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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지(舍方知)는 과연 양성인간인가?

Darkel 2009. 5. 21. 11:04

네, 이번에는 성(姓)으로 조선 사회를 뒤흔들었던 사방지(舍方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실록에 사방지의 첫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세조 8년(1462)입니다.

 

-장령(掌令) 신송주(申松舟)가 아뢰기를,
 “이제 서부(西部)의 정문(呈文)에 의거하면, 여경방(餘慶坊)에 사는 고(故) 학생(學生) 김구석(金龜石)의 처(妻) 이씨(李氏)의 가인(家人) 사방지(舍方知)가 여복(女服)을 하며 종적(蹤跡)이 괴이하다고 하였으므로 본부(本部)에서 잡아다가 이를 보았더니, 과연 여복(女服)을 하였는데, 음경(陰莖)과 음낭(陰囊)은 곧 남자였습니다. 그가 남자로서 여장(女裝)을 한 것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가두어 고신(栲訊)하게 하소서.”
하니,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전교하기를,
 “그를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살펴보게 하라.”
하고, 정현조에게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와 승지 등과 같이 가서 보게 하였는데, 머리의 장식과 복색은 여자였으나 형상과 음경·음낭은 다 남자인데, 다만 정도(精道)가 경두(莖頭) 아래에 있어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를 뿐이었다. 승지 등이 아뢰기를, 

 “이것은 이의(二儀)의 사람인데, 남자의 형상이 더욱 많습니다.”
하니, 신송주에게 전교하기를,
 “이씨(李氏)의 가비(家婢) 소근 소사(小斤召史)를 난장(亂杖)하여 신문(訊問)한 것이 여러 번 있었는데, 또 무엇을 문초할 것이 있어서 고신(栲訊)하기를 청하느냐?”
하였더니, 신송주가 대답하기를,
 “그가 남자로서 여복(女服)을 하였으니 반드시 그 실정(實情)이 있을 것이므로 고신하기를 청한 것이며, 또 소근 소사는 신문할 즈음에 당하여 태 1, 2도를 때렸을 뿐입니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황당(荒唐)한 사람이 여자의 집을 출입하였는데도 이순지(李純之)는 가장(家長)으로서 능히 금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그르다. 그러나 간통한 것을 잡은 것도 아닌 데 재상(宰相) 집의 일을 경솔하게 의논하고, 또 이와 같은 이상한 일을 계품(啓稟)하지 않고 억지로 취초(取招)하였으니 심히 불가하다.”
하고, 헌부(憲府)의 관리(官吏)를 파직(罷職)하도록 명하였다. 저녁에 부(溥)로 하여금 승지(承旨) 등에게 묻기를,
 “사방지(舍方知)를 가두어 국문(鞫問)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승지 등이 아뢰기를,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므로,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가두어 국문하게 하였다. 김구석(金龜石)의 처(妻)는 일찍이 과부(寡婦)가 되었는데 사방지(舍方知)와 사통(私通)한 것이 여러 해 되었고, 또한 김중렴(金仲廉) 집의 계집종[婢]으로 여승(비구니)이 된 이가 있었는데, 사방지와 더불어 간통(姦通)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었으므로, 이에 이르러 헌부(憲府)에서 굳이 청(請)하였다. 임금이 도승지 홍응(洪應)에게 이르기를,
 “이순지(李純之)도 또한 대부(大夫)의 가문(家門)이다. 애매(曖昧)하여 명백히 하기 어려운 일을 가지고 하루 아침에 흠을 받는다면 또한 억울하지 않겠느냐? 헌부 등은 대체(大體)를 알지 못하니 감히 욕되게 하지 말고 그를 가두게 하라.”
하였다. 당시에 이씨(李氏)는 부호(富豪)라고 일컬었는데, 사방지의 복식(服飾)이 화려한 것은 다 이씨가 준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8년 임진조(4월 27일)

 

네, 그야말로 희안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겉모습은 여자인데 그 알맹이는 남자였군요.

그런데 주목할 것은, 사방지가 주목받게 된 원인은 그 모습이 아니라 바로 김구석의 처 이씨와 간통한 일 때문입니다.

 

사방지는 흔히 양성인간, 남녀추니(Hermaphrodite)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남자, 여자의 성기를 모두 가진 인간을 말합니다.
그러나 기록만으로 보면 사방지가 양성인간이다라고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사방지가 여자의 모습에 남자의 성기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자의 성기를 가지고 있다는 기록이 없죠.

당시 사방지를 남녀추니로 기록한 것은 남녀의 성기를 다 가지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여자의 외형을 하고 남자의 성기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머리와 장식은 여자지만, 외형은 남자라고 하죠)

 

그렇다면 조선시대 양성인간이 전혀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냐? 는 아닙니다.

'남자의 형상이 더 많다'는 내용을 봐서, 이미 조선 사회에는 남녀추니의 존재가 많이 알려졌고,

또한 남자의 외형을 한 경우가 많이 보고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단지 여기서 말하는 이의(二儀), 즉 남녀추니는 오늘날의 인식처럼 남녀의 성기를 모두 지닌 양성인간뿐 아니라

사방지처럼 여자의 외형에 남자의 성기를 가진, 여성형 남성의 경우까지 몽땅 포함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단서는, 사방지를 확실하게 남녀추니로 구분지을 만할

증거, 즉 사방지의 '가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경우, 남녀추니의 신체를 가진 사람들은 사회적 인식 때문에 비밀로 숨긴다던지

아니면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통해 어느 한쪽을 잘라(?)버린다고 합니다.

 

추리해 보면, 사실 조선시대 남녀추니는 좀 이상하긴 해도 괴물 취급을 받는다던가 하는 경우가 아니라

그저 '해괴한'일 정도로 치부되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대처 사방지의 일이 왜 실록에까지 올라간 걸까요?

그 답변은 바로 사방지와 간통한, 저 이순지의 딸에게 있습니다.

아니, 그 아버지인 이순지가 더 유력하다고 해야 겠습니다.

 

-당시 세종(世宗)은 역상(曆象)이 정(精)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문신(文臣)을 가려서 산법(算法)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순지(李純之)가 추구(追究)하므로 세종이 이를 가상히 여기었다. 처음에 이순지가 추산(推算)하여 본국(本國)은 북극(北極)에 나온 땅이 38 도(度) 강(强)이라 하니, 세종이 의심하였다. 마침내 중국으로부터 온 자가 역서(曆書)를 바치고는 말하기를,
 “고려(高麗)는 북극(北極)에 나온 땅이 38도 강(强)입니다.”
하므로, 세종이 크게 기뻐하시고 마침내 명하여 이순지에게 의상(儀象)을 교정(校正)하게 하니, 곧 지금의 간의(簡儀)·규표(圭表)·태평(太平)·현주(懸珠)·앙부일구(仰釜日晷)와 보루각(報漏閣)·흠경각(欽敬閣)은 모두 이순지가 세종의 명을 받아 이룬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1년 정해조(6월 11일)

 

이순지는 놀랍게도 당시 우리나라의 위도를 측정해 낸 인물입니다.

저기서 38도는 바로 한양을 기준으로 측정했기에 나온 결과죠. 정확하진 않지만 저정도만 해도 대단합니다.

이순지는 그만큼 역법, 천문에 능해 세종 27년에는 '제가역상집'(諸家歷象集)이라는 천문서를 발간하기도 했고

세종 31년에는 혜성이 관측되자 이를 조사하기도 했죠.

계유정난의 파도 속에서도 별다른 정치적 위협 없이 살아온, 그야말로 원로공신의 하나였습니다.

 

그런 공신의 딸이 간통사건을, 그것도 남녀추니와 간통했으니 난리가 난 거죠.

이 사방지는 분명 여자의 외형을 하고 있는데 간통이라니? 이 사건은 조정을 발칵 뒤집습니다.

세조는 이 사방지가 희안했던지, 오히려 환자로 규정해버립니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사방지를 추국(推鞫)하소서.”
하니, 어서(御書)로 이르기를,
 “전지(傳旨)한 사연(辭緣)은 사방지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소근 소사(小斤召史)를 지목한 것이다. 사방지는 병자(病者)이니 추국하지 말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8년 갑오조(4월 29일)

 

당시 유교(정확히는 성리학)적 가치관이 뿌리내리던 조선 사회에서

사대부 아녀자의 간통도 간통이거니와 그것도 공신의 딸, 게다가 상대는 남녀추니.

곳곳에서 사방지를 국문할 것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옵니다.

그러나 세조는 사방지를 굳이 국문하려 들지 않는데 이순지의 그간 공로나 사회적 명망을 고려해서였죠.

이게 국문을 거치면 그대로 세상에 다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되며 이순지의 가문은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사방지를 국문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와 건의는 이어지고

심지어는 세조가 술자리에서 '국문할 것을 약속한다'라고 달래기까지 합니다.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제장(諸將)·승지(承旨) 등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도승지 홍응(洪應)에게 이르기를,
 “내가 사헌부(司憲府)에서 사방지(舍方知)를 추국하려는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편벽(偏僻)된 마음을 세우는 때문일 뿐이다. 마침내는 사방지를 국문하여 이순지를 죄줄 것이니 승지는 잊지 말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8년 을미조(5월 1일)

 

사방지 사건은 이후 엄청난 공방전을 불러 일으킵니다.

공신인 이순지의 명망을 먼저 고려한 세조와 대신들 사이에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이어집니다.

 

세조 8년 5월 2일, 이순지는 '딸자식 간수 못한 죄'로 파직되었지만

겨우 10일후인 5월 12일, 이순지를 복직시키고 '사방지 사건'을 '모함'으로 규정짓고 국문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의금부에서 사헌부(司憲府)의 관리(官吏)를 국문(鞫問)하고 아뢰기를,
 “지평(持平) 성율(成慄)은 사방지(舍方知)의 일을 김석손(金石孫)에게 들었고, 김석손은 윤우(尹遇)에게서 들었으며, 윤우(尹遇)는 중비(仲非)에게서 들었다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중비(仲非)도 아울러 국문(鞫問)하고 이순지(李純之)를 파직(罷職)하되, 사방지는 이순지에게 주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8년 병신조(5월 2일)


특이한 것은, 사방지를 이순지에게 주라는 것인데 말 그대로 노비로 주라는 것입니다.

이순지는 파직됬고 사방지는 이순지에게 주어집니다.

삶든 굽든 이순지 맘대로 하라는 뜻인데, 이미 세상에 알려진 것을 죽인다고 해결될 수가 없죠.

(더구나 결혼관이 아직 자유롭던 조선 전기입니다)

이순지의 사위 김구석은 이미 사방지 사건 전에 사망했고, 결국은 그냥 이순지의 딸과 같이 지내라고 붙여준 셈이군요.

어찌보면 모나지 않게 잘 처리된 듯 합니다.

 

그러나 반대도 만만치 않아서, 세조가 사정전에서 약속한 5월 1일부터 14일까지

사방지를 국문할 것을 청하는 건의가 4차례나 이어졌습니다.

사방지는 놔두고, 엉뚱하게 사헌부 관리들이 국문당하고 있으니 보고만 있을수가 없었죠.

 

그러나 세조는 이것들을 모두 단호하게 내칩니다. 태종만큼이나 왕권강화에 집착했던만큼

세조는 아마도 이 사방지 국문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왕권과 신권의 세력을 가늠해 보려는 의도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은 더욱 커져, 5월 14일 사방지를 국문할 것을 청한 정언 이길보(李吉甫)를 의금부에 가두고

오히려 이길보를 국문할 것을 지시합니다(주객전도군요)

 

결국 5월 22일, 한명회와 함께 계유정난의 일등공신인 권람(權擥)의 중재로 일은 원만하게 넘어가고

더 이상 사방지의 일은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조 11년, 이순지가 죽고 13년에 다시끔 사방지에 대한 처벌 논의가 올라옵니다.

 

-처음 김구석(金龜石)의 아내는 이순지(李純之)의 딸이었다. 일찍이 과부가 되었는데, 그 일가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종[奴] 사방지(舍方知)라는 자는 턱수염[鬚]이 없어 모양이 여자와 같은데다가 재봉(裁縫)을 잘하여 여자 옷을 입고 일찍이 한 여자 중을 통간(通姦)하였다. 여자 중과 이씨(李氏)는 이웃하였으므로 사방지(舍方知)가 인연이 되어 이씨(李氏)의 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마침내 사랑하고 가까이 친해짐을 보고는 좌우에 있으면서 음식도 그릇을 같이 하고, 앉고 눕는데도 자리를 같이 하며 의복(衣服)도 빛깔을 같이하니 모두 사치스럽고 화려하기가 극도에 달하였다. 노비(奴婢)가 섬기기를 집 주인과 같이 하여, 이웃 마을에서 비록 알더라도 이씨(李氏)는 달리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추잡한 소리가 퍼지어 대관(臺官)이 이를 규찰(糾察)하였다.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안험(按驗)하게 하고, 사족(士族)을 더럽히고 욕되게 함은 옳지 못하다 하여 석방하려고 하니, 길창군(吉昌君) 권람(權擥)이 치죄(治罪)하기를 힘껏 청하므로, 명하여 사방지(舍方知)를 의금부(義禁府)의 옥(獄)에 내려 핵실(覈實)하게 하고, 이어 이순지(李純之)의 구처(區處)에 붙이니, 이순지가 엄호(掩護)하여 징치(懲治)하지 아니하고 시골집[村莊]에 두었는데, 이씨(李氏)가 온천(溫泉)에 목욕함을 칭탁하고 따라갔다. 이순지가 졸(卒)함에 미치자 사방지는 다시 이씨(李氏)의 집에 들어가 처음과 같으므로, 헌부(憲府)에서 안찰(按察)하고 여의(女醫)로 하여금 증험하여 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순지(李純之)가 여러 재상(宰相)에게 말하기를,
 “헌부(憲府)는 어찌 혹심합니까? 그 근거는 바로 쓸데없는 군말이고 진실이 아닙니다.”
하니, 당시 사람들이 놀리기를,
 “속담에 사위를 췌랑(贅郞)이라고 부르니, 이공(李公)의 발명(發明)은 진실을 발명하였다.”
하였었다. 이에 이르러 한명회(韓明澮)가 아뢰기를,
 “사방지(舍方知)는 다시 이씨(李氏)의 집에 들어가 추납한 흔적이 더욱 현저하니, 청컨대 먼 지방으로 유배(流配)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도 이미 국문하지 않았으니, 지금도 또한 우선 용서하라.”
하니, 신숙주(申叔舟)와 심회(沈澮)가 진언(進言)하기를,
 “사방지(舍方知)는 일찍이 한 여자 중을 통간(通姦)하고 여자 중은 마침내 머리를 길렀으니, 그 정상을 알 만합니다. 청컨대 도성 안에 머물러 풍속(風俗)을 오래도록 더럽힘이 없게 하소서.”
하고, 홍윤성(洪允成)은 아뢰기를,
 “신과 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 등이 함께 들었으니, 이 일은 진실로 허위가 아닙니다.”
하고, 신숙주(申叔舟)가 또 아뢰기를,
 “외간(外間)에서 전하는 말이, ‘사방지(舍方知)가 아니고 바로 서방적(西房的, 사위)이라’고 하니,이와 같은 사람은 강호기문(江湖紀聞)에도 또한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서거정(徐居正)에게 이르기를,
 “경(卿)도 또한 아는가?”
하니, 서거정이 대답하기를,
 “과연 있습니다. 그 말에 이르기를, ‘하늘에 달려 있는 도리는 음(陰)과 양(陽)이라 하고 사람에게 달려 있는 도리는 남자(男子)와 여자(女子)라고 한다.’ 합니다. 이 사람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니, 죽여서 용서할 게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윤필상(尹弼商)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인류(人類)가 아니다. 마땅히 모든 원예(遠裔)와 떨어지고 나라 안에서 함께 할 수가 없으니, 외방(外方) 고을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키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씨(李氏)의 집은 돈이 넉넉하고, 한 아들이 있으니 이름은 김유악(金由岳)이다.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의 사위가 되어, 일찍이 그 어미에게 울면서 간하였으나, 마침내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3년 경자조(4월 5일)

 

네, 결국 일이 터졌군요.

이순지가 죽은 상황에서 이씨와 사방지의 밀회가 논란이 되었고 결국 사방지를 이씨와 떼어 먼 지방 노비로 보냅니다.

이순지 사후, 더 이상 사방지 문제를 비호하기가 어려웠고 비호할 이유도 없었겠죠.

사방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그 결말을 보여줍니다.

 

-장례원(掌隷院)에 전지하기를,
 “사노(私奴) 사방지(舍方知)를 이제 공천(公賤)으로 소속시켰으니, 그 나이에 상준(相准)한 자로써 그 주인에게 충당해 주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13년 기묘조(6월 27일)

 

즉, 원래 사노비였던 사방지를 공노비로 옳겼으니 그 주인에게 다른 노비를 주라는 것인데요

이로서 이씨와는 영영 이별하게 됩니다. 둘이 다시 재회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죠.

 

이 사방지 사건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이순지도, 사방지도, 이씨도 아닌

바로 이씨의 아들 김유악(金由岳)이었습니다.

 

김유악은 이순지의 외손자이자, 정인지의 사위라는 엄청난 배경을 바탕으로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김유악은 이 사방지 사건 하나로 인해 인생이 꼬여들어갑니다;;;

 

예종 1년, 당시 김유악의 집과 정인지의 집은 담 하나를 경계로 두고 있었는데(사위와 장인이 붙어 살았군요.)

순라꾼 4명이 범죄자 잡는다고 한밤중에 김유악의 집으로 침입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정인지는 이 일을 임금에게 상소하는데, 엉뚱하게도 김유악이 바난받고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자기 집에 뛰어든 놈 신고하는 것도 니가 직접 못하냐? (사방지 사건의) 이씨 아들이라 별볼일없구나'

라는 식의 놀림인데...이게 실록에 사관이 직접 비난하기도 한 부분입니다;;;

 

또 성종 4년에는 경상도 도사(都事, 감사의 바로 아래, 부 도지사급)로 임명되었는데 김유악이

이씨의 아들이란 이유로 성종이 김유악을 빼고 다시 임명할 것을 지시합니다;;;

 

거기에 한술 더떠, 연산군 6년 부마(駙馬, 왕의 사위)를 뽑는데 김유악의 아들은 대궐에 들이지 말 것을

연산군이 직접 하교하기도 합니다;;; 

 

정말 엄마의 실수 한번에 김유악은 물론 그 아들까지 인생이 줄줄이 꼬인 셈입니다;;;

 

이 사방지 사건이 당시 조선 사회에 얼마나 큰 파장을 미쳤는지

실록을 빼고도 다른 기록에서 심심찮게 사방지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들을 보면 흥미로운 점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점필재집(佔畢齋集)에 사방지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사방지는 사천(私賤)으로서 어려서부터 그 어미가 여자 옷을 입히고 화장을 시켜 바느질을 가르쳤다. 성장하자 조사(朝士)들의 집을 드나들며 많은 하녀들과 정을 통하였다. 선비 김구석(金九石)의 처 이씨(李氏)는 판원사(判院事) 순지(純之)의 딸이다. 과부로 있으면서 사방지를 불러서 바느질을 맡기고 밤낮으로 함께 지내기 10여 년이 지난 천순(天順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7년(세조 9, 1463)에 사헌부(司憲府)에 알려져서 그를 국문하던 중 신문이 그와 평소에 정을 통하던 한 비구니에게까지 미쳤다. 그 비구니가,
 "정력이 매우 왕성합니다."

하므로, 여의(女醫) 반덕(班德)을 시켜 잡아서 시험해보게 했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상(上)이 승정원(承政院) 및 영순군 부(永順君簿)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을 시켜 함께 알아보게 하였다. 하성위의 누이는 이씨의 며느리였는데 하성위 또한 혀를 내두르며,
 "어쩌면 그렇게도 왕성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웃으면서 특명을 내려 추문(推問)하지 말게 하고,
 "순지(純之)의 집안을 더럽힐까 염려스럽다."

하고는, 사방지(舍方知)를 순지에게 넘겨 주어 알아서 처리하게 하였는데, 순지는 다만 매 10여 대를 때려서 기내(畿內)에 있는 노복의 집으로 보내 버렸다. 얼마 후, 이씨가 몰래 사방지를 불러서 다시 돌아오게 되었는데, 순지가 죽은 후에는 방자해져서 더욱 그칠 줄을 몰랐다. 금년 봄에 재추(宰樞)들이 얘기 중에 이 일을 상에게 아뢰어 사방지에게 매를 쳐서 신창현(新昌縣)으로 유배하였다. 

언젠가 한 야사(野史)를 보니 사방지는 남녀의 성기(性器)를 모두 가진 사람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다만 남자가 여복(女服)을 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오행지(五行志)에 넣을 만한 일이다.

-청장관전서(書) 권32 사방지편 

 

위의 기록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懋)가 저술한 청장관전서의 한 내용입니다.

위 기록에서도 사방지가 남녀의 성기를 다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 않는군요.

오히려 남녀의 성기를 다 가졌다는 것이 야사의 내용이라고 썻습니다.

(매우 왕성했다는게...참 압박입니다.)

 

-사방지라는 자는 사천(私賤) 계층의 출신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여복(女服)을 가장하여 얼굴에 분과 기름을 단장하며 재봉을 배웠더니, 자라나서 조사(朝士)들의 집에 드나들곤 했다. 천순(天順) 7년(1463년) 봄에 사헌부(司憲府)에서 그 일을 풍문으로 듣고 체포하여 그가 평소에 간통하던 여보살에게 취조한즉, 보살은,
 “그의 양도(陽道)가 유달리 큽니다.”

한다. 이에 여의(女醫) 반덕(班德)을 시켜서 만져 보았고, 또 영순군(永順君)이보(李溥)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도 번차례로 실험하며 보고는 모두 혀를 뽑으면서,
 “에이, 대단하더구만.”

하였다. 이때에 중국에서도 역시 이보다 먼저(뒤인 것을 잘못 센 것 같다.)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 오군(吳郡)양순길(楊循吉)의 봉헌별기(蓬軒別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성화(成化) 경자년(1480년)에 경사(京師)에 과부 하나가 여공(女紅)에 능란하고 젊고도 예쁘며, 또 신이나 버선이 네 치에 지나지 않을 만큼 작았다. 모든 부귀가에서 서로 맞이하여 수놓기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남자를 보면 문득 부끄러운 빛으로 회피하기도 하려니와, 밤이면 그에게 배우는 여자와도 서로 자누이되 자물통을 튼튼히 잠그곤 한다. 그러므로 남들은 더욱이 그가 자기 몸조심에 가장 엄격하다고 믿었다. 이때 태학생(太學生)으로 있던 아무개가 그를 연모하여, 처음에는 그의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이고 그 과부를 자기의 집에 맞이하고, 가만히 그 아내에게 타일러 밤들어 문을 열고 거짓으로 뒷간에 가는 듯이 하고는, 갑자기 방안으로 들어가 촛불을 끄니 과부는 고함을 치자, 그는 과부의 목덜미를 껴안고는 강탈한즉 곧 남자인지라 구속하여 관청에 보내어 조사하니, 그의 성은 상(桑)이요, 이름은 중(翀)이며, 나이는 24세인데 어릴 때부터 발을 싸 매었다 한다. 법사(法司)가 그 옥사를 위에 아뢰었더니 헌종 황제(憲宗皇帝)가 이는 ‘인요(人妖)’라 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한다.
-열하일기(記) 피서록(避暑錄)편 

 

네,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왔는지 수백년 후에 박지원 선생도 사방지 사건을 알고있고

사방지를 '여장남자'로 보는 듯 합니다.

 

점필재(佔畢齋) 김문간공(金文簡公 김종직)이 사방지(舍方知)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그 서문에 이르기를, “사방지는 사천(私賤)으로 어려서부터 그의 어미가 계집애의 옷을 입히고 연지와 분을 칠하고 바느질을 시켰다. 장성하자 자주 사대부(士大夫) 집에 드나들면서 여자종들과 함께 자는 일이 많았다. 진사(進士) 김구석(金九石)의 아내 이씨는 판원사(判院事) 이순지(李純之)의 딸인데, 과부로 지내면서 사방지를 데려다가 바느질을 시키고 밤낮으로 거의 10여 년이나 함께 거처하였다. 천순(天順) 7년 봄에 사헌부에서 이 사실을 듣고 그를 국문하여 그가 평소에 사통(私通)하던 한 여승(女僧)을 심문하니, 여승이 말하기를,

 '그의 남경(男莖)이 매우 장대(壯大)하더라.'

하므로, 여의사 반덕(班德)으로 하여금 더듬어 만져 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임금이 승정원 및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에게 알아보게 하였는데 하성위의 누이가 이씨의 며느리였다. 하성위도 말하기를

 '어쩌면 그리도 장대하냐.'

하니, 임금이 웃고 이순지의 가문을 더럽힐 염려가 있으니 따지지 말라고 특명을 내렸다. 사방지를 이순지에게 넘겨 주어 처리하게 하였는데, 이순지는 다만 곤장 10여 대만을 치고 기내(畿內)에 있는 노복의 집으로 보냈다. 얼마 안 되어 이씨가 몰래 사방지를 도로 불러들여 이순지가 죽은 뒤에 더욱 마음대로 놀아났다. 금년 봄에 재상들이 연회 석상에서 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사방지에게 매를 치고 신창현(新昌縣)으로 귀양보냈다.” 한다. 
사방지의 불알은 늘 살 속에 간직되어 있었으므로 양성인(兩性人)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사가(四佳)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자세히 적혀 있다. 내가 일찍이 의주(義州)의 갑사(甲士) 최한수(崔漢壽)의 집에서 암말을 보았는데, 그 음부(陰部) 안에 양경(陽莖)이 있어 졸아들면 안으로 감추어지고 일어서면 밖으로 나오며 양경으로 오줌을 누었다. 봄이 되면 암말을 따라다니나 그 양경이 뒤로 향하여 있으므로 서로 교미(交尾)는 할 수 없었다. 만약 숫말이 다가오면 발로 차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물리(物理)의 알 수 없음이 이쯤 되니, 사람으로 말하면 사방지의 부류(部類)라고나 할까. 그러니 둘이 다 만물 중의 요물(妖物)인데, 사방지는 게다가 여자를 범하였으니 말보다 심한 자이다.” 했다.
-패관잡기(記) 권1

 

네, 패관잡기에서는 '사방지의 불알이 늘 살속에 간직되어 있다'했는데 이것은 음핵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장대하다'라고 표현한 것 보면 어쩌면 사방지는 '심각한' 음핵비대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말 그대로, 음핵이 지나치게 커지는 건데, 오늘날 신생아들의 경우 음핵비대증 때문에 남녀 성별이 뒤바뀌어

나중에 성을 바꾸려고 소송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만큼 구분하기 힘들었다는 거죠)

이 경우, 오히려 사방지는 정상적인 여자인 셈이죠.

(다만, 장대하다 라고 표현할 정도였다면 아마 의학계에 남을 정도로 중증인 음핵비대증일겁니다.)

 

위 기록들은, 대부분 필원잡기와 점필재집을 참고, 인용하여 이루어졌는데

두 서적의 저술자인 서거정, 김종직같은 대학자도 관심을 가질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유명한 학자였던 추사 김정희(喜)역시 사방지 사건이 신기했던지

'양성인간'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눈문제목이 무려 '음(陰)과 양(陽)의 두 가지 신체(身體)에 대한 변증설'입니다;;;내용은 너무 길어 생략)

 

그렇다면 실록에 확실하게 기록된 양성인간은 없는 걸까요?

네! 물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양 성기'를 다 갖춘 확실한 양성인간이라고 기록했군요.

 

-함경 감사의 장계에,
 “길주(吉州) 사람 임성구지(林性仇之)는 양의(兩儀)가 모두 갖추어져 지아비에게 시집도 가고 아내에게 장가도 들었으니 매우 해괴합니다.”
하였는데, 전교하기를,
 “성구지의 일은 율문(律文)에도 그러한 조문은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라. 성종조(成宗朝)에 사방지(舍方知)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아울러 문의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언필이 의논드리기를,
 “임성구지의 이의(二儀)가 다 갖추어짐은 물괴(物怪)의 심한 것이니 사방지의 예에 의하여 그윽하고 외진 곳에 따로 두고 왕래를 금지하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3년 기축조(11월 3일)

 

양의, 즉 음양을 다 갖추었다고 표현했군요. 거기다 시집장가를 동시에 간 인물이라;;;

임성구지는 오히려 아주 특별했던 존재인 듯 합니다. 양성인간이라도 시집장가 동시에 가기 힘든데...

시잡장가 다갔다는 말을 봐서 확실하게 남녀의 성기를 가진 완벽한 양성인간으로 보입니다.

 

-간원이 아뢰기를,
 “김순고는 부과(浮誇)하고 아는 것이 없어서 가는 곳마다 근신하지 아니하여 지난날 경상 병사로 있을 때에 탐오한 일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 본직(本職)을 주니 물정이 편치 않습니다. 체직시키소서.
길주(吉州) 수인(囚人) 임성구지는 아내를 거느리며 지아비에게 출가도 하여 인도(人道)를 양용(兩用)하였으니 실지로 천지간에 요사하고 음예(淫穢)한 요물입니다. 강호기문(江湖記聞)을 상고하니, 이와 같은 사람은 인도(人道)의 올바름을 문란하게 한다고 하여 죽였으니 진실로 하루라도 인류에 섞어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임성구지는 무격(巫覡)을 핑계하여 남자 의복 여자 의복으로 변환(變幻)하며 남의 가정에 드나들면서 몰래 독란(瀆亂)함을 행하여 성스러운 교화를 더럽혔으니 죄악이 이미 지극합니다. 사형으로 단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순고의 일은 무릇 사람이 어찌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와지는 길이 없겠는가. 윤허할 수 없다.
임성구지는 괴이한 물건이지마는 다만 인간의 목숨이 지중하니 그윽하고 외진 곳에 두어 인류에 섞이지 못하게 하고 구태여 중전(重典)을 쓸 것까지는 없다.”
하였다. 김순고의 일은 차례 아뢰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조선왕조실록 명종 3년 임진조(11월 21일)

 

네, 시집장가 동시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남자, 여자의 옷을 바꿔가며 입는 다는 내용으로 봐서는

임성구지는 혹시 조선의 아수라 백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목숨은 건졌네요...사방지처럼 노비로 보내지지도 않고...)

 

어쩌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양성인간은 사방지가 아니라 임성구지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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