을 오르던 중, 그녀의 애인이 로쿠분기라는 것을 알고 그는 크게 놀랐다. 들리는 바로는 유이의 배경이 보통이 아니라, 능력도 재력도 없던 겐도우가 흑심을 품고 그녀에게 접근했단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걱정이 많았는데, 유이는 후유츠키를 보며 다들 모를 뿐, 겐도우도 알고 보면 참 귀여운 사람이라고 했다.

유이 "어머 후유츠키 선생님, 그 사람 알고 보면 아주 귀여운 남자랍니다."

후유츠키 "모르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구만."

다시 얼마 뒤, 세컨드 임팩트가 발발한다. 후유츠키는 교수 자리를 잃고 자격증 없이 의사 활동을 하며 생계를 잇고 있었다. 그러다 UN(이라는 이름의 제레)의 요구에 의해, 남극 조사단에 참여하게 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를 추천한 사람이 겐도우였다. 탐사 당시 겐도우는 이미 제레 멤버의 자제인 이카리 유이와 결혼을 마친 상태였다.

겐도우 "지금은 이름을 바꿨습니다."

후유츠키 "엽서? 명함이 아니고?"

저희 결혼했어요. 이카리 겐도우, 유이.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시죠?

"……!"

놀라는 것도 잠시, 도저히 운석 충돌이라 판단할 수 없는 남극의 상태와, 겐도우에 대한 불신 등으로 후유츠키는 겐도우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곧 제레라는 조직, 그들의 음모, 또 세컨드 임팩트가 결코 사고가 아니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어, 겐도우에게 모은 자료를 꺼내며 압박을 가했다. 그러자 겐도우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게히른 본부로 데리고 갔고, 에반게리온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본 그는 완전히 압도되어 게히른에 힘을 보태게 된다. 물론 사실은, 후유츠키는 겐도우를 경멸하고 있었고, 따라서 호기심만을 근거로 그의 태도 변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실제로 이후 15년이란 시간 동안, 후유츠키는 겐도우의 한 손이 되어 그의 충실한 부하 역할을 맡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겐도우 옆에 남게 만든 것일까? 혹시, 이 모든 게 이카리 유이의 힘은 아니었을까?

에반게리온에서 가장 흐릿한 설정 중 하나가 바로 유이의 진짜 동기이다. 본 리뷰에서는 유이가 초호기에 흡수된 것이 사고가 아니라 본인의 의지였음을 이미 설명했으나, 그 이유를 명확히 짚지는 않았다. 유이는 어째서 스스로 초호기 안에 들어간 것일까? 또 그 위험한 접촉 실험 장소에 굳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왔던 이유는 뭘까? 그녀가 바라는 서드 임팩트는 어떤 것이었나? 초호기와 함께 영원히 우주에 남는 것도, 그녀의 목적이었을까? 지금 이 많은 질문에 대해, 작품의 단서를 통해 제대로 고찰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유이 타입의 보완 계획은 이미 리뷰 4편에서 오리지널 타입이란 제목으로 언급한 바 있으나, 굳이 유이 타입이라고 칭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진정한 동기 및 의도가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시작하자.

우선 유이가 초호기에 흡수된 것이 사고가 아니란 사실은, 거의 명백한 진실이나, 여전히 해당 부분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아 따로 짚어 본다.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게 바로 21화에 나왔던, 후유츠키와 유이의 대화 장면이다. 2003, 신지가 3살 때, 그러니까 접촉 실험 얼마 전 일이다. 장소는 하코네 북쪽 지역에 있는 아시 호수(하코네 호수), 23화에서 레이가 알미사엘과 함께 자폭을 선택했던 곳이었다. 우선 유이의 말을 들어 본다.

후유츠키 "이 나라에서 가을이 사라진 건 참 아쉬운 일이지.

제레가 가지고 있는 사해 문서….

그 시나리오 대로라면, 10여 년 후엔 반드시 서드 임팩트가 발발한다…."
유이 "최후의 비극을 막기 위한 조직. 그게 바로 제레와 게히른이죠."
"나는 자네의 생각에 찬동할 뿐, 제레가 아니야."

, 여기서 잠깐. 우선, 제레의 사해 문서에 따르면, 서드 임팩트는 반드시 발생한다. 앞선 리뷰에서 설명한 대로, 구체적으로는 사도가 아담과 결합하여 인류가 멸망하는 것을 칭한다. 그 비극을 막기 위해, 게히른은 제레의 힘을 뒤에 업고 에반게리온을 제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미 이 시점에서, 우리는 유이의 계획이 제레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이는 제레 멤버의 딸이고, 그렇기 때문에 제레의 멤버라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유이는 제레의 의도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단은, 여기서 말하는 제레의 의도라는 게, 그저 에반게리온을 사용하여 사도를 막는 것인지, 아니면 제레 타입 A, 사도를 무찌른 후 릴리스를 이용하여 속죄 의식을 치르는 걸 말하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만약 전자라고 한다면, 유이나 후유츠키나 인류를 지키는 계획을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답은 후자 쪽일 것이다. 유이가 속한 제레가 일단, 릴리스 속죄 의식을 계획하는 중, 생각 차이가 있던 유이가 그 계획에 반하는 다른 타입의 인류 보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두 계획이 갈리고 있다는 걸 후유츠키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유이 "후유츠키 선생님, 그 봉인의 세계를 푸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후유츠키 "자료는 전부 이카리에게 넘긴 상태야.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말이네."

여기서 유이가 말하는 봉인의 세계, 표면적으로는, 세컨드 임팩트를 제레가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사실을 말한다. 후유츠키의 대사 또한, 그가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비밀을 캔 후, 그 자료를 이카리에게 넘겼던 사실말한다. 그러나 유이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비밀이 또 하나 있다. 유이의 대사가, 후유츠키의 내가 지지하는 건 제레가 아니라 너야.’에 대한 반응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 후유츠키는 유이가 사실 제레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알고 있고, 그것을 말로 꺼낸 후유츠키에게, 그녀는 지금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가자.

"……."

후유츠키 "…전과 같은 짓은 이제 하지 않아."

"거기다, 어떻든 경고도 받고 있는 중이고.
그들에게 나 한 사람 쯤 세상에서 지우는 일 정도야 전혀 문제도 아닌 모양이니 말이네."

유이 "살아남은 사람들도 그렇죠.
간단해요. 사람을 없애는 것은."

후유츠키 "그렇다 해도, 굳이 자네가 실험 대상이 될 필요는 없었다고."

유이 "모든 것은 흐름 대로예요. 저는 그것을 위해 제레에 있는 거니까요.
…신지를 위해서."

우선 후유츠키가 말한 전과 같은 짓이란, 제레의 비밀에 대해 캐고 다니는 행동일 테며, 곧 그의 대사는 본인 역시 그 행위의 위험성을 자각하고 있다는 소리인 동시에, 유이와 겐도우가 속한 제레 및 게히른에게 완전히 뜻을 굽히고 가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여기서 잠깐, 이 대사 바로 전에 잠깐의 침묵이 있는데, 화면이 비추는 후유츠키의 시선이 꽤 미묘했다. 중앙에 잡힌 것은 신지도, 유이의 얼굴도 아니고 그녀의 가슴 주변이다. 에반게리온의 연출 기법을 생각해 보면, 이 부분은 후유츠키가 유이를 이성으로 보고 있다는 중요한 증거가 되는 장면이겠다. 다음, 유이의 마지막 대사, 익숙하지 않나?

카오루 "알고 있어요. 그것을 위해 내가 지금 여기 있잖아."

"모든 것은 리린의 흐름 대로."

24화에서, 타브리스가 이 말을 그대로 했다. 유이는 지금 목숨을 걸고실험에 임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은 사실 신지를 위한 것이란다. 그런데 같은 대사를 쳤던 타브리스 또한 목숨을 걸고신지를 구하기 위해 제레를 배신했다. 따라서 우리는 유이의 의도가, 후의 카오루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의지 관철을 위해 제레를 배신하는 것임을 알 수 있겠다. 그리고 제레라는 거대 조직 속에서 배신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사실, 유이의 접촉 실험에는 커다란 의문점이 하나 있다. 어째서 그렇게 빨리 실험을 진행했어야 하나? 당시, 초호기는 여전히 릴리스의 육체에 붙어 있는 상태였다. 사도가 오는 것도 14년은 더 흘러 한다. 유이는 명색이 제레 유력 멤버의 자제였고, 게히른의 수장인 겐도우의 아내였고, 아들은 이제 겨우 3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목숨을 걸고 벌써, 유이는 실험을 속행하려는 걸까? 그렇다. 어차피, 죽게 될 운명이니까.

"……."

유이는 지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 제레는, 유이가 뜻을 달리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것 같다. 그게 아니어도 최소한, 그녀 스스로 곧 들킬 거라고 예상한 것 같다. 제레의 능력 정도면 충분한 일이다. 후유츠키가 그 비밀을 살짝 언급했을 때 유이가 당장 경고를 준 것도 같은 의미였으리라. 이렇게 놓고 보면 유이가 그렇게 코어 실험을 서둘렀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녀에겐 시간이 없었던 거다. 이는 후에 네르프의 진실을 알게 된 카지, 사랑하는 미사토에게 위험을 안겨 줄 것을 걱정스스로 호랑이 굴에 가 목숨을 버렸던 것과 다르지 않다. 유이 역시 본인의 의지를 지키기에 앞서, 사랑하는 가족, 겐도우와 신지의 목숨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해야 했던 셈이다. 후유츠키가 밝힌 대로, 제레에게 사람 한 명 없애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그렇기 때문에 유이는 공식적으로 실험 대상이 되어 희생양 역할을 맡기로 한 것이다. 그 말은 곧, 유이의 접촉 실험은 제레를 포함하여 외부에는 철저히 사고라고 알려야 했다는 소리이다. 그녀 스스로의 의지로 초호기 안에 숨었다는 사실을 들키면, 당장 제레 쪽에서 겐도우를 위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비밀은, 유이후유츠키, 두 사람만 알고 있었다. 심지어 겐도우도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유이의 이런 비밀을 아무도 모르게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후유츠키를 14년이라는 긴 시간 겐도우 옆에 머물러 있게 만든 이유가 되었을 수 있다.

후유츠키 "사람은 살아가려는 의지를 가진 것에 그 존재 의의가 있다."

후유츠키 "…그것이, 스스로 에바에 남은 그녀의 바람이니 말일세."

말한 대로, 겐도우는 유이의 진짜 의도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육체 샐비지 프로젝트를 통해 어떻게든 그녀를 초호기에서 다시 꺼내고 싶어 했다. 물론 유이는 명백히 본인의 의지로 에바에 남아 있었고, 그의 부름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육체 일부는 꺼내 주었다. 어떻게 보면 겐도우가 레이라는 개체를 만들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최대한의 배려였던 셈이다. 과연 유이는 겐도우의 향후 행동 방향까지 계산했던 모양이다. 잔인한 일이어도, 겐도우가 이렇게 유이의 마음을 모른 채 그녀를 절실히 원한다는 사실 자체, 제레에게서 남편과 아들을 지킬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23화에서 후유츠키는 레이를 더러 이렇게 말했다.그녀는 내 절망의 산물인 동시에 겐도우 자네의 희망이기도 하다.” 겐도우의 입장에서 레이라는 존재는, 유이가 다시 그와 만나고 싶어 했다는 믿음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후유츠키는 유이가 절대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귀환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육체 부분만 겐도우에게 넘겼던 의미 역시 잘 알았을 것이다. 유이에게 레이란, 영원히 인간의 형태를 버리겠다는 의지 표현과도 같으므로.

후유츠키 "난 죄 투성이가 되어도, 인간이 살아 있는 세계가 되길 바라네."

유이의 죽음 이후, 후유츠키는 오랜 시간 겐도우의 한 손인 동시에 유이의 유지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그 또한 유이를 사랑하니까. 다시 유이와 만나야 하니까. 그가 바라는 세상은 곧, 유이가 원하던 세상이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떳떳하게 계속 살겠다는 것. 죄라는 게 그 이름을 얼마나 많이 더럽히든, 사람은 살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지옥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라고. 누누이 말한 대로, 에반게리온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는 부분이다.

겐도우 "이 아이는 세컨드 임팩트 이후를 살게 되는 건가? 이 아이는, 그 지옥을…."
유이 "어머, 삶의 의지만 있다면, 어떤 곳이든 천국이 될 수 있다구요.
살아 있기만 하면, 행복의 찬스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약속의 날, 그녀의 모습.

코어 실험 당일이다. TV판에선 화면에 비추지 않았으나, 리뷰 10편에서 언급한 완전판 23화에선 숨은 장면이 등장한다. 다이브 슈트를 입고 있는 유이의 모습. 코어 접촉 실험을 위해 특수 제작한 옷이라고 한다. 등에는 날개 비슷한 것을 달고 있는데 그 용도는 알 수 없다.

후유츠키 "유이, 오늘은 자네 실험이잖아!"
유이 "그래서예요. 제 아이에게 밝은 미래를 보여 주고 싶거든요."

나오코가 말한 대로, 저게 유이의 마지막 말이었다. 우선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녀는 지금 코어 접촉 실험이, 인류의 밝은 미래와 같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는 그녀의 계획이 제레의 릴리스 속죄 계획, 나쁜 말로는 인류 멸망 계획과 그 궤를 전혀 달리 한다는 암시가 된다. 그런데 유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인류의 희망이라 여겼던 걸까? 그녀가 신지에게 보인 것은, 스스로 에반게리온이 되는 과정이었다. , 에반게리온이라는 방주에 타서, 그 안에 담긴 의지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것. 그게 그녀가 말하는 인류의 밝은 내일이었다. 인류의 조상인 릴리스의 육체로 새롭고 완전한 삶을 얻는 것. 에바 초호기라는 명칭은 따라서, 새로운 인류의 모습 그 첫 번째가 되는 것이다. 어째서 그녀는 영원한 삶에 집착하는가? 유이는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세상에 살았던 여성이다. 살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조직의 위협을 받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사람이 함부로 나의 의지를 침범할 수 없는,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후유츠키에게 말한, 인류 멸망이 간단한 세상이 아니라,누구도 나를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세상을 원했던 것 같다.

기획 단계의 겐도우

여기서 잠깐 겐도우 얘기를 하고 가자. 그는 어떤 보완을 원했나? 그는 도통 다른 사람을 믿지 않고, 사랑할 의지도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미움 받는 것에 익숙한 남자, 그런 자신에게 마음을 연 유이라는 여성은, 그에게 있어 단 하나의 천국이었다. 그래서 힘이 들면 언제나 그녀에게로 도망을 쳤던 것이다. 사실 겐도우의 본래 성인 로쿠분기 육분의(바다에서 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관측 도구)라는 뜻으로, 이카리 유이, 단 하나의 닻에 장착한 이후로 영원히 머무르려 하는 그의 마음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다른 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남편의 그런 폐쇄적인 성격을 걱정한 유이는 아마 미래에 다시 그와 만나 직접 마음의 보완을 이루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따라서 유이의 희생은 결국, 겐도우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3년 만에 만난 아들을 보는 아빠의 시선

그러나 겐도우는 아내의 깊은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아들에 대한 처사이다. 그는 정말 신지를 미워하는 걸까? 나는 최소한, 겐도우 역시 처음엔 보통의 아버지와 같이 신지를 사랑했을 거라 믿는다. 당장 신지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 바로 겐도우 아니었던가. 그러나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인 유이가, 자신을 두고 후에 아들이 타게 될 초호기 안에 숨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그는 두렵기 시작했다. 그 두려움은 곧 신지에 대한 애꿎은 미움의 발로가 된다. 사랑하는 아내가 나를 버린 채 신지를 택하는 것은, 아무리 아들이라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그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그녀가 자신을 버릴 수 없는 위치에 서고자, 그녀가 이브가 되겠다면 억지로 아담이 되어서라도 그녀 옆에 서고 싶었던 게다. 그 원대한 꿈을 핑계로, 신지 또한 자신과 같이 마음 구석에 보완의 욕구를 남겨 두길 바랐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은 물론 아내의 사랑도 진심으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 자식에 대한 애정 표현도 그 수준에서 머물렀던 것이다.

다시 코어 실험 현장으로 가자. 유이는 도대체 왜, 신지를 코어 실험 현장에 데리고 온 것일까? 인류의 밝은 미래를 보인다는 넉살 좋은 핑계가 있어도, 그 광경은 신지에게 다만 큰 트라우마를 주었을 뿐이며, 그의 어두운 성격 형성에 큰 몫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성 강한 유이가 그 위험을 몰랐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신지에게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보이려 했던 것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진짜 이유가 있었다는 소리다.

아마 유이는 신지가, 엄마는 초호기 안에 담겨 있단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랐던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나 뿐인 아들에게, 너는 엄마 없는 아이가 아니며, 나는 언제나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메시지를 넌지시, 전하려 했던 것 같다. 유이 본인의 의지가 초호기 안에 남아 있을 거란 사실을, 신지에게 직접 말할 순 없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제레가 알면 안 되었다. 그러니 유이는 신지 스스로, 언젠가 이 안에 담긴 엄마를 찾아 주길 간절히 원했던 게 아닐까 싶다. 결국 이 날의 실험은, 유이에게 있어 아들 신지와의 말 없는 약속이기도 했다. 실제로 유이는 신지가 제3도쿄에 온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엄마의 따스함가르쳐 주려고 했다.

신지 "엄마…?!"

유이가 파일럿이나 더미 없이 초호기를 움직인 경우가 두 번 있었다(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한 번은 엔드 오브 에바에서 베이클라이트를 뚫고 신지와 함께 의식 장소로 향했을 때. 그 땐 신지가 엄마의 존재를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초호기가 움직인 즉시 그게 엄마의 의지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번의 경우인 1화의 사건 때는 상황이 좀 달랐다. 유이는 혼자 힘으로 초호기를 움직여 신지를 구했으나, 그 때의 신지는 그 거대한 로봇 안에 엄마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테다.

그런데 레이를 품에 안고 망설이던 신지가 잠깐 초호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자세히 살피면 에바의 눈에 조용히 불이 켜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엄마가 따뜻한 목소리로 원하는 대로 하렴.’이라 다독이는 느낌이다. 신지가 마음을 돌려 초호기에 타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그 눈빛, 신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당시의 신지도 이미 심층적으로는, 엄마를 지각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유이 "이제 괜찮니?"

신지가 초호기 안에 유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게 된 계기16에서 나왔다. 그가 죽음에 이르기 직전, 신지는 꿈을 꾸는 듯이 초호기 속 엄마와 만날 수 있게 된다. 어린 신지의 모습, 그리고 그 앞에 선 어머니 유이. 신지가 두 손에 사탕 비슷한 것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뭐라고 말하는 장면을 주목하라. 흑백 처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에 있는 구슬이 붉은 이유는 의도적인 강조 연출이겠다. 나는 저 동그란 구슬이, 초호기의 코어, 유이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라 봤다. 마치 신지는 지금, 엄마와 노는 어린 신지의 모습이 되어 봐요 엄마, 내가 드디어 엄마를 찾았어!”라 기쁘게 외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리고 유이의 대답.

"그래…다행이구나…."

BGM Opening of Dream (Piano, Leave it to Version)

신지를 위해, 그녀는 초호기에 남았다. 커다란 재앙이 지구를 휩쓸었고, 지구의 멸망은 또 다시 가까워 오고 있다. 남은 사람들은 살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죽을 위기에 놓여 있었다. 에반게리온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현실의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다. 제레의 경우 사이비 종교라고 부르면 딱 좋을, 속죄 의식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유이는 반대로, 살기 위해 움직였다. 유이는 아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본인이 옳다고 믿는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살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천국이 될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바로 유이의 궁극적인 목적, 진정한 유이 타입의 보완이다.

신지 "하지만 엄마는…엄마는 어떡하실 거예요?"

그리고 유이는, 인류라는 존재를 부끄럽게 여기는 제레에 반하여, 인류가 살았다는 자랑스러운 증거를 남기기 위해, 우주에 영원히 남을 것을 결심했다. 제레의 속죄가 감히 지울 수 없는 영원한 흉터를 새기고 싶어서, 외로움을 각오하고 그녀는 코어 실험에 임했던 게다. 마지막에 신지는 인류의 보완을 거부하고, 에반게리온 안이 아닌, 세상 바깥에서 살 것을 원했다. 확실히 신지는 유이를 꼭 닮아, 따뜻한 마음을 가진 동시에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제법 강단이 있었다. 유이는 그런 아들이 진작 성장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그의 뜻을 존중하기로 한다. 사실 솔직한 욕심으로는, 다른 사람과 함께, 아니 최소한 신지하고만은, 함께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어머니도, 아들의 성숙과 독립을 말릴 수 없는 법이다.

후유츠키 "인간이 신을 모방해 에바를 만든다. 우리의 진정한 목적이 그것인가?"

유이 "네, 사람은 이 별에서만 살 수 있지요. 하지만, 에바는 무한히 살 수 있습니다.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의 마음과 함께."

"설령 50억 년이 지나도, 이 지구도 달도, 태양마저 사라져도 남을 거예요.
단 혼자라도, 살아갈 수 있어요."

"…굉장히 쓸쓸해도, 살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유이는 아들과 작별의 시간을 갖는다. 살고자 하는 의지. 직접 그 상징이 되겠다던, 오래 전 스스로와 했던 숭고한 약속은 꼭 지키고 싶었다. 신지를 정말 사랑하지만, 굉장히 보고 싶을 테지만, 아들은 어느 사이 저렇게 커서는 엄마 품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그러니까, 이제 괜찮은 거다. 정말로.

유이 "이제…괜찮은 거지?"

"안녕히 계세요, 엄마."

[에반게리온] 33. 보완에 이르는 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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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보완에 이르는 길

 

드디어 먼 길을 돌아 다시 이 자리에 섰다. 이후 파트에서는,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다양한 관점에서 살피고 분석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본 리뷰가 진행하고 있는 에반게리온 해석 여행의 종점이 되는 부분이다.

보완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신지, 아스카, 레이 세 사람이 오랜만에 다시 모였다. 에반게리온에서는 기차 장면이 꽤 자주 등장했다. 대개 신지의 내면 세계를 조명하기 위해 활용하는 공간인데, 어째서 하필 기차인 걸까?

아빠가 버린 아들

우선 표면적인 이유로는, 신지가 3살 때 겐도우에게 버려져서 혼자 선생님 댁으로 갈 때 탔던 것이 아마 이 기차였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신지에게 기차라는 공간은, 믿었던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던 날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이는 곧 처음으로 타인에게 배신을 당했던 곳이 된다. , 신지의 타인에 대한 공포가 에반게리온에서 기차가 지닌 이미지인 셈이다.

사도 레리엘과 대면한 공간

이 기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화에서였다. 앞서 설명한 대로 사도 레리엘, 신지의 기억 속에서 어린 그의 모습으로 등장해 그 기차 내부를 배경으로 삼았다. 그 공간이 신지에게 있어선 일종의 트라우마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워낙 신지의 마음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은 탓에, 레이가 신지의 마음을 조명할 때에도 대개 이 공간을 활용하게 되었다.

레이와 대면한 공간

사실 이 기차 공간은 꿈의 세계라고 볼 수도 있으나, 동시에 명백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 가장 중요한 증거가 19화에서 나온다. 3호기 사건으로 기절한 신지는 꿈을 꾸고 있었다. 바깥에서 그의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아스카가 예상한 대로였다. 그 꿈이란 신지가 기차 공간 안에서 레이와 함께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었는데, 당시 2대 레이는 신지의 꿈 상황은 물론 꿈이란 개념 자체를 잘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역시 기차 안의 레이는 3대 레이일 가능성이 크다. 마침 그녀의 질문은 엔드 오브 에바의 기차에서 신지에게 했던 말과 거의 일치하고 있어, 보완을 준비하던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다양한 시점에서 그의 마음을 물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3대 레이는 시간과 공간을 거스를 수 있으며, 신지를 마음으로느낄 수 있다는 식의 연출도 나오는 만큼(초호기에 탄 신지가 2호기를 보고 패닉에 빠져 비명을 질렀을 때, 레이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그가 자신을 부르고 있음을 느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다.

토우지의 꿈 = 신지의 꿈

아무튼 그 기차가 단순한 꿈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는, 19화에서 토우지가 그 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토우지는 마침 히카리를 보고 난 뒤 살짝 잠이 든 상태였는데, 기차 안에서 눈을 뜬 그는 옆 칸에서 신지가 레이에게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다만 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아 대화의 내용은 파악할 수 없었다. 두 사건은 실재하기 때문에 그 기차 공간 또한 다른 차원에서 실존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기차의 칸은 개인의 공간 단위로 보이며, 따라서 신지에게 타인인 토우지는 다른 칸에 앉아 있되, 당시 레이 및 신지와 꽤 가까운 상태였던 덕에 바로 옆 칸에서 그들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스카의 가슴

그런 이유로, 나중에 다룰 엔드 오브 에바의 기차 장면 또한, 보완을 주도하게 된 레이, 결정권을 넘긴 신지의 마음을 알기 위해, 그가 바라는 대로 아스카를 데리고 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스카는 2호기 안에서 죽었으나, 3대 레이는 미사토와 리츠코에게 행한 대로 시간을 거슬러 누구든 보완에 데리고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었다.

, 이 기차 공간을 설명할 때엔 보다 상징적인 이유도 들 수 있다. 본 리뷰에서는 이미 에반게리온이 다양한 방법으로 프로이트의 학설을 차용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 기차는 꽤 중요한 테마를 지니고 있다. 그에게 기차란 폐쇄적이고 불쾌한 공간이며,에로틱한 환상을 주는 비밀스러운 공간인 동시에,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어렸던 자신을 싣고 간 두려운 장소였다. 신지가 기차 공간에서 느끼던 심상과 꼭 같지 않은가? 신지에게 있어서도 기차는 불쾌하고, 두려우며, 에로틱한 환상을 겪는 공간이다. 결국 이 기차라는 내면 공간은, 신지가 세상에 대해 지니는 모든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스카 "이상하네…. 역시 받지 않아. 또 어딘가로 가 버린 걸까?"

"……!"

"뭐야, 어차피 나는 졌다고, 너 같은 것에게…."

붙여 설명하면, 사실 아스카 또한 이 기차 상징과 엮이는 부분이 있다. 우선 살필 장면이, 22화의 초반인데, 아스카가 기차역에 서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아마 카지일 것이다.(그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은 신지와 미사토만 알고 있었다.) 카지가 받지 않자 이상하게 여기며 전화를 끊은 아스카는, 문득 반대편에 신지와 레이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보는 즉시 불쾌해진다. 제르엘에게 완패한 것도 분하고, 신지가 자신을 구하지 않았던 것도 짜증이 나는데, 그는 깨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레이랑 희희덕대고 있다. 자존심이 팍 상한다. 지금 아스카는 두 사람과 반대 방향의 승강장에 서 있으며, 이는 곧 두 사람을 거부하고 혼자만의 고독을 선택한 것이라 설명할 수 있다. 기차는 아스카의 시야를 가려 신지를 보이지 않게 한다.

그런데 그녀가 아라엘에게 정신 공격을 받는 와중에, 기차 관련 상징이 또 나온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철도 위. 기다란 선로만 여럿 늘어져 있을 뿐, 기차는 아주 예전에 다 떠나간 모양이다. 주위 사람들과의 동행을 포기하고 혼자이길 원했던 아스카의 외로움을 잘 표현한 장면이다. 여기서 만약 기차를, 보완으로 향하는 공간이라 해석하면, 이 부분은 아스카가 보완을 거부하여 개인으로 남는 것을 원할 것이란 복선이 된다. 실제로 엔드 오브 에바에서의 기차는 보완의 거점이 되며, 인류 보완 과정 중에는 기차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는 연출이 있다.

엔드 오브 에바의 기차에서, 레이는 아스카를 신지 앞에 세웠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아마 신지가 아스카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아스카를 직접 신지의 내면 공간으로 불러,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생각을 들으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 공간에서 신지는 보완 여부를 정식으로 결정하게 된다. 그 대화를 자세히 살피기에 앞서, 우선 신지와 아스카가 각자 어떤 경로를 거쳐 기차에서 재회하게 됐는지, 잠깐 시간을 앞으로 돌려 확인해 보도록 하자.

신지 "어디야…여긴, 어디로 가야 해…?"

"미사토 씨, 어디로 간 거예요? 전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아스카, 아야나미, 토우지, 켄스케! 리츠코 씨! 카지 씨! 아빠…엄마…."

"…에반게리온 초호기…?!"

25화에서, 신지짙게 깔린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갈 곳을 잃은 채, 주변 사람을 불러 봐도 대답이 없다. 도움을 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누구도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됐는데, 그의 닫힌 마음은 단 한 사람도 담고 있지 않았다. 사실 이 장면의 안개는, 엔드 오브 에바의 첫 장면인, 신지의 두 번째 자살 시도와 큰 연계를 맺고 있다. 절망 끝에 물에 빠진 그의 암담한 시선을 상징하는 공간이란 것이다. 모두에 대한 마음을 닫고, 살 길을 잃어버린 신지의 상황이다. 그런데 그런 그의 앞에, 초호기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엄마다. 과연 유이는 아들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TV판의 묘사

극장판의 묘사

그 시각, 2호기는 아스카를 품은 채 호수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딸은 자살을 시도했다. 그럼에도 제레의 폭격 속에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딸이 가여웠던 것일까. 쿄코는 아스카에게 뭔가를 계속해서 말하려고 한다. 처음에는 잘 들리지 않았으나, 아니 정확히는 언제나 그렇듯 미친 쿄코의 같이 죽자는 말만 들렸으나, 서서히 진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이내 아스카는 2호기 속의 쿄코와 마주하게 된다.

"엄마…! 거기 있었구나!"

엄마를 만난 아스카는 그녀와 합일을 이룬다. 아스카가 자신의 일렉트라 콤플렉스를 모성과의 완전한 합일로 극복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아스카는 카지에 대한 미련도 일부 떨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에 대한 육체적 사랑은 일렉트라 콤플렉스의 그릇된 발현이기도 했으니까.

아무튼 쿄코와 하나가 된 아스카는 전에 없던 컨디션으로 에바 양산기를 상대할 수 있었다. 19화에서 400% 싱크로를 등극한 신지처럼, 지금의 아스카도, 이상할 만큼 희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양산기를 파괴하며 가학 욕구를 해소하려는 느낌이다. 그렇다. 높은 싱크로의 상징, 데스트루도의 발현이다. 싱크로 수치가 높다는 것은 코어 내부 영혼에 대한 파일럿의 AT 필드가 열린 상태라는 의미이며, 이는 곧 안티 AT 필드에 상응하는, 데스트루도 에너지가 강력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소리이다. 아스카는 가차 없이 양산기를 파괴한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양산기는 복제 롱기누스의 창을 가지고 있었고, 엄마와 함께 만든 강력한 AT 필드도 속수무책으로 뚫리고 만다. 전원이 끊겼는데도 워낙 싱크로가 높았던 탓에 2호기는 폭주 상태나 다름없었다. 눈을 창에 찔린 2호기의 고통은 아스카에게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었다. 피를 철철 흘리며 발버둥을 쳐 보지만, 상대는 S2 기관을 탑재한 양산기 9였다. 아스카는 그들의 부활을 보고만 있어야 했고, 양산기는 음흉하게 웃으며 복수를 시작한다.

22화의 아라엘이 아스카에게 행한 것이 정신적 강간이었다면, 지금의 양산기육체적 강간으로 그 정도를 더하고 있다. 의도적인 연출이 맞는 것이, 이미 22화의 심리 공격 중에도 Menarche(초경), Membrane(), Popped(파열) 등과 같은 굉장히 적나라한 텔롭을 사용한 바 있다. 또 한 가지, 이 처참한 장면은 아스카의 소류로서의 숙명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그녀의 성인 소류는 일본 해군의 모함 이름으로 실제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군의 군함 여러 척에 의해 격침된 배였다고 한다.

아스카 "…죽여 버리겠어…죽여 버리겠어…."

과거 쿄코가 아스카에게 함께 죽자며 목을 매달던 것과 미묘한 평행을 이루며, 쿄코는 다시 한 번 딸과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아스카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도권을 쥐고 싶어 하며, 누구보다도 위에 서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지금, 모든 상황이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밖이다. 죽음을 원할 때엔 억지로 살려 호수 속에 가둬 놓더니, 이젠 그 반대다. 애초에 그녀에겐 삶과 죽음에 대한 자유가 없었다. 죽여 버리겠다는 절규와 함께, 마지막으로 그녀의 손이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가린다. 언제나 당당히 세상을 비추던, 언젠가 그녀 자신의 상징이었던.

마야 "……!"

"신지 군! 아스카가! 아스카가!"

신지 "…그래 봤자 에바에 탈 수도 없어…. 어떻게 할 수도 없어…."

마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신지라고 어쩔 수 있는 건 아니다. 초호기는 베이클라이트에 묶여 있잖아. 사실 더 솔직히는, 그 스스로 에바에 탈 생각이 없었다. 미사토가 타라고 했어도, 그 한 마디에 사람의 의지가 변할 수는 없다.

"…엄마…?!"

신지 "…결국 이걸 타야 하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아버지나 모두의 바람 대로…?"

"엄마, 뭔가 말해 봐요, 대답해 봐요!"

그런데 초호기가 직접 베이클라이트를 뚫고 신지에게 오는 게 아닌가! 신지는 그녀에게 물었다. 결국 난 에바에 타야만 하는 거냐. 좋아하는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거냐. 유이는 대답 없이 그를 태워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대답은 거기에 있었다. 신지의 눈에 보인 것은.

신지 "으아아아악-!"

초호기 구속구 해제

레이 "이카리 군이, 부르고 있어!"

롱기누스의 창도 소환

신지는 충격에 정신을 놓고 만다. 그의 마음을 반영한 초호기는 각성하여 구속구의 봉인을 푼다. 도그마에 있던 레이도 신지의 아픔을 느낀다. 서둘러 아담을 몸에 품고, 릴리스와 융합하여 신지를 만나러 간다. 초호기의 부름에 응답하여 달에 있던 롱기누스의 창도 그를 만나러 왔다. 초호기는 릴리스의 육체이면서도 코어에는 S2 기관을 탑재하고 있었다. 그 덕에 아담 세트의 롱기누스의 창을 획득할 수 있던 것이다.

생명의 나무

신이 되는 초호기와 신지

초호기는 창을 흡수하여 태초의 모습으로 환원된다. 신에 가까운 형태인 생명의 나무, 그 나무를 두 손에 감싸 안은 거대한 레이가 보인다. 정확히는 아담과 릴리스의 영혼을 담은 그릇이다. 거인이 나무와 융합하게 되면, 말 그대로 새로운 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양산기는 초호기를 십자가에 묶고, 두 손에는 창으로 성흔을 새겼다. 그 의식으로 초호기는 의 상징이 됐다. 그리고 그 안의 파일럿, 신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에반게리온 초호기 파일럿의, 일그러진 자아로써 사람들의 보완을!"

"세 번째 응보의 때가, 지금!"

제레가 바라는 것은 릴리스의 오명을 씻기 위한 인류 소멸이고, 따라서 초호기 파일럿의 일그러진 자아에 자신들의 소망을 의탁하려 한다. 나중에 그들은 인류가 LCL로 환원되는 것을 보며 계획이 성공했다고 믿었겠지만, 실은 아니었다. 그들은 진짜 변수가 따로 있음을 몰랐다. 초호기 안에는 오래 전 그들을 배신한 유이가 있었고, 초호기 밖에는 역시 그들을 배신한 카오루, 겐도우를 배신한 레이가 있었다. 모두가 인간 신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살고자 하는 사람의 순수한 의지, 동경하고 있었다.

유이 "지금의 레이는 네가 바라는 대로야."

레이 "무엇을 원하니?"

거대 레이의 기괴한 모습에 패닉에 빠진 신지를 보며, 유이가 조용히 가르쳐 준다.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레이는, 너 자신이 바라는 그 자체라고. 이어 레이가 신지에게 묻는다. 무엇을 원하냐고. 그 물음에, 신지는 흐릿한 이미지를 하나 구현해 보인다. 바로 여성의 가슴이다.

이게 원본이다.

머리 모양을 보아 아스카일 가능성이 크며, 따라서 이는 신지가 아스카에게 성적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부분이다. 신지의 자위 장면과도 연계하여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신지의 자아는 끝없이 영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신지의 얼굴이 물결에 흔들려 점점 더 희미해져 간다. 영혼의 힘이 더는 LCL로 신지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그의 몸이 초호기 내부 LCL에 녹고 있는 것이다.

TV판의 평행 연출

신지 "뭐지…이 감각은? 전에도 한 번 느꼈던 것 같은데…내 몸이 사라지는 기분…기분 좋아…."

놀이터 시퀀스

무대 조명

TV판의 평행 연출

이후 약 240 동안 나오는 것이 놀이터 장면이다. 이 시퀀스는 굉장히 많은 상징적 연출과 은유를 포함하고 있어 비중 있게 다루려 한다. 우선 눈길이 가는 것은, 이 공간이 마치 연극 무대와도 같다는 점이다. 심지어 무대 조명이 따로 있다.

TV판에 나온 영화 세트와 조명 등

데스 앤 리버스의 합주 장면을 위한 무대 세트

그런데 이 연극 영화 세트, 생각해 보니까 TV25, 26에서도 나온 적 있었다. 데스 앤 리버스에서 신지가 아스카, 레이, 카오루와 함께 합주 연습을 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 이곳은 신지의 내면 세계인 동시에 인류 보완의 무대가 된다. 무대 조명을 보면 꼭 한 쌍의 눈이 신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실제로 신지가 주목의 대상이자 무대 너머에서 모든 사람들이 관객이 되어 그를 볼 수 있다는 표현이 된다. 더는 숨길 수 없는 신지의 마음이다. 그러니까 이 놀이터는, 인류 보완이라는 감독이 연출하고, 신지가 주연을 맡은 진심이라는 이름의 영화이다. 모두가 관람 가능하다.

어디 함께 보자. 해가 질 무렵의 사람 없는 놀이터. 그네는 삐걱거리는 소릴 내며 흔들리고 있고, 파이프 오르간 연주와 함께 노래 소리가 들린다. 일본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むすんでひらいて)라는 곡으로, 신지의 버릇 중 하나가 주먹 쥐고 펴는 것이니 과연 의미 있는 선곡이겠다. 주변을 보자. 좌우 대칭인 언덕이 덩그러니 있는데, 여성의 가슴을 꼭 닮아 있는 것, 방금 전 신지가 생각한 가슴 그림을 반영한 풍경인 것 같다.

신지 "…그래, 첼로를 처음 시작했던 때랑 같아.

여기에 오면,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

신지의 나레이션이 들린다. 그 의미는 잠시 후 파악하는 걸로 하고, 어린 신지가 가만히 서서 보고 있는 모래 피라미드를 좀 보자. 어째 상태가 많이 안 좋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멀뚱히 서 있는 신지에게,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신지 군도 같이 하자! 함께 만들자, 성!"

신지 "응!"

또래 아이의 말에 신지는 금새 표정이 환해진다. 기다렸다는 듯 그 옆으로 가서 두 아이와 함께 피라미드 성을 쌓기 시작한다. 두 명 모두 여자 아이인데, 이상하게도, 사람이 아니라 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지와 성을 쌓는다. 같이 노는 게 아니라 결국 그냥 혼자 노는 꼴이다.

무대 바깥에 앉아 있는 여성

신지만 남겨 두고 다들 간다. 신지는 갈 수 없다. 무대 밖이다.

어떻든 웃으면서 한참 놀고 있는데, 무대 뒤에 한 여성이 앉아 있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상황을 보니 두 아이의 엄마 되는 사람인 모양이다. 두 아이는 여성을 따라 무대 위에서 사라진다. 신지를 기다리는 엄마는 없다. 그래서 다시 혼자 남았다.

네르프 피라미드

뒤의 조명이 마치 신지를 보는 두 눈 같다.

, 여기서 일단 스톱. 이 부분을 본격적으로 해석해 보겠다. 우선, 피라미드는 쉽다. 네르프 본부에 대한 상징이란 걸 다들 알고 있을 테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할 부분은, 신지가 처음 왔을 때, 피라미드가 꽤 무너져 있었으며, 신지는 그 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1생각해 보자. 처음 신지가 네르프에 왔을 때, 본부는 사키엘 때문에 위험에 처한 상황이었다. 또 당시엔 레이나 아스카도 없었기 때문에, 신지는 혼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신지는 가만히 서 있는가? , 이 놀이터 장면이 나오기 시작할 때, 신지가 뭐라고 했더라?그래, 첼로를 시작했던 때와 같아. 여기에 오면,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

신지 "지금의 내겐 에바 외엔 없어."

-하지만 에바에만 의지하면 에바 그 자체가 네 전부가 되는 거야. 진짜 네 자신은 사라지는 거야.

"괜찮아! 원래 내겐 아무 것도 없었어. 배우고 있던 첼로도, 아무 것도 아니었다구."

신지 "선생님 충고를 듣고 시작했어. 금방 그만 뒀어야 했는데…."

아스카 "그럼, 왜 계속한 건데?"

"…아무도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신지는 첼로 연습 에바에 타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한다. 하긴 그렇다. 첼로나 에바 파일럿이나, 둘 다 다른 사람이 시켜서 시작했고, 아무도 그만하라 하지 않아서 계속하고 있었다. 본인의 의지는 무관하다. 놀이터에서, 신지가 피라미드를 멀뚱히 보고만 있는 것은 그런 그의 성격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피라미드 상태가 어떻든 주변 사람이 그에게 아무 것도 시키지 않으면, 그는 정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 아이가 그를 부른다. 신지에게 아마 그 대상은 레이가 아닐까 싶다. 세 아이가 함께 피라미드를 쌓는다. 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실은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세 사람이다. 세 명의 파일럿은 그런 식으로 에바를 통해 네르프를 지키고 있었다.

미사토?!

"아, 엄마다! 가야 돼!"
"그럼 안녕!"
"엄마…! 아하하!"

신지 "……."

다음으로 무대 밖에 서 있는 여성을 보자. 누군지 잘 모를 텐데, 놀랍게도 대본은 이 여성을 미사토라고 구체적으로 지칭하고 있다. 과연, 알고 다시 보니 확실히 미사토처럼 보인다. 그런데 지금 미사토는 무대 바깥에 앉아 있다. 신지에게 있어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을 그저 방관하고만 있는 의미 없는 동거인일 뿐이었다. 그리고 미사토는 끝내 신지의 어머니 역할을 맡을 수 없었다. 두 아이와 함께 미사토가 무대 밖으로 나가도, 신지는 그녀를 따라갈 수 없었다. 혼자 놀이터에 남아야 했다. 그의 시각에서, 미사토는 절대 어머니가 될 수 없었으니까.

신지야, 어디 서 있니…?

다음 장면을 계속 보자. 두 아이는 미사토와 함께 떠났고, 혼자 남은 신지는 웬 철골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까마귀도 기분 나쁘게 운다. 물론 신지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죽을 용기가 없었으니까.

혼자 성을 짓는 신지

결국 그는 아무도 없는 놀이터로 돌아와, 피라미드 앞에 앉는다. 신지는 울기 시작한다. 그러나 울어도 위로해 줄 사람 하나 없음을 깨닫고 눈물을 멈춘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억지로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한다.

그리고 완성. 피라미드는 훌륭했으나, 그것을 보고 감탄할 사람, 신지에게 칭찬해 줄 사람도 없었다. 에반게리온을 타서 열심히 사도를 무찌르면 뭐 하겠는가, 당연한 일일 뿐이다. 갑자기 신지는 화가 난다. 도저히 분노를 삭일 수가 없다.

기껏 완성한 피라미드를 발로 차는 신지

는 지고, 그네도 멈춘다.

지금의 세상

신지는 공을 들여 쌓은 피라미드를 발로 차 부서뜨린다. 그러는 동안 해는 지고, 뒤에서 계속 흔들리고 있던 그네는 멈추기 직전이다. 잠깐, 여기서 그네가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우선은 신지의 심리 상태에 대한 묘사이다. 신지가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땐 아주 빨리 흔들렸고, 아이들이 떠나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땐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그리고 또 하나, 대개 그네의 진자 운동은 시간의 흐름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점에서 신지 뒤의 그네가 완전히 멈추어 다시 움직이지 않게 된다.’는 것은 곧, 그의 마음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얻었다는 소리가 된다. 절망한 신지가 마음으로 죽어 버린, 엔드 오브 에바의 자살 시도 장면과 평행을 이루는 부분이다.

그리고 보완?

해가 완전히 지고,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신지는 무너진 성 주변에 있는 흙을 다시 만지작거리기 시작한다. 무슨 의미일까? 아마 그는 뭔가 새로운 것을 지으려는 모양인데, 그것이 뭔지는 묘사되지 않은 채 놀이터 시퀀스가 끝을 맺는다. 아마 이 부분은, 보완의 시작을 고민하는 신지의 마음을 조명한 것일 테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새로 지을 수 있는 상태이니까.

아스카 "아아…증말…! 널 보고 있자니 짜증이 난다고!"

신지의 영화가 끝나자마자, 아스카의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귀를 찌른다.

신지 "자길 보는 것 같아서…?"

내면 여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진짜 타인을 만났다. 아스카. 레이가 원하는 것을 물었을 때, 신지가 떠올린 것이 그녀의 가슴이었고, 과연 아스카는 지금 옷을 다 벗은 채 그의 몸 위에 엎드려 있는 상태이다.(이 자세를 기억해 두자.) 아마 레이에 의해 억지로 끌려온 게 아닐까 싶다. 사실 아스카는 양산기에게 엄청난 수모를 당한 후 이제 막 깨어난 참일 테다. 자신을 구하려는 의지도 없던 신지에게, 지금 그녀가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겠는가. 서로의 마음을 보이고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인데, 두 사람 사이의 골은 이미 너무 넓고 깊었다.

미사토 "응…? 하자…? 아직 시간 있어…. 뻐근해서 그래. 그러니까…부탁해, 응…?"

미사토 "대개는 말야, 자기가 여기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야. 자기를 원한다는 걸 느끼고, 기쁜 거야."

신지미사토의 가슴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미사토는 과거의 모습으로 카지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역시 미사토의 입장에선 그녀가 주연이 되는, 모두가 관람 가능한 영화인 셈이다. 미사토는 이게 사실 꽤 아픔이 따르는 일이라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신지는 눈을 찌푸린다. 저런 식으로 밖에, 타인이 나를 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아스카 "야, 우리 키스해 볼래?"

미사토 "어린 애가 하는 거 아니다."

"그럼, 간다?"

아스카신지와 키스를 하던 순간으로 간다. 처음엔 미사토가 마음에 걸렸으나, 어른인 척만 하는 그런 여자,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그 날의 키스는 최악이었다. 아니, 그녀의 시각에서, 신지는 키스를 한 적이 없었다. 그냥 아스카 앞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당시 신지가 숨이 막혀 괴로워하는 사이 아스카의 진짜 마음, 이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나온다.

"……."

아스카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내 곁에 오지 마!"

신지 "…알고 있어…."

아스카 "너 모르고 있어, 이 멍청아!"

"네가 나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도와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아스카 "그거야 말로 오만한 생각이야! 이해할 리 없어!"

신지 "이해할 수 없지…왜냐 하면, 아스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잖아!"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얘기해 주려고도 안 하는데 알아 달라니, 무리야!"

자존심이 상한 아스카신지가 자신의 마음을 거부한 데 대해 화를 내며, 너 따위가 감히 나를 이해할 수 있었겠냐고 괜히 발로 찬다. 그런 그녀에게, 신지 쪽에서도 할 말은 있었다. 나도 너를 이해하려 했지만, 도통 말을 제대로 해 주질 않으니, 내가 어떻게 알겠느냔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어긋나는 두 마음이다. 지금은 보완이 아니라 다만 서로의 마음을 꺼내 보이는 과정일 뿐이고, 따라서 타인을 접한 신지의 마음엔 생채기만 더한다.

레이 "이카리는, 이해해 보려고 했어?"

신지 "이해해 보려고 했지."

아스카 "바-보!"

"알고 있어…네가 나한테 그 짓을 한 거."

"언제나처럼 해 보시지 그래? 여기서 내가 봐 줄 테니까…."

아스카 "네가 완전히 내 것이 아니라면, 나, 아무 것도 필요 없어."

레이는 갈등하는 두 사람기차 안으로 불러 모았다. 보완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신지와 아스카는 이미 서로의 마음을 다 보고 온 상태이다. 신지가 자신의 몸을 보며 뻔뻔하게 자위한 사실도 아스카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신지가 원하는 게 아스카 하나가 아니라, 그저 자신을 위로하고 사랑해 줄 아무나라 생각한 그녀는 신지를 허락할 수 없었다.

신지 "그렇다면 넌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 줘."

타인의 목소리 "친절하게 대해 주고 있잖아?"

신지 "거짓말!"

도저히 신지는 타인을 믿을 수가 없다. 그가 원한 건 다만, 그를 배신하지 않는 사랑인데, 애매하지 않은 분명한 표현인데, 그런 그에게 아스카는 조금도 타협해 주지 않는,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진 진정한 타인이었다. 혹시나 타인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여기에 왔건만, 겪으면 겪을수록 두려움만 커진다. 기차 오는 소리가 들린다. 신지는 이제 정말로, 보완을 부르기 직전이다. 타인의 공포가 그의 마음 안에서 온통 수런거린다. 그런 그를 레이와 아스카, 그리고 어느 사이 등장한 미사토가 가만히 보고 있다.

신지는 정말 마지막으로, 자신의 자아가 미련을 남긴 곳으로 향한다. 3도쿄에 와서 타인에 대한 희망을 조금이나마 믿게 되었던, 미사토의 집이다.

옷을 보니, 두 사람이 키스를 했던 당시인 것 같다. 사실 이 장면에서의 아스카는, 단편적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신지는 지금 본인의 마음속으로 도망을 친 상태였고, TV판 25화에서 잠깐 나온 대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아스카 신지 안에 있는 아스카이기도 하다.

신지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너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어떻든 신지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미련이 남은 타인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자세를 많이 굽혔다. 그가 타인에게 바랐던 태도로 아스카에게 접근해 본다. 그녀에게 솔직히 말했다. 뭔가 도움이 되고 싶고, 항상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아스카가 아니면 나, 안 된단 말이야!

아스카 "그럼, 아무 것도 하지 마…. 내 곁에 오지 마…."

"…넌 그냥 누구라도 좋은 거잖아!"

"가엾구나…."

그러나 아스카는 기어코 신지를 뿌리친다. 아니 더 정확히는, 신지의 마음에 존재하는 타인은 끝내 신지 자신을 거절한다.

신지 "도와 줘…응? 그래, 누구든…누구든 날 좀 도와 줘…."

"…부탁이니까…제발, 도와 줘…."

"…나를 혼자 두지 말아 줘!"

"…날 버리지 말아 줘!"


"…날 죽이지 말아 줘!"

신지 "날 혼자 두지 말아 줘."

미사토 "날 버리지 말아 줘."

아스카 "날 죽이지 말아 줘."

"-싫어."

실제로 이 장면은 신지와 아스카의 대화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라는 존재 타인이라는 존재 일반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으로 보는 것이 좋다. 당장 25화에서, 레이와 함께 기차에 탄 세 사람, 신지, 아스카, 미사토는 지금 신지가 한 말을 그대로 하고 있었고, 이는 신지의 모습이 세상 모든 나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의도적인 대사 구성이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나요? 신지는 그 답을 찾고 싶어 기차 여행을 떠났고, 이제 그 결론을 내렸다. 아니, 절대로,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랬구나. 이 세상은 어차피 나 혼자였어. 누구도 나를 구할 수 없어.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였어. 그렇지?

BGM Komm, Susser Tod (Single Version)

사실 미리 말하면, 방금 신지의 판단에는 안타까운 오류가 하나 있었다. 지금 그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해서, 그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신지 신지이기 때문에, 아스카의 진심을 본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게 맞다. 그러니 지금 그의 부탁을 거부한 아스카는, 다만 그가 판단한 아스카일 뿐이다. 신지가 스스로 타인을 믿지 못하는 탓에, 그의 마음에 존재하는 타인도 철저히 그를 배척하고 있다. 그걸 모르는 신지에게, 타인은 단지 공포이며, 고통일 뿐이다. 그럴 바에야, 모두 다 죽어 버리는 게 나아. 아니, 그랬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다들, 죽어 버려.

신지 "아무도 날 몰라 주는 거야."
레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타인도 자신과 같다고 혼자 믿어 버리고 있었구나."
"배신한 거야, 내 기분을 배신한 거야!"
"처음부터 너 혼자서 멋대로 믿은 것에 지나지 않아."


"다들 날 귀찮게 여겨. 그러니까 전부 다 죽어 버려."
"하지만, 그럼 그 손은 뭘 위해 있는 거야?"
"내가 있으나 없으나 아무 것도 변할 건 없어. 그러니까, 전부 다 죽어 버려."


"그럼, 사람의 마음은 뭘 위해 있는 거야?"

"없는 쪽이 나은 거지. 그러니까 나도 죽어야 해."
"그럼, 넌 왜 여기에 있어?"

"…여기 있어도…괜찮아?"

"으아아아아아악!"

I know, I know I've let you down
알아요, 내가 당신을 실망시켰다는 걸


I've been a fool to myself
난 참 바보였어요


I thought that I could live for no one else
누구도 필요 없이 혼자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But now through all the hurt and pain
이제 그 모든 고통과 아픔으로


It's time for me to respect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The ones you love mean more than anything
그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단 걸


So with sadness in my heart
정말 슬픈 일이지만 나는 알아요


Feel the best thing I could do is end it all and leave forever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모든 것을 끝내고 영원히 떠나는 것


What's done is done it feels so bad
여태 있었던 모든 일들에 참 유감이에요


What once was happy now is sad
한 때의 행복이 이제는 모두 슬픔이 됐죠


I'll never love again my world is ending
나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내 세상이, 끝나고 있어

I wish that I could turn back time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참 좋겠죠


Cause now the guilt is all mine
이게 전부 다 내 잘못이니까


Can't live without the trust from those you love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는데


I know we can't forget the past
알아요,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예요


You can't forget love and pride
그 사랑도, 그 기개도 잊을 수 없겠죠


Because of that, it's killing me inside…
그래서 내가 이렇게 죽어가고 있잖아요…

-그리고 인류의 보완이 시작된다.

[에반게리온] 34. 끝나는 세계 : Take care of yourself/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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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끝나는 세계 : Take care of yourself

 

보완의 시작과 함께, 눈에 띄는 그림이 몇 장 나온다. 10장으로, 어린 아이가 그린 것 같은 크레파스 그림이 5, 섬세한 펜 터치로 그린 현실적인 그림이 또 5장이다. 먼저 나온 크레파스 그림은, 22화에서 아스카의 내면을 다룰 때 나왔던 것과 같다. 분노한 사람의 얼굴, 살인 장면, 피를 튀기는 사람 등, 얼핏 봐도 기분 나쁜 그림들이다. 정신적 질환을 앓는 아이가 그린 것 같기도 하며, 리뷰 20편에서 설명한 대로 데스트루도의 발현을 상징하기 위한 연출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나머지 5장은 조금 다른 느낌인데, 나온 순서대로 양동이에 담긴 물고기 두 마리, 내장이 튀어 나온 개의 모습, 파리 떼와 함께 병에 담긴 목 잘린 생선, 상처를 핥는 고양이 모습이다. 크레파스 그림과 인상은 좀 달라도 역시 기분이 좀 나쁘고, 전체적으로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상기시키는 작품들이다. 기차 신호등 그림이 조금 별개의 이미지로 보이나, 앞서 언급한 대로 기차는 곧 보완의 상징인 만큼 역시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10장의 스케치는 타인에 대한 분노와 죽음에 대한 공포 등 보완의 욕구를 상징하며, 이와 함께 안티 AT 필드, 데스트루도 형이하화의 결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아주 잠깐 나온다.

그 시각, 지구 상공에서는 양산기의 대열이 변하고 있었다. 생명의 나무를 중앙에 둔 채, 검은 달과 함께 상승하며 트라이퀘트라를 형성하고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가지 위격을 취하는 신에 대한 상징이다. 초호기를 그 신의 자리에 세우며 의식이 절정에 이르는 부분이다.

거대 레이의 날개

후유츠키 "거프의 방이 열린다. 세계의 시작과 종국의 문이, 마침내 열리는 것인가!"

거대 레이의 등에는 12개의 날개가 돋아 나온다. 신에 가까운 존재의 각성을 의미하는 이 열 두 갈래 날개는 전설 속 사탄의 날개 숫자와 같아 죄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또 후유츠키는 거대 레이의 날개를 보며 거프의 방이 열린다.’고 말했기 때문에, 날개를 거프의 방과의 연계 장치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과거 카츠라기 조사대가 남극을 탐사할 때 아담에게서 날개가 나왔던 것도 세컨드 임팩트, 거프의 방이 열리는 전조였음을 생각하면 꽤 일리가 있다. 실제로 거프의 방이 다시 닫힐 땐 거대 레이의 날개도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거프의 방?!

그런데 잠깐, 거프의 방이 대체 뭔가? 작품 전체에 걸쳐 이 용어가 등장한 것은 세 번뿐이다. 위에 언급한 아담 각성 당시, 21화의 영상 자료 멘트를 통해 한 번. 23화에서 리츠코의 말 거프의 방은 닫혀 있었어.”에서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이 방금 후유츠키의 대사에서 나온 것이다. 일단 리츠코의 대사는 논외로 둬야 할 것이, 그녀는 거프의 방이란 개념을 더미 안에는 진짜 영혼을 담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두 번의 경우에선, 실질적인 의미로 거프의 방이란 표현을 쓰고 있으며, 그 뜻을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영혼이 본래 있던 곳, 후유츠키의 말을 빌려 세계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곳이다. 영혼에 대한 개념인 만큼, 거프의 방은 디라크의 바다와 같이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3차원 세계에서 그 물리적 형태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후유츠키의 말 직후 릴리스의 두 손에 구멍이 뚫리며, 그 안으로 들어간 영혼들이 코어와 닮은 구체로 향하는 장면이 있어, 붉은 구체가 거프의 방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거대 레이가 보완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 붉은 빛으로 묘사되는 사람들의 영혼을 우선 검은 달주변에 모은 후, 다시 그것을 몸 안으로 넣는 식인데, 이렇게 굳이 검은 달에서 한 번 거르는 이유, 일종의 영혼 정화 작업을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인류의 근원이 되는 곳이니, 인간의 기억과 자아 경계의 소각을 담당하는 부분이기도 한 셈이다.

그로테스크의 절정

그와 함께, 양산기는 복제 롱기누스의 창으로 각자의 코어를 뚫는다. 지금 양산기는 AT 필드 공명을 통해 거대 레이와 일체화된 상태이다. 거대 레이의 의지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양산기의 코어에도 그 정체가 불명일 뿐 영혼은 있으며, 따라서 그 영혼도 보완 의식에 참여할 수 있게끔, 영혼 방출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작품은 영혼의 해방이라는 특이 감각을, 고통이 아닌 쾌락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흡사 오르가슴을 느끼는 양산기와 함께, 지구의 전 인류는 고통의 비명 대신 엑스터시의 환희로 보완을 장식한다.

코어에 주목!

영혼이 나가는 순간

영혼이 육체 밖으로 빠져 나가는 순간을, 에반게리온은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 코어의 반짝임이다. 양산기가 코어에 창을 찌르는 순간을 유심히 보면, 코어가 붉게 한 번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순간이 바로 영혼을 방출하는 때이다. 20화에서, 초호기에 흡수되었던 신지가 에바 밖으로 나왔을 때에도, 이와 같이 코어가 반짝이는 연출이 있었다. 둘째, 물속의 공기 방울이다. 정확히는 화면을 가득 메운 액체 속에서 기체 입자가 수면 위로 빠져 나가는 식의 연출인데, 양산기가 코어를 찌를 때 한 번, 신지가 유이와 작별하여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에 또 한 번 나왔다. 셋째, 십자가 상징이다. 지구의 모든 인류는 거대한 녹색 십자가를 쏘아 올리며 영혼을 방출한다. 단순히 영혼의 방사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로 봐도 좋고, 기독교 상징이 말하는 대로 신과 인간 사이를 잇는 다리 개념으로 이해해도 된다.

십자가 상징

다음으로, 에반게리온 주요 인물들의 LCL화 과정은 개별적으로 묘사되는 만큼 여기서도 따로 다루려고 한다.

우선 가장 먼저 나온 휴가. 휴가 앞에 선 레이는 미사토의 모습이 되어 그를 죽음으로 유혹한다. 알다시피 마야나 후유츠키 또한, 각자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긴 채 LCL이 되었던 만큼, 사랑하는 대상의 환영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영혼 방출을 위한 하나의 통과 의례로 보인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인류의 어머니 릴리스의 마지막 배려일까? 그렇게도 볼 수 있으나 나는 보다 실질적인 이유를 대고 싶다. 아마 이 부분은, 데스트루도에 감응하는 과정 중 하나,리비도의 방출을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극도의 성적 쾌락 등을 느끼며 육체에 잔류하는 AT 필드 상응 에너지, 리비도를 방출한 뒤 LCL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양산기가 코어를 뚫을 때 유사한 반응을 보인 것도 같은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다음 차례, 아오바가 좀 애매하다. 그의 경우, 다른 사람과는 달리 레이 그 자체를 목격하며, 쾌락이 아닌 두려움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에 대해, 우선은 아오바가 생전에 성적 관심을 느낀 대상이 없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고 보면 나머지 2명의 오퍼레이터가 각각 이성애동성애라는, 사랑의 두 형태를 대표하고 있으니, 3의 인물인 아오바로 무성애(Asexuality)와 같은 또 다른 사랑을 표현하려 했을 수 있겠다. 그게 아니어도 표면적인 선에서, 아오바의 케이스를 특별하게 연출한 이유는, 제작자 입장에서 죽음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여러 반응고루 담고 싶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오바는 사랑의 유무를 떠나 삶에 대한 미련이 있었고, 그래서 죽음 앞에서 솔직하게, 두려움을 표현할 수 있었던 거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드 임팩트라는 것은 개인의 미약한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강조할 수 있었다.

"시작과 끝은 같은 곳에 있다. 이것으로 됐다."

제레의 킬 또한 아오바와 같이 환영 없는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 경우 아오바와는 또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킬은 삶에 대한 일말의 미련, 죽음에 대한 공포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덤덤히,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만족하고 있었다.

마야 "AT 필드가, 모두의 AT 필드가…사라져 가고 있어…이게 대답인 거야…? 내가 구하고 있던…?"

마야 "……?!"

"선배님…!"
리츠코 "…마야."

노트북 주목

마야 "선배…선배…선배…!"

마야의 케이스는 또 다른 각도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는데, 그녀가 리츠코의 환영과 만나는 순간 노트북이 바닥 한 구석으로 밀려 나가는 부분 말이다. 영상만으론 제대로 파악할 수 없으나, 스토리 보드에는 마야가 직접 발로 찬다는 식으로 나와 있다. 마야가 네르프에 존재하는 이유가 그 노트북 안에 모두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서드 임팩트 앞에서 두려움에 떨던 그녀가 사랑하는 리츠코에게 안긴 즉시 스스로 노트북을 차버리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결국 마야가 원하던 것, 또 구하려던 대답이 그저 한 사람의 진심이며 사랑이었다는 완곡한 표현이 된다. 그녀의 환상이 노트북에 적어 놓은 ‘I need you.’라는 말, 지금은 마야의 개인적인 갈망에 불과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훨씬 더 큰 울림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후유츠키 "이카리…자네도 유이를 만났는가…!"

후유츠키는 또 어떤가. 그 역시 겐도우와 함께, 유이와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마음 깊은 곳에 감춰 두고 있었다. 이브가 된 유이와 같은 위치에 설 수 없음은 잘 알고 있으나, 애초에 그것은 유이가 살아생전에도 다를 바 없었다. 겐도우가 있는 한, 그의 사랑은 혼자만의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최후 후유츠키에게 나타난 유이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와도 같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유이가 날개 달린 다이브 슈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일까? 생각해 보면, 과거 겐도우가 그에게 무심히 건넨 결혼 카드 위에도, 날개를 단 푸른 머리의 천사 그림이 있었다. 그에게 유이란, 아주 긴 시간 동안 숨기고 있었던, 남은 미련이었다.

, 문제는 다음이다. 이카리 겐도우. 그는 대체 어떻게 되었는가?

겐도우 "간신히 만났군…."

"…유이."

바라던 대로 유이는 만났으나, 계획은 진작 실패했다. 유이를 만날 면목은 없었다. 그래서 억지로 아담이 되어 그녀 옆에 서려던 것이었다. 그 스스로가 유이에게 자신이 없으니,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이고 싶었던 게다. 아내인 유이도, 아들인 신지도, 지금의 겐도우에겐 그저 두려운 타인일 뿐이다. 멋대로 손에 이식해 하나가 되려 했던 아담, 멋대로 손을 넣어 하나가 되려 했던 릴리스완전한 타인, 다른 말로 공포가 되어 다시 그를 만나러 왔다. 사랑했던 유이와 함께.

겐도우 "내가 곁에 있으면, 신지에게 상처만 줄 뿐이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나아."

유이 "신지가 두려웠군요."
겐도우 "남에게 받는 사랑은, 믿을 수 없다. 내겐 그럴 자격도 없어."

카오루 "그냥 도망치는 것뿐이야. 자기가 상처 입는 게 두려워, 세상을 거부하는 거지."

유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형태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이…."

레이 "그게 두려워, 마음을 닫았던 거네요."

겐도우 "그 응보란 게 이 꼴인가…미안했다, 신지."

겐도우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보자. 굉장히 익숙하다. 신지가 R-20 구역에서 미사토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 말이다.

신지 "사람을 상처 입히면서까지, 죽이면서까지 에바에 타다니, 내겐 그럴 자격 없어요.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같은 거, 내겐 아무 것도 없어!"

"난 무엇을 해도 남에게 상처만 줄 뿐이야, 그렇다면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나아!"

겐도우는 지금, 당시의 유약한 신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것은, 신지에겐 진심을 줄 미사토라는 어른이 곁에 있었으나, 겐도우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 하나 믿어 줄 상대가 없었다. 언제나 혼자이길 바랐던 겐도우의 최종 결론은, 결국 성장보완도 아닌 영원한 도망이었다. 신지에게 상처를 줄 뿐이라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그의 말, 이제 우리는 그 의미를 잘 안다. 그는 다만 그 스스로가 두려웠을 뿐이다.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으니, 남을 사랑할 수도 없었던 거다. 에반게리온은 겐도우라는, 정신적으로 정체한 캐릭터를 통해, 타인과의 교류를 거부한 개인의 고독한 최후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보는, 아내와 아들-초호기가 맡게 됐다. 겐도우의 환상은 사랑하는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죄책감에 응당한 벌을 내릴, 공포의 대상-말 그대로 타인이었다.

다리만 남은 겐도우. 애도.

사실 이 응보 과정은 단순 환상이라 보기엔 어렵다. 바로 다음 컷에서, 겐도우는 실제로 하반신만 남긴 채 목숨을 거뒀다. 정상적인 LCL 환원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며, 따라서 보완에 참여했다고 확언할 수 없다. 그에 대한 이 잔혹한 처벌은,릴리스의 복수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데, 겐도우가 초호기에 의해 상반신을 뜯기고 다리만 남긴 것, 과거 릴리스가 상반신만 남기고 다리를 뜯겼던 아픔과 의미 있게 대응한다.

신지 "잘도 토우지를 다치게 하고 어머니를 죽였겠다…!"

또한 신지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데, 이미 20화의 환상 속에서, 신지는 초호기를 통해 겐도우를 죽이려 했고, 이후 아버지에 대한 심리 변화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 그의 의지를 반영한 보완은 겐도우를 허락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이렇게 두면, 26화 마지막의 아버지, 고마워요.’라는 텔롭을 해석할 때 껄끄러움을 피할 수 없다. 물론 두 시점의 신지는, 마음의 성장 여부를 기준으로 큰 차이가 있으나 그렇다고 굳이 미성숙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잔인한 장면을 연출할 이유가 있나 싶다. 따라서 나는 이 부분을 좀 더 완곡하게 이해하여, 어머니가 아들 대신 죄를 업고 증오를 씻어 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 부분을 설명하기 전에, 여러분 혹시, 위 장면에서 유이에게 재밌는 변화가 있었다는 걸 눈치 챘는가? 그렇다, 유이의 옷이 변한다! 처음엔 가운 속에 분홍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보라색 터틀넥으로 바뀌어 있다.

분명 의도적인 연출일 텐데, 이를 통해 말하려는 바가 대체 뭘까.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첫 번째 분홍색 옷의 경우, 유이가 후유츠키를 처음 만났을 때 입던 것이고, 두 번째 보라색 옷은 후유츠키가 게히른에 들어온 뒤,신지의 어머니유이가 입던 것이다. 우리가 두 옷의 차이에서 꺼낼 수 있는 정보는 따라서, 여자 어머니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보완 중 겐도우가 유이를 처음 마주했을 때, 우선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여성 유이였다. 좋은 남자가 있다면 주부로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지닌 그 아가씨. 그러나 어느 순간 겐도우의 앞에 서 있는 건 그를 불행한 남편으로 만든, 어머니 유이였다. 더는 나를 사랑해 줄 것 같지 않아서 두려웠던 타인이었다. 또한 그녀의 보라색 옷은 초호기의 컬러링과도 의미 있게 겹치고 있어, 아마 안노는 이 옷의 변화를 통해, 지금 초호기가 그녀의 의지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걸 강조하려 했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괜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도록, 어머니가 대신 벌을 준 셈이다. 겐도우의 죄는, 아내라는 이유로 쉬이 사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으니까.

또 하나, 여기서 레이는, 유이의 옷이 변함과 동시에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겐도우의 시각에서, 여성 유이레이에게 옮겨 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대로 유이 입장에선 겐도우에 대한 사랑을 이미 레이라는 샐비지 육체에 모두 넘겼다는 표현일 수도 있겠다.

레이 "……."

세 명의 레이가 겐도우의 최후를 보고 있다. 더미 레이, 초대 레이, 2대 레이. 마치 레이라는 투명한 개체,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분명한 색깔을 찾으며 인간이 되는 과정을 표현한 것 같지 않은가. 그 여정의 끝에 선 2대 레이가, 겐도우의 안경을 조용히 줍는다. 겐도우에게는 타인에 대한 벽이었던, 레이에게는 타인에 대한 희망이었던.

제3의 눈

영혼의 바다

이제 마지막 남은 인간의 영혼, 생명의 나무가 된 신지 차례. 다른 영혼과는 달리, 신이 된 소년은 거대 레이 이마에 달린 3의 눈으로 직접 들어간다. 3의 눈은 인간 정신의 중심이 되는 차크라이다. 그 눈의 각성은 곧 신의 세계로의 입회를 의미하는, 의식의 마지막이다. 생명의 나무가 레이와 융합하는 순간을 마치 남녀 성기의 결합과 같이 묘사한 것이 흥미롭다.

신지는 거인의 몸 안에서, 중앙의 붉은 구체를 향해 헤엄치는 무수한 영혼들과 마주하게 된다. 모습을 난자로 향하는 정자의 움직임과 같이 그려 놨는데, 위의 융합 장면과 더불어 태초로의 회귀 모티브를 표현한 것 같다. 지금 사람들의 영혼은 모두 하나같이 레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검은 달의 정화 과정을 거친 덕에 개인의 특이 자아가 없으며, 때문에 우주에 유일하게 실존하는 레이의 모습을 빌리고 있을 뿐이다.

신지 "아야나미…레이…?!"

응?!

그 기괴한 광경에 놀라는 신지를 보고, 영혼들은 순간적으로 신지의 얼굴로 모습을 바꾼다. 자타의 구분이 사라진 세상이다.

-찰싹!

초록색 비상구가 보인다. 그 위에 보완으로 향하는 기차의 모습이 오버랩, 잠시 후 뺨 때리는 소리와 함께 비상구 불빛이 꺼진다. 신지를 포함해 모든 인류의 자아 경계가 소멸하여, 비로소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온갖 마음이 섞인 채 정처 없이 떠도는 혼돈의 시간이다. 성적 흥분에 도취한 여성의 가쁜 숨소리, 다층 셀에 그려 넣은 여성의 음란한 모습, 그리고 중구난방으로 들리는 욕설 등, 신지가 지닌 인간 소망의 마지막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네

미사토 "그렇게 힘들었다면…이제 그만 둬도 좋아요."

레이 "그렇게 싫었다면…이제 도망쳐도 좋아요."

-홀가분해 지고 싶겠죠?
-나와 하나가 되고 싶죠?

"그래도…."


"너하고만은…."

"절대로…죽어도…."

보완을 허용하는 레이 미사토와는 달리, 아스카는 이 와중에도 끝까지 신지와의 경계를 수호하려 한다. 신지를 보는 아스카의 증오 섞인 눈빛은 인간적인 악감정이 아니라, 그저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에 더 가까워 보인다. 신지에게 타인으로서의 미련을 남겼다는 것은, 여전히 그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니까. 아스카의 이 기개 넘치는 거절, 영화의 피날레가 되는 너와 나의 재회장면으로 이어지며 그녀의 성장을 무게 있게 표현해 준다. 그러고 보면 아스카가 이렇게 완강하게 보완을 거부한 덕, 보완을 주도한 신지 다음으로 가장 먼저 진짜 세상에 다시 발을 들일 수 있었던 셈이다. 과연 아스카다.

그러나 아스카가 무엇을 바라든, 또 신지가 그것을 어떻게 여기든, 이제 세상은 정말로 끝이 났다. 작품은 기존 세계의 붕괴를 표현하기 위해, 실사 세계를 촬영하여 스크린에 띄우는 특별한 방식을 사용했다.

아주 영리한 방법이지 싶다. 애니메이션 세상을 기준으로, 우리가 사는 현실은 곧 환상의 세계라 할 수 있으니까. 2차원에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우주에서, 놀이터의 그네는 다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기차소리 없이 달리고 있다.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이란 잔잔한 클래식 넘버를 배경으로,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눈앞을 무정히 스친다. 어떠한 마음의 변화도 없다. 아픔도, 그 대신 즐거움도 없는 적막한 세상이다.

저 사람…?!

이 시퀀스에서 우선 특별히 눈이 가는 부분은, 영화관의 실제 객석을 화면에 비추는 연출이다. 앞자리에서 레이와 아스카 인형을 손에 든 남자를 봤다면 알았겠지만, 데스 앤 리버스 상영 당시 실제 객석 화면이다. 과연 신지가 작품에서 말하는 꿈과 현실, 3차원 세계에 사는 우리네 입장에선 애니메이션과 바깥 세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신지 "…있잖아…."

미사토 "뭐?"

신지 "꿈이란 건, 뭘까?"

아스카 "꿈?"

레이 "그래, 꿈…."

신지의 물음에 대해, 텔롭은 그 대답을 상영관의 객석으로 돌린다. 당신이 지금 꾸는 꿈은 어떤 것입니까, 하고. 앞서 아스카가 신지의 영화를 보며 화를 냈던 것과 같이, 안노는 지금 에반게리온을 통해 우리 자신의 영화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묻고 있는 셈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감독은 데스 앤 리버스라는 안노의 영화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감상을 보여 준다. 일반적인, 평범한 리뷰도 있고, 굉장히 공격적인, 협박에 가까운 반응도 눈에 띈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다만 이런 식으로 각자의 답을 추구해 달라는 감독의 메시지이다. 그리고 그 하나의 답, 아마 안노 본인의 생각신지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다. 함께 보도록 하자.

신지 "모르겠어…현실은, 잘 모르겠어…."

레이(유이라 생각해도 좋다.) "타인의 현실도, 자신의 진실도…잘 알 수 없구나…."

신지 "행복이 어디 있는 건가, 잘 모르겠어."

레이 "꿈 바깥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구나…."

내 꿈, 기분 좋으냐고? 모르겠어. 사실은, 현실도 잘 모르겠어. 신지가 답했다. 여기서 현실이란 우리 입장에선 상영관 바깥의 세상. 나와 작품이 아닌, 나와 타인이 대면하는 공간이 된다. 실사 세계라는 낯설게 하기기법을 통해 감독은 우리를 잠깐 영화 바깥으로 데리고 나간다. 미사토, 아스카, 레이의 성우가 캐릭터가 아닌 본인의 모습으로 우리의 눈을 본다. 이어 각 캐릭터의 코스튬 플레이를 하는 세 사람의 모습.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대개 현실과 꿈의 그 미묘한 경계이다.다루기 쉬운 꿈의 유혹 때문에, 진짜 현실을 망각하는 경우도 꽤 있다. 혹은,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다는 핑계, 무시하기도 한다. 현실이란-우리의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너무나 견고하여, 그래서 섣불리 건드렸다간 상처 입기 쉬운 세상이니까.

신지 "그러니까 이건 현실이 아니네…아무도 없는 세계다."

레이 "그래…꿈."

신지 "그러니까, 여기에는, 내가 없어…."

그러나 지금 신지가 만들어 낸 보완의 세계에는, 괴로움이라곤 없다.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됐으니까, 타인에 대한 공포도 없다. 그러나 나만이 존재하는 세계에는, 타인도 없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도 있을 수 없다. ‘라는 건 타인과의 인연을 통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까. 그래서 여기는, 아무도 없는 꿈과 같은 세상이다. 현실이라 부를 수 없는 곳이다. 신지를 보며 레이는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저, 괴로운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도망쳐 왔을 뿐이군요. 정말로 이런 세계를 원한 게 아니라, 다만 고통을 받지 않기 위해, 덜 괴로운 곳에 잠깐 기대고 싶었을 뿐이군요. 신지는 물었다. 그게 나쁜 거냐고. 그러면 안 되는 거냐고.

레이 "그럴싸하게 둘러대는 식으로 현실에 복수를 하고 있었구나."

신지 "안 된다는 거야?"

레이 "허구 속으로 도망쳐서, 현실을 무시하고 있었구나."

신지 "나 혼자만의 꿈을 보는 게, 나쁘다는 거야?"

레이 "그건 꿈이 아냐. 그냥…."

"…현실 도피야."

레이는 다만, 신지가 착각하고 있음을 가르쳐 준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이라 부를 수 없단다. 얼핏 이상하게 들린다. 아까는 신지가 꿈속으로 도망친 것이라 했으면서 지금은 또 이게 꿈이 아니라니? 중요한 것은, 신지가 도망쳤다는 사실에 있다. 꿈을 현실의 도피처로 삼는 순간 그 공간은 이미 꿈이 아니게 된다. 말 그대로, 현실 도피일 뿐이다. 레이의 짧은 말과 함께, 음악이 멈춘다. 객석을 가득 메우던 사람들의 모습도 사라지고 없다. 이제는, 스크린을 보고 있는 당신 하나만이 남았다. 이런 방법으로 감독은, 당신이 영화를 보는 이 순간을, 꿈의 경계를 넘어, 안노라는 타인당신 자신실질적인 대면 시간으로 바꾸려는 셈이다.

신지 "…그럼, 나의 꿈은 어디에 있어?"

레이 "그것은, 현실의 연속."

그래서 더욱,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레이는, 꿈을 부정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시퀀스의 대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에반게리온을 더러 오타쿠를 마냥 비판하려는 작품이라 생각하는데, 이는 명백한 작품 오독이다. 레이의 입을 통해 안노가 비판하는 대상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에서 도망친 채 이 공간을 자신의 꿈이라 착각하며 위안 삼으려는 사람들이다. 현실을 무시한 꿈에는 괴로움도 없는 대신 행복도 없다. 꿈은 언제나 현실과 함께 있는 것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 진짜 행복은 그 안에 있다. 애니메이션 역시 하나의 꿈이며, 그 꿈을 탐닉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의 눈을 닫고 꿈의 세계로 도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애니메이션이란 꿈으로 가장한 위선일 뿐이다. 정말로 꿈을 아끼는 사람은 현실도 아끼는 법이다. 현실 없이는 꿈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신지 "…그렇다면, 내 현실은, 어디에?"

레이 "그것은…."

"…꿈의 끝이야."

BGM Liberation of Souls : The Enlargement of Obstruction

현실에는 고통도 있으나, 즐거움도 있다. 그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면, 일단 꿈에서 깨야만 한다. 타인을, 진짜 세상을 마주해야만 한다. 꿈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신지, 그러니까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진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우선은 꿈을 놓고 눈을 떠야만 한다.

26화의 영어 부제, ‘Take care of yourself’이 모든 메시지를 집대성하고 있는 문장이며, 에반게리온이 먼 길을 돌아 우리에게 전하려 했던 것들의 응축이다. 당신의 소중한 꿈을 위하여, 당신의 현실을 먼저 소중히 해 달라는 것. 바로 그러기 위해, 당신 자신을 아껴 달라는 것이다. 행복한 꿈은 행복한 현실에서만 꿀 수 있는 법이며, 그 현실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안노의 말에 따르면,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은 그가 아주 오랜 시간 도망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일구어 낸 하나의 진실이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싸구려 허구가 아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 신지, 진실인 이유이기도 할 테다. 진정한 꿈은 현실 안에, 현실은 너와 나의 관계 속에, 그 관계는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행복은 그 안의 어디쯤, 바로 당신의 손 안에 담겨 있는 셈이다.

꿈의 끝이라는 레이의 말과 함께, 거대 레이의 목에 커다란 금이 하나 그어진다. 신지에게 있어, 레이라는 존재는 꿈의 상징이기도 하다. 꿈처럼 만나 꿈처럼 이별하는, 그리고 인류 보완이라는 영원할 것만 같은 꿈을 선사한 그녀. 진정한 꿈에 대해 깨닫게 된 신지의 의지를 반영한 걸까, 레이의 목에서 선홍색 피가 뿜어져 나온다. 그러나 아프진 않다. 레이는 웃고 있다. 아주 거룩한 성장이니까. 마침내, 신지가 꿈에서 깨기 시작한 것이다.

2화의 낯선 천장

26화의 낯선 천장

아스카 "이제야 안 거야, 바보 신지?!"

신지 "아야나미…?"

신지 "여기는…."

레이 "LCL의 바다, 생명의 원천. AT 필드를, 자기 형태를 잃은 세계."

"나는, 죽은 거야?"

"아니,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을 뿐. 이게 네가 바란 세계야."

"…하지만, 이건 달라…다르다고 생각해."

"지금 다시 타인의 존재를 원하면, 다시 타인의 공포가 시작되는 거야."

"…괜찮아."

"고마워."

신지가 바라는 대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마음에 벽을 세운다. 그러나 그 덕분에, 신지는 다시 한 번 그녀를 아야나미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한 번 그녀와 악수를 나누고,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신지 "…현실은 항상 괴로웠어. 그러니까, 도망쳐도 됐던 거야. 그치만, 도망친 곳에서도, 좋은 일은 없더라."

"왜냐면, 거기엔 내가 없었으니까. 아무도 없는 것과 같았으니까…."

카오루 "다시 AT 필드가, 너나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혀도 괜찮아?"

신지 "…상관 없어. 그런데, 내 안에 있는 너희는 그럼 누구야?"

레이 "희망이란 거야."

"사람들이 서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그런 거…."

카오루 "좋아한다-는 말과 함께 말이지."

신지 "자기 멋대로인 믿음 말이지. 계속될 수가 없는 거야. 결국엔 날 배신하고 말겠지. 나를 아프게 하겠지."

"그치만…."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 때의 마음은, 진짜라고 생각했으니까."

너와 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타인은 공포이며 고통일 뿐이다. 그러나 너와 나를 믿는 사람에게, 타인은 희망이며 행복이 된다. 신지가 여러 사람과 함께 진심으로 웃고 있는 저 감동적인 컷을 보라. 그들이 바로, 신지 안에 새롭게 살게 된, 희망이라는 이름의 타인들이다. 26화의 후반을 장식한,행복한 드라마를 함께 연출한 사람들이다. TV판의 엔딩에서, 신지에게 마음을 다해 축하의 박수를 쳐 줬던, 그 사람들이다. 이제 됐다. 신지는, 괜찮을 것이다.

거프의 방이 다시 닫히고, 거대 레이의 붉은 눈을 초호기가 뚫고 나온다. 온 우주에, 신지의, 초호기의 용맹한 포효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외치는 짐승이다!

[에반게리온] 35(). 진심을, 너에게 : I need you/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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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完). 진심을, 너에게 : I need you

 

마치 수정란이 분화하는 과정 같다.

신지는 보완을 거부했다. 거대 레이의 날개는 사라지고, 대신 초호기에게서 빛의 날개가 새롭게 돋아난다. 보완을 주도한 것은 신지의 의지를 업은 아담+릴리스였으나, 그 보완의 끝을 맺는 역할은 신지가 탄 초호기가 행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영혼을 모은 검은 달이 쪼개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폭발하여 지구 전체에 영혼의 빛을 흩뿌린다.

역할을 마친 거대 레이의 육체가 파괴되기 시작한다. 아담과 릴리스의 영혼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영혼을 잃은 육체는 스스로를 지탱할 힘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조각이 나 지구로 추락하게 된다.

거대 레이가 그 형태를 잃고 땅으로 추락한다.

초호기의 입에서, 코어를 통해 융합한 롱기누스의 창이 도로 빠져 나온다. 초호기는 양손으로 창을 잡더니, 그 형태를 바꾸는데, 이 부분의 묘사가 분명하지 않아 해당 장면의 정확한 의미는 파악하기 어렵다. 이 부분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작품의 초기 기획안을 통해서인데, 본래 이 장면은 초호기가 롱기누스의 창을 파괴하는 부분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신의 도구를 에반게리온이 파괴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아서일까, 본편에서는 이 설정이 파기되었으나, 어떻든 여기서도, 초호기의 이 행위를 통해, 양산기가 지니고 있던 복제 롱기누스의 창이 소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획 초안과 크게 다른 설정은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창의 바뀐 형태도 매듭에 가깝기 때문에,봉인 의식의 일종이 아닌가 싶다.

복제 롱기누스의 창도 파괴

복제 롱기누스의 창들이 파괴되는 장면을 보자. 대본에서는 창이 LCL화 되어 터진다.’고 표현해 놓았다. 자세히 보면, 창들이 소멸하기 직전에, 아주 잠깐, 릴리스의 육체와 같은 형태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연출 때문에, 복제 롱기누스의 창이 실은, 분실한 줄 알았던 릴리스 세트의 롱기누스 창을 제레가 극비리에 9개로 나눈 것이라는 가설도 나왔다. 일리는 있으나 다른 근거는 없다. 그러니 단순하게, 리린이 만든 창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연출로 보는 게 무난하다. 리뷰 13편에서 양산기의 창들이 롱기누스의 창을 카피한 것임을 밝혔으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작품 내의 최소한의 묘사는 필요했을 테고, 그게 바로 이 부분이라는 거다.

양산기의 최후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저 창들이 파괴되었냐는 것이다. 어차피 그 안에는 영혼도 없는데 말이다. 연출로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창의 소멸과 함께 양산기의 코어가 변색하고 육체의 부식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인데, 그런 과정이 왜 필요한 것일까? 아마 초호기가 창의 변형으로 그렇게 만든 것 같은데, 왜 그랬을까? 나는 이 모든 게,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기존에 존재하던 에바를 포함해 신에 필적하는 도구를 영구히 봉인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양산기뿐만이 아니다. 의식의 마지막에, 초호기는 스스로 날개를 접더니, 이내 양산기와 같이 육체의 빛을 거둔다. 그 안의 유이와 함께 영원히 잠이 드는 것이다. 그녀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는 것일까, 레이가 초호기를 가만히 주시한다.

그리고 이별

그렇다면 그 봉인 과정은 어째서 필요한가? 롱기누스의 창으로 말하자면, 우선은 시조 민족에 의해, 아담과 릴리스 등 생명의 시조를 제어하기 위한 도구였고, 그 활용 방법으로는 AT 필드의 무조건적 조절보완 기능 등이 있었다. 결국 초호기가 신의 도구인 롱기누스의 창을 파괴한다는 것은, 신지가 살게 될 새로운 지구에서는 타의에 의한 보완의 여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는 의지 표현이자 선언인 셈이다.

생각해 보자. 이제 지구에는 검은 달도, 하얀 달도 없다.임팩트의 원인은 ‘1행성 1씨앗원칙을 어긴 데서 나왔고, 결국 여태 지구에서 발생한 모든 재앙은 두 씨앗의 금지된 병존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사도와 인간은, 그러니까 아담과 릴리스는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과는 별개로, 신이 허락하지 않은 관계였던 셈이다. 그러나 엔드 오브 에바를 기점으로, 지구에는 어떠한 달도, 마음을 제어할 롱기누스의 창도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앞으로 지구에 사는 그 누구에게도, 존재의 정당성을 물을 필요가 없게 된 셈이다. 아담이든, 릴리스든, 전혀 다른 존재이든, 그 누가 지구에 살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밑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것은 에반게리온이 담는 실존의 메시지와 직결되는 부분이다. 동시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의 에바 없는 지구, 어쩌면 엔드 오브 에바에서 신지가 아픔을 딛고 진정 원하게 된 바로 그 세상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 초호기의 이 의식은, 신지가 현실과의 대면을 위해 꿈과의 완전한 이별을 추구하는 과정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넓게 보면 엔드 오브 에바는, 신지가 에반게리온을 영원히 떠나 진정한 의미의 현실과 마주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따라서 에바에 다시 탑승할 여지를 남기게 된다면 그것은 꿈과의 결별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 또 하나, 신지에게는 레이 또한 꿈의 상징이었고, 따라서 꿈의 끝 레이와의 작별도 수반해야 한다. 아픈 이별이 되겠지만, 그녀를 곁에 두면 신지의 지구는 완전한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이는 이제 ‘I need you 시퀀스(이하 파이널 시퀀스)에서 그에게 잠깐 얼굴을 비출 때 빼고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존재의 소멸, 아마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녀는 시간과 공간을 거스를 수 있기 때문에 죽는다는 의미 자체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최소한 상징적인 선에서라도, 신지 곁을 떠나는 것 같다. 리뷰 9편에서 밝힌 대로, 아마 아담의 영혼과 함께 말이다.

이 주장의 결정적인 근거가, 엔드 오브 에바의 초안(6차 원안)에 나오고 있다. 초안은 엄밀히 완성작과 다르기 때문에 작품 해석에 남용하면 곤란하지만, 감독의 생각과 연출 의도를 추리할 때 중요한 판단 기준은 될 수 있기 때문에 짚을 필요가 있다. 초안에서는 이 부분에 추가 장면이 있었다. 신지가 마지막으로 레이와 대화를 나누는데, 꿈의 끝에 선 신지가 갑자기 울기 시작한다. 왜 우냐는 레이의 말에 신지의 대사.

네가 내 곁에 있어서야. 아직 레이가 내 옆에 있잖아.”

신지의 말에 당황한 레이는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라 말한다. 그 때 2대 레이의 환상이 등장하여 그녀에게 웃으면 된다.’고 가르쳐 준다. 장면 마무리.

결국,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신지가 꿈에서 깨기 위해, 아픔을 각오하고 레이와의 작별을 원하고 있으며, 그것이 실로 거룩한 성장임을 알기 때문에, 레이도 기꺼이 웃으며 그를 보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레이 "진실은 마음 속에 있어."

카오루 "사람의 마음이,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으니까 말이지."

레이 "그 새로운 이미지가, 상상하는 힘이, 인간의 미래를, 시간의 흐름을 만들어 가니까."

카오루 "단,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어."

레이 "그러니까, 잃어버린 자신은 스스로의 힘으로 되찾는 거야."

유이 "걱정할 것 없어. 모든 생명에겐,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어. 살아가려는 생각 하나면, 어디든 천국이 될 수 있단다."

"왜냐하면, 살아 있잖니! 행복의 찬스는, 어느 곳에나 있단다."

"태양과, 달, 그리고 지구가 있는 한, 괜찮아."

현실을 맞이하기 위한 의식의 끝에서, 레이, 카오루, 유이가 전하는 메시지는 에반게리온 주제의 핵심이라 해도 좋다. 그 의미 또한 워낙 구체적이고 분명하여 따로 짚을 필요도 없는 수준인데, 안타깝게도 이 작품을 해석하려는 많은 이들이 이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어 주의를 주고 싶다. 곧 다룰 파이널 시퀀스가, 괴리를 느낄 정도로, 시각에 따라 어둡고 기분 나쁜 장면일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작품 초안은 의도적으로 기분 나쁘게 묘사하려는 성격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짧은 장면의 시각에 매여 이 길고 장대한 에바 여행의 결론을 무시하는 것은 작품 감상에 있어 결코 바람직한 자세라 할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인류를 위해 스스로 존재를 포기한 어머니 릴리스가, 아버지 아담이,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는 엄마 유이가 괜찮다.’고 했다. 그 소중한 메시지를 무시하고 엔드 오브 에바를 파이널 시퀀스 때문에 비극으로 칭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를 마음에 새겨 둔 채로, 드디어,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장면으로 향할 시간이다.

해석 여행의 마지막 얘기를 나누기에 앞서, 두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하나, 이 장면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지 말라. 엔드 오브 에바에서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섰던 부분이며, 작품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장면인 만큼 그 중요성은 물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장면은 다른 장면과 같이 중요할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한 감상이 다른 장면에 대한 감상을 엎어 버리면 만든 사람의 입장에서도,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다시 설명할 부분인데, 이 장면은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것 자체에 가치를 담고 있다. 간혹 하나의 답에 집착하려는 사람들이 있어 짚고 간다. 에반게리온을 떠나 모든 미디어, 모든 예술에는 무수한 답이 있을 수 있다. 이 짧은 시퀀스 안에도 당연히, 여러 갈래의 해석이 있고, 필자가 제시하려는 견해 또한, 상당히 많은 시각을 융합해 놓은 것이다. 답이 많을 수 있는 수수께끼에 열린 시각을 가져 줬으면 한다. 바로 시작하겠다.

파이널 시퀀스를 해석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이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다. 파이널 시퀀스란, 구체적으로는 영어 부제 ‘I need you’ 컷에 이어, 컷 넘버 461A에서 시작해 481컷까지 이어지는 장면을 말하며, 간혹 컷 넘버로 표시하지 않는 마지막 종극부분도 포함한다. 다행히 긴 장면이 아니기 때문에 컷 넘버와 캡션 모두 참고하여 꼼꼼히 다룬다.

#461A. 거대 레이의 얼굴 반쪽과, 땅에는 나무 기둥들이 여러 개 박혀 있다. 캡션은 이 기둥을 묘지 기둥과 같은 나무가 여럿 서 있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묘지 기둥이란, 보통 죽은 사람의 무덤 위치를 알리기 위해 사용하는 것인데, 다만, ‘묘지 기둥이 서 있다.’가 아니라, 굳이 묘지 기둥과 같은이라 표현한 것으로 볼 때, 단순히 보기만 해서는 그 나무 기둥의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애매한 연출을 한 것 같다. 실제로 6차 원안을 보면, 본편 스토리 보드와 달리 묘지 기둥이 서 있다.’확실히 표현한다. , 감독이 수정을 거쳐, 최종적으론 일부러 우리가 저 나무 기둥의 정체를 알 수 없게끔, 노린 셈이다.

이 컷을 자세히 보면, 중앙의 기둥 하나가 부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캡션 또한 그 중 하나는 부러져 있다.’고 명시해 놨다. 이유가 뭘까? 어두운 분위기 연출을 위한 것이란 설명이 가장 무난한데, 사실 이 부분도 초안에서 커다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원안에 따르면, 무덤 기둥에는 주요 캐릭터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스카가 등장해, 자신의 이름이 적힌 무덤 기둥을 발로 차 버리는 씬이 있다. , 이 부러진 기둥은 원래라면,아스카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이 컷의 기둥들이 무덤 기둥이라 확신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덤의 부정적인 이미지만 생각하고 이 장면을 결국 아무도 신지 곁에 오지 않는다.’절망의 암시로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방금 원안을 통해 짚은 대로, 이 기둥들은 오히려 부활을 기다리는 희망의 상징에 더 가깝다. 당장 아스카가 부활하여 스스로 그 기둥을 존재의 표식으로 삼지 않았는가. 물론 무덤 상징은 겉으로 보면 누가 봐도 기분 나쁜 생각이 들게 만들며, 결국 이 장면은 마냥 희망이라 하기에도, 그렇다고 마냥 절망이라 보기에도 애매한 컷이 되었다. 아마 안노는 누구에게도 이 컷이 확실한 희망의 증거확실한 절망의 증거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 같다. 바로 그 이유로, 최종 완본에서는 나무 기둥의 정체를 흐릿하게 숨기려 했던 것이다.

#461B. 나무에 걸린 미사토의 십자가이다. 장면 캡션은 십자가에 녹이 슬어 있다.’고 적고 있다. 십자가에 담긴 상징이라면 역시, 카츠라기 박사에게서 미사토에게, 또 그녀에게서 카지의 유지와 함께 신지에게 전해 왔던 사랑 삶의 의지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목걸이가 파이널 시퀀스에서 신지 곁에 남아 있다는 것은, 신지의 마음에 다시 한 번 타인과 맞서고 싶다는 용기가 숨어 있다는 소리가 된다. 따라서 저 목걸이는, 혹시 미사토가 신지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희망의 상징이 된다. 솔직히 필자는, 굳이 말하라면, 미사토는 귀환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이미 할 일을 마쳤고, 보완이 아닌 방법으로 죽음을 맞았기 때문에, 굳이 이 삶에 미련을 남겼을 것 같지 않다. 대신 그녀가 생전에 한껏 담은 소중한 진심, 십자가로 신지 곁에 가장 먼저 복귀한 것 아니겠는가.

다만 한 가지, 녹이 슬었다는 점이 걸린다. 우선은, 보완 이후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비해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을 거란 예측의 근거가 되기도 하며, 상징적으로는, 영원히 반짝일 거라 믿었던 희망, 차가운 현실 앞에서 조금씩 변색되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파이널 시퀀스는, 희망과 동시에 절망의 여지도 남겨 두고 있으며, 특히 이 십자가는,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담고 있는 셈이다. 감상하는 입장에서는, 십자가 그 자체에만 주목할 수도 있겠고, 십자가에 서린 녹에 더 주목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당신이 지닌, 해석의 자유이다.

#460. 목 잘린 양산기의 모습이다. 캡션에서는 지구로 추락한 에바 시리즈가 고대 유물과 같은 상태로 변해 있다.’라 표현하고 있으며, 목이 잘린 것에 대한 멘트는 없다.

#464. 드디어 신지와 아스카의 모습이 보인다. 가까운 곳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이지만, 서로 한 마디의 말도 나누지 않는다.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를 강조하려는 듯 465컷을 할애하여 두 사람의 손만 따로 묘사하는데, 캡션에서도 두 손은 서로를 만지지 않는다.’고 따로 명시하고 있다.

먼저 이 공간에 대한 얘기를 좀 한다. 물결이 밀려오는 해변, 하나의 물가를 끼고 같은 방향으로 누워 있는 두 사람. 리뷰 26편에서 언급한, 카지의 대사 여자와 남자 사이의 넓고 깊은 강과 대비를 이루는, 서로의 이해에 대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그러나 여전히 두 사람은 마음의 단절을 겪고 있다. 이렇게 희망의 공간에서 절망을 그리는 식으로, 감독은 다시 한 번 두 가지 이미지를 한 곳에 담아 놨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하늘을 보는 두 사람에게 주목해도 좋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두고 말 한 마디 없는 두 사람의 침묵에 주목해도 좋다.

다시 한 번, 레이의 상징을 비춘다. 그 때 갑자기 물 치는 소리와 함께 신지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 워크가 하향, 신지의 놀란 얼굴.

#468. 물에 서 있는 레이의 모습이다. 아까 설명한 대로, 신지와의 작별 인사로 보인다. 동시에, 이 시점에서, 신지는 진정한 의미로 꿈과 결별하게 되었다. 꿈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모든 달콤한 것을 잃게 되는 아주 따끔한 순간이다.

신지의 시야에 흐릿하게 아스카의 가슴 부분도 보인다. 역시 캡션에서 따로 명시해 둔, 의도적인 연출이다. 신지에게 아스카의 가슴이란, 본능적인 욕구의 대상인 동시에 지금은 죄책감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가 아스카의 몸을 똑바로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할 테다.

#470. 이제 레이는 없다. 꿈은 완전히 끝났다.진짜 현실,완전한 타인이 신지 곁에 있을 뿐이다. 꿈의 마지막 자취를 느끼려는 듯 잠깐 몸을 일으켜 세워 한동안 바다 너머를 바라보던 신지는, 이제 아주 천천히, 옆에 누운 아스카에게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다.

#471B. 다시 한 번, 붉은 바다. 두 마음이 변화를 보이려 한다.

#472. 저 멀리 거대 레이의 이 보인다. 보완 당시 레이가 신지에게 물었던 것. 그 손은 무엇을 위해 있는 거야?”라는 대사를 생각해 보라. 신지의 손은, 이제 무엇을 할까?

#473. 신지의 두 손이, 아스카의 목을 조르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배경에는 캡션이 지시하는 대로, 양산기의 모습이 보인다. 보완 당시의 세계와 보완 후의 현실을 미묘하게 배치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혼란을 주는 장면 구성이다.

#475A. 목을 조르는 동안 신지의 표정은 일부러 가려 놓았다. 캡션은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지시해 뒀다. 474컷에 아스카의 얼굴이 나오는데,고통을 느끼고 있으나 저항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점이 흥미롭다.

다시 찾은 '너'라는 감촉

#476. 그렇다면 아스카의 손은 무엇을 하고 있나? 붕대를 감은 오른쪽 손이 서서히 들리더니, 신지의 뺨에 그 손을 갖다 댄다. #477. 아스카의 손이 신지의 뺨을 가만히 쓸어내린다. 크게 놀라는 신지의 얼굴.

#478. 아스카의 목을 조르던 신지의 두 손에 힘이 빠진다. 흐느끼기 시작하는 신지. 그가 흘린 눈물이, 아스카의 뺨을 타고 흐른다.

#480. 차가운 눈으로 울고 있는 신지를 보는 아스카. 그리고 481컷의, 아스카의 대사.

기분 나빠.”

파이널 컷. 흰 배경에 검은 두 글자. 종극(終劇).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신지는 왜 아스카의 목을 졸랐는가? 우선 이 질문에는, 신지는 이미 성장했던 것 아니었나?’와 같은 의문이 함께 담겨 있다. , 신지가 여기서 아스카의 목을 조르는 게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신지가 보완 과정을 통해 타인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질문을 풀어 쓰면, 신지는, 분명히 성장한 줄 알고 있었는데 왜 여기선 여전히 보완 이전과 같이 아스카의 목을 조르고 있는 거야?’가 되겠다.

성장은, 쉽지 않다.

그 질문에 대해 필자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사실 신지는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못했다.’가 된다. 이것을 불완전하고 애매한 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꽤 있겠지만, 사실 이런 게 바로 현실이다. 성장에는 그에 응당한 아픔이 필요한 법이다. 신지가 보완이라는 경험을 통해 단번에 성장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마음의 성장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에반게리온은 보완을 거부하고 현실을 마주하게 된 신지는 행복할 것이다란 우리의 기대를 한 번 꺾음으로써, 현실에 대한 인식에 대해, 그리고 성장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떠나, 사실 신지는 타인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적이 없다. 그가 깨달은 것은 타인은 공포가 아니라 희망이다.’가 아니라(작품도 그렇게 말한 적 없다.) 타인은 여전히 두렵다. 그러나 내 의지에 따라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신지 또한 성장 여부와는 별개로, 타인이 공포의 대상인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다만 이제, 그것을 과거와 달리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이며, 아직 신지는 그런 부분에서 어른이 아니기 때문에, 감상자가 보기에는 아주 부적절한 행동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어쩔 수 없다. 보완 이후로 처음 만난 타인이 아스카였다. 소중한 꿈과 작별하고, 차가운 현실에 미처 적응도 못한 상태였다.

여기서 또 생각해 볼 부분이, 신지가 미사토에게 어른의 키스를 받았던 장면 말이다. 에반게리온이 신지의 성장을 아주 쉽고 간결하게만 그리려 했다면, 아마 미사토의 십자가를 보며 큰 용기를 얻고 굳은 의지로 초호기에 탑승하여 아스카를 구하러 나갔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신지의 아픔이라는 게, 또 타인에 대한 공포라는 게, 그렇게 말 몇 마디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님, 당신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현실의 고통으로 2번이나 죽음을 결심한 소년이다. 미사토의 진심을 건네받고도, 신지는 아픔을 극복할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미사토의 노력이 헛된 것이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실제로 보완을 거부한 신지에게 가장 큰 힘을 줬던 게 바로 십자가, 미사토의 의지였으니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대개 이런 식이다. 우리 가슴에 씨앗으로 뿌리 내려 아주 천천히 자라는 것 말이다. 결국 파이널 시퀀스 또한, 신지의 피할 수 없는 마음의 정체(停滯)를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단계 성장한 것은 맞지만, 신지가 정말로 그 깨달음을 체화하기 위해선, 보다 현실적인 아픔에 맞설 필요가 있다. 잔인하다고도 볼 수 있는 그 통과 의례, 에반게리온의 메시지를 진부한 설교가 아닌 진정한 성장의 한 단면으로 만든 것이다.

동시에 신지의 목 조르기는, 보완에 대한 남은 미련이기도 할 테다. 결국 같은 말이다. 신지가 보완 당시 느꼈던 깨달음을 확실히 터득하고 있었다면 좋았겠으나, 현실은 꿈과 다르다. 신지는 여전히, 타인에 대한 공포에 더욱 주목하고 있었다. 사실 이 마음의 정체TV판의 파이널 시퀀스에서도 다룬 바 있다.

신지 "하지만다들 날, 싫어하는 거 아냐?"

아스카 "너 바보야? 너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신지 "그치만…난 내가 싫은 걸.

난 비겁하고, 겁쟁이고, 교활하고, 나약하고…."

"하지만,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 나는…여기 있어도 좋을지도 몰라. 그래, 나는 나야. 나로 있고 싶어!"

"나는 여기에 있고 싶어, 나는 여기 있어도 좋다구!"

과연 에반게리온의 주제 의식을 정확히 관통하는 메시지였다. 동시에 엔드 오브 에바에서 그가 레이에게 물었던 질문,여기 있어도 돼?’에 대해 신지 스스로 내린, 값진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저 메시지가, 단순히 나는 여기에 있어도 돼.’가 아님을 잘 생각해야 한다. 나는 내가 싫어. 하지만 좋아할 수 있을 것도 같아. 어차피 나는 나야. 내가 나를 허락하면 괜찮은 거야.’ 이 메시지는 단순히 나는 내가 좋아.’로 귀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극히 현실적이며,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다. 신지는 여기서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깨달았을 뿐, 여전히 그 스스로에 대해 긍정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보완 이후 현실에 눈을 뜬 신지는 여전히, 아니 당연히, 스스로를 혐오하고 있었을 테다. 마음 아주 깊은 곳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의 씨앗만 심어 두었을 뿐, 여전히 그는 자신, 타인이 두려웠다. 그래서 남을 상처 입힌다. 카오루가 경고한 대로이다. 그리고 신지는 이미 그것을 각오했다.상처 입히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그래도 그런 현실을 견딜 자신이 있어서였다. 아주 중요한 차이이다!

신지가 유이와 작별할 때 뭐라고 했던가. 아직, 행복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어.” 아주 솔직한 대답이다. 행복은, ‘다른 내가 있을 수 있다, 입에 착 붙는 쉬운 말 한 마디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필요한 건 진짜 타인의 진심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 우선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게 현실이고, 그런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진짜 행복이니까. 그래서 신지의 이 잠깐의 정체,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꼭 필요한 과정이겠다. 신지가 다시 이 세상을 선택한 이유가, 아프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아파도 살 가치가 있는 세상이기 때문임을 잊지 말자. 그래서 신지의 이 선택이 더욱 용감하고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진정한 가치를 우리에게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소년의 마지막 실수는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미리 말하자면, 신지의 이 실수는, 완전한 타인인 아스카의 진심을 받는 것을 통해, 소년의 진정한 성장으로 이르게 된다.

신지는 왜 하필 아스카의 '목'을 졸라야 했을까?

신지의 목 조르기를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핵심은, 신지가 왜 하필 아스카의 을 조르느냐를 추리하는 데 있다. 이미 다양한 경로로 설명했으나, 신지의 이 두 번째목 조르기는, 보완 직전의 첫 번째목 조르기와 연계하여 이해하는 게 좋다. 실제로 장면 구도 또한 의도적으로 거의 동일하게 배치해 놓았다.

쉽게 말해, 신지의 두 번째목 조르기는, 보완 직전에 미처 하지 못한 일을 마저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이 부분에서 아까 언급한, 신지의 보완에 대한 미련을 엿볼 수 있다. 신지 입장에선, 아스카의 목을 조르는 게 곧 보완의 시작이기도 했지 않은가. 이제 막 꿈에서 깨어 현실을 마주한 신지에겐, 시야에 잡힌 아스카, 즉 완전한 타인의 공포가 크게 두려웠을 법도 하다. 레이도, 카오루도, 엄마도 없이, 이제 그는 철저히 혼자가 됐으니까. 그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보완에 대한 남은 미련을 발현한 게 아닐까 싶다.

여기서 하나 더. 신지의 목 조르기는, 아스카의 마음에 대한 신지의 오해로도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목 조르기 장면에서, 신지가 보완을 선택하게 만든 건 바로 아스카였다. 실제로 아스카는 명백히 보완을 거부하고 있었음에도, 신지는 그녀가 거부한 게 다만 자신의 마음이라 치부했고, 결국 아스카 역시 보완을 원한 것이라 착각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나는 보완 중에 아스카가 했던 말이, 신지에게 큰 충격을 줬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도…너하고만은…죽어도 싫어!"

많은 감상자들이 해당 대사에 대해 오해한 것과 같이, 신지 역시 꼭 같은 오해를 품고 있었다. 아마 안노가 일부러 노린 것일 테다. 아스카의 입장에서 저 말은 사실, 신지에 대해 타인으로서의 미련을 표시한 건데, 신지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명백한 거부와도 같았다. 아스카는 그저 너와 나의 경계를 잃는 게 싫었을 뿐인데, 신지는 아스카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거부했다고 여겼다.

그리고 지금 이 해변은, 말하자면 그 사건 이후, 두 사람이 인간의 형태를 찾고 처음으로 다시 마주한 공간이다. 신지는 아마, 아스카가 여전히, 그를 증오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녀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존재하는 우주에서 그녀를 지우려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아까 언급한 대로, 이 컷의 캡션은 아스카가 저항하지 않는다.’고 명시해 놨다. 첫 번째 목 조르기 때에도 그랬다. 아스카는 신지에게, 왜인지 목을 졸릴 때만큼은 반항하지 않았다. 그녀의 AT 필드가 미처 회복을 마치지 않은 탓일 수도 있고, 결국 신지의 뜻에 따르겠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지 입장에서는, 그녀의 무저항, 그의 오해를 확신으로 만드는 것과도 같다.

저항하지 않는 그녀

그래서 말인데, 어쩌면 말이다. 이 시점에서 신지가 정말 바란 것은, 아스카의 저항이었던 게 아닐까? 아니 더 정확히는, 아스카가 저항하는 걸 보기 위해, 일부러 을 조른 게 아닐까? 신지가 첫 번째로 아스카의 목을 조를 때, 그녀가 저항하지 않은 것은, 신지 입장에서는 곧 보완의 당위성을 부여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혼자 뜻으로 보완을 거부한 신지는, 아스카에게 한 번 더, 그 때와 같이 대답을 요구한 게 아닌가 싶다. 만약 아스카가 저항한다면, 그의 시각에서 볼 때, 그녀가 신지와 함께 있는 세상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 그렇다면 아스카는, 그런 신지에게 무엇을 줬는가? 저항? 아니면, 죽음? 둘 다 아니었다. 그녀가 신지에게 선사한 것은 바로,어머니의 손이었다.

신지 앞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레이 말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스카를 보러 온 것일 수도 있다. 레이는 아스카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고,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마저 다할 수 없는 어머니 역할의 부여란 걸 설명한 바 있다. 파이널 시퀀스에 복귀한 아스카가 눈과 팔에 붕대를 매고 있는 건, 물론 양산기와의 전투 이후 본인의 회복을 상상한 이미지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실제로 같은 부위(방향은 반대)에 붕대를 맸던 소녀가 또 바로 레이였기 때문에, 이 장면은 레이의 유지가 그녀에게 전해져 있다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아주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신지가 들고 있는 미사토의 십자가는 아버지의 마음을 상징하며, 아스카가 지니고 있는 레이의 붕대는 어머니의 마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아스카는 얼핏 레이의 뜻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결국 이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주 감동적인 방법으로, 레이가 그녀에게 부탁한 어머니의 역할, 조용히 수용했음을 우리에게 귀띔해 준다.

눈물을 흘리는 신지

아스카의 그 손길에, 신지는 비로소 자신이 여태 지녀 왔던 모든 생각들이 한심한 오해였음을 깨달았을 테다. 가장 먼저는, 첫 번째 목을 조를 때의 그 아스카가, 실은 지금 내 앞에 누워 있는, 완전한 타인인 아스카가 아니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실제로 당시의 아스카는, 정확힌 신지의 마음에 존재하는 아스카라 할 수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차갑게 신지를 거절한 이유, 신지가 스스로를 거절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의 아스카가 전부라 생각했던 신지는, 지금 자기 옆에 누운 아스카 또한 동일 인물이라 여기고 목을 졸랐던 건데, 명백한 타인인 아스카는 오히려, 그에게 어머니의 손으로 볼을 쓸어 주었다. 괜찮은 거니, 하고 마음으로 물어 주었다. 타인은 공포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은 희망에 더 가까운 존재였음, 이렇게 멀리 돌아서, 이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던 거다. 성장한 소년은 과거의 실수가, 또 깨달음을 얻은 이 부끄러운 방식이 안타까운 나머지, 끝내 오열하고 만다. 그 눈물은 아스카의 볼에 닿았고,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진심을 나눠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안노는 이 감동 일로의 상황을 아스카의 마지막 대사를 통해 또 한 번 비틀었다.

"기분 나빠."

얼핏 알 수 없고 이상한 대사로 보이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이 마지막 대사에는, 굉장히 많은 감정이 응축되어 있는데, 몇 가지 짚어 보겠다.

우선은 죽기 전에 신지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장소, 병원에서의 자위. 신지의 그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을 것이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느꼈던 감각인, 양산기의 잔혹한 겁탈 행위와 그 고통이 떠올랐을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던, 그러나 결국 와 주지 않은 신지에 대한 증오도 섞여 있을 것이다. 보완 직전에, 신지가 자신의 목을 졸랐던 때의 괴로움도 섞여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완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자신의 마음과 하나가 된, 타인들에 대한 불쾌함도 잊을 수 없다. 아주 오랜 잠에서 깬 아침과 같이, 이렇게 부활하여 현실의 바람을 쐬는 기분도 편치 않다. 신지에게 진심을 건넨 방법, 진심을 받은 방법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걸 떠나 지금 이 순간, 볼에 닿은 눈물의 감촉이, 기분 나쁘다.

타인은 공포

그러나 사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신지가 보완을 거쳐 바로 옆에 누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을 여전히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겠다. 아스카는 최소한 신지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그래서 솔직한 마음을 담아 위로를 건네려고 했던 건데, 바보 신지, 그 마음도 모르고 목을 조르려 했으니, 그녀 마음이 어땠겠는가. 아팠을 것이다. 굉장히 기분 나빴을 것이다.

유명한 일화인데, 이 대사는 원안에서는 기분 나빠가 아니라, 너 같은 녀석에게 죽는 건 질색이거든.’이었다. 대사만 남은 탓에 연기의 뉘앙스는 알 수 없으나, 아마 단순한 증오는 아니겠고, 자신의 진심을 모르는 신지에 대한 투정, 그녀의 자존심이 살짝 걸러 낸 표현일 것이다. 오히려 이해하기 쉬운 쪽은 원안의 대사이나, 역시 가슴을 콕 찌르는 뭔가가 없다. 아스카 성우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여 대사를 수정한 건,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

"기분 나빠…."

"기분 나빠…."

사실 이 기분 나빠라는 대사는 신지가 1화에서 처음으로 LCL에 입수할 때 느꼈던 감상이기도 하며, 아스카가 22화에서, 미사토와 신지가 쓴 욕조 앞에서 말한 대사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과 마음을 교류하는 것에 대한 두 아이의 성장을 강조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이 대사는 앞서 레이가 보완 중의 신지, 정확히는 우리 모두에게 물었던 질문, 기분 좋아?’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

기분, 좋아?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긍정이 아닌 부정으로 처리하여 작품을 마무리한 데 대해 이상하게 여길 사람들도 있겠으나, 거듭 말한다. 에반게리온이 외치는 것은 세상은 기분 좋은 곳이다.’아니라,세상은 기분 나쁜 일도 잔뜩 있지만 그래도 살 가치가 있으며, 살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어디든 천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스카의 마지막 대사는 결국, 이 세상에 대한 안노의, 어쩌면 우리 모두의 솔직한 감상이며, 동시에 그것이 현실을 마주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기분 나쁜 게 현실임에도, 세상에는 아스카의 손길과 같은, 또 신지의 눈물과 같은 희망이 있으니, 함께 살아 볼 만하지 않겠냐는 거다.

정리하면 이렇다. 신지가 두 손으로 아스카의 목을 조른 것, 너무나 당연히도, 아직은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신지의 마지막 실수이며, 다른 말로는 보완에 대한 미련이자, 타인에 대한 남은 공포가 된다. 사실, 신지는 아스카에게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을 게다. 카지의 죽음에 대해 알린 것도, 그녀 앞에서 자위를 한 것도, 보완을 위해 목을 조른 것도. 모두 다 그가 아스카를 떳떳하게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아스카는 신지가 가장 마주하기 싫은 현실이었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희망을 새로 품고 왔음에도, 유일하게 그 앞에 온 사람이 아스카라니, 굉장히 가혹한 일이다.

그런데 바로 그 아스카가, 신지에게 한 손으로 따뜻한 위로를 건넨 것은 어떤가.레이가 남긴 모성의 발현이자 신지에게 진심을 건네는 수단이며, 그에 대한 용서인 동시에, 스스로 타인에 대한 희망이 되는 일이었다. 레이가 꿈을 통해 신지에게 희망을 가르쳐 줬다면, 아스카는 현실 속에서 그에게 희망을 보인 셈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신지의 곁에 있던 세 여자, 미사토, 레이, 아스카는 모두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 그 자체였다.

엔드 오브 에바의 파이널 시퀀스는, 단순히 희망을 담은 장면이라 보기엔 너무도 어둡다. 그러나 나는, 그 어둠 또한, 에반게리온의 메시지를 위해, 꼭 필요한 연출의 일부라 생각한다. 계속 강조한 대로, 에반게리온이 말하는 건 유치한 꿈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이며, 중요한 건 우리가 그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현실을 나쁘고 싫다고 말하는 건 네 마음이야.

-현실을 진실로 바꾸고 있는 네 마음이야.

-현실을 보는 각도를 약간만 바꾸어도 마음은 크게 변해.

-진실은 사람의 수만큼 존재하지. 그러나 너의 진실은 하나야.

-맑은 날은 기분 좋음.

-비가 오는 날은 우울.

-그렇게 배웠다면 그렇게 믿어 버려.

-비 오는 날도 기분 좋을 수 있는데 말야.

파이널 시퀀스를 보고, 어떤 사람은 절망이다!’라 해석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희망이다!’라 설명하기도 한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답은 많다. 그 자체가 에반게리온의 주제와도 같다. 안노는 작품을 볼 수 있는 방법과 여지를 충분히 많이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내가 이 리뷰에서 에반게리온의 희망을 강조하는 까닭, 그게 바로 나의 시선이며, 나의 소망이며, 내가 생각하는 에반게리온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레이가, 카오루가, 유이가, 또 신지 스스로가 괜찮을 거라고 했다. 당장 극의 제목이 나는 너를 필요로 한다.’며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굳이 그 메시지를 거슬러 엔드 오브 에바는 절망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건, 내 개인적 입장에서 보면 난센스에 가깝다.

말이 나온 김에 짚고 가자. 대체 종극 이후에는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얼핏 보면, 지구 멸망이 따로 없다.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것 같다. 물론 신지의 결론이 희망이었다는 점에서, 감독은 이미 줄 수 있는 최대한으로 힌트를 남겼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태 에반게리온이 우리에게 보여 줬던 희망의 경로에선 한참 벗어난, 찝찝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붉은 바다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부활한들 뭘 어쩌겠는가.

그러나 필자의 리뷰를 자세히 보고 또 여러 경로에서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사실 꼭 그렇지도 않다는 걸 잘 알 것이다. 두 사람의 주변에 있는 LCL의 바다는, 말 그대로 가능성의 세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의 주요 설정인 영혼과 LCL의 관계, 그리고 인지론 기반 양자 역학의 개념이, 그 유효한 근거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애초에 그렇게 생겨 먹은 게 아니라, 우리가 그런 세상이라고 견고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엔드 오브 에바 이후 모든 인류가 LCL로 리셋이 되었다는 건, 인지론과 양자 역학을 함께 응용하여 생각해 보면 말 그대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소리가 된다. 단순히 사람이 본래의 형태를 찾는다.’는 것을 훨씬 초월하여, 그 마음, 그 상상의 힘, 모든 세상을 구성할 수 있다. 기존 세상에 대한 고정 관념이 없기 때문, 살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어떤 세상이든 열릴 수 있다. 잠깐 신이 된 신지가, 가능성을 모두에게 선물한 것이다.

역으로 이를 통해, 어째서 파이널 시퀀스가 그렇게 절망적인 느낌으로 그려졌는지에 대해서도 조리 있게 설명 가능하다. 아직 신지에게는 타인에 대한 공포와, 아스카에 대한 죄책감이 남은 탓에, 그가 구성한 세상은 이렇게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는 게 당연하다. 다행히 신지 곁에 아스카가 등장하여, 공포가 아닌 희망의 상징이 되어, 그의 성장을 도운 덕분에, 이후의 세상은 정말로 알 수 없게되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릴 가능성은, 두 사람이 서로의 진심을 나누는 순간 증폭되었을 게 분명하다. 노련하게도, 그 즉시 안노는 종극이라는 표현과 함께, 그 모든 여지를 우리의 상상에 맡겨 놓았다. 성장한 두 사람이 재구성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시간이 더 흘러 새롭게 부활한 사람들이 참여한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른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당신이 에반게리온을 보고 느낀 것 타인에 대한 공포와 절망이었다면, 그 세상은 꼭 그런 이미지를 담고 있을 테며, 누구도 그 세계를 부정할 수 없다. 안노가 절망의 여지도 열어 뒀으니까. 하지만, 당신이 에반게리온을 보고 느낀 게, 필자와 같이 희망이었다면, 그 이후의 세상은 당연히, 밝은 미래를 담고 있게 된다. 그 생각 또한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며, 안노는 희망의 여지 또한 확실히 열어 놓았다. 나머지는 개인의 자유이다. 안노가 극 이후의 세상을 표현하지 않았던, 아니 표현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와 같다. 그것을 표현하는 순간, 에반게리온의 메시지는 철저히 희석되고 만다. 그 새로운 세상은 당신만이 알고 있어야 하니까. 에반게리온을 보고 느낀 사람들의 숫자만큼 존재해야 하니까.

새로운 가능성이 연출한, 또 하나의 영화

응?

TV26화의 새로운 세계말이다. 단순히 가능성의 세계라며 웃고 말 수도 있겠지만, 사실 안노는 그 세계 또한 하나의 완성된 결말로 문을 열어 놓았다. 겐도우가 보는 신문 날짜를 보면, 꽤 구체적으로, 20169이다. 왜 하필 9월인가? 서드 임팩트는 20161월에 발발했고, 그 이후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게 된다면, 저 시기가 딱 적당한 때가 아닐까 싶다. 보완에 참여하지 않은 겐도우 유이의 얼굴 의도적으로 가린 것비롯, 안노는 분명히 이 소위 평행 우주 시퀀스엔드 오브 에바 이후의 세상 중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해 놨다. 그러니 이 부분도 감상하는 당신의 자유에 달렸다. 혹은, 그 새로운 세상이란 건, 신극장판이 묘사하는 세상일 수도 있겠다.

BGM The Heady Feeling Of Freedom

끝으로, 신지가 레이에게 물었던 그 질문,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나는, 여기에 있어도 돼?” 레이는 당시 그 물음에 무언으로 답했다. 이는 그 질문의 답이, 다른 사람이 아닌 신지 스스로 구해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또 어떻게 보면, 답이 없다는 것이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다. 우리가 존재하는 건, 애초에 당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이 담는 실존에 대한 얘기이기도 한데, 우리가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 그런 건 물론 없다. 허락을 받을 문제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존재하고 있고, 내가 좋다고 하면 좋은 게 이 세상이다. 모든 건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 그게 현실이다.

TV판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지는 자신에게 미안하다던 아버지에게, 끝내 고맙다는 인사로 답해 주었다. 신지는 이제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그가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면, 그는 이 세상에 있어도 좋다. 혹시 스스로가 싫다고 해도, 살 가치가 있는 세상이다. 그 살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천국이 될 수 있는 세상이거든! 이제 신지가 세상에 존재하는 건 절대 가 아니다. 에반게리온이라는 , 인간을 원죄에서 구원했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 에바와 작별하여, 오직 인간만이 존재하는, 인간만을 위한 세상에서, 신지는 단지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에게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었다. 자신에게는 에바 외엔 아무 것도 없다던 신지와 아스카가, 에바 없는 세상에서, 서로의 진심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 행복의 가능성. 에반게리온이 심어 둔 가장 커다란 메시지였다.

타인, 현실, 미지의 세계, 언제나 두려운 것이지만, 그 안에는 진짜 행복도 숨어 있기 때문에, 공을 들여 알아 갈 가치가 있다. 끝내 배신을 당한다 하여도, 우리가 진심이라면, 언제든 어디서든 행복을 찾을 수 있다그 믿음, 그 희망. 그러니까, 이 세상은 기꺼이 살 가치가 있다는 것. 마땅히 로 있을 가치가 있다는 것.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에게는 타인이 필요하다는 것. 당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제 에반게리온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여기에 있어도 좋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축하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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